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7회
179일차
물의 정령왕과 계약을 맺은 메리지는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 이건 미친 짓이야! 난 여기서 도망치겠어!
압도적인 힘을 자랑해야할 물의 정령왕은 스스로의 목을 졸라 몸을 터뜨렸다. 정령계에서 중간계로 넘어오면서 형태를 물의 거인에 담아냈던 그는 목도 없으면서 목을 졸라 터뜨렸다.
'이건 계약 위반이에요!'
메리지는 살면서 처음으로 물의 정령왕에게 화를 냈다. 마왕군을, 그것도 인간들의 성기를 터뜨리는 엽기적인 전술을 사용하는 마족의 수작에 물의 정령왕이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친 것에 어이가 없었다.
'어째서 도망친 거죠?! 이해할 수 있게 대답해주세요!'
- 저 검에는 요정왕의 기운이 서려있다! 정령과 요정은 적대해서는 안 돼! 저자는 요정왕의 가호를 받는 자!
"네?"
메리지는 정령계로 도망친 물의 정령왕이 하는 말이 순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요정왕이라는 건 페어리족의 왕을 말하는 것인가? 메리지는 정령과의 대화가 머릿속으로 이루어지는 것조차 잊고,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그게 무슨 개떡같은 소리에요?!"
- 나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존재의 가호이니라! 같은 '왕'의 칭호를 달고 있으나, 정령들에게 신이 있다면 요정들에게는 요정왕이 있는 것이다!
"아니, 그러면 저 돼지 오크가 요정왕의 가호를 받았다는 거예요? 도대체 왜?!"
-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물의 정령왕이 설마 다른 요정왕이라는 존재의 가호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 비단 요정왕의 힘 뿐만이 아니야! 검들에 깃든 기운도 그랬지만, 저 오크는 보통 존재가 아니다!'
"그건 딱봐도 알 수 있어요! 저 놈이 대장인데?!"
- 그냥 보통이 아니라는 게 아니다! 저 놈은 분명 솔로몬의 하수인! 정령들조차 붙잡아 임신시키는 던전의 주인들이다!
"......씨발, 뭐라고?"
메리지는 자신의 마법적 지식과 이성이 무너지는 듯한 정령왕의 말에 뒤통수가 얼얼했다.
- 분명 저 놈은 나를 붙잡아서 던전으로 끌고갈 거야! 그리고 촉수같은 것으로 나를 구속한 뒤, 내 몸에 자지를 박고 싸겠지! 그럼 나의 푸른 몸은 놈이 뿌리는 백탁액으로 물들 거고, 나는 오크의 씨가 뿌려져서 정령만 낳는 물싸개가 될 게 뻔해!
"그게 무슨 구체적으로 미친 말이에요?!"
- 놈에게서 흐르는 피가 그렇게 말하고 있어! 놈 안에 고여있는 좆물이 나를 향해 외치고 있다고!! 저 새끼, 내가 여성체인 걸 알면 바로 정령계까지 넘어와서 따먹을 새끼야! 미안해! 계약은 이걸로 끝!
물의 정령왕은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하려고 했다. 얼척이 없다못해 어이가 하늘로 날아올라갈 것만 같았다.
"도대체 왜?! 계약을 포기하면 나는 어쩌라고요?!"
- 내가 너와 계약을 한 걸 알고 있다면, 놈은 분명 너를 구속해서 나를 소환하라고 살살 꼬드길테지! 그럼 나는 평생 너한테 묶여서 던전 말고는 다른 곳에 소환할 수 없게 될 거라고! 그러다가 한 번이라도 실수로 던전으로 소환되면...아아! 싫어! 나는 그러려고 물의 정령왕이 된 게 아니야!
"넵튜뉴스!!"
정령왕의 존칭조치 버리고, 정령왕을 이름으로 막 불렀다. 일방적인 계약 파기에 화가 끝까지 난 메리지는 물방울이 든 목걸이를 번쩍 들어올렸다.
"생명의 물방울을 부숴버리기 전에 당장 돌아와요!"
- 진짜 미안! 어차피 너랑 맺은 계약 깨지면 그거 부서지는 거야! 혹시 다음 생에 정령으로 태어나면 상급 정령으로 만들어줄게! 내가 그래도 전 계약자로서 한 마디 하자면....
쩌적, 쩌적.
정령계로 통하는 문이자 정령왕의 흔적인 생명의 물방울이 차츰 금이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푸른 빛을 뿌린 정령왕의 기운은 안개처럼 사라졌다.
- 박히기 전에 지금 당장 도망쳐.
뽀각!
드래곤 레어 급의 물건이 수십 조각으로 쪼개졌다. 물의 정령왕은 자신이 중간계에 넘어올 수 있는 매개체까지 버리면서 정령계로 도망쳤다. 메리지는 무엇이 정령왕을 두렵게 만들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도 도망쳐?'
정령왕은 자신에게 단 한 번도 나쁜 말을 해준 적이 없었다. 도망치는 게 자신의 신상에 더 낫다는 건 알지만, '지금 당장'이라는 말이 걸렸다.
아직 인류는 패배하지 않았다. 왕국군은 하나 둘 무력화되고는 있었지만, 요새 안으로 적이 들어왔다고 마왕군에게 요새가 함락된 건 아니다.
"메리지, 지금 뭐해?!"
전신이 흠뻑 젖은 오르드는 대검을 들고 메리지의 앞에 나타났다. 이미 수많은 구울들을 썰어버리고 온 듯, 그녀의 검에는 구울들이 반으로 잘려 죽은 흔적이 역력했다.
"우리 둘이서 저 놈을 치자!"
"뭐? 위험해!"
"괜찮아! 우리보다 약해보이는 놈인 걸!"
"......."
메리지는 침을 꼴깍 삼키며 스태프를 움켜쥐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등을 맞대고 함께 싸워온 둘은 전성기 시절 25위 던전 글라샬라보라스라스를 단 두명이서 쓰러뜨린 적도 있는 실력자였다.
대부분의 마왕군이 그렇지만, 마족은 우두머리를 죽이면 전투가 끝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현재 아무리 봐도 우두머리로 보이는 적은 붉은 직검 두 자루를 휘두르며 엄청난 속도로 병사들의 목을 자르고 있었다.
"자지가 안 선 너는 목을 잘라주마! 대가리 커트!"
"자지를 세운 너는 좆목을 잘라주마! 귀두 커트!"
오크의 칼부림은 병사들에게 너무나도 위협적이었다. 물에 흠뻑 젖은 그린엘프가 젊음과 미모를 과시하며 병사들을 미인계로 유혹하면, 오크는 그 사이사이를 뛰어다니며 망나니마냥 칼춤을 추고다녔다.
"가자, 메리지!"
"...그래. 설마 진짜로 그렇게 되겠어?!"
여검사와 마법사는 마나를 갈무리하며 오크의 앞에 나섰다. 검과 스태프를 오크에게 겨누며, 두 사람은 동시에 소리쳤다.
""이 더러운 마물! 우리가 너를 쓰러뜨리겠다!""
"...헐."
앞에 달려드는 병사의 명치를 걷어차고 뒷목에 검을 쑤셔박던 오크는 허탈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거 강하기는 더럽게 강할 것 같은 년들이 술담배 냄새에 쩔어있구나. 맨날 신선한 엘프들만 먹어서 그런가, 화장 떡칠한 아줌마들은 별로 내키지는 않는데."
오크는 두 검을 부딪히며 낄낄 웃었다.
"수백 살 먹은 엘프들도 먹는데 인간 미시라고 거르면 안 되지. 어서 덤벼라, 이 발효된 치즈 덩어리들아."
오르드와 메리지는 바로 마나를 끌어올렸다.
* * *
마왕군의 군대가 요새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푸른 보호막을 찢고 성문을 열어젖혀, 요새 안을 비집고 들어간 구울과 엘프 병사들의 상태는 무혈입성에 준할 정도였다.
"쏴라! 쏘란 말이야!"
"으허헝! 싸, 쌀 것 같아!"
화살을 쏴야할 궁수들은 다른 걸 쏘며 무력화되었다. 7할 가량의 병사들은 쌀 것 같은 와중에도 정신을 가다듬고 화살을 쐈지만, 붉은 오라의 버프를 받은 마왕군은 손쉽게 공격을 쳐내며 성문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걸 이렇게 점령한다고?'
그 모습이 여인의 질속을 헤집고 다니는 정자의 움직임같았다. 마르바스는 두둥실 떠오르는 열기구 위에 걸터앉아 전투를 특등석에서 구경했다.
"하늘도 아주 난리가 아니네."
지상의 싸움도 싸움이지만 공중의 싸움도 무시할 수 없었다. 열기구라는 족쇄가 풀린 쿠앤크 엘프들은 그린엘프들과 마찬가지로 머리에 쓰고 있던 안드라스 투구와 강철의 깃털 로브를 집어던지며 무게를 줄였다.
끼요오오옷!!
지킬 것이 없어진 쿠앤크 엘프들은 엘프 장로 니프엘라의 지휘 하에 그리폰 라이더들을 서서히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리폰 라이더들은 하피 에일로를 한 기도 떨어뜨리지 못한 반면, 엘프들은 착실하게 하나 둘 그리폰을 떨어뜨렸다.
"젠장, 진정해! 정신차려!!"
끄어어엉!!
기수들은 흥분하여 말을 듣지 않는 그리폰들에 제대로 공격을 할 수 없었다. 눈이 시뻘게진 그리폰들은 부리에 채워진 사슬 고삐조차 부술 기세로 맹렬히 앞으로 돌진했다. 그리폰들이 기수의 지시를 무시하고 달려가는 방향에는 하피 에일로들이 가슴을 드러낸 채 열심히 여인의 향기를 뿌리고 있었다.
하피도 그리폰도 결국 같은 조류형 마수. 대부분의 그리폰은 수컷이었고, 분노의 군단이 뿌린 광역 발정 오라는 인간도 요정도 마족도 짐승도 가리지 않았다.
캬오오오!!
그리폰들은 괴성을 지르며 날개를 펼쳤다. 왕국과 마왕군의 전투라는 것은 이미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리폰들은 등에 짐덩이를 태우고 암컷을 상대로 경쟁을 해야만 했다.
그라아아아!!
검은 날개의 강철 까마귀, 블랙 레이븐들이 하피 에일로의 앞을 막아서며 날개를 펼쳤다. 그리폰과 엇비슷한 크기의 블랙 레이븐들은 모두 한 마리도 빠짐없이 모두 수컷이었고, 오랜 기간 하피 에일로들의 번식을 도맡아 온 장본인들이었다.
하피 에일로라는 암컷 하나를 두고, 그리폰과 블랙 레이븐들이 서로 부리와 발톱을 겨누며 싸우기 시작했다.
카앙, 카앙, 카앙!
그리폰의 발톱이 블랙 레이븐의 깃털을 스쳤다. 블랙 레이븐의 부리가 그리폰의 턱밑을 찔렀다. 서로가 서로의 질긴 가죽과 강철 피부를 물어뜯고 긁으며 싸우는 야생의 전투에 죽어나가는 건 등에 올라탄 기수들이었다.
"으어, 으어어! 미친 놈들이 왜 여기서 번식경쟁을 하고 있어?!"
그리폰의 위에 올라탄 기수는 자신이 떨어질 것 같아 고삐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 바람에 그리폰은 순간적으로 턱이 뒤로 당겨졌고, 블랙 레이븐의 눈을 찌르려던 부리가 종이 한 장 차이로 멈춰버렸다.
"고맙네. 멍청이."
블랙 레이븐 뒤에 올라탄 다크엘프는 공중에서 몸을 날려 그리폰의 목 아래에 안착했다. 수 십 미터 상공에서 겁도 없이 뛰어오른 다크엘프는 그리폰 기수의 턱을 걷어 차올렸다.
"우리 애들 넘보지 말고 꺼져."
빠-악.
다크엘프의 발길질에 기수는 안장에서 미끄러지듯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폰은 기수가 떨어지고 있음에도 블랙 레이븐을 제치고 하피 에일로를 향해 달려가려고 하느라 미쳐있었다.
"자, 자, 착하지."
다크엘프는 그리폰의 안장 위에 올라 익숙한 손길로 그리폰을 다독였다. 손등에서 뿜어져나오는 성마법의 마력은 그리폰의 흥분을 가라앉히게 만들었다.
"진정하고 들어봐. 쟤들 말고 쟤가 낳을 새끼랑 하면 되잖아. 그치?"
크르륵....
그리폰은 다크엘프의 말을 듣고 혼란에 빠졌다. 이도 저도 아닌 상황에 허공에 멈춘 그리폰의 선택은 고삐를 잡은 기수의 선택을 따르는 것.
갸르르.
"잘했다, 솔라!"
"이 정도는 기본이죠, 장로님."
푹, 푸욱.
엘프들의 분전으로 기수들이 하나 둘 그리폰 위에서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다. 마르바스는 아둥바둥 팔다리를 저으며 떨어지는 인간들을 향해 조용히 명복을 표한 뒤, 다시 요새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공중은 이걸로 끝났...어머. 쟤들...."
마르바스는 자신도 이름을 알고 있는 두 명의 콤비를 혼자서 상대하는 오크를 향해 눈을 반짝였다.
"쟤들 상대로 혼자서 이기려고 한다고? 얼마나 내 자궁을 욱씬거리게 하려고 하는 거야...?"
어째서일까. 마검 레오의 주인이 된 이후로, 마르바스는 자꾸만 오크를 볼 때마다 배가 뜨거워졌다.
"강한 수컷...츄릅...."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기대감이 드는 모순적의 상황에서, 마르바스는 조용히 오크를 응원했다.
* * *
"크윽?!"
검이 매섭다. 목을 찌르려고 파고드는 대검을 마검으로 튕겨내고, 다른 손에 쥔 검을 앞으로 찌른다.
카앙-!
내가 찌르려고 하는 곳에는 이미 얼음방패가 기다리고 있었다. 내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고, 대검을 회수한 오르드는 튕겨나간 방향으로 검을 한 바퀴 빙 돌렸다.
"이런?!"
나는 두 검을 옆으로 비스듬히 세웠다. 검면을 눕혀 대검을 비스듬히 틀어막았고, 검과 검이 부딪힌 반탄력으로 뒤로 물러섰다.
"하! 제법 싸우는데?!"
"하지만 우리를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에요!"
두 여자는 나를 비웃으며 공격을 퍼부었다. 여기사는 소드마스터 급 정도는 되어보였고, 마법사는 그레모리 이상의 대마법사-아크메이지처럼 보였다.
"젠장, 이런 동네에 이 정도 강자가 있을 줄이야!"
나는 둘의 연격을 최대한 쳐내며 공격을 피했다. 내 병사들은 내가 벌이는 일기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적 병사들을 죽여나갔지만, 지금은 내가 죽게 생겼다.
'하지만 군단장이 되어서 여자 둘한테 죽어나가는 모습을 보여줄 수 없지.'
모처럼 대군을 이끌고 나온 전투다. 새롭게 우리 군단의 병사들이 된 이들을 위해, 나는 군단장으로서 위엄을 보여야만 했다.
"여기사와 거유 여마법사가 거근 오크에게 범해지는 것은 세계의 섭리!"
나는 두 마검을 허리에 채우고 하늘을 향해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내가 뭔가 할 것 같은 기색을 보이자 둘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오라, 자연의 이치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르드와 메리지는 안도감을 내비치며 나를 향해 무기를 다시 겨눴지만, 나는 그들을 향해 두 주먹을 움켜쥐고 앞으로 휘둘렀다.
쾅---!!
오르드와 메리지의 발치 바로 앞에 무언가가 떨어졌다. 한발자국만 더 다가왔어도 다리가 두동강이 났을 테지만, 둘은 내 뒤에서부터 날아온 무기에 제법 빠른 대처를 보였다.
"흐흐. 이걸로 2:2다."
나는 오르드의 앞에 떨어진 할레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붉은 문신의 힘이 넘실거리는 할레오 색스는 보호막을 깨뜨리던 순간의 힘을-아니 그 이상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오르드와 메리지는 끓어넘치는 할레오의 힘에 잔뜩 경계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승리하고, 너희는 패배한다. 그게 법칙이며 진리다. 그런데 말이야...."
군단은 이미 인간들을 상대로 승기를 잡았다. 나머지는 저 둘을 어떻게든 처리하면 끝. 나는 할레오의 그립을 단단히 움켜쥐며 자세를 낮췄다.
"둘 중에 누가 더 오크를 잘 낳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