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비만 오크-623화 (619/800)

623회

179일차

<늦은 밤, 호트로 요새>.

마왕군이 하루 거리에 자리를 잡은 이후, 3군단의 지휘관들은 의견이 둘로 갈렸다.

"나가서 요격하자."

오르드를 중심으로 한 요격파.

"적들은 미친듯이 질주해오다가 우리 요새를 보자마자 바로 그 자리에 눌러앉았다. 적이 지친 지금이야말로 적을 공격할 절호의 기회다."

"가만히 앉아서 적이 오는 것을 기다리기만 하면 결국 우리가 먼저 당하게 되어있다."

"병력의 수는 우리가 더 많다. 그렇다면 나가서 싸우는 게 훨씬 이득이다."

요격파의 주장에 반기를 든 이들의 반응은 한결 같았다.

"요새를 버리고 왜?"

메리지를 중심으로 한 수성파.

"왕국 역사상 단 한 번도 점령된 적이 없는 요새야. 여기가 점령됐으면 아마 왕국 자체가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을 걸?"

"아무리 후작령이 점령당했다고 해도 이곳과 그곳은 달라. 여긴 왕성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곳인데 굳이 나가서 싸워줄 이유가 있어?"

"병력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한들, 쟤들이 사람이 아니잖아."

공격과 수비, 어느쪽을 선택할 지 성향에 따라 갈린 지휘관들의 회의는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논스톱으로 이어졌다. 양 측 다 일장일단이 있어 선택을 내리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누군가가 선택을 내려야만했다. 다수결은 전원 귀족의 신분을 가진 이들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3왕자님,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어떤 길이 더 좋을 것 같습니까?"

선택의 공은 3군단의 군단장, 3왕자에게로 넘어갔다. 가만히 앉아서 코코아만 홀짝이던 그는 1만의 목숨을 책임지게 된 것에 잔뜩 긴장했다.

"나, 나는...."

아직 20도 되지 않은 소년이 막중한 책임을 짊어지기에는 여러모로 무리가 있었다. 물론 일국의 왕자라는 사람인 만큼 왕자로서의 면모를 보이는 게 당연한 게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건 동화나 이야기, 위인전에나 나올 법한 영웅적인 인간의 면모였다.

3왕자는 아직 그런 존재만큼 성장하기에는 어렸다. 어렸기에 오기를 부리며 3군단의 군단장을 맡았다.

"어, 어느쪽이 더 좋습니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검을 들어 인류연합 최전선에서 싸우는 1왕자, 아리에서 변경백을 대신하여 해당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섭정 비슷한 역할로 파견되어 마왕군과 사투중인 2왕자와는 달리, 3왕자는 아직 어리고 약했다.

"수성전의 이점을 버리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고 배웠습니다. 적은 숲에 포진을 하였고, 엘프들의 전력은 몹시 두렵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적이 오는 걸 기다리는 건 너무 수동적입니다. ...제가 무슨 선택을 내려야 하는 겁니까?"

책임을 피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어느 쪽이 좋을 지 모르기에 그는 선택을 내리기 어려워하는 것이다. 그가 전장에서 실제로 싸움을 겪어봤거나 군대를 이끌어봤다면 적절한 선택을 내렸겠지만, 3왕자는 온실 속의 화초일 뿐이었다.

"아무거나."

"군단장께서 원하시는대로."

"그러니까 그것이 어렵다는 겁니다!"

3왕자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오르드와 메리지, 그리고 3군단의 지휘관들은 오롯이 3왕자의 선택을 존중했다.

"차라리 제게 기대를 걸지 마십시오! 저를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라고, 그냥 무시하고 작전을 진행해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3왕자는 차라리 병풍이 되는 게 전황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고생은 모두 부하들이 하면서 '비르고, 레오 등지에서 발호한 마왕군은 앤티알 왕자가 이끄는 토벌대에 토벌되었다'고 역사서에 남는 걸 바란다고 오해를 사더라도, 차마 어느 쪽을 선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냥 경들의 뜻대로 하면 안 됩니까?"

"예. 안 됩니다."

그러나 3군단의 장군들은 누구하나 3왕자의 어리광을 들어주지 않았다.

"왕자님, 저희는 조디악 왕국, 왕가에 충성을 다하는 자들. 저희는 국왕 폐하의 명령에 따라 당신을 군단장으로 모시고 있는 겁니다."

"이 전투를 바탕으로 왕자가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수 있도록 하라. 그게 국왕께서 내리신 명령이었습니다."

"고민하고 또 고민하십시오. 3군단은 당신을 믿고 있습니다."

자신을 향한 믿음과 신뢰가 가득한 시선에 3왕자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 모두가 자신을 향해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자신이 이 선택을 바탕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을거라는 믿음을 보이며, 이 고뇌의 시간이 왕자를 진정한 군왕의 길로 인도하리라 확신하며.

"...하루, 하루만 더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앤티알 왕자는 결국 결단을 내리기를 포기했다. 다른 지휘관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앤티알 왕자의 선택을 존중했다.

하루 정도야.

"알겠습니다. 부하들이 어느쪽이든 바로 대처할 수 있도록 준비해두겠습니다."

"요격을 하러 나가도 수성에 필요한 최소 인원은 남겨야하니까, 수비부대 먼저 위치를 확실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방금 전까지 갑론을박하던 지휘관들은 언제 언성을 높이며 싸웠냐는 듯 금방 의견을 조율했다. 장군들은 빠르게 병력 배치를 완료하고 이동에 착수했고, 요격을 하더라도 요새를 지켜야 할 수비병들만 빠르게 요새 곳곳에 배치되었다.

"3왕자님, 옆에서 군의를 지켜보시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입니다."

선택은 자신이. 하지만 모든 실무는 부하들이.

"......."

앤티알은 점점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해 생각이 깊어졌다. 군의가 끝나고 각자의 방으로 지휘관들이 떠난 뒤, 앤티알은 홀로 성벽 위에 올라 밤공기를 쐬며 생각을 정리했다.

자신의 존재의의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곳에서 자신이 반드시 해야할 역할이 있을텐데, 나는 무엇을 하면 되는 것인가.

"나, 나는...."

국왕을 상대로 최선을 다하겠노라 말은 하기는 했지만 어디 뜻대로 되기만 한다면 그게 사람 일인가. 앤티알의 한숨은 깊어만 갔고, 그 누구 하나 앤티알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이는 없었다.

"...들어가야지. 가서...응?"

살랑, 살랑.

앤티알의 앞에 검은 깃털 하나가 좌우로 흔들리며 떨어졌다. 아무 생각없이 깃털을 집어든 앤티알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주머니에 주섬주섬 집어넣었다.

"까마귀가 지나가나...?"

그는 아무런 의심조차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세간에서 그를 부르는 또다른 별명은 <무능왕자>. 아무 능력도 힘도 없이 서열만 높은 그는 이번 기회에 자신을 바꿔보고자 큰 용기를 냈으나,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 * *

"정찰다녀왔어!"

하르파스와 안드라스. 두 명의 공군 부대장은 적의 마법에 탐지되지 않을 아주 높은 고도에서 적진을 살폈다. 생각보다 적의 수는 많았고, 우리는 후작령의 전투 이후 또다시 강적을 맞이하게 되었다.

"고도 2km 정도 되는 높이인데도 저격마법이 날아와?"

"지상으로 접근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구형 방어진인 것 같아. 땅굴도 막혔어."

우리는 현재 난관에 제대로 봉착했다. 적의 요새는 반경 2km 일대를 모두 감시하고 요격하는 방위마법이 달려있는 것 같았다. 때문에 우리는 왕도로 향하는 천혜의 요새를 눈앞에 두고 전열을 가다듬어야했다.

"씁, 이거 짜증나는군. 왕국 역사 이래 한 번도 점령되지 않은 곳이라."

"주인님 하실 말 뭔지 대충 알 것 같아요."

"뭔데?"

"저 요새의 처녀는 내 것이다!"

정답이다. 나는 호트로 요새를 최초로 공략한 남자가 될 것이다. 정답을 맞춘 륜의 귀를 쓰다듬어 준 나는 요새 공략을 위해 준비된 결전병기를 살폈다.

"라스토피아의 역사서에 이렇게 남겠지. 조디악 왕국 난공불락 호트로 요새는 분노의 군단에 의해 떨어졌다고."

"보통은 '나 라스푸틴'이라고 하지 않나?"

"분노의 군단이 곧 나이며, 내가 곧 군단이다. 어디 나 혼자서 점령하는 것도 아닌데, 역사서에 집단으로 쓰이는 것 정도야 뭐가 나쁘겠느냐? 나는 그냥 라스푸틴 일대기로 남으면 돼."

포르네우스 던전의 오크 노예 병사로 태어난 그가 불과 오크 인생 5년이 지나기 전에 왕국을 점령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왕도로 가는 길에 왠 요새 하나가 있었지만, 인류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하는 전략 전술로 분노의 군단은 아무 피해없이 요새를 점령하였다.

"그나저나 저 요새 말이다, 더럽게 넓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우리는 멀찍이 언덕 위에서 요새를 내려다보았다. 우리가 과거 후작령을 상대할 때 요새 포트라스를 만든 것처럼, 인간들 또한 협곡에 넓은 관문형 요새를 만들어 왕도로 가는 길을 틀어막았다.

"귀찮게시리."

"주인님, 저거 점령하실 거예요?"

"아니, 지워버린다."

라스피카나 레굴라스같이 우리가 점령하여 사용할 곳이 아니라면 우리의 전략전술은 무궁무진해진다.

상대의 시설을 빼앗아 우리의 도시로 만드는 분노의 군단식 전술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파괴하고 부수는 그레모리 타입의 오만의 군단식 전술, 일단 전부 범하고 보는 색욕의 군단식 전술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적이 마왕군이 아닌 게 아쉽군. 저게 만약 마왕군의 요새였으면 성검으로 쓸어버리면 그만인데."

핑크빛과 별빛과 금빛이 뒤섞인 삼색보-빔 광선이라면 성벽은 그대로 두고 안에 있는 마족들만 일제히 신성력으로 태워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적은 신성력에 오히려 몸이 치료가 되는 인간들.

"크림엘프가 안 되면 쿠키엘프를 먹으면 그만."

당연히 사용해야 하는 힘은 달라야 한다.

"성검이 안 되면 마검 써야지."

요새에서 틀어박혀 싸우지 않겠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더 좋다.

"모두 불 피워."

화륵.

곳곳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플레어 판테라와 그레모리의 원소마법을 함께 섞어 만든 불꽃은 어둠 속에서 주변을 활짝 비추며 조금씩 열기를 더했다.

불씨가 타오르는 곳은 블랙 레이븐의 강철깃털을 뽑아 끝이 뾰족한 토기처럼 만든 그릇으로, 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처럼 깃털을 엮은 강철의 성화봉 안에 마기를 머금은 불씨가 피어올랐다. 총 60개 가량의 불씨가 피어올랐고, 나는 박수로 다음 단계를 지시했다.

"젖기름 준비!"

모든 젖은 지방의 성분을 가지고 있다. 우유에서 단백질을 걷어내고 유지방만 모아 버터를 만들 듯, 우리 군단의 그린엘프들이 짜내는 젖도 당연히 기름 성분이 있다. 갓 짜낸 젖을 마시지 않고 가만히 두기만 하면 당연히 지방성분이 위로 떠오르기 마련.

"8젖통에서 짜낸 엘프젖, 양동이에 모두들 잘 모아뒀나?!"

"""라스!!"""

각 소대에서는 나무 양동이에 모아둔 엘프젖을 가져왔다. 언제 짜낸 젖이냐 하면, 우리가 다들 미쳐서 8젖통을 외치며 광란의 진격을 할 때 쾌락과 함께 터져나온 젖이었다.

수소자동차가 친환경 에너지의 순환으로 배기구에서 공기와 고인 물을 흘리듯, 우리의 성욕 에너지 동력원인 그린엘프드른 8젖통에서 물 대신 젖을 흘렸다. 그걸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 양동이에 모아뒀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히 성분이 침전되며 층이 나뉜 것이다.

아래는 민트초코맛 치-즈가 될 단백질이, 그리고 위에는 민트초코맛 버-터가 될 지방질이.

화르르륵.

고소하면서 달콤한듯한 미묘한 향의 젖기름은 강철의 성화 안에 불타는 작은 불씨를 더욱 크게 피어올렸다. 나름 기름이라고 불길은 겉잡을 수 없이 위로 치솟아올랐고, 우리의 예상대로 솟아오르는 불길에 내부가 크게 팽창했다. 덕분에 하피들이 붙잡고 있던 '천'이 서서히 부풀기 시작했다.

"와!"

"아아, 이것은 열기구라고 하는 것이다."

스타킹 재질의 천을 덧대어 엮은 열기구의 검은 천이 넓게 펼쳐졌다. 동시에 천에 묶인 통나무 전차의 잔해가 서서히 하늘로 두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우리를 이곳까지 데려다 준 통나무 전차들은 소임을 다하고 승천하듯 하늘로 두둥실 떠올랐다.

"역시 쓰레기는 재활용해야 제맛이지."

흔들, 흔들.

하피들이 날개를 펄럭이며 열기구를 하늘로 잡아끈다. 흑익룡들은 열기구가 중간에 떨어지지 않게 통나무 겉에 젖기름을 끼얹었다.

"공중 2km 안으로 들어오는 것들을 요격하는 마법방어 시스템이라...제법 공략하기 힘들겠어. 크흐흐."

하늘로 떠오르는 열기구의 수는 무려 60. 그중에는 나와 나의 여인들이 마음껏 정사를 나눴던 아스모딘의 뿌리털나무집도 함께 같이 떠오르고 있었다. 엘프 젖기름으로 타오르는 불의 열기와 하피, 흑익룡들이 열심히 줄을 잡고 날개를 펄럭이는 덕분에 열기구는 무럭무럭 하늘로 날아올랐다.

"우리는 여기서 마음껏 불꽃놀이나 보면 되겠군."

"주인님, 저기 뭔가 날아오고 있습니다."

적들도 마냥 바보는 아니었다. 우리가 올리는 열기구를 요격하려는 듯 뛰쳐나온 그리폰들은 등 위에 중갑의 기사를 태우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거대한 망치를 든 채 요새에서 튀어오르기 시작했다.

"오오, 그리폰 라이더?"

하늘로 떠오른 그리폰의 수는 대략 100. 하지만 우리도 마냥 열기구가 터지게 놔두지는 않는다.

"그리폰 위에 기사라니. 크으.... 하지만 이쪽의 공군도 무시 못하지. 니프엘라!!"

"쿠앤크 엘프 전원 대기 중!"

하피 에일로, 블랙 레이븐. 하르파스 던전에서 일부러 40명씩 맞춘 거대 조류 마수들의 등에는 니프엘라를 비롯한 쿠앤크 엘프들이 활을 겨눴다.

"그리폰들을 요격해! 열기구를 지켜!"

열기구가 2km 상공 위에서 떨어지느냐, 떨어지지 못하냐. 그것이 우리의 승리를 결정짓는다.

"마검 드랍, 반드시 성공시킨다!!"

...60개의 열기구에는 기름을 잔뜩 머금은 드라이어드 뿌리털과 우박처럼 쏟아져 인간들의 뚝배기를 깨버릴 온갖 물건에 더불어, 곳곳에 마검을 함께 실어놓았다. 마기의 불꽃을 더욱 강화하고 젖기름을 마구 태워, 열기구 자체를 하늘에서 '폭탄'으로 떨어지게 하는 매개체로서.

"라스주의 배달왔습니다."

이름하야, 작전명 <화염과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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