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2회
260일차
결전전야.
왕국의 모든 전사들이, 왕국의 모든 피난민들이 왕도 오피큐스에 몰려들었다. 조디악 왕국의 구명줄은 오직 왕도 오피큐스 뿐이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마왕군의 발호에도 불구하고 왕도 오피큐스만큼은 평화로웠다. 이미 죽은 이들은 마왕군에 의해 범해졌고, 살아남은 이들이 모두 왕도에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벼락이 떨어지기 전에 하늘이 고요한 법이라고 한다만, 왕국의 국민들은 마왕군이 결코 왕도를 점령하지 못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왕국에는 수많은 용사들이 있다.
비록 성검을 가진 용사들은 없었지만, 성검 사용자에 준하는 실력을 가진 자들이 차고 넘쳤다.
- 왕국을 지키기 위해 텔레포트로 넘어오다니, 참된 조디악 왕국의 국민이로다...!
- 성검의 용사들도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 근데 차라리 성검의 용사가 없는 게 나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성검의 용사는 분명 하나하나가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으나, 마왕군은 성검의 용사를 타락시켰다.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 성검의 용사를 타락시켰는 지는 알 수 없으나, 성검의 용사 둘을 마왕군의 간부로 삼았다.
아리에스의 금발 검사.
비르고의 핑크 머리 마법사.
왕국군을 전멸시키는 선봉에 선 두 타락용사는 인류를 (좋아)죽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같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인류를 포로로 잡아 마왕군에게 범해지도록 하는 데 아무런 주저가 없었다.
심지어 둘은 마왕군의 대장으로 보이는 오크에게 찰싹 달라붙어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금발 여기사 쪽은 오크에게 아양을 떤다는 소문도 무성했다.
- 어쩌면 오크 자지에 패배선언 한 거 아니냐?
- 용사가 오크의 자지에 져서 타락했다고? 세상에 그렇게 말도 안 되는 타락이 어디있어?
- 여신께서 정한 금기를 범하게 되었으니 타락하는 것도 신빈성이 있는데?
두 용사가 전부 여성이라는 점에서 착안하여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했지만, 성적으로 개방되다 못해 문 자체가 없는 마왕군의 행동에 사람들은 제법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조디악 왕국을 9할 가까이 점령한 마왕군에게 '섹스'는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기본이었다.
- 내가 봤어요! 내 아내가! 구울들에게 물리더니 구울에게 다리를 벌렸다고요!
- 제 남편도...흑흑! 저랑 10년을 넘게 살았는데, 다리 하나를 들어올린 엘프를 보더니 엘프 가슴에 안겼어요!
군단의 앞에 저항하던 인간들은 모두 돌변하여 성욕의 노예가 되었다. 라스키토에게 제압당해 마왕군의 구울이 되는 자들은 하나같이 이성이 마비되고 성욕에 뇌가 지배당했다.
상식적으로 인간이 마물과 성행위를 하는, 이른바 '마물박이'를 할 리가 없다.
애초에 마왕군이 인간을 범하는 경우는 조디악 왕국에서 일어나는 경우를 제외하고 극히 드문, 아니 아예 없다시피 했다. 마왕군은 포로라는 개념이 없었고, 전장에서 죽이지 못하면 확인사살을 해대며 인간연합을 철저히 죽이려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상대는 평범한 마왕군이 아니었다.
- 자네, 조디악 왕국 얘기 들었나? 거긴 마왕군에게 포로로 붙잡히면 마물들에게 강간당한다더군.
- 미친. 고블린이랑 오크들한테 따먹힌다고? 차라리 자살하고 만다.
- 남자는 엘프랑 드라이어드, 서큐버스들한테 범해진다던데? 크흐흐, 죽을 때 까지 정기가 뽑힌다더군.
- 어우야.... 우리쪽은 그냥 서로 죽고 죽여서 다행인 건가?
다른 전선에서는 어떨 지 몰라도 조디악 왕국에서만큼은 마물박이가 아예 없는 일이 아니었다. 마왕군은 포로로 잡은 인간들의 이마에 '오크랑 함', '촉수랑 함' 등등의 문장을 새겨넣으며 인간들을 일부러 놓아주기도 했다.
마왕군과의 싸움을 포기하는 순간, 인류는 진다. 그냥 지는 것도 아니고 범해진다.
인류는 마물에게 강간당하지 않는다!
남녀를 불문하고 범해지는 것에 저항하기 위해, 자신과 가족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조디악 왕국의 영웅들은 한 자리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 * *
<왕도 오피큐스.>
"영광입니다, 폐하! 저는 소드마스터이며, 리브라 영지 출신의 버르메질이라고 합니다!"
"고향 마을이 파괴되었다는 걸 듣고 왔어요. 일람스 마탑 출신의 7서클 마법사, 산타크르 테니란이라고 해요."
"정말로 엘프들을 노예로 삼아도 되는 거요? 흐흐, 나라에서 우리같은 노예상인들을 이런 식으로 끌어들일 줄 몰랐군."
"제 아내가 오크들의 아래에 깔렸습니다! 복수하게 해주십시오! 무릎에 화살을 맞아 은퇴했지만, 아직 저는 창을 들 수 있습니다!"
각양각색의 영웅들이 한 자리에 모여들었다. 왕성을 지키는 근위대장, 파르기스 푸르지엔은 조디악 왕국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모여든 이들을 보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저마다 마왕군을 상대하기 위한 이유는 달랐지만, 마왕군을 상대로 하나가 되어 싸우겠다는 의지만큼은 하날 똘똘 뭉쳐있었다.
"르토스파이 시종장, 대단하지 않습니까? 저들이 모두 왕국을 위해 목숨을 내건 자들입니다."
"...그렇습니까."
왕성의 시종장, 르토스파이는 떨떠름한 얼굴로 화답했다. 근위대장은 시종장의 반응에 의아함을 느꼈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국왕 폐하께서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폐하는 건강하십니다. 단지 저들이 걱정되어서 그런 겁니다."
"걱정이요?"
"저들도 결국 성욕에 패배하여 마왕군의 부하가 되지 않을까 하는."
"크하하!"
파르기스 근위대장은 껄껄 웃으며 시종장의 등을 두드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디악 왕국의 정신력은 고작 그따위 성욕에 지지 않습니다! 여신께서도 굽어살펴 주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아차, 폐하께서 부르시고 계십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팔찌가 번쩍이자마자, 르토스파이는 꾸벅 허리를 숙이고 자리를 떠났다. 수많은 영웅들을 뒤로한 채 큼직큼직 걸어가는 그의 발걸음에는 짜증이 치밀어있었다.
끼이이익.
왕가 전용 훈련장의 문이 열렸다. 안에는 상의를 탈의한 근육질의 중년 사내가 스태프 하나를 움켜쥔 채 가상의 적을 향해 스태프를 휘두르고 있었다.
"직접 나가서 싸우려고?"
시종장은 중년 사내, 국왕에게 반말을 했다. 누가 봤다면 시종장을 매달고 왕가 모독죄로 참수를 했을 테지만, 훈련장에는 국왕과 시종장밖에 없었다.
"젊은 시절 만큼은 아니더라도 국왕이 가만히 있을 수 없지. 고맙다, 바르바토스."
오피큐스 왕은 시종장을 '바르바토스'라고 불렀다. 시종장은 앞머리 속에 가려진 노란 파충류의 눈동자를 번뜩이며 선언했다.
"잊지마라. 이번 계약을 끝으로, 나는 자유의 몸이 된다. 더이상 왕국을 수호하는 수호룡 따위가 아니다."
"걱정마라. 오피큐스의 이름을 걸고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그런가. 그렇다면 다행이고."
시종장, 파이톤은 손가락을 튕겼다. 파이톤의 손에서 막대한 신성력과 마력이 몰아치기 시작했고, 국왕을 향해 스며들기 시작했다.
고오오오오.
별빛처럼 내려앉은 두 개의 힘이 국왕의 몸에 깃들자, 국왕은 점점 젊어지기 시작했다. 그가 유폐시켜놓은 3왕자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아리에스 대성벽 너머에서 실종된 2왕자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저 멀리 인류 연합의 최전선에서 대규모 병력을 끌고 회군하고 있는 1왕자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여차하면 내가 직접 나서야지."
"...맘대로 해라. 나는 계약대로만 움직일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파이톤, 조디악 왕국을 수 백년간 지켜온 왕국의 신성 수호룡이여. 오피큐스 왕가의 마지막 계약자로서 그대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는 바이오."
이제는 청년이 되어버린 오피큐스 국왕은 스태프를 잡고 고개를 숙였다. 파이톤은 그의 얼굴에서 건방진 초대 계약자의 얼굴이 떠올라 속이 뒤틀렸다.
"그딴 식으로 아부해도 계약은 더 연장해주지 않는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오. 고맙소."
"...흥."
파이톤은 손가락을 튕겨 마력을 일으켰다. 오피큐스 국왕을 훈련장에 놔둔채 왕국 지하, 던전으로 돌아온 그는 던전 내부에 가득 차있는 병사들을 눈으로 훑었다.
"쯧. 마음 약해지게."
우둑, 우두둑. 파이톤의 몸에서 뼈와 뼈가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순식간에 몸의 형체가 바뀐 파이톤은 거울 속에 비친 인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왕국의 수호룡이라...."
목소리도 높아졌다. 힘을 해방하며 흘러내린 앞머리와 머리칼은 신성력의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다, 오피큐스."
파이톤, 바르바토스는 허공-시스템을 향해 손가락을 두드렸다.
* * *
<그 시각, 왕도 오피큐스 인근. 분노의 군단 주둔지, 라스푸틴의 꿈속.>
"선전포고문?"
꿈속, 나는 샤이탄의 제안에 조금 당황했다.
"언제는 우리가 선전포고 날리고 싸웠나?"
"쟁탈전을 할 때는 항상 시스템이 대신 선전포고를 날려줬습니다."
군복 차림의 샤이탄은 화이트보드에 크게 적힌 '선전포고' 네글자를 가리켰다.
"꼭 해야하는 건가?"
"예. 주인님께서 왕국을 진정으로 당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신다면, 선전포고는 꼭 필요한 겁니다."
"선전포고가 꼭 필요한 건 아니잖아. 이제와서 무슨 명분과 명예를 챙기겠다고."
"형식적이라도 절차는 중요합니다. 왕도의 어리석은 자들에게 주인님의 공포를 보여드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음...."
나는 지금까지 쟁탈전을 할 때에는 전면전을 걸었다. 하지만 대놓고 싸운 적은 없었다. 온갖 악질과도 같은 계략으로 적의 전의를 상실하게 하거나, 전력을 깎아놓고 싸워왔다.
아무리 왕도를 포위한 우리 마왕군의 전력이 압도적이라 한들, 기본적인 틀은 변해서는 안 된다.
"샤이탄, 우리 그냥 선전포고 없이 했던 전술 그대로 써먹는 건 어때? 우리 전술은 적에게 들키지 않는다는 걸 전제로 많이 이루어졌잖나."
"이미 저희 전술의 9할은 왕국군에게 파악당했습니다. 파훼당했다고 하는 게 맞을 지도 모르겠군요. 실제로 아직도 몇몇 귀족령은 군단에 저항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피스케스, 칸세르, 그리고 타우러스 인가."
한 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나로서는 인연이 없다고는 할 수 없는 곳이었다. 조디악 왕국 중에서도 세 영지는 우리 군단의 기본 전술-성욕이라는 전염병 확산-이 쉽게 통하지 않는 곳이었다.
하지만 세 영지는 자신들의 영지를 지키는 데 급급하지, 왕도를 지원할 수 있을만한 여력이 없었다.
"타우러스야 아무도 없으니 그렇다치고, 피스케스와 칸세르는 계속 교착 상태지?"
"예. 기네비어도 그에이도 전선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각 영지의 영주들도 왕도가 점령당하면 백기를 들고 항복할 겁니다."
우리 군단에서 두 도시에 대한 정벌은 각각 기네비어 피스케스와 그에이 칸세르가 맡았고, 나의 두 사위는 영지민들이 개죽음을 당하지 않도록 각자의 영지와 무한 대치전을 벌이고 있었다.
둘에 대한 내 작은 배려이며, 괜히 왕도에 병력이 추가되지 않게 하기 위한 얄팍한 술책이었다.
"어쩔 수 없군. 선전포고문을 만들어야 하는 건가."
"예. 라스토피아 역사서를 장식할 역사적인 명문이 되어야 합니다. 설마 주인님, 라스토피아의 역사서에 '왕국을 따먹으로 왔다!'고 남기실 건 아니시죠?"
"라스토피아의 정체성에 걸맞는 서두라고 생각하지는 않나? ...흠흠, 미안하다. 그래."
나는 순순히 꼬리를 내렸다. 선전포고를 만들고 낭독하는 것 정도야 얼마든지 쉽다.
하지만 서신 하나 적어서 달랑 보내봐야, '이런 고얀!'하면서 버려질 게 뻔했다. 그럴 바에는 좀 더 확실하고 적을 동요하게 만들 수 있는 방안으로 선전포고를 해야했다.
"찌라시라도 뿌려? 아니면 엘프들이 입던 스타킹 살포?"
뭔가 방법이 없을까. 왕성 뿐만 아니라 왕도에 숨은 모두에게 우리 군단의 선전포고를 알릴 방법이.
아.
"샤이탄, 혹시 마법 중에 그런 것도 가능한가?"
"어떤 걸 말씀하시는 지요?"
"왜, 그...."
나는 내 머릿속에 있던 구상을 꺼냈다. 샤이탄은 내 설명을 듣자마자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마음을 굳히셨군요."
"어차피 할 선전포고문 낭독이라면 확실하게 해주마. 모두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하기 위해, 모두가 볼 수 있게 하는 거지."
"혹시 이런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치직. 샤이탄은 스크린에 참고 영상을 하나 띄웠다. 빛무리와 함께 수 십 미터에 이르는 거대 괴수가 홀로그램으로 반짝이며 콘크리트 도심을 걸어가고 있었다.
"가능합니다. 마법사들을 많이 동원할수록 더 선명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 그러면 부탁하마."
왕도 오피큐스라는 특등석에서 모두가 관람할 수 있게, 나는 선전포고의 방식을 정했다.
"연설이다."
왕국의 중심에서 라스를 외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