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2회
186일차
원군을 보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단연코 ‘신속성’일 것이다.
원군이라함은 결국 동맹이 위기에 처한 순간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는 군대이며, 대부분 원군을 보내는 시점에는 이미 전황이 몹시 불리해져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원군은 신속해야한다.
괜히 늦게 원군을 파견했다가 적이 세력을 점령하고 황폐화 해놓으면, 결국 원군을 보낸 건 이도 저도 아니게 되기 마련.
“축하한다, 마르코시아스.”
나는 감옥의 문을 열었다. 마르코시아스는 내가 자신을 찾은 것에 순순히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었다.
“드디어.”
“그래. 죽음이다.”
나는 할레오를 높이 치켜들었다. 던전 주인에 대한 최대한의 예우를 하기 위해, 나는 그녀의 목을 향해 할레오를 겨눴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반드시 끝까지 올라가라.”
나를 향해 저주를 퍼부을 거라고 생각했던 마르코시아스는 생각외의 말을 내게 건넸다. 눈에는 여전히 분노와 증오가 이글거리지만, 그녀가 한 말은 결코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너는 반드시 1위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내가 패배한 게 당연한 것이 돼.”
“하하하! 정신승리를 하겠다는 것이냐? 귀엽군.”
토너먼트 대회에서 16강에서 나에게 패배를 안겨준 상대가 우승했다면, 사실상 명예로운 패배를 했다는 셈이었다.
"최소한 내가 죽어서 남들에게 얘기할 때 자랑이라도 하게 해줘라...! 바알이 될 놈에게 살해당했다고!"
"저런. 나는 바알이 아니라 마왕이 될 몸이다."
"......큭, 흐흐, 흐."
마르코시아스의 말은 결과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었지만, 나는 빠른 원군 파병을 위해 그녀를 자유의 몸으로 만들었다.
“다시 태어나면 순순히 우리 군단의 부하가 되어라.”
서걱.
마르코시아스의 목이 하늘로 솟구쳤다.
<알림> 쟁탈전, 승리!
쟁탈전의 종료를 알리는 시스템창이 떠오름과 동시에, 나는 바로 알림창을 꺼버리고 새로운 창을 열었다. 마르코시아스 던전은 곧장 우리 던전의 멀티가 되었고, 나는 예전부터 미리 준비했던 작업을 저질렀다.
“쟁탈전을 건다.”
상대, 나베리우스.
위이잉.
포털이 열렸다. 내 예상대로 마르코시아스 던전과 이어져있던 포털이 다시 열렸다. 위치는 똑같지만 넘어가면 전혀 다른 곳이고, 한 번 넘어가면 사흘 동안 돌아올 수 없다.
"누가가랴."
나는 나베리우스를 향해 열린 포털을 바라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씨발, 내가 아니면 누가가리. 샤이탄! 뒷 일은 맡긴다.”
"부디 몸조심하시길."
마왕군의 대의를 위해, 나는 나베리우스 던전으로 향하는 포털을 넘었다. 안에는 온갖 종류의 흡혈귀들이 박쥐마냥 모여 나를 향해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이열, 누가 보면 내가 너희를 죽이러 온 줄 알겠어."
"넌 뭐하는 새끼야?! 정체를 밝혀라!!"
"건방진 입을 놀리는 것도 거기까지다. 10초 내로 너희 대장 안 나오면 진짜로 난동을 피울테니, 어서 나와라. 10, 9, 8...."
푸드득. 검은 박쥐가 내 근처를 스치듯이 날아 한 자리에 모였다. 피처럼 붉은 빛을 뿌리며 사람의 모습을 갖춘 뱀파이어는 내가 이미 알고 있던 모습의 여인이었다.
"다시 만나서 반갑다, 나베리우스."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흡혈귀 여인, 나베리우스는 내가 아닌 나의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모두 내가 들고 온 무기와 부하들을 바라보고 있으나, 오직 나베리우스만이 내 위-시스템이 알려주는 나의 정보를 바라보고 있었다.
라스푸틴 아스타로트, ★★★★★, Lv.92. <사자검 레오>.
"도대체..뭐야?"
"아아, 이것말인가?"
나는 할레오 색스를 들어올렸다. 흡혈귀들은 사자 앞에 놓인 박쥐마냥 벌벌 떨며 몸을 움츠렸다. 내 의지를 읽은 할레오는 자신의 힘을 유감없이 과시하며 흡혈귀들을 압박했다.
"마검이다. 성검의 용사를 죽이고 빼앗았지."
"도끼잖아."
"이래서 성검알못 새끼들이란. 성검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기본 형태에 지나지 않아! 주인이 원한다면 손톱도 성검이 될 수 있는 거고 자지도 성검이 될 수 있는 거다! 지금은 마검이지만."
"......."
나베리우스는 내 말에 긴가민가하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나는 내 머리 위를 가리켰다.
"시스템으로 보고 있는데 왜 의심을 하지? 사자검 레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용사'라는 증거 아니냐?"
"시스템은 믿겠는데 그게 너라고 하니까 믿지를 못하겠어."
"이 년이? 내가 용사인 걸 믿지 못한다니, 내가 직접 그 증거를 보여주랴?"
"역시! 갑자기 아스타로트 던전에서 쟁탈전 걸린다 싶더라니! 이 개새끼야! 어떻게 같은 마왕군끼리 이럴 수 있어! 용사들을 앞두고 같이 싸워도 유분수인 상황에!!"
나베리우스는 혼자서 멋대로 착각하며 우리를 향해 전투태세를 갖췄다. 쟁탈전을 건 순간부터 예상은 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격한 환영인사를 해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이 멍청한 년! 기껏 도우러 왔더니 싸우자는 것이냐?!"
"도우러 왔...?"
"병신! 원군을 보내달라고 해서 내가 바로 포털로 날아왔건만 어쩌고 저째? 마왕군끼리? 머저리같은 년! 아이고 마왕님! 저 멍청한 군단장 년이 용사들에게 발리는 거 도우러 왔는데, 저 년이 저를 오히려 죽이려고 듭니다! 이 걸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마왕은 답이 없다. 하지만 내 말은 던전 전체로 울려퍼지며 흡혈귀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 진짜 우리 도우러 온 건가?
- 용사잖아? 성검 사용자 아니야?
- 용사 죽여서 마검으로 타락시켰다잖아.
- 그래도 쟁탈전을 걸었는데?
- 쟁탈전 포털만큼 빨리 넘어올 수 있는 게 어디있어?
흡혈귀들은 서로 눈치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부하들이 아무리 자신의 의견을 펼친다고 한들, 결과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탐욕의 군단장 나베리우스였다.
"...네놈이 우리 군단의 원군으로 왔다는 증거있어?"
"증거? 물론이지! 이 얼굴이 음흉한 흉계를 꾸미는 얼굴 같으냐?"
"어. 100%. 쟁탈전을 걸어놓고 우리 뒤통수를 쳐서 전부 다 훔쳐갈 것 같은 얼굴이야."
"저런. 믿음과 신뢰가 부족하군. 그렇다면 증거를 보여주지."
마침 던전의 기운이 갑자기 변하기 시작했다. 입구 쪽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나는 할레오를 굳세게 우켜쥐고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마왕이시여, 군단을 위해 기적을 내려주소서!!"
푸화아아악---!!
할레오로부터 퍼져나간 붉은 오라가 주변에 가득 퍼져나갔다. 나의 오라에 식겁을 하며 몸을 피하던 흡혈귀들은 오라에 당하자마자 독이라도 받은 줄 알고 기겁했으나, 곧 내 오라의 정체를 깨닫고 환호성을 질렀다.
"크오오오오!!"
"히, 힘이 넘쳐난다!!"
<혈류가속>. 나의 오라는 피의 움직임을 더욱 활발하게 하는 원리를 가지고 있는 만큼, 피가 근본이 되는 흡혈귀들에게 있어 최강의 버프라고 할 수 있다. 안개처럼 퍼져나간 오라는 동굴 전체에 퍼져나갔고, 나베리우스는 붉은 안광을 터뜨리며 내 앞에 마주섰다.
"흐음.... 적에게 이런 버프를 걸어줄 리가 없지. 좋아, 믿을게. 하지만 아직이야. 아직-"
"고작 이런 버프로 내가 너희를 지원하는 게 끝이라고 생각하면 유감이다."
나는 나베리우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나의 할레오 위에 올렸다.
"마왕님께 기적을 간청드려, 용사들을 다른 곳으로 보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뭐...? 말도 안 돼. 그게 어떻게 가능해?"
"흐흐흐, 가능하니까 기적이지. 용사들만 없으면 인간 군대는 쉽게 이길 수 있지?"
"군단장님---! 급보!!"
던전 입구에서 거대한 박쥐 한 마리가 날아왔다. 하피 에일로보다 더 큰 박쥐는 어떻게 통로를 날아왔는지 모를 정도로 컸지만 속도는 엄청 빨랐다.
"적 용사들이 갑자기 전선을 이탈했습니다!"
"뭐...라고...?!"
"기적."
나는 할레오를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마왕님, 만세----!!"
형제찬스.
* * *
"갑자기 다른 곳으로 떠나겠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 2왕자, 네토라레우스는 갑작스럽게 자리를 이탈하려는 용사들의 움직임에 당황했다.
"미안하오. 하지만 지금 당장 떠나지 않으면 안되게 생겼소."
"죄송합니다."
천마를 타고 날아온 검은 드레스의 용사, 스스로를 <마망>이라고 칭한 여인은 고개를 살포시 숙였다. 검은 실크 장갑 아래에 시스루로 비치는 가슴골이 네토라레우스의 침을 꼴각 넘어가게 만들었지만, 2왕자는 퍼뜩 정신을 차려 자초지종을 물었다.
"설명해주십시오, 마망!"
"여신께서 그걸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하...!!"
2왕자는 답답함에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아무리 질문하고 답을 받아내려고 한들, 마망은 '여신의 뜻'이라는 이유로 모든 답을 대신했다.
"어머나, 이번에는 신탁이 사지타리우스에게 갔나보네?"
"당연하죠. 리브라가 칸세르를, 칸세르가 사지타리우스를, 그리고 이제 사지타리우스가 카프리콘으로 인도할 차례니까요."
"그러하다, 왕자. 미안하지만 우리의 역할을 여기까지다."
용사 일행의 수장, 타우러스는 던전의 입구로 추정되는 계단을 가리켰다. 덩굴 사이에 숨겨진 계단을 앞에두고 떠나가려는 용사들의 모습에 2왕자는 그들을 사로잡을 명분이 없었다.
하나, 원래 용사들은 대성벽을 되찾는 것 까지 도와주기로 했을 뿐이다.
둘, 던전을 공략하는 건 2왕자의 군대로도 충분하다.
셋, 여신의 뜻이다.
다른 이유는 전부 차치하고 여신의 뜻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용사들이 당장 발걸음을 돌리기에 충분했다. 용사들은 이미 많은 시간을 아리에스 영지에서 지체했고, 결국 사지타리우스가 '여신의 뜻'을 전하기 위해 다시 날아온 것이다.
"다른 두 분! 다른 두 분은 어떻게 됐습니까?!"
"먼저 출발했습니다."
"허...."
2왕자는 허탈함에 전신에 힘이 빠졌다. 용사만 있다면 던전은 하루만에 공략할 수 있는데, 모처럼 대성벽 너머까지 군대를 진군시켜 악의 싹을 잘라낼 수 있는데 눈앞에서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된 것이다.
"성녀님...."
결국 2왕자는 구원의 눈빛을 보내야만 했다.
"성녀님, 혹시-"
"안 됩니다. 여신께서 말씀하신 이상, 가야합니다."
성녀는 입술을 깨물며 또박또박 말했다. 울분을 참는듯한 모습에 2왕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아, 여신이시여...."
인간이 신의 뜻을 어찌 알겠는가. 여신은 용사들에게 던전의 공략이 아닌 새로운 용사를 각성하라고 말했다. 성검의 용사와 여신의 신탁을 받는 성녀가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이 네토라레우스 마이아네 오피큐스! 보란듯이 던전을 점령하여 조디악 왕국에 해를 끼치는 자들을 모두 없애버리겠습니다."
"여신의 이름으로."
위이잉.
마망 사지타리우스가 신성력을 뿜어내 천마 여럿을 만들어냈다. 비록 날개는 달리지 않았지만 은빛으로 반짝이는 몸은 여느 군마 못지 않은 외형이었다.
"어서 타세요. 카프리콘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겠습니다."
천말들은 용사들을 등에 태웠다. 2왕자와 잠시 이야기를 나눈 성녀는 말 위에 오른 용사들을 보고 흠칫 놀랐다.
"......?"
"나도 용사니까 말 타야지!"
페어리 용사, 제미니는 안장 위에 올라 주먹을 성녀에게 뻗었다. 성녀의 주먹보다 작은 몸집으로 안장 위에 오른 요정의 모습에 성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마망, 혹시 한 마리 더...?"
"죄송해요. 신성력이 이게 한계라."
"......아무리 생각해봐도 네가 내려야 하는 거 아니야?"
"흥!"
위이잉.
용사 제미니는 몸에서 빛을 뿌리며 거대해졌다. 성녀 못지 않은 여체로 변한 제미니는 오드아이를 동시에 손가락으로 내리며 혀를 내밀었다.
"베에에에- 마망이 용사들 타라고 했거든? 꼬우면 용사하시던가요--"
"이...."
"하는 수 없군. 타라."
타우러스는 자신의 등 뒤를 두드렸다. 성녀는 제미니를 향해 입꼬리를 비틀며 타우러스의 등 뒤에 올랐다.
"네토라레우스 왕자, 뒷 일을 부탁-"
히히힝---!!
말이 거칠게 울며 앞으로 튀어나갔다. 성녀는 말을 하다가 혀를 씹고 타우러스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다그락, 다그락.
유독 타우러스와 성녀가 탄 말만 거칠게 위아래로 움직였고, 2왕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장도 없이 달려가면 엉덩이 엄청 아플텐데...."
퉁, 퉁퉁.
말 궁둥이 쪽에서 위아래로 들썩거리는 성녀의 모습이 한 눈에 선했다. 2왕자는 뺨을 톡톡 건드려 정신을 가다듬었다.
"안 되지, 안 돼. 정신차려라, 네토라레우스! 네게는 아내가 있다!"
2왕자는 호흡을 가다듬고 칼을 빼어들었다.
"가자, 왕국의 용사들이여! 나 네토라레우스가 앞장서겠다!!"
2왕자를 비롯한 수많은 기사들이 던전에 발을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