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비만 오크-638화 (634/800)

638회

188일차

물의 정령왕, 넵튜뉴스는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지난 번에 그렇게 도망친 건 조금 추했지.'

아무리 강한 던전 주인이라고 한들 자신은 물의 정령 중 왕으로 불리우는 존재다. 비록 요정왕의 가호를 받고 있는 던전 주인이라고 해도 싸워서 이기지 못할 존재는 아니었다.

'그 인간한테 조금 미안하기는 하군.'

지난 번 계약자는 제법 만족스러웠다. 혼기가 다 찼음에도 불구하고 마법과 정령술을 연구하다가 좋은 사람을 놓쳐 혼자 술을 마시며 독수공방하는 것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계약자를 먼저 버리고 도망친 건 넵튜뉴스 본인이었다. 조잘거리기 좋아하는 정령들은 금세 소문을 퍼뜨렸고, 졸지에 넵튜뉴스는 정령들 사이에서 계약자를 아무렇게나 바꾸는 무책임한 정령으로 소문이 났다.

'나라도 살아야지!'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넵튜뉴스가 계약자를 버리고 튄 건 사실이니까. 요정왕의 가호와 물의 기억을 바탕으로 읽은 미래만 아니었다면, 넵튜뉴스는 그 자리에서 오크를 익사시켜 죽여버렸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번 계약자와는 잘 지내야 한다.'

정령은 단 한 명과 계약을 맺을 수 있다. 계약자를 잃은 넵튜뉴스는 정령계에 있다가 금방 부름을 받았다.

페스니에 커러프티션.

정령 친화력이 높은 그녀는 이전 계약자보다 마법적 재능은 낮았지만 대량의 정령을 다룰 수 있었다. 거인형 정령부터 물의 늑대, 거기에 소용돌이 정령까지 다루지 못하는 정령이 없었다.

"넵튜뉴스, 도와줘!"

[얼마든지. 소환사.]

이전 계약자와 달리 사근사근하고 친근감이 강한 것도 썩 마음에 든다. 너무 자신을 우러러 보는 것도 아니고, 마치 오랜 친구처럼 대하는 편안함에 넵튜뉴스는 안도했다.

'이 녀석이라면 분명-'

"던전, 진입합니다!!"

[뭐?]

넵튜뉴스는 흠칫 놀랐다. 설마 자신을 소환하여 힘을 빌리고자 하는 곳이 던전이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잠깐, 지금 던전을 공략하려고 하는 것인가?]

"응! 2군단이 나베리우스 던전을 공략하려고 하는 거야."

[위치는? 지도를 잠시 보여주겠나?]

"지도? 그야 어려울 건 없는데...."

페스니에는 부하에게 지도를 가져오게 시켰고, 넵튜뉴스는 바로 지도를 확인했다. 그들이 공략하고자 하는 나베리우스 던전이라는 곳은 자신이 죽을 뻔 했던 왕도와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다행이다. 그 놈들이 아니라서.'

짧은 기억이지만 분명 나베리우스라는 이름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넵튜뉴스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계약자와 계약자의 부군-2왕자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조심해요. 어디서 어떤 마물이 나올 지 모르는...이게 뭐지?"

던전 안에 들어가자마자 이상한 흔적을 발견했다. 본래 한쪽으로 꺾어들어가는 곳과 안쪽으로 들어가는 곳이 따로 있었는데, 이상하게 돌아가는 방으로 향하는 길이 막혀있었다.

"...! 장군들, 여기 보시오! 바닥에 무수히 많은 발자국이!!"

2왕자는 신성력으로 빛을 뿌리며 바닥의 발자국들을 가리켰다. 장군들은 급히 발바닥을 살폈다.

"말발굽...?"

"아니오. 앞꿈치와 뒷꿈치가 멀찍이 떨어져있는 것으로 보아 말은 아니오. 이건 분명 던전 내에 있는 별종의 마물이 분명하오."

"그런 것 치고는 보폭이 사람같지 않은가?"

"사람 발바닥이 이렇게 생기지는 않았잖소!"

장군들은 서로 생각을 주고받으며 발자국의 정체를 파악했다.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기에는 발자국의 수가 너무나도 많았다.

[짐작가는 것이라도 있나?]

"음...."

페스니에는 자신의 발을 한참 내려보다가 바닥의 발자국과 비교했다. 그리고는 입꼬리를 비틀며 피식 웃었다.

"힐 자국 같은데, 던전에 이런 힐 자국이 엄청 많은 게 말이 될 리가 없잖아. 그냥 특이한 변종 말일지도 몰라."

[그런가. 다행이군.]

넵튜뉴스는 물의 기억을 떠올렸다. 요새를 점령하고 인간들을 향해 다리를 벌리던 녹색의 엘프 군단은 힐과도 같은 군화를 신고 있었다.

"일단 계속 나아가자. 무슨 적이 나타나도 우리는...허어억!!"

2왕자는 망치를 들고 앞으로 나아가다가 비명을 질렀다. 그의 뒤를 따라온 병사들은 참혹한 현장에 입술을 벌벌 떨었다.

"누, 누가 이런 끔찍한 짓을!!"

"......."

벽에는 흡혈귀 고블린 하나가 머리만 빼꼼 내민채 벽 속에 박혀있었다. 송곳니가 뽑힌 흡혈 고블린은 눈에 안대가 씌워지고 입에 재갈이 물려있었다. 벌려진 입에서 침이 피와 함께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2왕자 님!! 안쪽에 더 있습니다!!"

앞쪽에 정찰을 나선 장군들은 수많은 흡혈귀들의 참혹한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하나같이 안대와 재갈이 물린 흡혈귀들은 빠져나올 수 없게 제대로 파묻혀 있었다.

[.......]

넵튜뉴스는 생각했다. 정말 이대로 안쪽으로 들어가는 게 맞는 선택인가? 그냥 하위 정령들에게 모든 걸 맡기고 자신은 정령계에서 정령들을 더 만드는 것이 좋은 선택이 아닐까?

'던전 안으로 더 들어가는 건 나도 위험한데.'

던전은 마왕의 영역이다. 요정왕조차도 한 때 던전에 갇혀 강제로 마왕의 자식을 낳아야 했던 적이 있었는데, 정령왕이라고 오죽하겠는가?

'그래도 별 일 없겠지?'

요정왕의 가호를 받은 그 자만 아니면 된다. 안쪽에서 혹시나 뭔가 느껴지나 싶어 마력을 앞으로 뻗어봤지만, 송곳니를 뽑히는 고통에 괴로워하는 흡혈귀들의 흔적만 느껴질 뿐이었다.

'설마 무슨 일 있겠어?'

라고, 생각한 순간.

"으아아악!!!"

던전의 입구 쪽에서 비명이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 * *

모든 던전에는 비밀 기믹이 존재한다.

과거 안드라스 던전에서 원형의 긴 통로를 지나 천장의 비밀통로로 빠져나왔던 것처럼, 직선 통로형 던전은 안쪽에서만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환풍구 같은 통로를 만들어놓기 마련이다.

"모두, 준비됐냐?"

나는 선두에 서서 뒤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 샤이탄이 지원을 보낸 그린엘프(적안) 부대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빠져나온 절벽 아래에는 수많은 인간 병사들이 사주경계를 하며 던전 앞을 지키고 있었다.

던전에 들어간 수많은 침입자들 이외에 던전 앞을 지키고 있는 일반병사들이었다. 분명 나베리우스의 소수정예 흡혈귀들을 상대로 평균 70레벨 이상의 존재들만 꾸린 게 틀림없었다.

'우리가 가야할 곳은 저들의 한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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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입구 방향으로 뛰어들어가 포털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야했다. 문제는 그곳이 적의 병사들의 중간을 정확히 파고드는 곳이며, 최악의 경우 포털이 열린 곳까지 닿기도 전에 양옆으로 쌈싸먹힐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니 내가 선두에 선다.'

나는 할레오 색스를 움켜쥐었다. 그린엘프들 모두 몸으로 상대했던 나베리우스 전과는 달리, 다들 무기를 들어올리며 진짜로 싸울 준비를 마쳤다.

"하서스와 라스투자드에게 전하라. 후미는 맡기겠다고."

"라스."

전령이 떠나기 무섭게 나는 앞으로 뛰어내렸다. 몇몇 눈치 빠른 놈들이 나를 올려다보며 눈이 휘둥그레졌고, 나는 그들이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할레오 색스를 높이 치켜들며 아래를 향해 내리찍었다.

"색스 나가신다!!"

콰----앙!!

땅이 크게 흔들리고 거대한 흙먼지가 일어났다. 내 전신의 무게를 실은 내려찍기에 병사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꺄아아악!!"

그린엘프들은 비명을 지르며 절벽 위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그리 높은 절벽은 아니라 위에서 덮치기에 아주 적절한 높이였고, 그린엘프들은 병사들의 얼굴에 정확히 착지했다. 목마의 방향이 반대가 되는, 고간부가 병사의 얼굴을 향하는 방향으로.

"이런 미친-"

푹---!!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그린엘프들은 정확히 단검을 뒷덜미에 찔러넣었다. 단검은 날카로운 송곳니가 되어 병사들의 목을 찔렀고, 나는 할레오 색스를 수습해 던전 안으로 달렸다.

<알림> 던전 최심부에 적이 도달했습니다!!

"그 딴 거 알아!"

나는 전력으로 앞으로 달려나갔다. 중간중간 설치된 마법함정을 짓밟아, 입구쪽으로 향하는 삼거리의 앞을 틀어막았다.

타다다닥!!

"라스!" "라스!" "라스!"

근접 무기를 든 그린엘프 병사들은 입술을 깨물며 통로를 달렸다. 그들은 나를 향해 응원밖에 할 수 없었으나, 그것만으로도 나는 책임과 긍지라는 버프가 생겨났다.

"군단장님!! 돕겠습니다!"

"오냐! 뒤에서 지원사격을 해라!"

활 등의 원거리 무기를 든 그린엘프들은 내 옆으로 늘어서며 방어선을 구축했다. 통로가 좁아 서너 명 밖에 설 수 없었지만, 그것만으로 마음이 든든했다.

"입구쪽은?!"

"하서스님과 라스투자드 님께서 막고계셔요!"

던전 안쪽, 5성의 강자들은 내가 앞에서 틀어막는다. 그리고 우리 병사들의 후미에는 구울 콤비가 인간들을 받아내며 서서히 후퇴할 것이다.

"라, 라스!!"

우리 군단에 항복한 흡혈귀들은 등 뒤에 한아름 보따리를 들고 있었다. 검은 보따리는 당연히 그린엘프들이 벗은 스타킹이었고, 안에는 블랙잭 마냥 금은보화와 마석이 가득했다. 중간중간 찢어진 스타킹 구멍 사이로 마석이 흘러내렸지만, 나는 눈물을 머금고 그들을 포털 방향으로 가리켰다.

"달려!!"

"""라스!!"""

흡혈귀들은 보물들을 챙겨 달렸다. 저 보물만 없었다면 그냥 도망만 쳤으면 되었겠지만, 저걸 놓치면 분명 통한의 눈물을 흘릴 게 분명했다.

"우오오오오!!"

통로 맞은 편에서 왠 미친 놈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놈의 정보를 시스템으로 확인했다.

[네토라레우스 폰 오피큐스], ★★★★★, Lv.100

"이런 미친!!"

왕국의 군단장들은 전부 괴물인가. 나는 내 할레오 색스에 버금가는 거대한 망치를 든 2왕자를 향해 전력으로 레오를 휘둘렀다.

"뿌! 뿌! 뿡!"

가벼운 기합과 함께 앞으로 발걸음을 내딛으며 망치를 후려쳤다. 여차하면 도끼날로 벨 생각으로 휘둘렀건만, 도끼는 튕겨나갈 뿐 아무런 피해도 없었다.

"역시 만렙!"

"죽어라, 오크!"

2왕자는 몸을 빙빙 돌리며 휠윈드를 돌기 시작했다. 좁은 던전 통로에서 빙글빙글 도는 휠윈드는 동굴 벽에 닿았음에도 벽을 망치로 깎으며 우리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활!"

나는 할레오 색스를 앞에 두고 옆의 그린엘프에게서 활을 건네받았다. 붉은 오라가 활에 깃들어 곧장 마궁이 되었고, 나는 붉은 화살을 망치의 아래로 쐈다.

"특등사수의 힘을 보여주마!!"

나는 집중하자마자 활시위를 놓았다. 붉은 오라의 화살은 빛처럼 날아갔고, 앞으로 돌아가는 해머의 아래를 스치듯 지나갔다.

"나이스!"

화살이 노리는 곳은 당연히 남자의 급소. 나는 륜과 루나에게 배운대로 정확히 저격했다. 마궁에 깃든 레오의 버프도 한 몫했다.

하지만 상대도 마냥 만렙을 도박으로 따낸 건 아니었다.

"크오오!"

쿵! 해머를 벽에 휘둘러 내던지듯 튕긴 그는 반탄력과 관성을 이용해 몸을 살짝 붕 띄웠다. 덕분에 내 화살은 그의 고간 아래를 스치듯 지나갔다.

"아오, 씁!"

회심의 일격이 무위로 돌아갔다. 2왕자는 자신이 고자가 될 뻔 했다는 것에 사색이 되어 나를 노려봤고, 뒤에서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당신!! 저 미친 오크가! 어디서 남의 남편을 불구로 만들려고!!"

"오, 아내라고?"

새끈한 푸른 머리칼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척보기에도 물이 줄줄 흘러나올 것 같은 여인은 금발벽안의 성기사와 찰떡궁합이긴 했다.

[조심하라, 소환사여! 적은-]

"어?! 우리 구면 아니냐!!"

나는 멀찍이 다가오는 인간형 물의 정령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실제 인간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건 처음 보지만, 나는 시스템을 통해 그녀의 정체를 바로 파악했다.

[물의 정령왕 넵튜뉴스], ★★★★★☆, Lv.100.

"우리 인연이 참 깊구나!"

[으, 으아악!!]

물의 정령왕은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몸을 터뜨렸다. 이전에 봤던 것처럼 정령계로 도망치려고 한 듯 보였지만, 물방울이 된 몸이 여인-페스니에라는 정령사의 서클릿 안으로 스며들어갔다.

"오, 거기 갇혔어?"

[분노의 주인이시여!]

뒤에서 하서스와 라스투자드가 통로를 달리고 있었다. 나는 할레오와 내게 활을 준 그린엘프를 들고 곧장 뒤로 돌아 둘의 뒤를 따라 달렸다.

"우오오오오!!"

"쪼, 쫓아라!!"

밖에서 들어온 입구 방향에서 수많은 병사들이 따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문신의 힘까지 전력으로 활용해 앞으로 달렸다.

"젠장, 넷 다 든다!!"

하서스에게 할레오를 들게 하여 내 어깨에 올리고, 라스투자드의 로브 후드를 낚아챘다. 살짝 놓은 그린엘프는 로브를 벗어던지며 몸을 가벼이한 다음 앞을 향해 달렸다.

"크오오오!!"

나는 눈앞에 흔들리는 엉덩이를 따라 달렸다. 우리 앞에 놓인 포털을 향해 라스투자드를 집어던지고, 하서스에게서 할레오 색스를 돌려받아 하서스를 집어넣었다.

쿵!

멀리서 날아온 거대 망치에 나는 손이 다 저릿했다. 2왕자는 시뻘게진 얼굴로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우리 싸움은 앞으로 계속 될 거다, 인간 성기사."

나는 등 뒤로 몸을 눕혔다. 그리고 포털을 넘어오자마자 시스템을 열었다.

<쟁탈전> '나베리우스' 던전을 서브 던전으로 등록하시겠습니까?

"예."

딸칵. 나는 내 손에 쥐여진 물건을 보지도 않고 벽에다 박아넣었다.

새애액-!!

"큭!"

포털 너머로 성기사의 손이 뻗어나왔으나, 곧 포털은 보라색 안개를 흩뿌리며 사라졌다.

툭.

내 발치에는 성기사, 2왕자의 잘려진 팔이 떨어졌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주저앉았다.

"지렸다...."

나는 내 오른쪽에 설치된 서브던전의 출입문을 보며 대자로 누워버렸다.

"경험치 파밍 개꿀."

흡혈귀 던전이 될 지, 물의 정령 던전이 될 지, 인간들의 던전이 될 지.

"주인님!!"

나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안도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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