653회
260일차
결전의 날이 밝았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나의 온갖 감정들을 하나로 모아, 연설문 하나로 만든 나는 그걸 내 가슴에 품고 모든 장비를 갖췄다.
"갑옷은 입지 않는다."
일반적인 오크 병사에게는 갑옷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전신갑옷을 입는다거나, 투구를 쓴다거나 하는 건 오크에게 어울리지 않다.
특히 전신에 퍼져있는 문신의 힘을 사방으로 퍼뜨려야 하는 내 특성상, 평범한 피복도 문신의 방출을 방해하는 요소가 될 뿐이다.
아무리 로도페리의 할레오 색스를 하늘을 향해 움켜쥔다고 한들, 전신의 피부를 드러낸 상태로 문신 버프를 뿌리는 것 보다는 버프의 힘이 약했다.
그래서 로브를 입었다. 내 복장은 언제나 항상 전라였고, 그 위에 검은 로브를 한 벌 걸치는 정도였다. 간혹 타이즈나 바지를 입는 경우는 있었지만, 나는 어지간하면 항상 로브만 걸친 채 언제든지 자지를 박을 준비를 끝내놓았다.
그리고 내 몸을 가려줄 로브는 다른 평범한 로브와는 다르다.
우리 군단 최강의 직조장인, 코스트 윰 프레이가 안드라스(★5)와 하르파스의 날개 깃털을 한 털 한 털 모아 만든 최고급 날개옷으로, 들어간 재원만 따지면 족히 최고급 마석을 몇 개고 갈아넣었을 로브다.
그리고 로브에 등판에 새겨진 군단의 문장은 내 부하들, 내 여자들의 머리칼이 실로 묶여 수를 놓았다. 나는 나 혼자만 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군단 전체와 함께 싸우는 것이다.
쿵, 쿵쿵.
모든 병사들이 왕도 오피큐스를 포위했다. 평야에 원형으로 덩그러니 놓여있는 성인 만큼, 우리 마왕군은 동서남북으로 열려있는 성벽을 중심으로 이중 삼중의 포위망을 형성했다.
전력.
던전에 뿌리를 내려 빠져나올 수 없는 플라우로스를 제외한 모든 병력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쟁탈전? 후방에 대한 기습? 그건 완벽한 대처를 해놨기에 무용지물이다. 그 어떤 던전도 우리 '군단'의 던전에 쟁탈전을 걸 수 없다.
72위가 71위에게 쟁탈전을, 70위가 69위에게 쟁탈전을 걸었다. 그리하여 우리 군단은 아래에서 위로 한 단계씩 올라가며 꼬리물기를 하듯 포털이 이어졌다.
바르바토스가 아스타로트의 던전에 쟁탈전을 건다? 불가능하다. 그건 내가 이미 직접 확인했다.
<경고> 안드로말리우스(72)는 현재 쟁탈전 중입니다! 쟁탈전을 걸 수 없습니다.
<경고> 단탈리안(71)는 현재 쟁탈전 중입니다! 쟁탈전을 걸 수 없습니다.
한 번 걸린 쟁탈전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따라서 공격측도 수비측도 쟁탈전이 걸리지 않는다.
라스푸틴 아스타로트의 던전도 마찬가지.
바르바토스나 바르바토스의 하수인이 내 군단에 공격할 여지를 차단했고, 마르바스가 뒤통수를 칠 가능성도 차단했다.
사실상 빈집을 공략당할 요소를 전부 없애버렸다. 빈집이 털릴 이유가 없으니, 99%에 이르는 병력을 끌고 나와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우리의 전력은 대략 2만.
3천여명의 주요 병력을 제외하면 1만 7천에 이르는 병사들은 전부 조디악 왕국에서 급히 사로잡은 성욕의 노예들이다. 그 중 5천이 살아있는 라스키토이며, 1만 2천은 모두 구울이다.
라스투자드와 흑마법사들이 마검 스태프까지 사용하며 한계까지 구울을 운용한 결과였다.
북방으로 내려올 마르바스의 수인족 원군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우리 군단 만으로도 일단 포위망은 구축할 수 있었다.
"샤이탄, 정찰부대로부터 들어온 정보는?"
"압도적입니다. 일반병의 수만 8만에 달할 정도고, 그 중에 80레벨 이상의 이름난 병사들만 따져도 족히 천 명은 넘을 것 같습니다."
"역시 열세군."
군대를 대량으로 만들어도 항상 인간들은 마왕군보다 수가 많았다. 이제는 징글징글하다 싶을 정도지만, 이제 이 악연도 끝이다.
"그래. 도망친 놈들을 모두 오피큐스에 몰아넣었으니 당연한 셈이지. 아아, 이것은 몹몰이라고 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인간을 몹이라고 표현하는 건 조금 그렇기는 하지만, 왕국 전체라는 사냥터를 외곽부터 조이며 나는 모든 생존자를 왕도에 밀어넣었다. 사면초가에 놓인 생존자들은 목숨을 걸고 우리와 싸우려고 할 것이다.
그만큼 왕도를 점령하기 어려워졌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왕도를 점령하면 완전 승리가 확실하다.
배수진을 친 적은 흉포하고 사납지만, 결국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죽거나 항복하는 길 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는 저들을 모두 죽일 것이다.
8만 명에 이르는 병사들도.
8만이라는 숫자 뒤에 숨겨진, 정예병도 아니지만 살아남기 위해 집에 있던 녹슨 칼과 쇠붙이를 들고 튀어나올 100만에 가까운 시민들도.
그들의 뒤에 숨어 왕성에서 꽁꽁 나오지 않는 오피큐스 왕가, 그리고 국왕도.
모두 짓밟아 범하고 라스로 왕국을 통일할 것이다.
쿵.
나는 연단에 섰다. 그레모리를 비롯한 우리 군단의 모든 마법사들이 상급 마석을 사용해, 나를 향해 무지개빛을 쏘았다.
파---앗.
나를 중심으로 펼쳐진 수정구들은 내 전신을 거대한 홀로그램처럼 비추게 만들었다. 화려한 무지개빛 조명의 한 가운데에서, 나는 인류를 향해 고개를 치켜들고 내려다봤다.
'개미 같구나.'
성벽 위의 병사들이 동요하는 모습이 보인다. 집안 곳곳에 숨어있는 왕국 백성들의 공포가 보인다. 나를 향해 활 시위와 마법을 겨누지만, 곧 50m에 달하는 거대한 로브의 오크가 허상이라는 걸 알고 혀를 차는 이들이 보인다.
그리고 왕성에서 나를 노려보는 듯한 이들이 보였다. 허상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옥좌에 앉아 나를 노려보고 있는 젊은 근육질의 전사가 왕관을 쓴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네놈이구나.'
국왕 오피큐스. 내가 반드시 죽여야 할 존재. 우리 서브 군단에서 몇 번이고 죽어가는 네토라레우스를 위해서라도, 그를 붙잡아 암컷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승리를 위한 도화선에 불을 붙여야 할 때.
바로 내가, 이 입으로 승리를 향해 외칠 때가 되었다.
"나에게는 꿈이 있다."
* * *
3년 전, 한 오크가 던전에서 태어났다. 지금 너희들의 앞에 있는 오크가 바로 이 왕국의 어딘가에 열린 던전에서 태어났지. 오크는 마물로서, 인간들을 죽이는 병기로서 살아갔다.
인간은! 마족을 억압하며 세계의 가장 더럽고 어두운 곳에 밀어넣었다!
모험가들은 고블린들의 심장을 갈라 마석을 꺼내고, 트롤의 목을 베어 피를 뽑아 포션을 만들고, 미노타우루스의 뿔을 잘라 장식으로 만들었다! 인류는 여신이 인도하는 신성력이라는 풍요와 자애 속에 파묻혀, 마족을 억압하고 자신들의 윤택한 삶을 위한 노예로 만들었다!
마족은 100년 전에도! 100년이 지난 지금도! 100년이 또다시 흐른 미래에도 억압받을 것이다! 마기를 품은 괴물이라는 이유로 평생을 던전에 갇혀 유배와도 같은 삶을 살아왔고, 살아가고, 살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 파후우 라스푸틴이 고통받는 현실에 혁명을 일으키겠다!
들으라, 인류여!
모든 생명은, 여신 앞에 평등하다! 인간이라고 하여 마족을 죽이는 것이 정당화 될 수 없으며, 천족이라고 한들 마족을 강제로 소멸시킬 수는 없다! 마족은, 마물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죽어 마땅한 존재가 아니다!
누가 우리를 마족이라고 정의내렸는가!
누가 우리를 마물이라고 단정했는가!
누가, 같은 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수많은 종족들을 인류 연합과 마왕군이라고 갈랐느냔 말이다! 누가 이 땅의 수많은 생명을 마물이라 칭하고, 괴물이라 칭하며 동굴 안으로 밀어넣었는가!
바로 인간이다!
더러운 인간들만이 서로를 차별하고 능멸하며 불평등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선언하노라!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인류에게 전 생명의 평등함을 일깨워 줄 것이다! 모두가 서로 함께 사랑하고, 사랑을 나누는 세계를 만들 것이다!
이 세상을 라스로 가득 채울 것이니라!
아아, 여신이시여! 듣고있습니까!
만약 제가 당신의 뜻을 폄훼하고 음해하고 거짓으로 타인을 속인다면, 제게 천벌을 내려주소서!
먄약 제가 당신의 가르침에 조금이라도 어긋난다면 하늘에서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십자가를 내려뜨려 저를 찌그러뜨려 주소서!
그러나 제가 틀리지 않았다면, 제게 힘을 주소서!
저 간악하고 사이한 이들을 향해 정의의 철퇴를 내려칠 힘을 주시고, 서로를 죽이고 생명의 씨앗을 즈려밟는 저 어리석은 자들에게 세계 평화를 위한 길을 알려주소서!
라스!
보아라, 인류여!
너희들은 내가 여신을 모독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여신을 모독한 건 내가 아니라, 네놈들이다!
교리라는 이름으로 여신의 뜻을 왜곡하여 설파하고, 여신의 신탁이라는 이름으로 민중을 속여 배를 기름지게 하려는 위정자들의 행패일 뿐이다!
누가 여신을 모욕했는가?!
바로 너희, 인간이다!
누가 여신을 능멸한 자에게 정의의 철퇴를 내리쳐야 하는가!
바로 나다!
바로 내가 여신을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다 믿는 오만한 인간들의 정신을 단단히 고쳐놓을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마족이 인류를 상대로 보이는 분노의 표현이 아니다!
이것은 살육과 광기에 어린 마족들이 인류를 상대로 벌이는 학살이 아니다!
이것은, 성전이다!
교단에 의해, 성녀에 의해, 인류에 의해 만들어진 가짜 여신을 파괴할 것이다! 거짓된 우상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진실을 일깨워 줄 것이다!
종족을 초월하여, 지성체와 지성체로서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 것이니!
진정한 여신의 뜻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이야말로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니라!
나, 파후우 라스푸틴이 이 자리에서 선고한다!
사랑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불쌍한 너희들에게 사랑의 힘을 똑똑히 보여주마!
혁명이다! 사랑을 하는 모든 자들이여, 일어나라!
라스를 위하여!!!
* * *
'무슨 미친 개소리를 하는 거지.'
파이톤은 라스푸틴의 말에 그저 어이가 없었다. 뭔가 마법으로 수작을 부리나 싶더니, 왕성 전체가 울려퍼지게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지껄일 뿐이었다.
'내용에 공감은 하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여신 앞에 평등하다. 그건 인정한다. 다만 한 가지 덧붙이자면, 여신 이전에 드래곤의 앞에 모두 평등할 뿐이다.
드래곤이라는 존재 아래에는 인간이든 오크든 엘프든 모두 하등 생물에 불과하다. 남녀 개미 새끼 두 마리가 서로 아무리 분비물을 뿌리며 교미를 외쳐도 그게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치겠는가?
'여신은 뭐하나, 저 미친 놈에게 천벌을 내리지 않고.'
모두가 오크의 말을 비웃었다. 로브를 쓴 채 인간 병사들의 틈바구니에 숨어있던 파이톤은 당장 하늘에서 십자가가 거꾸로 떨어져 오크의 대가리를 으깨버리기만을 기다렸다.
'뭔가 크게 떨어질 것 같군. 그래서 늦는 거야.'
공개적으로 여신을 모독했다. 홀리 드래곤인 자신 조차도 여신을 능멸하지 않건만, 어떻게 한낱 마물 주제에 여신의 이름을 걸고 선언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명백한 자살행위다.
하지만.
- 왜 이렇게 늦지?
- 뭔가 일어나야 하는 거 아닌가?
- 신벌 같은 건 없...어?
병사들이 하나 둘 동요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하늘은 고요하고 잠잠하기만 했다.
'저 개소리를 언제까지 듣고 있어야 하는 거지?'
무엇이 사랑이냐. 무엇이 평등이냐. 무엇이 인간과 마족이냐. 무엇이 혁명이냐.
그저 인간들을 먹고 싶은 마족들이 자기들 되는 대로 지껄이는 망발에 불과하다. 결국 마왕군은 왕도를 군화로 짓밟고 인간들을 잔혹하게 죽인 뒤, 그들을 잔혹하게 뜯어먹고 황폐화시킬 뿐이다.
여신의 천벌이 있기를. 파이톤은 속으로 기도하며 몸을 돌렸다.
순간.
절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화상의 옆에 무언가가 나타났다. 파이톤은 왠지 모를 소름에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씨발?!"
"미, 미친?!"
"으아아악!!"
인간들이 모두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호들갑을 떠는 정도가 아니라, 형언할 수 없는 공포를 본 것 처럼 괴성을 질렀다.
"도대체 무슨.... 아니 미친 씨발?"
파이톤은 자신도 모르게 상스러운 말을 내뱉고 말았다. 옆으로 비켜선 오크는 손에 쇠사슬을 움켜쥐고 있었고, 그의 쇠사슬은 금발 여기사의 목에 목줄로 채워져 있었다.
여기사는 넝마나 다름없는, 속옷보다도 더 노출면적이 심한 옷을 입고 있었다. 프릴 달린 브래지어에 팬티, 스타킹, 가터벨트를 입고 발에는 유리구두만 신은 여이은 만인의 앞에서 당당히 제 알몸을 드러냈다.
- 인류여, 보아라! 이것이야말로 모두가 평등하게 누릴 수 있는, 사랑의 힘이다!
츄릅.
오크는 여기사와 입술을 맞췄다. 흉악한 오크가 왕국 최고의 미녀보다 더욱 아름다운 여인과 입술을 맞추는 모습에 왕국 주민 중 대다수는 입을 쩍 벌리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바야흐로, 아노미의 도래.
상식과 이성이 붕괴되는 역사의 현장에서, 파이톤은 3천년 드래곤 인생을 살며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광경에 손발이 떨렸다.
"서, 설마...아니겠지."
소문에 따르면, 분명-
- 백문이 불여일견! 보아라! 이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이다!
펄럭----!
오크는 로브를 벗어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