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6회
248일차
까악, 까악.
까마귀가 하늘을 난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갈색 머리칼의 청년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까마귀가 아니다. 까마귀의 모습을 한 괴물로, 이미 세간에는 '안드라스'라고 널리 알려진 비행형 아인(亞人)들이 먹잇감을 찾아 하늘을 날고 있었다.
"까마귀는 흉조라고 하던데."
청년은 몸서리를 치며 길을 마저 걸었다.
왕국으로 향하는 대로에는 온갖 시체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그들의 입은 하나같이 송곳니가 날카롭게 삐져나와있었고, 모두 마물이 아닌 인간에 의해 살해당한 상처가 가득했다.
"부디 다음 생에는 더 강한 존재로 태어나시오."
청년은 지나가면서 마주친 모든 시체들의 눈꺼풀을 닫았다. 마주치는 시체 한 명 한 명 모두 기도를 했다.
"까아악!!"
마침 청년을 발견한 안드라스들이 아래를 향해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는 하늘에서 무언가를 아래로 흩뿌렸다.
"씁."
청년은 소매로 손등을 막으며 숨을 참았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흰색의 끈적한 액체가 비처럼 쏟아졌고, 청년은 검은 로브에 묻은 젖내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어으...어제 빨았는데. 미치겠네."
청년은 로브를 한 번 힘차게 털어냈다. 하지만 이미 로브에 스며든 냄새는 지워낼 수 없었다.
민트초코.
마왕군은 젖의 냄새로 대상의 위험성을 널리 알렸다. 자신들이 잡아먹기 쉬운 약한 존재를 상대로는 '초코우유'라는 것을 뿌렸고,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적을 상대로는 '민트초코우유'라는 것을 뿌렸다.
저벅, 저벅.
젖내를 맡고 구울들이 하나 둘 청년의 근처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죽은 시체들 사이에서 몸을 일으킨 구울들은 하나같이 눈이 붉게 반짝이고 송곳니가 날카롭게 발달되어 있었다.
애애앵.
하나 둘 움직이기 시작한 구울들의 몸에 희고 검은 선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면 흰 피부에 검은 줄무늬가 새겨진 것이었고, 줄무늬의 정체는 촘촘한 문신이었다.
"<라스키토>...!"
왕국 전체를 흡정귀의 세상으로 만든 역병의 전파자. 한 번 사람을 깨무는 것으로 같은 마물로 만들어버리는 미친 괴물.
그리고 아직 감염시키는 과정에서 상대의 정기를 흡수하기 위해 강제로 범하는 강간마족.
청년은 침을 꿀꺽 삼키며 로브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아직 왕도까지 한참 남아있었지만, 라스키토와 마주친 이상 밍기적거릴 수는 없었다.
"여기서 힘을-"
"키에에엑!!"
가까이 다가온 라스키토가 질색을 하며 도망쳤다. 근처에 다가와 냄새를 맡던 라스키토는 헛구역질을 하며 청년을 피했다.
"......."
킁킁. 청년은 자신에게서 나는 민트초코 냄새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똑같은 마왕군에서 뿌리는 것일텐데 왜 라스키토들은 민트초코 냄새에 질색을 하는 걸까. 소문에 의하면 이 민트초코는 오크들에 의해 피가 오염된 엘프들에게서 쥐어짜낸 젖이라고 하던데.
"씁."
청년은 입맛을 다셨다. 스쳐지나가며 한 번 봤던 엘프의 아름다움이 머릿속에서 떠올라 잊혀지지 않았다.
마왕군은 그런 엘프들을 노예처럼 다룬다고 하더라. 한 명의 오크가 두 명의 엘프에게 목줄을 채워놓고 시가지를 활보하는 것은 예사 일이라고 하더라.
심지어 마왕군에게 점령당하는 영지민들의 경우, 노력에 따라서 엘프를 노예로 들일 수 있다더라.
이미 세상은 엘프들이 마왕군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마왕군의 노예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지만, 알게 되는 때가 너무 늦었다.
'나도 엘프랑 하고 싶기는 하다.'
엘프는 과연 어떤 느낌일까. 평범한 사람이랑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좋다고 하던데. 청년은 음습한 속마음을 달래며 코를 막았다.
"...어우, 계속 맡다가는 미쳐버리겠어."
로브를 벗을 수는 없다. 결국 청년은 근처 개울가에서 로브를 벗어 물에 한 번 씻어내기로 마음먹었다.
"이야...조디악 왕국 진짜 조졌다."
강물 위에도 죽은 시체들이 두둥실 떠내려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구더기가 끓는다거나 부패했다거나 그런 일 없이 죽은 상태 그대로 떠내려가고 있었으나, 이건 이거대로 또 무서웠다.
"저게 다 라스키토라는 거지. 으으."
청년은 품에서 지팡이 하나를 꺼내 물가에 꽂았다.
싸아아----
지팡이 근처로 마나가 펼쳐나가 결계를 만들어냈다. 지직거리는 전기가 반구형의 결계로 펼쳐졌고, 청년은 숨을 크게 고르고 검은 로브를 벗어 물에 집어넣었다.
키아아아악!!
물에 두둥실 떠내려가던 라스키토들이 기겁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민트초코로 흠뻑 젖은 검은 로브가 강물 속에 담기자, 라스키토는 강물에서 뛰쳐나와 이빨을 날카롭게 세웠다.
덜렁덜렁.
...송곳니도 세우고, 벗겨진 아랫도리에서 고간의 장침이 빳빳이 섰다.
"......이것만 빨고 가면 안 될까?"
키야아아악!
라스키토들이 모두 청년을 향해 괴성을 지르며 사납게 뛰어들다가 입을 쩍 벌리며 미친듯이 웃기 시작했다.
"동정!"
"동정!"
"""동정!!"""
"아오, 젠장 이 놈의 라스키토 놈들은 정도가 없나!!"
청년은 급히 정화된 강물에 로브를 벅벅 씻어냈고, 라스키토들은 전류가 흐르는 결계를 향해 달려들었다.
파지지직!!
"으아아악!!"
청년은 라스키토들이 결계를 부수기 전에 로브를 최대한 빨리 씻어냈다.
* * *
<수 시간 뒤, 조디악 왕국 왕도 오피큐스 인근 항구도시, 바너드.>
"라스키토는 여신께서 인류에게 내리신 재앙입니다!"
검은 로브를 입은 사내가 광장에서 사람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갑작스러운 말에 광장을 지나가던 이들은 모두 표정이 굳었다.
"나약한 인류가 새로운 존재로 나아가기 위해 여신께서 보내주신 힘입니다!"
"저 놈 잡아!!"
경비병들이 급히 달려와 분수대 위로 오른 사내를 붙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사내는 오히려 경비병을 제압하고 승리의 포효를 내질렀다.
"라스! 이제 인류는 마족을 배척해야 할 때가 아닙니다! 마족의 존재를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겁니다!"
"저 새끼 뭐야!"
"허, 헉! 푸른 사자 용병단의 부단장이다!!"
사내의 얼굴을 본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지금은 몰락한 용병단의 부단장, <푸른 늑대> 라이오니스 였다.
"여러분! 인류는 인정해야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마족들을 죽이고 핍박한 것에 여신께서 분노하셨음을!"
마나까지 목에 실어 내지르는 라이오니스의 말에 사람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광인의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명망있는 용병단의 부단장이 하는 말에 다들 '진짜 그런가?'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아, 여신께서는 인류에게 벌을 내리고 계신 겁니다! 인류가 지금까지 세상의 주인이라고 생각했던 것에 대해, 신벌을 내리고 계신 겁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
저벅, 저벅.
조디악 왕국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흑발의 여인이 분수대 앞까지 다가왔다. 엘프 뺨치는 아름다운 외모와 귀에 쏙쏙 들어박히는 목소리에 모두의 이목이 여인에게로 쏠렸다.
"근데 그런 말은 혼자 집에서 지껄이지 않겠어?"
쾅! 여인은 로브 아래에서 다리를 들어올리며 분수대를 걷어찼다. 검은 스타킹을 신은 그녀의 매끄러운 다리가 분수대에 닿자, 분수대에 흐르던 물이 하늘로 솟구쳤다.
"끄어어억!!"
치솟은 물줄기에 튕겨나간 라이오니스는 꼴사납게 바닥을 뒹굴었다. 여인은 손을 가볍게 털며 주변을 향해 소리질렀다.
"이딴 개소리 듣고 있을 시간에 집에 가서 돈이나 더 벌어!"
여인은 빽 소리를 지르고 인파 사이로 사라졌다. 순식간에 건물 지붕을 뛰어넘으며 사라진 여인은 골목 근처에서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하아, 하아. 젠장. 육지에서는 힘이...."
"끄어어어...."
골목길 구석에 갈색 머리칼의 청년이 죽어가는 목소리로 기고 있었다. 여인은 청년의 모습에 예의 라스키토 인 줄 알고 죽이려고 했으나, 청년이 짚고 있던 지팡이를 보고 입을 떡 벌렸다.
"피스케스?"
"드, 드디어 만났다...."
청년, 피스케스는 힘겹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쿠아리우스, 맞지? 당신의 협조가 필요해서 이렇게 찾아왔어."
피스케스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국은 멸망해야 해. 당신이 도와줘야겠어."
"...그게 용사로서 할 말인가?"
"당연하지. 성검의 용사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뭐겠어? 대마왕을 죽이는-"
"...그런 임무는 중요하지 않아. 성검은 그저 도구일 뿐이야."
"......그렇게 말할 줄 몰랐는 걸. 모처럼 당신을 찾아온 내가 무안해지잖아."
피스케스는 굳은 얼굴로
"왕국이 멸망해야 이 지옥같은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고."
"......."
뎅뎅뎅뎅뎅-----
경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적습경보!! 라스키토들이 나타났다------!!"
* * *
<항구도시 바너드 근처, 마왕군 집결지.>
"여기만 점령하면 이제 왕도는 끝이다."
펄럭, 펄럭. 나는 블랙 레이븐 다섯 마리가 날갯짓을 하는 공중택시 위에서 항구도시를 내려다봤다. 왕도 오피큐스로 통하는 거대한 운하의 끝에 위치한 도시로, 사실상 왕도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활로였다.
"주인님, 그러면 적이 도망칠 수 있는 모든 곳을 차단하는 거네요?"
"그래. 아아, 이것은 사면초가라고 하는 것이다."
지난 2개월. 우리는 레오 후작령을 중심으로 포위망을 구축했다. 우리 군단의 흡정귀들은 인간들의 틈바구니에 숨어 광역으로 피를 오염시켰고, 세상은 온통 흡정귀 밭이 되었다.
저들의 표현에 따라 <라스키토>라고 명명한 흡정귀들은 전염력과 성욕이 왕성했다. 흡혈귀들이 송곳니를 박아넣는 것 만으로 사람을 흡혈귀로 만들 듯, 라스키토들은 조디악 왕국 전체를 뒤덮었다.
성욕은 곧 식욕. 타인의 피를 오염시키지 않는 자, 먹지도 자지도 싸지도 못하게 되었다.
"죽은 라스키토들은 구울이 되어 병사로 활용하고, 살아남은 이들은 군단의 주민으로 활용한다. 크으, 완벽한 계획이로다."
인간들을 소모품으로 활용하는 건 나로서는 다소 껄끄러웠던 점이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더이상 인정을 베풀지 않았다.
'마르바스랑 떡치려면 어쩔 수 없지.'
던전 주인 5위에 빛나는 마르바스는 지금도 나를 지켜보고 있다. 바알의 부하들은 다른 제국이나 왕국들을 상대로 선전하고 있고, 마르바스 또한 조디악 왕국과 동맹인 왕국을 공격하여 원군이 오지 못하게 돕고 있다.
사실상 우리 군단만이 조디악 왕국을 상대할 수 있게 된 셈이고, 조디악 왕국을 점령함으로서 나는 군단의 힘을 널리 알릴 수 있다. 완벽한 승리를 위해 포위망의 마지막 매듭, 항구도시 버나드를 점령하러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왔다.
무려 3천.
대부분 죽은 라스키토 구울이라 Lv.30, ★★ 전후의 전력이지만 일반 보병으로 활용하기에는 충분한 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버프만 조금 넣어주면 ★★★급 화력도 낼 수 있었다.
"그래도 역시 인간들도 적응하는 생물이군. 다른 도시들이 라스키토에게 점령당하는 걸 보고 학습한 것 같아."
라스키토들이 항구도시를 포위하자마자 수비병들은 분주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모두 손에 횃불을 들고 있었고, 그들은 성벽을 향해 다가가는 라스키토들을 향해 불화살을 쏘고 기름을 뿌렸다.
키에에엑!!
라스키토들은 모두 불에 타죽어버렸다. 구울이 되기 전의 사인은 다들 '행복사'였으니, 이미 죽은 상태에서 움직이는 시체가 고통을 느낄 것도 없을 것이다.
"쉽게 쉽게 라스키토 만으로 이기려고 했는데 안되겠군. 륜, 그러면 슬슬 '본체'를 들고와라."
"진짜요? 이제 분신 생활 끝내도 되는 거예요?"
정령왕의 힘으로 물분신으로서 내 곁을 지키던 륜이 활짝 웃으며 반겼다. 나는 샤이탄이 보내준 던전 부하들의 정보를 읽고, 드디어 때가 왔음을 느꼈다.
"그래. 애들 거의 다 풀렙작도 슬슬 끝났는데 몰아쳐야지."
2개월.
우리는 라스키토를 세상에 풀어 조디악 왕국의 도시 9할을 점령함과 동시에, 대부분의 네임드급 부하들을 평균 85레벨 선까지 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죽은 수많은 네토라레우스와 페스니에에게 애도를. 나는 우리의 경험치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는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다른 놈들 던전은 과연 어떤 상태일까? 85레벨 이상 부하들이 500명 가까이 넘는다는게."
"글쎄요. 적어도 90레벨이 이렇게 많은 던전은 없지 않을까요?"
나의 수많은 여인들, 그리고 이름있는 부하들. 각지로 퍼진 네임드 부하들은 5성, 90레벨로서 소규모 중대를 이끌며 조디악 왕국 곳곳에 라스토피아의 깃발을 박아넣었다. 한 번 성장에 탄력을 받기 시작한 부하들은 이제 4~5성이 아닌 이들이 드물었다.
'죽으면 끝장이나 마찬가지지.'
부활에 필요한 마석은 상급-최상급. 따라서 죽지 않는 선에서 안정적으로 왕국을 점령해야만 했다.
왕도 오피큐스를 점령하기 위한 계책으로 '아사'를 노리는 것 또한 그런 이유였다. 괜히 갑자기 괴물이 튀어나와서 우리 군단을 휩쓸면 피해가 극심하니까.
'죽으면 분명 지옥가겠지.'
내 부하들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인간들을 라스키토로 만들어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라스토피아를 위하여."
잠시 뒤.
전이 포털을 통해 우리 군단의 정예'신'병들이 하나 둘 도착했다.
"그래도 역시 경험치 작업은 해야지."
핏빛처럼 붉은 머리칼을 찰랑거리는 엘프들을 향해, 나는 두 팔 벌려 환영했다.
"블러드 엘프 들이여, 어서오너라."
"군단을 위하여."
"""라스!!"""
피의 엘프.
우리 군단이 새롭게 만들어낸 엘프 병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