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비만 오크-649화 (645/800)

649회

248일차

정령이라 함은 본디 동물이나 짐승, 혹은 작고 귀여운 어린 아이와도 같은 모습을 한 존재다.

우리 군단에 종속되어있는 피의 정령들 또한 마찬가지다.

아무리 성욕이 왕성하고 행동 습성이 모기나 흡정귀와 닮아있다고 한들, 그들의 근간은 엄연히 정령이다. 물의 정령에 페트라누스의 피가 아주 약간 들어갔을 뿐이다.

그렇다고 피가 오염되서 정령왕이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그건 아니다.

'피의 정령이라는, 물의 정령왕 아래에 하나의 새로운 정령 체계가 탄생했었지.'

따라서 정령왕이라는 존재가 마음만 먹으면 피의 정령-모르디네들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새로운 존재로 탈바꿈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바로 지금, 우리가 할 진화처럼.

"피치, 아니 넵튜누스여. 내가 인도하는 대로 물의 정령들을 구성해라."

나는 나의 기억 속에 깃들어있는 것들을 그림으로 모조리 이끌어냈다. 넵튜누스는 내 그림을 보고 상당히 당황스러워했다.

"이렇게 태어나게 만들라는 겁니까?"

"아니지. 태어나게 하는 건 너의 역할이 아니다. 일부러 생명을 정령을 창조할 필요는 없다. 네가 할 일은 모르디네들에게 변이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변이성이요?"

"그래. 육체를 자유자재로 변형시킨 뒤,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 말이다."

물의 정령이 가진 강점은 단연 유연성이다.

딱딱한 땅의 정령이나 허상과도 같은 바람이 정령과 달리, 물의 정령 흐르는 물이라는 특징으로 유연한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 엄연히 실체를 갖추고 있다.

마치, 슬라임처럼.

즉, 이들의 특징은 우리 군단의 어느 종과 가장 어울린다. 슬라임과 물의 정령은 마족과 정령이라는 서로 다른 카테고리만 아니었다면 같은 종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닮아있었다.

"역소환 당한 모르디네들을 싹다 불러라. 그들은 이제 정령계에 속한 정령이 아니게 될 것이다."

"뭐, 뭘 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합성."

서로 다른 두 개체를 합성하는 걸로 끝나는게 아니라, 나는 비슷한 성질을 가진 두 종족을 하나로 합쳐 새로운 종으로 진화시킬 계획이었다.

<슬라미아 X 모르디네>.

<슬라임 드래곤 X 모르디네>.

<빅슬라임 X 모르디네>.

<슬라인 X 모르디네>.

슬라임 종을 베이스로 하여 피의 정령으로서 가진 성질을 합성한다.

그리하여 우리 군단의 슬라임은 마물이 아닌 "정령"으로 진일보하게 된다.

"비바, 솔로몬!"

레벨과 등급과 형태를 무시한 강제합성이었으나, 역시 같은 유체 형태의 종족이라는 특징을 바탕으로 나는 슬라임의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게 되었다.

<부하합성> 2개체 이상의 부하를 합성하여 하나의 개체로 만들어냅니다.

# 합성대상 : <슬라임 스피릿>

# 합성조건 : 슬라임 종 1개체 + 물의 정령 1개체

이미 나는 실험을 끝마쳐놓았다. 물의 정령을 단순히 정령으로서 활용하는 것을 넘어, 우리 군단에서 강화할 수 있는 만큼 활용해보았다.

그린 엘프와 블러드 엘프들이 물의 정령을 계약했듯, 슬라임들은 정령의 힘을 가지게 된 것이다.

<라임 슬피릿>.

슬라임이자 동시에 정령인 존재.

물의 정령왕의 도움으로 물의 정령왕 아래 또다른 파생 정령으로 만들기 위해선 한 명의 슬라임이 라임 슬라임의 군주, 그러니까 '슬라임 대공'이 되어야만 했다.

'라임은 안 되지.'

라임에게는 바알을 쓰러뜨리고 훗날을 도모할 갓-슬라임으로서 자리를 계승할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라임이 아닌 슬라임 중, 슬라임 정령군주가 될 또다른 존재가 필요했다.

뀨륵.

사실 정반대다. 나는 이 아이를 다른 이들처럼 강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 새로운 방안을 찾다가 한 가지 길을 발견했을 뿐이다.

"라인아, 준비는 되었느냐?"

뀨륵.

라임의 품에 안긴 라인은 당당히 손을 들어올리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내 자부심이 슬라인으로 태어난 것처럼, 녀석은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오늘부터 너는 정령이 된다. 괜찮겠느냐?"

뀨르륵.

나와 라임이 낳은 결정체, 라인은 자신만만한 포즈로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자신의 몸에 정령의 성분이 깃들어, 슬라인이 아닌 '정령'이 됨에도 라인은 한치의 의심도 없이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라인, Lv.75, ★★★.

3성으로서 최대 레벨을 찍고 썩어 넘치는 마물 강화권을 폭식하여 최대 레벨은 올랐지만, 등급을 더 올리기 위해서는 라인에게 새로운 계기가 필요했다.

합성을 하되, 본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합성이라는 계기가.

"네가 오늘부터 피정령의 군주다."

나는 그녀에게 우리 군단 피의 정령이라는 새로운 길을 제시했고, 라인은 나를 믿고 슬라임 정령 군주가 되기로 했다.

"새롭게 태어나라. 이것이 바로 너를 위한, 너와 슬라임들을 위한, 너와 모르디네들을 위한 특별한 합성, 그리고 진화다."

뀨르륵.

고작 1m도 되지 않는 라인은 당당히 소환진에 섰다. 팔짱까지 낀 라인은 자신감으로 철철 흘러넘쳤고, 주변에 자리잡은 물의 거인들도 철철 흘러넘쳤다.

"소, 소환 다 끝났습니다."

넵튜누스는 지친 얼굴로 물의 거인을 가리켰다. 이성은 없지만 정령왕이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어낸 워터 엘리멘탈은 전부 ★★★★의 등급을 갖추고 있었다.

<알림> 워터 골렘(★★★★)을 던전의 하수인으로 등록하시겠습니까?

"물론."

라인에게 정령의 가능성을 부여하기 위해 태어난 물의 거인은 벌써부터 라인을 지키듯 몸을 낮췄다. 탄생의 이유가 합성을 위해서라는 것이 다소 미안하기는 했지만, 녀석은 라인의 일부가 되어 라인의 힘으로서 살아갈 것이다.

"잘했음, 역시 정령왕."

"흑, 흐윽...."

넵튜누스의 뒤에는 라임이 눈을 희번득 뜨고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륜은 라임의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넵튜누스를 따로 빼두었고, 넵튜누스는 라임에게 조인트를 당하며 이성 없는 워터 골렘을 만들어냈다.

"간다, 라인아."

바야흐로 합성의 때.

이것은 슬라임 종의 혁명이며, 새로운 역사를 장식할 슬라임계 진화의 상징이 될 것이다.

"라인, 초특급 진화!"

위이이잉------

평소라면 그냥 사방으로 터져나왔을 보라색 연기가, 하늘을 향해 계단을 만들어나가듯 솟구치며 소환진을 뒤덮었다.

끄오오오오----!!

물의 거인 또한 보랏빛 계단과 하나가 되어 라인을 향해 폭포수처럼 떨어졌다. 라인에게 곧장 떨어지는 정령의 빛은 라인을 휘감기 시작했고, 라인은 점차 소환진 위에서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라인은 한쪽 주먹을 꽉 움켜쥔 뒤, 하늘을 향해 주먹을 치켜들었다.

뀨오아아아앙----!!

<알림> 앗, 라인의 상태가...?

* * *

"모두 조심하십시오! 붉은 물의 정령은 아군이 아닙니다! 마왕군의 부하인 적군입니다!"

전신을 푸른 갑옷으로 중무장한 여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혼란에 빠진 사람들은 여인의 군화 아래에 깔린 붉은 물의 정령을 보고 수군거렸다.

"저거 운디네 아닌가...?"

"운디네치곤 엄청 붉잖아."

"지금 붉은 게 문제냐! 저 표정을 봐! 군화에 깔린 상태로도 헤벌레 하고 있는 표정을!"

사람들은 운디네의 표정을 보고 기겁했다. 혀를 앞으로 내밀고 눈동자가 위로 올라간 운디네-모르디네는 손만 앞으로 내밀었다면 양손으로 V라도 할 기세였다.

"들어보십시오! 이 녀석이 어떻게 우는 지!"

"라, 라스!"

날개가 뜯기고 더듬이가 잘려, 실체로서 존재하게 된 모르디네의 외침에 사람들은 공포에 빠졌다.

"아헤엥, 으엉, 라스!!"

쾌락에 물든 모습, 붉은 색, 그리고 숨길 수 없는 성전(性戰)의 함성.

"으아악! 성욕의 군단이다!!"

라스.

분노의 군단이기도 하며 오만의 군단이기도 하며 색욕의 군단이기도 하며 탐욕의 군단이기도 한 집단으로, 조디악 왕국을 좀먹어들어가는 정체불명의 마왕군을 일컫는 이름이었다.

비르고 남작가를 시작으로 레오 후작가까지 점령하여 어느덧 왕국의 턱밑에 칼끝을 겨눈 마왕군으로, 그들은 자비로우면서도 무자비하게 인류를 능욕했다.

- 씹물이 흐르는 곳에 라스가 있다.

라스 군단에 의해 조디악 왕국은 이미 전역이 피바다로 물들었다. 수많은 이들이 라스키토에 의해 범해져 마물박이가 되었다.

- 남자는 겁탈하고 여자도 겁탈하라!

남자는 여성형 마물들이 범했다. 여자는 남성형 마물들이 범했다.

그나마 남자들은 여성형 마물-엘프나 하피, 안드라스 등-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여자들의 경우에는 촉수라든가 텐타클이라든가 돌기 달린 슬라임과도 같은 마물들에게 범해지는 경우도 허다했다.

- 저항하는 자는 모조리 죽여라! 단, 복상사로!

그나마 저항하지 않으면 성욕의 군단은 복상사로 죽여주지만, 죽은 시체는 구울-라스키토로서 사용되었다. 인간의 상식을 초월한 군단의 진격에 많은 이들은 공포와 두려움에 빠졌다.

당연히 분노의 군단의 상징과도 같은 말을 하는 마족이 광장 한 복판에 있는 것 또한, 그들의 공포를 심화시키기에는 충분했다.

"라스!"

"시, 싫어어어----!!"

광장은 아비규환에 빠졌다. 왕도 근처의 항구도시 만큼은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던 이들도 모두 패닉에 빠졌다.

"라스 군단이 여기까지 온 거야!"

"우린 따먹힐 거라고!"

"으아악! 이, 이대로 결혼도 못하고 범해지긴 싫어어!!"

드디어 성욕의 군단이 버나드에 도착했고, 성에 굶주린 괴물들이 성벽 내부로 침투하기 시작한 것이다.

"감염될 거야! 발정증후군에 걸릴 거라고!!"

"싫어! 나는 섹무새가 되고 싶지 않아!!"

"으아아악! 배, 백작은 어디서 뭘 하는 거야!"

이미 숱한 도시들이 어떻게 점령당했는지 사람들은 훤히 알고 있었다.

한 명만 전염되어도 속속들이 퍼져나가는 섹무새 증후군부터 시작하여, 미약에 오염된 저수지, 에스트라스 보균자, 인간으로 변장한 라스키토 등 마왕군은 다양하게 인류를 감염시키고 점령하여 군단의 노예로 만들었다.

"정령을 범해서 마족으로 만들다니, 미친 놈들이잖아!"

"우리도 저렇게 될 거야! 섹스밖에 모르는 바보가 되어버릴 거라고!!"

하지만 설마 하다하다 못해 물의 정령까지 타락시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광장의 주민들은 닿지 않는 기도만 올리며 두려움에 빠졌다.

"큭...!"

갑옷 여인은 투구의 페이스 가드를 들어올렸다. 인상적인 갑옷과는 달리 여인의 얼굴은 평범하게 아름다웠다.

"여러분, 모두 진정을-"

"의미없어. 이미 대세는 기울었으니까."

갑옷 여성의 옆으로 다가온 청년은 지팡이를 바닥에 두어번 두드렸다. 지팡이 끝은 물의 정령에 닿자마자 전기를 일으켰고, 붉은 정령은 순식간에 푸른 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너...!"

"정령계로 돌아가라."

[으어엉, 허엉, 흐어어엉!]

운디네로 다시 되돌아간 정령은 꺼이꺼이 울면서 정령계로 사라졌다. 청년이 보인 행위는 가히 기적이라고 할 만큼 대단했으나, 그 누구도 그걸 관심있게 보지 못했다.

"이거 봐. 병사들이 아무도 나타나지 않아. 이미 당했거나, 사람들을 구할 생각이 없거나. 그냥 이 도시, 이 왕국은 끝난 거라고."

패닉에 빠진 시민들을 진정시켜야 할 병사들이 일방적으로 당했다. 청년은 당장이라도 도시를 뛰쳐나갈 것 같은 여인의 손목을 붙잡았다.

"나랑 같이 가자."

"어딜!"

"이 도시를 지키고 싶은 거지? 그러면 도시를 점령하려고 하는 녀석한테 가서 사정해야지."

청년은 성벽 너머를 가리켰다.

"라스푸틴에게 가자. 그리고 그 자와 거래를 하는 거야."

로브 아래 청년의 입꼬리는 크게 비틀려있었다.

"너도 이 도시를 지키고 싶은 게 아니라, 네 도시를 지키고 싶은 거잖아?"

"윽...!"

"나도 너희랑 개인적인 인연이 있는만큼, 전력을 다해 도와줄게. 대신 마왕군에게 피해를 끼칠 수는 없어. 굳이 따지자면 나는 인간의 편이 아니라 마족의 편이니까."

청년은 실실 웃으며 지팡이를 바닥에 두드렸다. 청년을 중심으로 작은 마법진이 펼쳐졌고, 청년의 몸이 아래에서부터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할래? 이대로 여기서 마왕군이랑 결사항전하다가 결국에는 패배해서 종족 전체를 노예로 만들래, 아니면 네 한 몸 희생해서 마족과 동맹을 맺을래?"

"...너는 어떻게 했지?"

"나?"

청년은 날카로운 송곳니를 번뜩이며 사납게 웃었다. 청년은 머리칼 위로 고양이와도 같은 귀가 쫑긋 솟아올랐다.

"서로 서로 윈-윈하는 건설적인 관계를 맺었지."

"......믿는다, 피스케스."

여인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청년의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청년은 키득거리며 웃다가 장난스레 지팡이를 위로 치켜들었다.

"뿅!"

사라락.

마법진이 무지개빛으로 반짝이더니, 청년과 여인은 모습을 감췄다.

"아아아악!!"

아비규환에 빠진 도시는 여전히 혼란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리고.

뀨오와와아앙----

도시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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