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3회
189일차
“아아, 이것은 자동사냥이라는 것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반자동사냥이지만요.”
물의 정령왕이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힘을 빌려줌에 따라, 우리는 아주 손쉽게 보스룸의 적들을 사냥할 수 있었다.
“물의 정령왕이 물속에서 놈들을 잡아당겨 질식시킨 다음, 산소부족으로 죽기 전에 푹찍. 그야말로 완벽한 계획이로군.”
“실제로 가능하게 하려다가 한 번은 물이 흘러넘치는 바람에 실패했었죠.”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지 않느냐? 흐흐, 나날이 지나갈수록 더 정교한 루틴이 만들어지는 셈이란다.”
“비효율적이지만 효율적인 공정을 찾아간다는 겁니까? 역시 주인님이십니다.”
보스룸 밖으로 물이 새어나오지 않도록 틀어막은 뒤에, 사람 키만큼 물을 집어넣으면 된다.
사람이 단번에 익사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서너시간이면 충분히 숨이 넘어가고도 남을 시간이다.
하루에 서브 던전은 단 세 번만 돌 수 있다.
즉 던전 진입~보스룸 클리어까지 일련의 과정이 여덟 시간 안에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3교대로 서브던전을 돌면서 레벨링을 할 수 있다.
“보스룸을 공략하기 어렵다면 그냥 앞에 있는 흡혈귀와 인간 병사들만 죽여도 충분해. 혹시 범람작전에 실패해서 놈들이 보스룸 밖으로 튀어나올 경우, 입구까지 전력으로 도망쳐도 된다고 전하라.”
“클리어는 실패하더라도 경험치는 온전히 남아있죠. 알겠습니다. 매뉴얼을 만들어 서브던전 입구에 붙여두겠습니다.”
이로써 나베리우스 서브 던전에 대한 추가 문제는 말끔히 해결되었다. 나머지는 이제 어떤 식으로 왕국을 공략하느냐.
“시간을 지체하면 다른 왕국에서 지원군을 보내겠지?”
“1군단이 돌아올 가능성도 있습니다.”
“왕성 내부에 산다는 괴물도 걱정이로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왕성 근처로 공병을 보내 수작을 부리는 것도 불가능할 겁니다. 이곳 요새가 무너진 이상, 적들은 이곳에 준하는 수비 체계를 편성할테니까요.”
이미 다른 부하들과 상의는 한 번씩 해봤지만, 그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구체적으로 작전을 세우는 것도 중요했다. 나는 지도 위에 우리가 위치한 호트로 요새를 가리켰다.
“우선 이곳을 제 2의 포트라스로 만들겠다.”
“명칭은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네오 포트라스? 아니면 뉴 포트라스?”
“무기라면 그냥 마크투라고 붙이면 되겠지만, 요새니까 그것도 어렵군. 쯧. 그럼 <라슬베니아>라고 하지.”
이름은 외우기 심플하게. 하지만 라스가 들어가게. 그리고 이름을 정하는데 굳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게.
“라슬베니아는 적들의 침입을 막는 천혜의 요새가 될 것이다.”
“군단의 주요 병력들이 이곳에 기거한다고 해도 수가 부족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샤이탄, 네가 제안한 방법을 사용하겠다.”
“......드디어.”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우리는 요새를 지킬 것이다.
“일단 저기 있는 병사들부터 처리하도록 하지.”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마침 하늘에는 여신이 나보고 승리를 하라고 속삭이는 듯한 은빛의 달이 걸려있었다.
“작전명 Z, 시작하지.”
야전의 시작이다.
***
“정말로 괜찮은 겁니까, 엑트라스 장군?”
“물론이오! 이 엑트라스, 요새의 탈환이라는 폐하의 엄명을 받고 이곳에 온 몸! 조디악 왕국의 명예를 위해 반드시 요새를 되찾을 것이오!”
엑트라스는 지휘봉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를 뒤따라 온 2천의 정예병은 힘없이 창을 치켜들었다.
“엑트라스 장군, 저희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정찰임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흥, 어리석군! 마왕군이 차지한 요새가 어디를 향해있는가! 레오 백작령을 향해 있지 않은가! 우리쪽으로는 요새가 아니라 뻥 뚫려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일세!”
엑트라스는 길게 다리로 이어진 요새의 끝을 가리켰다. 그의 말대로 왕국 방향의 요새 성벽은 반대쪽보다 훨씬 높이가 낮았다.
“잘 훈련된 기사라면 풀 플레이트를 입고 얼마든지 기어오를 수 있는 높이! 공성병기도 필요없으니, 이 얼마나 쉽단 말인가!”
“하지만 저들의 전투력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3군단이 전멸하지 않았습니까?”
“에에이, 그러니까 더더욱 싸워야 하는 것이다! 돌아가신 3왕자 님의 복수를 위해! 우오오오!!”
엑트라스는 한 번 더 지휘봉을 치켜들며 병사들의 사기를 고취시켰다. 실제로 의지가 올라간 건지, 병사들은 악다구니를 쓰며 함성을 질렀다.
우아아아아악-----!!
그것은 함성이 아닌 괴성이었다.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기 위한 자기암시였다.
“온다…!”
끼이익.
요새의 성문이 좌우로 열렸다. 스스로 성문을 연 적의 행동은 단 세 가지 뿐.
항복을 하거나, 전령을 보내거나, 그도 아니면 야전을 위해 병사를 내보내거나. 상대가 인간이라면 모를까, 항복이나 전령 따위를 위해 문을 연 것은 결코 아니었다.
크어어어-
“구울!!”
요새 안에서 꾸역꾸역 나온 갑옷의 괴인들은 구울이었다. 피골이 상접한 괴물들은 전부 사람마냥 왕국군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마법사들은 전방으로! 방패병 방패 세워! 궁병들은 놈들이 다리를 넘어오지 못하게 견제사격 개시!”
엑트라스의 지휘하에 병사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비록 2천이라는 적은 수였지만, 왕국 정예병은 체계적인 움직임으로 전열을 갖췄다.
“발사!!”
파바바박---!!
화살이 직선에 가깝게 날아갔다. 다리를 통해 넘어오는 구울들의 움직임은 몹시 느렸고, 구울 전체가 다리를 건너오기에는 다리의 폭도 좁았다.
크어어어.
구울들은 다리 옆으로 고꾸라졌다. 바닥에 쓰러진 구울들은 뒤에 넘어오는 구울들에게 짓밟혔고, 가에 있던 구울들은 안쪽 구울에게 밀려 다리에서 미끄러졌다.
“마법사들의 준비가 끝났습니다!”
“날려버려!”
휘이익---
마법병단의 지팡이에서 수많은 마법진이 생성되며 하늘로 마법이 날아올랐다. 불과 얼음과 뇌전과 석창이 뒤섞여 다리를 불태우고 얼리고 지지고 부셨다.
크어억.
당연히 구울들도 마법에 의해 무참히 파괴되었다. 무너지는 다리와 함께 폭사하는 구울들의 모습에 엑트라스는 의아함을 느꼈다.
‘이렇게 쉽게 무너질 리가 없는데.’
시간을 벌기 위한 용도인가, 아니면 왕국군의 전력을 확인하기 위한 정찰병인가. 엑트라스가 속으로 적의 의도를 파악하는 사이, 적의 움직임이 서서히 빨라지기 시작했다.
둥, 둥둥, 둥둥둥!
“장군! 예의 북소리입니다!!”
“큭, 전군 조심해라! 놈들의 움직임이 빨라진다!”
북소리가 울리자마자 구울들의 눈에서 붉은 안광이 빛났다. 사람처럼 걷던 구울들이 모두 짐승처럼 팔을 앞으로 떨구기 시작했다.
“장군, 저기 성벽 위에!!”
둥, 둥둥.
검은 로브의 거구가 자신조차 가릴 거대한 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소리와 함께 붉은 오라가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구울들의 몸놀림이 서서히 빨라지기 시작했다.
검은 로브의 거구가 양 손에 움켜쥔 북채를 동시에 북을 두드린 순간, 구울들의 움직임이 변했다.
키에에에엑!!
“온다!!”
구구구구. 구울들이 일제히 다리를 네 발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빠른 움직임에 병사들은 굳은 얼굴로 구울들을 맞이했다.
“물러서지마! 맞서 싸워! 놈들은 그저 시체에 지나지 않는다!”
“저들은 모두 왕국의 자랑스러운 병사들이었다! 시체를 능욕하는 마왕군에게 철퇴를! 저들에게 영원의 안식을!!”
“여신이시여! 죽은 자들을 보살펴 주시옵소서!!”
빨라진 구울들의 움직임에 병사들 또한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방패병들은 구울들이 넘어오지 못하게 다리 끝에 방패진을 쌓았고, 궁수와 마법사들이 원거리에서 구울들을 저지하거나 터뜨렸다.다리 앞까지 다가온 구울들은 금방 머리가 터져나가며 시체의 언덕이 쌓이기 시작했다.
캬아악!!
뒤에 있던 구울들이 시체 언덕을 발판삼아 높이 뛰어올랐다. 하지만 방패병 뒤에 대기하던 장창병들이 창을 높이 세워 구울의 심장을 꿰뚫었다.
전열은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구울들은 수가 무한이라도 되는 것처럼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쏟아졌다.
“이, 이런 젠장…!”
허세만 잔뜩 부리고 본디 정찰만 하고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생각보다 본격적인 전투의 발발에 엑트라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후퇴...해야하나?”
본대와 합류하여 전열을 가다듬어야겠다 생각을 한 순간.
“어, 어어, 어어어….?!?!”
“뭐가 그리 놀란, 이런 씨발.”
엑트라스는 요새 방향에서 벌어지는 일에 지휘봉을 떨어뜨렸다.
“오크가...마족들이 물위를 걷고 있어…?”
***
“으하하하!”
나는 할레오 색스를 들고 앞으로 달렸다. 내 뒤를 따라 달려오는 부하들 또한 물 위를 달렸다.
“정령들아, 던전에서 임신하기 싫으면 잘 지탱해라!”
[히이이익!!]
물의 정령들은 전력을 다해 물로 이루어진 발판을 지탱했다. 나는 정령들이 만든 발판을 뛰어넘으며 아무 방해없이 적의 앞에 도착했다.
“라슬베니아에 온 걸 환영한다, 이 작은 인간들아!”
쿵! 나는 할레오 색스를 앞으로 내리찍었다. 흙먼지가 사방으로 흩어지며 인간들의 시야를 교란했고, 나는 두 주먹을 앞으로 뻗어 방패병의 방패를 빼앗았다.
“앗?!”
“이제 이 방패는 내 거다!”
위이잉! 로도페리의 양날도끼에 깃든 할레오는 바로 방패로 몸을 옮겼다. 붉은 기운이 커다란 카이트실드에 깃들자마자 나는 다리에 힘을 주고 앞으로 달렸다.
“트럭 가즈아아아!!”
나는 카이트실드를 앞으로 세우고 막무가내로 앞으로 달렸다. 앞을 가로막는 것이 무엇이든, 감히 ‘할레오 실드’를 막아낼 수는 없었다.
“비켜----!!”
“저 미친 놈을 당장 막아!!”
병사들은 나를 억제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적의 최전방을 옆에서 밀고들어가는 내 돌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타도르가 내가 된다! 내 뒤를 따르라, 미.노.타.우.루.스!!”
“””끄어어엉!!”””
여섯 미노타우르스들이 중갑을 입고 내 뒤를 따라 달렸다. 성난 반인반수는 문신의 힘으로 붉게 물든 나를 뒤쫓아 마구잡이로 도끼를 휘둘렀다.
“미, 미친! 저거 다 뭐야?!”
“마검이다! 아니, 마부다!! 도끼에 다 마기가 깃들어있어!!”
당연히 그들이 쥔 무기도 할레오의 자식들이었다. 영입할 때부터 70레벨을 넘겼던 미노타우르스들은 최전선에서 싸우기에 최적화 되어있는 평균 85레벨로, 이제 어느덧 90레벨 언저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바로 나를.
“더, 더 달려!!”
“””끄어어엉!!”””
우리는 전차가 되었다. 투우 축제의 성난 황소를 막을 수 없듯이, 나와 여섯 미노타우르스는 다리를 막아선 병사들을 밀치고 짓밟아 반대편까지 통과했다.
덕분에 인간 병사들의 최전열은 좌우로 밀려나거나 으깨졌다. 반듯한 진형은 붕괴되었고, 다리를 벗어난 구울들은 하나 둘 인간 병사들을 향해 손톱을 휘둘렀다.
“이걸로 길이 열렸다! 구울들은 모두 전진!!”
나는 다시 물로 뛰어내렸다. 흥분한 미노타우르스들은 내 뒤를 따라 강물에 뛰어들었고, 물의 정령들의 마사지를 받으며 흥분을 가다듬었다.
“크헝, 흐어어….”
“잘 달렸다. 역시 최정예.”
“크흥. 군단을 위해서라면.”
나와 미노타우르스들은 구울들이 적에게 달라붙는 걸 보며 정령들의 인도에 몸을 맡겼다. 나는 나를 이끌어주는 물의 정령-돌고래 무리의 등을 토닥이며 치하했다.
“고마웠다. 답례로 네 계약자의 안에 마력을 집어넣어주마.”
[내 애들한테 이상한 소리하지 말고 올라와서 싸기나 해.]
물의 정령에게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곧장 성벽 위로 올라와 물의 정령을 부리는 금발 엘프의 허리를 휘감았다.
“고맙다, 루나.”
“흥. 로도페리 도끼나 주워와.”
“하서스가 가지러 갔으니까 괜찮다. 그보다...흐흐, 역시 정령왕을 빼낸 게 정답이었어.”
성벽 위에 선 금발의 엘프들은 모두 물의 정령을 다루며 구울들의 진격을 도왔다. 이전에 강물에 빠진 구울도 물정령 늑대의 등에 올라타 앞으로 달리며 인간 병사들을 덮쳤다.
“역시 왕이 있으면 좋다니까. 신하들이 알아서 다 명령을 따르잖아?”
“그래. 덕분에 물의 정령들은 이제 엘프의 친구가 아니게 되어버렸지만.”
“하이엘프 공주에게 물의 정령왕이 시녀로 붙어있는데 당연한 거 아니겠어?”
1인 1강제계약.
륜이 넵튜누스 피치에이드를 부하로 들임에 따라, 나는 그녀를 협박해 우리 군단의 엘프 전체와 계약을 맺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우리 엘프들은 피가 섞인 정도에 따라 다양한 정령을 부렸다.
쿠앤크 엘프와 같이 순혈 엘프일수록 고위 정령.
다크엘프, 그린엘프, 블러드 엘프 등 점점 여러 유전자가 뒤섞일 수록 하위 정령.
륜이 조금 고생을 하기는 했지만, 덕분에 우리의 엘프 전력은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되었다.
“슬슬 퍼질 때가 되었군.”
“인간들도 불쌍하네.”
“뭘. 군단에 검을 들이밀었는데 당연하지.”
으아아악!!
서서히 인간들의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루나의 가슴북을 두드리며 군단 전체에 버프를 걸었다.
“인간 놈들, 슬슬 알아차렸을까? 구울들의 송곳니가 유독 크고 우람하다는 걸.”
우리 군단에 새로이 추가된 힘은 정령만이 아니다.
“원래 흡혈귀나 구울이나 좀비나 다 물려서 전염되는 거지. 흐흐흐.”
저승에 있을 나베리우스에게.
"보고있나...나베리우스?"
나는 큼지막한 보름달 두 개를 올려다보며 눈을 감았다.
"마왕군을 위해 목숨을 다한 그를 생각하면, 눈에서 눈물이 흐를 것만 같구나!"
"자지에서 좆물이 흐르는 거 아니고?"
"크흠."
흡혈귀 웨이브로 왕국을 점령하려고 했던 나베리우스를 위하여, 나는 그를 기리는 마음에서 그의 책략을 벤치마킹 하기로 마음먹었다.
"무한히 늘어나거라, 흡혈귀들이여."
던전 정원에는 들어오지 않는 대량의 흡혈귀 부대. 나는 페트라누스와 나의 피가 섞이기 시작한 인간들을 위해 두 팔 벌려 환영했다.
"나베리우스여. 너는 훌륭한 군단장이었다. 네 의지는 내가 이어나가마."
X.
"그는 좋은 군단장이었지...."
나는 심심한 조의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