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비만 오크-633화 (629/800)

633회

186일차

용사에게는 다음 성검의 용사를 찾아야 할 의무가 있다.

에일라 아리에스는 트랄 타우러스를 찾았다. 정확히는 에일라의 선친이 트랄이 타우러스가 되도록 인도했다.

메어리 비르고는 성검 리브라의 위치를 알려줬다. 버지니움 실드를 절반이나 상시전개하면서까지 방향을 알렸고, 트랄 일행은 성검 리브라의 용사를 찾았다.

그리고 이어진 차례는 미르망의 차례.

사수좌의 사지타리우스는 염소좌의 카프리콘을 찾아야했다. 미르망에게는 아주 오래 전부터 여신의 임무가 주어졌지만, 자지에 허덕이느라 임무를 내팽겨치고 있었다.

‘솔직히 안 해도 상관없지만.’

용사가 꼭 여신의 임무를 따라야 하는가? 그건 아니다. 내게도 여신의 ‘임무’가 주어져있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여신의 부탁일 뿐 꼭 해야하는 일은 아니다.

따라서 원래라면 미르망에게 다음 용사를 찾으라고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필요는 언제든지 생기기 마련이고, 나는 갑자기 용사들이 전선에서 이탈하는 기적을 그리기 위해 미르망을 ‘자간 던전’으로 보냈다.

‘아리에스 영지에 있는 자간 던전에서  나온 뒤, 트랄에게 내 편지를 건네다오.’

나는 미르망에게 편지를 줬다. 편지 내용을 살펴본 그녀는 정체모를 음흉한 미소와 함께 내 자지에 출장키스를 남기고 떠났다.

카프리콘의 용사를 찾을 때까지 미르망은 용사 <마망>으로 트랄을 도울 것이다.

'그럼 이제 내가 움직일 차례.'

원군. 병 주고 약 주고.

나는 탐욕의 군단을 상대하기 위한 원군으로 세 명을 보냈고, 다시 탐욕의 군단에 원군으로  세 명을 보냈다.

나, 하서스, 라스투자드.

‘수비에 딱 세 명만 있으면 돼.’

적 군단의 병사들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이 셋만 있으면 충분하다. 나머지 필요한 병사들은 현지에서 조달하면 된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 적의 전력을 알고 나를 알면 질 이유가 없지.”

적의 전력은 3군단과 비슷했다. 내가 보냈던 용사 셋은 적의 정보를 엄청나게 많이 수집하여 가져왔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나는 언데드 둘과 나만 포털을 넘어왔다.

내가 모르는 정보가 있다면 우군, 그러니까 나베리우스 던전의 상태.

“야, 순순히 병력 구성표 내놔.”

“...믿어도 되지?”

“물론.”

“진짜, 진짜 배신 안 할 거지?”

“당연하지. 우리는 같은 마왕군의 군단이 아닌가? 나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마. 나는 너를 돕기 위해 이곳에 왔노라.”

한참을 망설이던 나베리우스는 그제서야 내게 던전의 정보를 공유했다. 양피지에 피로 쓴 던전의 정보는-

“이 년! 보고가 글러먹었어!”

“히익?!”

양피지 위에 적힌 문구는 악필에다가 글자체가 일정치 못했다. 무엇보다도 <핏빛 하늘이 물드는 밤, 고귀한 혈통을 가진 주인>이라는 흡혈귀 식의 문구는 내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던전에 있는 모든 병사들을 시스템이 정리해주는대로, 이름, 종족, 등급, 레벨 순으로 정리해서 가져와! 씨발, 지금 나보고 이걸 어떻게 보라고!”

“이걸...못 읽는다고? 왜?”

“다시 정리해온다, 실시!!”

“진짜 왜 저러는 거야…?”

나베리우스는 투덜거리며 새로운 양피지에 붉은 깃털펜을 끄적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마왕의 기적을 통해 내게 불만은 가지고 있어도 순순히 내 지시에 따르기는 했다.

“거기, 너! 코볼트 뱀파이어냐? 아래에 던전 약도를 그려봐라.”

“야, 약도요?”

나베리우스가 말한 간부급 코볼트는 머리를 조아리며 내 앞에 섰다. 나는 놈에게 나뭇가지 하나를 쥐어주며 흙바닥을 가리켰다.

“그래. 던전의 구조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알아야 싸울 거 아냐?”

“아, 알겠습니다.”

코볼트 뱀파이어는 바닥에 열심히 낑낑거리며 그림을 그렸지만-

“이런 썩을! 네 그림은 어린 아이도 보고 자기가 세계 최고 화가라고 생각할 정도로 난잡하다! 용사가 이걸 보고 간다면 혼란에 걸려서 인류연합을 배신하겠구나!”

“그, 그런…. 다, 다시 그릴까요?”

“젠장, 됐다. 어차피 대충 봐도 알 구조니.”

입구부터 일곱 개의 관문으로 이어진 일직선 구조.

쟁탈전의 포털이 열린 위치는 최초의 관문에서 두 개로 나뉘는 갈림길 중 하나로, 한 쪽에는 우리 던전으로 통하는 포털이 있고 반대쪽에는 바깥과 연결된 포털이 있다.

‘이거 잘못하다가는 우리 쪽으로 역류하겠는데?’

만약 적 병사들이 방향을 오른쪽으로 꺾으면 나베리우스 던전 안으로 들어오지만, 왼쪽으로 꺾으면 내 던전으로 향하게 된다.

‘다행히 아직 포털 방향이 바뀌려면 시간은 남아있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충분하다면 나머지는 적의 공격을 막아내고 최대한 빨리 전멸시키는 것 뿐.

“자, 여기있어.”

마침 나베리우스는 자신의 던전에 있는 병사들의 상태를 목록으로 정리해서 건넸다. 나는 다른 것보다 정원이 고작 ‘121’명 밖에 되지 않는 것에 놀랐다.

“너 C등급 던전 특성 뭐 찍었냐?”

“그, 그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

“그냥 궁금해서. 나는 정원 300까지 늘리는 거 찍거든.”

무조건 인원 수를 늘리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만, 나베리우스의 던전 운영은 조금 달랐다.

“정원을 뭐하러 늘려? 우리는 뱀파이어라서 상대의 목에 피를 박아넣으면 바로 흡혈귀로 만들 수 있는데.”

“오호. 그건 꽤 좋군.”

혹시나 싶어서 언데드 둘을 데려온 것이 천만다행이다. 그리고 나 또한 나베리우스의 수작에 당하지 않게 된 것이 다행이었다.

‘내가 흡혈귀가 될 수 없어.’

나베리우스가 감히 나를 배신하여 내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아넣는 순간, 나베리우스는 죽는다. 나는 미리 온갖 준비를 하고 던전으로 넘어왔다.

나의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자위수단도, 나의 적을 모조리 학살할 수 있는 수단도.

“나베리우스. 너희 던전에 있는 모든 부하들은 ‘흡혈귀’다. 맞지?”

“당연하지. 원래 종족은 다 다를 지 몰라도, 전부 내게 종속되어 있는 애들인 걸.”

“그럼 방법은 간단하다. 그냥 들어오는 적을 상대로 꼴아박으면 된다.”

압도적인 힘으로. 내 제안에 나베리우스는 입꼬리를 비틀며 나를 비웃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집어치워. 그런게 어떻게 가능하다는 거야?”

“말이 되고 안 되고는 내가 판단한다. 너는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돼. 하서스!”

나는 내 팔을 옆으로 뻗었다. 팔에 힘을 주어 힘줄이 돋아나게 만들었고, 하서스는 날카로운 검을 들어올려 내 팔에 긴 상처를 만들었다.

“라스투자드, 받아라.”

[위대하신 주인의 명을 받듭니다.]

라스투자드는 내가 흘리는 피 아래에 흑마법을 이용하여 뼈로 만들어진 성배를 만들었다.

성배의 가운데에는 내가 흘린 피가 흘러내렸고, 나베리우스는 성배에 담긴 피를 바라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부어 먹…아니, 마셔라. 나베리우스.”

“이, 이걸 마시라고?”

“그럼 당연하지. 너, 내가 어떻게 우리 군단에게 버프를 주는지 아느냐?”

나는 내가 우리 군단에게 힘을 주는 원리를 설명했다.

직접 하서스와 라스투자드에게 혈류가속의 힘을 보여주기도 했고, 그러고나서야 나베리우스는 나를 어느정도 믿기 시작했다.

“의심되는데…..”

“꼬우면 마시지 말던가.”

“그런 건 아니야. ...짜식, 그래도 같은 군단장이라고 도와주는 거 봐라. ...피에 다가 이상한 짓 한 거 아니지?”

나베리우스는 뼈성배를 들어올리며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나는 입꼬리를 비틀어 허리를 두 어번 앞 뒤로 흔들었다.

“이상한 짓 해줄까? 이참에 정액 섞인 피는 어때?”

“이상한 소리 하지마. ...꿀꺽.”

나베리우스는 피를 마셨다. 부하들을 배려하여 한 모금만 마셨고, 나는 바로 손등을 두드렸다.

고오오.

할레오 색스를 통해 퍼져나가는 나의 오라가 가장 먼저 나베리우스에게 깃들었다. 입술에 붉은 피를 번들거리는 나베리우스의 눈동자에서 붉은 안개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흐응...이런 식이구나...피를 들끓게 해서, 하아. ...대단한데?”

“당연히 대단하지. 자, 그러면 이제 내가 꼬라박으라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끄덕. 나베리우스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뼈성배에 직접 손을 집어넣어, 자신의 부하들에게 튕겼다.

“다들 마셔. 그리고 마신 피를 심장에 넣고 전신에 순환시켜. 그러면 금방 저 녀석의 오라를 받을 수 있을 거야.”

나베리우스가 부하들에게 일일이 나의 피를 주입하는 사이, 나는 상처를 회복시키고 뒤로 물러섰다.

[괜찮으십니까?]

“물론. 승리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라스투자드여, 천리안의 마법을 사용하도록 해라. 우리는 이제 사흘 동안 여기 앉아서 구경이나 하면 된다.”

탐욕의 흡혈귀들이 승리하든, 인간 병사들이 우리가 있는 곳까지 들어오든, 어느쪽이든 이미 승리는 확정되었다.

내가 할 일은 앉아서 배북이나 두드리는 것 뿐.

[군단의 주인이시여, 이번 작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이름? 아아, 그것은….”

***

둥, 둥둥, 둥둥둥.

던전 안쪽에서 북소리같은 메아리가 울려퍼졌다.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소리에 네토라레우스를 비롯한 인간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소리는 설마…?”

“아무래도 마왕군끼리 동맹을 맺은 것 같습니다.”

“레오 후작령을 점령했다고 하는 마왕군의 북소리가 틀림없습니다. 북소리를 들은 마물들은 하나같이 성난 들개처럼 날뛴다고 하더군요.”

2왕자 일행은 던전 내부의 어둠을 밝히며 신중히 앞으로 나아갔다. 직선 통로에는 온갖 함정이 설치되어있었고, 2군단 내에 소속된 다양한 전사와 기사들의 도움을 받아 역경을 하나씩 헤쳐나갔다.

첫 번째 관문에서 그들을 맞이하던 코볼트 뱀파이어부터 시작하여, 블러드 골렘에 거대흡혈충까지 모두 손쉽게 사냥할 수 있었다.

“이대로 가면 우리의 승리….”

짝.

2왕자는 볼 근처에서 느껴진 미약한 가려움에 뺨을 때렸다. 손바닥에는 손톱보다 작은 크기의 모기가 피가 터진 채 죽어있었다.

“쯧. 신관 있나?”

“여기있습니다.”

“모기에 물린 상처를 즉시 신성려으로 치료해주시게. 흡혈귀 던전에서 모기에 물린 게 계기가 될 수 있으니.”

“알겠습니다. 여신의 이름으로.”

소규모 모기들을 이용한 함정은 신성력 앞에 무력화되었다. 2왕자 일행은 무리없이 던전 안쪽으로 나아갔고, 마침내 제법 넓은 공터에서 옹기종기 모여있는 50명 가량의 뱀파이어들을 발견했다.

“하하하! 여기에 흡혈귀들이 모여있군. 다 함께 죽고싶어서 모인 건가?”

2왕자는 거대한 해머를 들어올렸다. 단단한 갑주를 입은 그의 손에는 신성력이 반짝이기 시작했고, 뱀파이어들은 흠칫거리며 나서서 공격하기를 주저했다.

“인간성기사, 네토라레우스! 조디악 왕국의 2왕자이자 2군단의 군단장으로서 너희들을 여신과 국왕폐하의 이름으로 용서하지 않겠다!!”

철컹!

2왕자의 주변에 선 주요 장군들이 하나둘 각자의 무기를 들어올리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눈앞을 가로막은 뱀파이어 무리들은 수만 많을 뿐 딱히 강해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예상도 잠시.

둥, 둥둥, 둥둥!

안쪽에서 배북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고, 붉은 안개가 흡혈귀들의 눈과 귀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이미 붉은 안광의 흡혈귀들은 눈빛이 핏빛으로 물들었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날카로운 손톱을 들어올렸다.

“건방진 인간 놈들아, 잘 들어라!!”

뱀파이어들의 가운데에서 검은 망토의 여인이 나서서 인간들을 향해 지팡이를 뻗었다. 날카로운 짐승의 송곳니가 주렁저렁 매달린 지팡이 끝에는 인간의 두개골이 달려있었다.

“내 이름은 나베리우스! 너희들이 감히 멋대로 발을 들인 이 던전의 주인! 나는 너희들을 순순히 살려보내지 않겠다! 흡혈귀로 만들어 충실한 나의 부하로 만들어주마!!”

“해볼테면 해봐라, 더러운 마왕군이여! 여신께서 우리를 굽어살펴 주신다!!”

위이잉. 인간 병사들의 몸에 은빛의 신성력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마왕군의 몸도 붉은 오라를 뿜어내며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인간 놈들의 목에 송곳니를 박아넣어! 놈들은 세뇌해서 밤의 노예로 만드는 거다!!"

"물러서지마라! 저 놈들이 밖에서 활개치고 다니게 내버려두면 분명 대성벽이 마족들에게 다시 점령될 것이다! 이 기회에 뿌리를 뽑고 박멸해야해!"

"해 볼 수 있으면 해보라지!"

와아아아아!

캬아아악!!

신성력의 기운을 받은 인간들과 피의 가호를 받은 탐욕의 군단 병사들간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아아, 이번 작전의 이름은 <오염된 피>라고 하는 것이다."

미약에 오염된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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