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9회
188일차
<그 시각, 정령계>.
여신이 주인인 천계가 있다. 이곳에는 수많은 천사들이 산다.
마왕이 주인인 마계가 있다. 이곳에는 수많은 마물들이 산다.
세계의 사이를 잇는 중간계가 있다. 이곳에는 수많은 종족이 산다.
그리고 어느 세계도 속하지 않는 중간계의 틈, 종족이 '정령'이외의 존재는 그 누구도 출입할 수 없는 '정령계'가 존재한다.
요정왕을 중심으로 한 페어리와 정령들이 살아가는 정령계는 중간계에 걸쳐있으면서 중간계와는 별개의 장소로 존재하는 곳이다.
정령계 또한 하나의 세계인 만큼 질서가 필요하다. 요정왕은 뒤에서 군림할 뿐 통치하지 않으며, 정령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건 요정왕의 힘을 이어받은 네 명의 정령왕이었다.
땅, 바람, 불, 그리고 물.
네 명의 정령왕은 정령들의 왕으로서 최선을 다해 질서를 유지했다. 하지만 격변하는 중간계의 상황에 정려왕들도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엘프가 마왕군에 붙은 것처럼, 정령들도 선택을 내려야했다.
조디악 왕국이라는 인류연합의 후방이 공격당한 것을 계기로 인류연합 최전선에 전력 공백이 생겨 승기를 잡은 마왕군의 편을 들 지.
아니면 아직까지도 수많은 맹장들과 실력자, 그리고 용사들이 살아남아 반격의 의지를 불태우는 인간들의 편을 들 지.
요정왕이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 방관자의 자리에 선 이상, 정령왕들은 선택을 해야만 했다.
"크하하! 전쟁이다! 모조리 불태워버리자!!"
적색 피부의 거인, 불의 정령왕은 몸에 달라붙은 불길을 활활 태우며 함성을 내질렀다. 어찌나 기세가 거친 지 지옥에서 소환된 악마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아, 안 돼.... 땅이 피로 물들 거라고."
화관을 쓴 갈색의 소년, 땅이 정령왕은 우울하지만 확고한 목소리로 상대의 의견을 반박했다. 서로 완벽한 의견 대립을 보인 불과 땅은 서로를 노려보며 언쟁을 시작했다.
"마왕군의 편에 서자! 어차피 인간들은 끝났어!"
"인간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마. 인간들은 언제 어디서 이상한 놈들이 나타날 지도 모르잖아."
"대세를 봐라, 대세를! 마왕군은 하루가 멀다하고 수가 늘어나는 것에 반해, 인간들이 죽어나가는 속도를! 마왕군의 번식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그건 당연한 거고.... 아무튼 안 돼. 땅을 멋대로 이계로 삼아버리는 짓은 더이상 용납할 수 없어. 마왕군은 마계로 돌아가야해."
의견이 완벽하게 갈렸다. 결국 둘은 자신의 의견을 지지해줄 존재가 필요했다.
"나는 몰라~"
옥색 머리칼의 페어리, 바람의 정령왕은 하품을 손으로 가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인간들이나 마왕군이나 다 똑같은 걸. 그쪽에서 정령계로 넘어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그냥 지켜보기만 하면 그만 아니야?"
"하지만...정령들이 던전 주인에게 붙잡히기라도 한다면?"
"그 때는 어쩔 수 없는 거지. 애들 매일 지상에 눌러앉고 싶다고 하더니 잘 됐네."
바람의 정령왕은 중립을 택했다. 결론이 나지 않자, 결국 셋은 몇 번이고 반복된 논의를 끝내줄 존재를 찾았다.
"물의 정령왕은?"
"몰라. 아까 나랑 있었는데 갑자기...."
두근, 두근. 갑작스런 마력의 흐름에 세 정령왕은 침을 꿀걱 삼켰다.
"물의 정령왕의 영압이...."
"사라졌어?"
정령계가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 * *
"흡혈귀 던전을 서브 던전으로 만들었다. 흐흐흐."
이걸로 고레벨 전용 던전이 생겼다. 지금까지 가장 레벨이 높았던 던전은 무조건 우리 군단의 주요 님읃들을 실력적으로 퇴화하게 만들 곳이었다.
"저레벨 안드라스 아무리 잡아봐야 레벨은 전혀 오르지 않지. 그에 비해 이놈들은-"
캬아아악!!
이지를 상실한 흡혈귀가 손가락만한 송곳니를 세우며 우리쪽으로 달려왔다. 나는 무기를 들어 적의 공격을 흘려냈고, 뒤에 있던 륜이 바람화살로 흡혁귀의 미간에 구멍을 뻥 뚫어버렸다.
"잘했다, 륜."
"주인님의 적을 쓰러뜨리는 일은 너무 당연한 거라 칭찬 받을 일도 아니에요. 히힛."
이제는 혼자서도 70레벨 흡혈귀를 거뜬히 제압하는 륜의 실력에 나는 우리 군단의 영원한 승리를 확신했다.
륜이 이만큼 강해졌다. 륜도 이만큼 강해졌다. 누구든 우리 군단에 들어오면 5성 만렙급 존재로 성장할 수 있다.
"그런데 생각보다 던전도 넓고 적도 많군. 우리는 아직 관문을 두 개 밖에 넘지 못했는데 말이야."
서브 던전은 원래 나베리웃 던전의 구조와 마찬가지로 일자형이었다. 안에는 침입자가 드나들지 못하도록 관문이 하나씩 박혀있었고, 우리는 관문을 지키는 흡혈귀 병사들을 상대로 무난히 경험치를 쌓았다.
"레벨 스케일링 하나는 기가 막히게 설게되었군. 륜, 조심해라. 이 놈이 블라드라고 하는 고위 흡혈귀다.
나는 륜에게 미간에 구멍이 뚫린 코볼트 흡혈귀를 가리켰다. 검치호만큼 두꺼운 송곳니를 손으로 뽑아내자 코볼트 흡혈귀는 검은 안개가 되어 서브던전 내의 벽으로 사라졌다.
"코볼트 치고는 엄청 강했어요."
"등급도 높고 던전 주인의 지원도 받았으니 고레벨이 되지 않으면 미안할 정도지."
나베리우스 던전은 '흡혈귀'라는 종족 하에 모두가 생긴 모습은 달라도 동료였다. 나는 나베리우스의 던전 운영 방식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라스 덕분에 이겼다.'
나베리우스와 나의 졀정적인 차이였다. 서로 같은 던전의 주인이며 군단의 주인이지만, 나베리우스는 복지를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덕분에 던전의 구조는 일직선으로 단조롭고 귀찮고 또 짜증만 날 뿐이었다.
"아무리 강한 흡혈귀라도 하더라도 확실히 해야할 건 해야지. 라스 차이."
"라스의 힘이란 건 정말 위대한 것 같아요."
"당연하지. 라스가 없었다면 우리 군단은 63위 안드라스에서 평생을 놀았을 거다. 흐흐흐."
오오, 라스. 그것은 위대한 의식. 나는 륜의 머리를 손으로 헝클이며 앞으로 전진했다.
"슬슬 하나 둘 나타날 때가 되었는데."
"주인님, 저기!!"
륜은 안쪽, 3번째 관문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나의 예상대로 지옥도가 펼쳐져있었다.
눈에 보이는 흡혈귀만 대략 40명.
지금까지 고블린 흡혈귀, 코볼트 흡혈귀, 놀 흡혈귀 등 마물 베이스의 흡혈귀들을 상대했다면, 지금 우리의 눈앞에는 새로운 흡혈귀들이 찰랑거리며 하늘을 날고 있었다.
"인간 흡혈귀."
"여, 여긴 어디야!!"
"크으으으,..!!"
흡혈귀가 된 인간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놈들은 모두 조디악 왕국의 갑옷을 입고 있었고, 어깨에는 '2군단'의 상징이 새겨져 있었다.
"어디냐고? 서브 던전이다. 분노의 군단 안에 만들어진 작은 경험치 파밍 던전이지."
"뭐...라고...?"
"너희들의 영혼은 이곳에 갇혔다는 말이다."
나는 나베리우스의 던전을 서브 던전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당시, 내가 일일이 세기 힘들 정도로 많은 2군단의 병사들과 정령들이 던전 안에 있었다.
'지금부터 하나하나 알아나가면 돼.'
얼마나 서브 던전 안에 들어왔는지 아는 방법은 단 하나 뿐. 나는 륜과 함께 무기를 움켜쥐었다.
"너희들의 영혼은 내 것이다!"
얌전히 서브 던전에서 우리의 경험치가 되어라.
* * *
"으아아악!!"
2왕자는 비명을 질렀다. 잘려진 한쪽 팔은 임시로 물의 정령왕이 마력을 이용해서 급히 지혈하고 치료했지만, 물의 정령왕은 팔을 치료하자마자 2왕자의 목을 졸랐다.
"뭐하는 거야!!"
[네 놈들 때문에, 네 놈들 때문에!! 이 더러운 인간놈들!! 죽여버려도 시원찮을 좆같은 인간 새끼들!!"
물의 정령왕은 악에 받친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너희들 때문에 여기에 갇혔어!! 나가는 방법이라고는 던전의 주인을 죽이는 것 하나밖에 없는 영원의 결계 속에!!]
"그, 그게 무슨 말이오...?"
방 안에 모인 2군단의 장군들은 입이 바싹 말라갔다. 유일하게 던전의 생리에 잘 알고 있는 자는 물의 정령왕이었고, 그는 패닉에 빠졌지만 현재 자신들이 닥친 상황에 진심으로 억울한 듯 바닥을 쾅쾅 발로 구르며 소리쳤다.
[이 던전에 영원히 갇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머저리들아!!]
"그,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가능하게 만든 게 마왕 솔로몬의 마법이다! 젠장, 정령계에서 이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정령이 던전에 갇힌 줄 알기나 해? 영혼을 묶어두는 마법이란 말이다!!]
"그 말대로."
끼이이익.
철문이 좌우로 열렸다. 통로 너머에는 전신에 피칠갑을 한 오크가 거대한 도끼를 든 채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번에도 흡혈귀는 아니군."
"뭐...?"
"저런, 문을 열고 이쪽으로 올 생각은 안했던가? 이 앞까지 흡혈귀들이 아주 판을 치고 있었단 말이지. 흡혈귀가 된 너희 병사들이."
오크는 철문을 팡팡 두드렸다. 그에 2왕자는 억울한 목소리로 외쳤다.
"열리지 않았다!!"
"당연하지. 이건 보스룸의 문이니까. 보스가 직접 문을 열고 던전 안을 방황한다니, 그런 개똥겜이 어디있겠냐. 크흐흐."
오크의 말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2군단의 장군들은 상황으로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열심히 해봐도 열리지 않던 문이 오크에 의해 열렸다. 정령왕의 말에 따르면 던전 주인을 죽여야 탈출할 수 있다.
"묻겠어요. 당신이 이 던전의 주인인가요?"
"크흡, 그래. 내가 이 던전의 주인이다. 나의 이름은-"
"알 필요 없어!!"
페스니에가 전방을 향해 스태프를 뻗었다.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나온 마력이 물의 늑대가 되어 오크를 덮쳤다.
"흥."
오크는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물의 늑대를 일격에 베어버렸다. 상급 정령의 목이 단번에 날아가자 페스니에는 몸을 비틀거렸다.
"윽...왜?"
페스니에의 눈이 물의 정령왕을 향해 돌아갔다. 정령계와 반쯤 걸쳐진 서클릿은 물의 정령을 다루는데 마력을 엄청나게 줄여줬고, 페스니에는 지금까지 하급 정령 수준의 마력을 소비하여 상급 정령을 다룰 수 있었다.
"왜 마력이 그대로 빠져?"
그걸 가능하게 해준 장본인이 물의 정령왕이었으나, 물의 정령왕의 도움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흐흐, 당연하지. 물의 정령왕도 지금은 그냥 한 명의 정령일 뿐이거든."
"그게 무슨 소리야?"
"이곳에 갇힌 시점에서 너희들은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는 거지."
오크는 비릿하게 웃었지만, 2군단의 장군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저, 정령왕께서 말씀하셨소! 던전 주인을 죽이면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고!!"
"아...그러셔?"
"네, 네 놈!!"
2왕자는 잘려나간 팔에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손은 이전과 다름없이, 오히려 더 단단하게 해머를 움켜쥐었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조디악 왕국의 2왕자, 네토라레우스의 이름을 걸고!!"
"""우오오오오!!"""
"야, 한창 기세 끌어올리는 중에 미안한데 말이다."
오크는 따분한 얼굴로 도끼를 빙빙 돌렸다.
"같은 말도 세 번 들으면 뇌절이란다."
"뭐-?"
"컷씬도 처음에나 전부 구경하지, 세 번째 되면 스킵이라 이거지."
흠칫. 물의 정령왕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오크는 물의 정령왕을 보며 활짝 미소지었다.
"아아, 이것은 '리젠'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루 세 번 뿐이지만. 오크는 중얼거리는 말과 함께 도끼를 냅다 집어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