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비만 오크-631화 (627/800)

631회

186일차

조디악 왕국에는 흔히들 난공불락이라고 불리우는 곳이 두 곳 있다.

하나는 아리에스 백작이 대대로 지켜온 대성벽이고, 다른 하나는 왕도로 들어오는 길목 중 하나인 호르토 요새다.

전자는 세계에 단 열 두 자루 뿐인 성검의 용사가 지키는 곳인 반면, 후자는 협곡에 수 십년간의 공사 끝에 누구도 점령하지 못하게 건축된 천혜의 요새였다.

아리에스 대성벽은 점령당했다.

대성벽을 지키던 용사가 살해당한 것을 계기로 수 만에 이르는 마왕군은 군대를 이끌고 대성벽을 넘으려고 했고, 엄청난 물량공세에 원군조차 늦어 대성벽은 점령당했다.

왕도의 사람들은 불안감에 빠졌다. 용사가 살해당한 것도 살해당한 거지만, 수 십년 동안 한 번도 마왕군이 넘어오지 못한 아리에스 백작령이 마왕군의 발에 쑥대밭이 될 것만 같았다.

- 그래도 호트로 요새가 있으니 안심이다.

왕도의 사람들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적어도 왕국이 건국된 이래 단 한 번도 점령된 적이 없는 요새는 왕국 사람들에게 있어서 수호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과거, 왕국의 수호룡이 직접 건설에 참여했다고 하는 전설의 요새.

그런 성이 함락된다면 조디악 왕국은 멸망 직전에 놓인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상징적인 의미에서도 그렇고, 지리적인 의미에서도 큰 문제였다. 호트로 요새에서 조디악 왕국의 왕도까지 가는 길은 고작 사흘 거리로, 그 사이에는 진격하기 딱 좋은 대로만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었다.

즉, 마왕군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요새에서 뛰쳐나올 수 있는 상황.

잔악무도한 마왕군은 1만의 군대와 쌍벽이라고 불리는 두 장수, 그리고 3왕자까지 '참살'하는 잔인한 손속을 보였고, 사람들은 진정으로 공포에 빠졌다.

호트로 요새, 함락.

그로부터 약 일주일이 흘렀다.

* * *

"살려주십시오!"

죽은 것으로 알려진 존재, 앤티알 왕자는 죄인처럼 밧줄에 묶여 국왕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누구 하나 3왕자를 동정하는 눈빛은 없었고, 역겨움과 경멸의 표정만이 가득했다.

"요새를 점령당했으면서 말이 많다."

국왕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3왕자를 나무랐다. 3왕자는 아무 반론도 하지 못했다. 적들이 보인 온갖 추잡하고 더러운 전략과 전술에 대해 아무리 설파해도 저들은 도무지 믿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는 억울합니다! 적이 미친 겁니다! 아버님, 부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한 번 더 기회를 줬다가는 수 만의 백성과 왕국 내 소드마스터 모두를 마왕군에 갖다바치겠군."

국왕은 신랄하게 3왕자를 비난했다. 3왕자의 의견도 듣지 않고 바로 국왕은 3왕자가 요새를 지키다가 장렬히 '전사'했다고 발표했고, 3왕자는 곧장 존재가 은폐되어 왕성 내 별궁에 유폐되었다.

"내가 너를 부른 이유는 단 하나. 네게 기회를 주기 위함이다."

시종 하나가 3왕자의 앞에 시약 하나를 내려놓았다. 누가봐도 좋지 않아 보이는 약물에 3왕자는 표정이 일그러졌다.

"독약...아닙니까?"

"마셔라. 죽음으로 네 패전을 책임져라."

"고작 한 번 졌습니다!!"

"고작 한 번 진 거로 1만 병사를 모조리 마왕군의 먹이로 만들어버렸지. 어디 그냥 1만이더냐? 너는 1만 병사들의 피를 흘리게 만들었고, 그들에게 딸린 수 만의 가족이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네가 살아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너를 내놓으라고 폭동이 일어날 터. 네가 나의 피를 이은 자이기에 산 줄 알아라."

왕족이라서 살았다. 그리고 왕족다운 최후를 맞이하라고 국왕은 명령을 내렸다.

"네가 양심이 있다면 마셔라, 앤티알."

"마, 만약 이 자리에 큰형님이나 작은형님이 있었어도 그러셨을 겁니까?! 예?!"

3왕자는 악다구니를 쓰며 약병을 내팽겨쳤다. 국왕은 바닥에 깨진 시약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혀를 찼다.

"쯧쯧, 영면에 들 수 있는 약이었거늘.... 굳이 대답하지. 물론이다. 놈들도 예외는 없어. 여봐라, 일단 끌고가라."

시종들은 추하게 발버둥치는 3왕자를 거칠게 제압하여 알현실에서 끌어냈다. 어찌나 기운차게 발버둥치는지, 시종장이 3왕자의 목을 쳐서 기절시켜야 했을 정도로 저항이 거칠었다.

"...후우. 이거 짜증 나는군."

국왕은 턱을 괴며 인상을 찡그렸다. 옥좌의 옆에 선 시종장은 길게 하품을 하며 눈을 끔뻑였다.

"뭐가 짜증난다는 거지? 생각했던 최악의 상황은 면했는데."

"그렇긴 하지. 2왕자가 생각보다 선전해주고 있으니."

호트로 요새까지 점령당한 레오 전선과는 달리, 아리에스 전선은 반격의 고삐를 움켜쥐었다. 2왕자가 이끄는 구원군은 현지에서 활약하던 성녀와 용사들의 도움을 받아 적들을 성벽 너머까지 쫓아내는데 성공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진짜로 왕성까지 놈들이 오겠어. 어떻게 하지?"

"뭘 어떻게 해? 마왕군이든 병사들이든 전부 쓸어버려야지."

"쯧. 일부러 전력을 숨기면서 연합군의 눈치를 봐왔건만...."

국왕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옥좌 곁에 놓아둔 왕관 모양의 장식이 달린 봉을 움켜쥔 국왕은 몸을 돌려 옥좌를 향해 왕관을 겨눴다.

"열려라, 지옥문이여."

끼리리릭.

옥좌가 옆으로 밀려나기 무섭게 안에서 사이한 기운이 퍼져나왔다. 국왕은 지팡이를 한 번 크게 땅에 짚는 것으로 보라색의 안개-마기를 제압하고 다스렸다.

저벅, 저벅.

국왕은 천천히 계단을 따라 내려갔고, 시종장은 그 뒤를 따라 움직이며 손을 휘저었다. 옥좌가 다시 소리를 내며 원래의 위치로 움직여 계단을 숨겼고, 빛 한 점 보이지 않는 칠흑같은 어둠이 드리웠다.

키히히힉.

마물들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국왕은 자신을 바라보는 수 백 쌍의 눈동자 속을 거닐며 앞으로 나아갔다. 옆에 있던 시종장의 몸에서 은빛의 안개가 피어오르더니, 거대한 드래곤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오피큐스의 계약에 따라, 나 오피큐스 18세가 계약자에게 명한다. 너희 무리는 나에게 복종하라."

"복종? 이 계약이 끝나면 나는 너희 오피큐스 가문과의 모든 계약이 끝난다. 그럼에도 계약을 거행하겠느냐? 부탁이 아니라?"

"감히 내 아들에게 치욕을 준 놈들은 철저히 짓밟아야지. 부탁을 하자면, 계약을 철저히 이행하여 호트로 요새를 점령한 마왕군 놈들을 상대로 인정사정 보지 말고 모두 학살하라는 것."

"흐흐흐, 꼴에 아비는 아비라는 건가."

은색의 드래곤은 날개를 펄럭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굴, 던전 안에 가득한 마물들도 환호성을 내지르며 무기를 들어올렸다.

"그 계약, 이 바르바토스가 이행하마."

* * *

난공불락의 요새를 함락한 지도 어언 일주일.

수 천의 인간들을 인질 겸 예비 구울로 손에 넣었고, 소드마스터와 아크 메이지의 힘을 손에 넣었다.

더군다나 수 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요새도 손에 넣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워지지 않는 이 공허함은 무엇일까.

"...여자...!"

여자가 없다.  정확히는 새로운 여자가 없다. 항상 나는 어떤 도시나 세력을 점령하고 나면 새로운 여자를 취했고, 그 법칙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난공불락의 요새가 처음으로 우리 군단에게 점령당하는 경험을 했듯이, 나는 요새를 손에 넣었음에도 새로운 여자 하나 얻지 못했다.

오르드 콜드미스와 메리지 칼나이야를 한 번씩 찍어먹어보기는 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수박 겉핥기였고 본 방은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래서 모처럼 기대했건만, 결과는 참담했다.

"야, 후타리치야."

[제게는 라스투자드라는 어엿한 이름이 있습니다.]

"그거 내가 지어준 이름 아니냐, 아크후타야."

라후타자드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내가 군단장만 아니었으면 한 대 칠 것 같은 얼굴이었다. 리치라 표정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지만, 나는 관심법으로 놈의 심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내 너의 마음이 훤히 들여다보이는구나. 지금 '그럼 지가 여자랑 합성시켜주지 말던가'라고 생각했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단지 주인께서 내려주신 이름을 잃어버리고 진짜로 후타리치라는 식으로 불리게 될까봐 두려울 뿐입니다.]

라스투보추는 내가 진짜로 시스템으로 그의 이름을 개명해버릴까봐 두려워했다. 개명이라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시스템을 이용해 명부만 조정하면 금방 이름을 바꿀 수 있었고, 나는 던전에 다녀오기만 하면 얼마든지 개명이 가능했다.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하서스."

[안서스도 라서스도 결국 주인께서 내어주시는 이름. 어떤 이름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금발거유리치의 옆에 서있는 보이쉬한 은발 여기사, 하서스는 묵묵히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외형은 오르드의 젊은 시절인 듯 우리 군단 내에서도 수위를 다툴 정도로 아름다웠으나, 내게는 그저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어떻게 쌍으로 죽메를 개같이 터뜨리고 가다니.'

오르드도 그렇고 메리지도 그렇고, 둘 다 아무리 노처녀라고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나를 엿먹이고 갈 줄은 몰랐다.

"아랫입에 거미줄 친 거 뚫어줬더니, 다시 태어나서도 거미줄에 더불어 마감까지 해버리고 갔을 줄이야...!"

대마법사라는 년은 라스투자드의 고간에 빅엿을 남기고 떠났고, 오르드는 구멍을 메워버리고 떠났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하서스의 아래는 마네킹마냥 구멍이 사라졌다는 말이다.

'아니, 이게 무슨 말이오! 노모도 아니고 노보라니! 마력 해제하면 뼈가죽도 숭숭 뚫리는 몸인데 구멍 두 개만 없다니!'

즉, 넣을 구멍이 없다.

5성 라스 나이트와 5성 아크 리치는 능력 만큼은 다른 이들을 훨씬 뛰어넘을 정도로 강하지만, 알을 낳을 수는 있어도 자지를 넣을 수는 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

"하, 나는 무엇을 위해...."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주인이시여. 주인께서 명령만 하시면 어떤 여인이든 잡아다가 다리를 벌리게 만들겠나이다.]

"...참 된 신하...!"

역시 하서스만한 언데드가 없다. 역시 우리 군단, 우리 던전의 첫 언데드답게 개념이 있고 생각하는 바가 올바르다. 아래에 구멍만 있었으면 바로 파종하고 싶을 정도였다.

[주인이시여, 저 여자는 어떻습니까?]

"지금 이 근방에 있는 여자는 내가 다 먹어치웠...응?"

라스투자드가 가리킨 여자는 내가 아직 먹지 못한 여자였다. 두 언데드와 비슷하게 창백한 인상의 여인은 송곳니가 나 있었고, 처음보지만 어디에서 왔는지는 감을 잡을 수 있었다.

"탐욕의 군단이냐?"

"색욕...의 군단장을 뵙습니다?"

"그래. 내가 색욕의 군단장 라스푸틴이니라. 무슨 일이냐?"

뱀파이어는 수정구 하나를 네게 건넸다. 라스투자드가 먼저 마법적인 함정이 있는지 살피고, 하서스가 내게 두 손으로 바치듯 건넸다. 소드 마스터 구울과 아크 리치가 나를 극진히 대하는 모습을 본 뱀파이어 전령은 침을 꼴깍 삼켰다.

"오랜만이구나, 나베리우스."

[그러게. ......저기, 한 가지 부탁을 할 게 있어서 부하를 보냈어.]

수정구 너머에서 나를 바라보는 나베리우스는 본인이 먼저 내게 말을 걸었으면서 내 시선을 피했다. 스스로도 쪽팔리고 부끄럽겠지만, 그녀는 내게 먼저 부탁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놓여있었다.

[도와줘.]

"뭘 도우라는 거지? 우리 도움 없이도 혼자서 백작령 정도는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던 사람이 아니던가!"

[으...너도 한 번 용사들한테 호되게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건지는 몰라도 용사 셋이 나타났다고!!]

"아이고! 그것 참 안됐군. 용사가 셋이나 나타났단 말이냐? 세상에! 그런 재앙은 듣도 보도 못했어. 용사가 무려 셋이나 나타나다니! 놀!랍!다! 와!!"

나베리우스의 표정은 썩어들어갔지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모를 줄이야.'

정보수집에 관심이 없는 건지, 그도 아니면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는 건지. 용사를 우리가 보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나베리우스는 울상을 지으며 부들부들 떨었다.

[인장 줄게! 그러니까 제발 도와줘!]

"뭐? 인장을? 너 지금 어떤 상황이냐?"

[용사들이 지금 던전 입구 근처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다고!! 성녀랑 인간 병사들도 함께 있단 말이야!!]

"이야, 그거 제대로 좆됐네."

누구 탓인지는 몰라도 아주 제대로 조졌다. 나는 나베리우스의 명복을 빌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인장'을 주겠다고 한 것에 귀가 솔깃했다.

"흠...용사가 문제라 이거지? 혹시 거기 나와 자웅을 겨뤄볼 정도로 남자답고 멋지고 잘생기고 근육질에 나만큼 자지도 커보이는 그린엘프가 있는가?"

[미친.... ...아, 아니! 있어! 너만큼 사내답고 인물 훤칠하고 자지 커보이는 엘프가 있단 말이야!!]

됐다. 나는 수정구 아래에서 서서히 고개를 들어올리는 라스푸틴을 진정시키며 거래를 제안했다.

"용사들 퇴각시키게 해주면 어떻게 함 대주냐?"

[뭐? ...씨발, 대줄게! 아니 알도 낳아줄게!!]

"그럼 됐다."

꾸욱.

나는 수정구에 비친 나베리우스의 입술을 향해 귀두를 꾹 눌렀다. 수정구는 산산조각났고, 나는 수정구의 조각에 할레오의 힘을 불어넣어 뱀파이어 전령의 목을 그었다.

"크허억!!"

뱀파이어는 목에서 피분수를 뿜어내며 죽었다. 라스투자드가 시체를 수습하는 사이, 나는 잽싸게 작전을 세웠다.

"지금부터 탐욕의 군단을 지원한다."

같은 마왕군으로서, 인류에게 위협을 받는 동족의 위험을 어떻게 못 본 척 할 수 있겠는가.

"하서스. 나는 던전으로 돌아가겠다. 너는 플라우로스 던전으로 돌아가 그녀를 데려와라."

[이 상황이라면...새로이 포털을 여실 겁니까?]

"역시 하서스. 척하면 척이군. 그래, 새로 포털을 열 것이다."

나는 요새에 만들어진 포털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르코시아스를 죽여라. 쟁탈전 끝나자마자 바로 나베리우스 던전에 쟁탈전 건다."

우리는 단지 원군을 보내려고 할 뿐이다.

"세 명만 보내면 떡을 치겠지? 흐흐흐."

원군을 보면 분명 기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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