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1회
248일차
본격적인 전쟁을 시작함에 앞서, 우리는 전열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우리의 적, 조디악 왕국.
시조 오피큐스와 열 두 용사가 악의 제국을 무너뜨리고 세운 왕국으로,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대륙의 강국으로-
"어차피 멸망할 왕국의 역사, 알아서 뭐하겠냐. 그냥 넘어가."
"설명해주려고 해도 난리야."
그레모리는 그럴 것 같았다는 얼굴로 [조디악 왕국 500년 역사]라는 책을 옆으로 밀었다.
"일단 네가 원할 것 같은 결론부터 얘기할게. 파이톤, 시조 오피큐스와 계약을 맺은 드래곤이자 왕국의 수호룡이야. 조디악 왕국이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힘은 성검의 힘도 있지만, 왕도에 있는 드래곤 덕분이기도 해."
"드래곤의 힘은 이미 잘 알고 있지. 암."
왜 모르겠는가?
우리 군단의 전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켜 준 계기가 바로 드래곤이었다.
하프 드래곤으로부터 뽑아낸 드래곤의 유전자로 우리 군단의 부하들은 대부분 별의 등급이 1~2개씩 올라갔고, 만렙 경험치 손실 없이 계속 강해질 수 있었다.
"크크크. 위대하신 군단장님의 힘과 용의 힘이 하나로 합쳐진 이상, 군단은 반드시 승리할 겁니다."
"그 상대가 드래곤이니까 조심하는 겁니다, 그에이 경."
...일부, 드래곤의 힘을 이어받은 영향인지 중2병에 걸린 놈들도 있지만.
'강한 힘에는 대가가 따른 법이긴 해.'
레비즈의 드래곤 유전자가 들어간 이들은 등급을 막론하고 모두 강해졌다.
20레벨 정도 오르는 대신 중2병에 걸린다면, 나는 얼마든지 질풍노도의 시기를 다시금 맞이할 수 있다. 그렇게 강해지지 않으면 왕국을 수호하는 드래곤을 어떻게 이기나 싶었다.
아무리 내 레벨이 97까지 올랐다고 한들, 상대는 만렙이다. 방심해서는 안 된다.
더군다나 몸이 수십 미터에 달하는 거대 드래곤이다? 말 다했지.
"드래곤 레이드를 뛰는 건 위험천만하군. 나는 드래곤 헌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던전 짓는 군단장님을 하고 싶단 말이지. 뭔가 방법이 없나?"
"방법은 있어. 쟁탈전이야."
버나드를 점령하고 왕도 오피큐스만 남긴 시점, 우리 군단의 회의장에는 한 명의 새로운 존재가 나타났다.
"파이톤은 던전의 주인이고, 던전 안에서는 몸을 최소 골렘만큼 줄일 필요가 있어."
본인의 취향인지 미소년의 몸을 빼앗아 우리 던전에 들어온 자는 다름아닌 마르바스, 솔로몬 던전 5위였다.
"성체 드래곤이 드래곤으로서 싸울 수 없는 환경에서 싸우면 돼. 바로 던전 안에서."
"드래곤인 동시에 '바르바토스'라."
"주인님, 그가 바로 8위 던전의 주인입니다."
바르바토스. 익히 알고 있다.
그쪽 방면으로는 관심이 크게 없지만, 모바일 게임에서 자주 등장하는 바르바토스라는 이름은 몇 번 들은 적 있다.
바르바토스라는 이름이 붙는 자들은 하나같이 강했다. 내가 알 정도로 이름이 유명하다는 건 그만큼 강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뭔가 있어보이는 이름일수록 강한 존재에게 배정되는 경향이 잦으니까.
'애초에 솔로몬이든 72던전이든 익숙한 이름들이 많이 있기는 하지.'
그런 나에게 익숙할 정도로 바르바토스는 상당히 강한 존재였다. 나에게도 익숙한만큼, 이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제법 익숙한 이름이었다.
"왕국 지하에 마룡이 살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그게 바르바토스라는 존재일 줄은...."
"이쪽도 마찬가지야. 왕국의 수호룡인 신성 드래곤인 파이톤이 던전 주인이었다고? 세상에. 누가 그걸 믿어?"
"현실이 그래. 그리고 그게 우리가 상대할 적이지."
지금까지 왕국을 공격하려고 한 수많은 적들이 왕국군의 손에 패배하기는 했지만, 왕도 오피큐스를 포위한 시점에서 파이톤/바르바토스에게 몰살당했다는 기록은 왕국 곳곳에서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었다.
왕국 가까이에서 적을 맞이할 때는 은빛의 수호룡으로, 왕국의 외곽에서 날 뛸 때는 검은 마룡으로.
홀리 드래곤, 파이톤.
'누구 애미인지 확실하군.'
모녀드래곤 덮밥을 실현하기 위해서, 나는 바르바토스를 잡을 수단을 강구해야만 했다.
"어디 뭐 낚을만한 장치 없나? 드래곤을 구속하는 신비의 아티팩트같은 거. 왜, 드래곤을 조종하는 피리 같은건...."
"유감입니다, 주인님. 파이톤이 이미 진작에 파괴했습니다."
진실로 유감. 그냥 되는대로 말해본 건데 진짜로 있었고, 이미 사라졌을 줄이야.
"그러면 차선책이다. 마르바스, 한 가지 물어보지. 바르바토스와 직접 만난 적이 있나?"
"물론이야."
"그 때도 드래곤의 형상이었나?"
"아니."
마르바스의 확답에 나는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밖에서는 블랙 드래곤으로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지만, 던전 안에서는 폴리모프 상태로 있어야 해. 솔로몬 님의 던전은 그 정도 공간을 허용하지 않으니까."
"아무렴. 크흐흐, 그럼 됐다."
블랙 드래곤 파이톤이 아니라, 폴리모프로 몸을 바꾼 던전 주인 바르바토스를 상대하는 것. 그게 바르바토스를 상대로 우위를 점하고 싸울 수 있는 방법이었다.
"놈은 어느정도로 강하지? 역시 100레벨인가?"
"응. 10위권은 모두 100레벨이야."
차고 넘치는 만렙의 수에 나는 입이 바싹 말랐다.
"우리 엄청 위험했군. 파이톤이 크아앙하고 울부짖었으면 우리 그냥 다 몰살당했던 거 아니냐."
특히 레비즈를 사로잡은 시점.
그리고 드래곤의 피를 이어받은 부하들을 마구잡이로 늘려나갔던 시점.
만약 파이톤이 빡쳐서 우리 쪽으로 날아왔다면, 아마 군단은 멸망했을 것이다.
"옛날이라면 그랬겠죠. 하지만 그 즈음부터 한창 인류연합과의 전쟁이 격화되었잖아요? 바르바토스도 자기 부하들을 차출해서 내보냈을 거예요."
"아니면 레오 후작령이나 다른 왕국의 군대가 우리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한 건가...."
"더군다나 8위가 63위 상대로 쟁탈전 거는 건 면이 안 서지. 언제든지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에 가만히 내버려뒀을 거고."
"우리쪽에 손을 쓰지 못하는 사이, 우리가 쉽게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는 거군. 흐흐."
새삼 솔로몬이, 에스투가 나를 얼마나 알게 모르게 도와줬는지 알 것만 같았다.
새삼 바르바토스가 나를, 우리 군단을 얼마나 무시하고 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새삼 우리 군단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알 것만 같았다.
쿵. 나는 테이블을 손으로 두드리고 몸을 일으켰다. 결정이 끝난 이상, 이제 본격적인 전쟁으로 나설 때다.
"주인님,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당연히 8위랑 맞짱떠서 바르바토스의 이름을 빼앗는다."
라스푸틴 아스타로트가 아닌, 라스푸틴 바르바토스가 되리라. 왕국을 점령한다는 것은 곧 바르바토스까지 쓰러뜨려, 후환을 없앤다는 의미기도 했다.
"마르바스, 공식적으로는 네가 바르바토스를 상대로 시비를 걸 수는 없지?"
"물론. 대신 파이톤이랑은 싸울 수 있지."
마르바스는 손가락을 튕기며 허공에 대륙의 지도를 펼쳤다. 조디악 왕국의 전도가 쭉 펼쳐짐과 동시에, 붉은 색으로 반짝이는 별이 하나 리브라 영지 너머에 큼지막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저기가 내 던전이야."
"마르바스 님, 수인족의 왕국이 아닙니까?"
"응. 파이톤이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도 수인왕국을 뒤에서 지배하는 자라 이 말씀. 애초에 10위권 안에 있는 놈들 대부분이 다 이럴 걸?"
"마계에서 올라온 강자가 아니라, 각 세력의 강자들에게 시스템을 주면서 마왕군으로 삼았다는 건가? 대충 알겠다."
마르바스가 이야기하던 '큰 물'이 무엇인지 감이 왔다. 동시에 솔로몬이 마왕군을 어떻게 단기간에 거대한 세력으로 확장했는지 알 것 같았다.
'시스템을 뿌렸어.'
바알이라는 자신의 심복을 제외한 모든 지역 강자들에게 시스템을 뿌려, 던전이라는 새로운 무기를 쥐여준 것이다. 개중에는 인류를 상대로 격한 증오를 가진 존재들도 있을 것이고, 마왕군이 적으로 삼기 껄끄러운 종족들도 있었을 것이다.
"수인왕국의 뒷 지배자에게 시스템을 준 건가.... 흐흐,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겠군."
"수명이 다한 최강의 전사를 던전의 부하로 삼는다거나, 아니면 왕국의 적에게 죽지 않는 무한의 군대를 보낸다거나. 꼭 던전의 힘이 아니더라도 강했지만, 굳이 활용할 수 있는 힘을 두고 안 쓸 이유는 없잖아?"
"정답이군. 그런데 아무리 마왕님이 강하다고 한들, 자존심 내세우는 놈들이 있었을텐데?"
"풉. 솔로몬님과 맞서 싸워서 시스템 받기를 거부한 놈들은 다 알싸개가 되었단다."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 나는 다시 한 번 더 마음속으로 장인장모님을 칭찬했다.
비바 솔로몬, 비바 에스투.
"던전에 영혼을 묶어둘 수 있는 부하들은 한정되어 있어. 하지만 꼭 부하들이 던전 부하들만 있는 건 아니잖아?"
"네가 무슨 생각인지 알겠다. 던전의 부하들을 동원하는 건 여러모로 문제가 되지만,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세력을 동원하는 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지."
"그래. 그래서 '파이톤'을 상대하고자 하는 거야."
붉은 점이 있는 곳에서 대규모 붉은 색 발자국이 왕도 오피큐스를 향해 움직였다. 리브라 영지를 짓밟고 비르고 남작령을 지나, 우리 군단의 포털을 통해 넘어오는 대규모 수인 병사들은 왕도를 둘러싸는 포위망의 일부가 되었다.
"마르바스로서는 도울 수 없어도, 수인왕국의 지배자로서는 도와줄 수 있지."
"수인왕국의 지배자는 여왕인가? 여왕이지? 여왕이라고 해다오."
"...나 참, 그래. 여왕이다. 이제 됐어?"
지릴 뻔 했다. 이미 어느정도 확신하고 있었지만, 본인의 확답을 듣고 나니 더욱 자지가 불끈 솟아올랐다.
'왕국 간의 동맹으로 결혼동맹 만큼 단단한게 없지.'
수인왕국의 지배자가 라스토피아 국왕의 아내 중 하나가 된다면, 수인들도 천천히나마 라스의 도리를 받아들일 것이다. 실제로 우리 군단에도 라스와 함께하는 화염표범수인들도 있고, 라스 그 자체인 안드라스들도 있다.
"북쪽은 우리가 맡겠어. 남쪽은...."
"우리가 맡겠소."
우리 군단에 새롭게 합류한 자들, 스스로를 '심해왕국 아틀란티스'의 대표라고 부르는 여자 용사-아쿠아리우스는 오피큐스에서 흐르는 강물을 가리켰다.
"오피큐스에서 도망치는 자들은 강을 따라서 도망칠 수밖에 없소. 만약 버나드까지 도망친다면 우리가 그들을 제압하도록 하겠소."
아틀란티스와 아쿠아리우스는 마르바스만큼 적극적으로 우리를 돕지 않았다. 사실 마르바스만큼 돕는 게 이상했다.
마르바스는 우리 군단을 몇 달간 옆에서 지켜보며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졌고, 아쿠아리우스는 버나드가 점령당하자 허겁지겁 우리 군단에 머리를 숙이고 들어왔다.
'진짜로 굽히는 건지, 아니면 개수작인 건지 아직 감이 오지 않아.'
싸워서 이기면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 상대가 심해에서 얼마나 올라오든, 귀찮기는 해도 육지에 성벽을 쌓고 올라오는 놈들을 하나 둘 사냥하면 될 일이다.
단지 바르바토스와 왕국군을 앞에 두고 굳이 심해의 어인들과 귀찮은 싸움을 할 이유가 없기에, 그리고 같은 성검의 용사로서 나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는 아직 너희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는다. 만약 너희가 우리를 배신한다면, 나는 그 때 내 자지를 걸고 너희들을 파멸시킬 것이다."
"걱정마시오.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니."
아쿠아리우스는 흉갑을 두드리며 당당히 선언했지만 글쎄. 나는 믿을 수 없었다.
'대줘도 믿을까 말까 한 판에 대주지도 않고 동맹을 맺는다?'
신뢰가 아닌 서로 이용하기 위해 손을 잡은 관계다. 나는 언제든지 손을 잡아당겨 명치를 친 다음 옷을 벗겨 범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다.
"결정났군. 그럼 전쟁 시작이다."
쾅! 나는 테이블을 할레오 색스로 쪼개버렸다. 반듯하게 반으로 갈린 테이블의 중심에는 조디악 왕국의 수도, 오피큐스가 있었다.
"왕국을 점령하고 왕성 꼭대기에 우리 군단의 깃발을 꽂을 것이다."
왕국통일까지, 앞으로 단 한 걸음.
* * *
모두가 전쟁 준비에 한창인 시각.
나는 륜도, 라임도, 샤이탄도 모두 떼어놓고 따로 라스베가스를 찾았다.
"오셨습니까."
공손히 나를 맞이하는 노인, 코스트는 눈아래에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아있었다. 나는 그의 안내에 따라 그의 작업실 안쪽, 비밀 공간의 안으로 들어갔다.
"음...!"
순백과 실크의 향연. 슬라임으로 굳어진 마네킹들은 각 종족 뿐만 아니라 내가 마음에 품은 모든 여인들의 체형에 맞게 제작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군단장님, 결국 실패하신 겁니까?"
"크흐, 어떻게 안 되더군. 이대로 제작해주시오."
나는 정면으로 서서 두 팔을 좌우로 들었다. 코스트는 반듯한 줄자를 가져와 내 몸을 측정하기 시작했다.
"군단장님께서 처음 저를 만난 날, 저는 다른 수많은 디자인도 그랬지만 이것에 매료되었습니다. 이제는 말씀해주시죠, 무엇입니까?"
"아아, 그것은 턱시도라고 하는 것이다."
이미 턱시도, 그러니까 정장은 이 세계에 널리 퍼졌다. 나의 기억과 유전자를 바탕으로 태어난 오크 성기사 갤러해드가 입은 것 처럼, 지구 현대식 정장은 제법 이 세계에 새로운 의문화로 정착되었다.
하지만 정장 중에서도 턱시도만큼은 남달랐다. 옷이 가지는 '의미'가 남달랐다.
"코스트 경, 이 순백의 드레스들이 무엇이라고 했지?"
"아아, 그것은 웨딩 드레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소. 웨딩 드레스. ...결혼할 신부가 입는 옷이지."
나는 드레스 중 하나의 곁으로 다가가 손을 붙잡았다. 슬라임 마네킹이지만, 왠지 모르게 나를 향해 웃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전투가 끝나면, 나는 왕성에서 나의 여인들과 결혼할 것이다."
플래그 따위는 없다.
내가, 파후우 라스푸틴 아스타로트가 무조건 승리할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