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8회
177일차
자기객관화는 언제나 중요하다. 특히 나와 군단 전체의 목숨이 걸린 일이라면, 나는 얼마든지 나를 깎아내리면서도 나와 우리 군단에 대해 평가할 수 있다.
"우리 말이야, 우리끼리도 왕국 점령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신수가 본진으로 들어오는 길을 보호해준다는 가정하에, 모든 전력을 남들 눈치 안 보고 때려박을 수 있다는 가정하에 전력을 배치해보았다. 그리고 나는 한 마디로 왕국을 상대하는 것에 결론을 내렸다.
"쌉가능."
용사 넷이 동시에 왕성을 향해 진격하면 왕성하나 파괴하지 못하겠는가. 백작부인이었던 미르망도 성검의 용사가 되자마자 바로 그레모리 사단을 후퇴시킬 정도였는데, 나를 비롯한 우리 군단의 용사들이 총출동하면 왕국을 점령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조디악 왕국 아무리봐도 좆밥같은데?"
거기에 엘프 여왕인 루나, 드워프 공주인 로도페리, 루시펠의 천사 부대와 아스모딘의 드라이어드 부대까지 포함되면 전력이 충분하다 못해 과잉전력이다. 혹시 100레벨에 준하는 놈들이 나온다면 내가 직접 할레오 색스를 들고 뛰쳐나가면 된다.
"어떻게 생각하냐, 얘들아. 내가 너무 우리를 과대평가하는 건가?"
"지금까지의 전력을 살펴보면 그렇습니다. 어지간한 10위권 던전은 왕국과 견줄만큼 세력이 강합니다. 저희는 언제나 등급과 전력이 따로 놀지 않습니까? 충분히 가능성 있습니다."
샤이탄피셜, 우리는 조디악 왕국 전체를 도모할 수 있다. 마르바스도 그런 가능성을 엿보았기에 나와의 알동맹에 내기를 건 것이다.
- 흥, 어, 어쩔 수 없네! 왕국을 점령했으면 다리를 벌려주는 수밖에! 으으, 기어오르지마! 나한테 박게 해준다고 내가 마음까지 허락한 건 아니니까!
나라는 우수한 존재의 종자가 탐이나지만, 츤데레인 나머지 본심을 숨기는 마르바스를 따먹을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자지가 부풀어올랐다. 왕도에 우리 군단의 깃발을 꼽는 게 빠르면 빠를 수록 마르바스의 다리도 더 빨리 벌어지게 되어있다.
즉, 타임 어택을 할 필요는 없지만 할 수 있는 걸 안 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정면 힘싸움은 불리할 걸요? 저희가 이긴 건 주인님께서 숱한 작전을 짜셨기 때문이잖아요."
"그렇긴 하지. 결국에는 전력을 약화시켜놓지 않았다면 정면 힘싸움은 많이 불리했을테니까."
항상 그렇지만 우리는 언제나 언더독의 입장에서 전투를 치루어왔다. 열세인 전력을 멋진 전략과 완벽한 전술, 그리고 사랑의 힘으로 숱한 거인들을 꺾어왔다. 짱돌 하나 빙빙 돌리던 어린 다윗은 이제 돌팔매질로 골리앗의 대가리를 으깰 수준까지 성장했다.
"그럼 주인님, 역시 네비로스와 동맹을 맺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래서 알 동맹을 제안했지만 실패하지 않았느냐."
"꼭 알 동맹만이 동맹은 아니지요. 섹스 파트너가 아닌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왕국 점령을 위한 협업이라는 관점에서 동맹을 맺는 겁니다."
샤이탄의 제안은 분명 이성적이고 논리적이었다. 하지만 나의 감성을 움직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샤이탄 또한 그걸 알면서 내게 일부러 물었다.
"싫다."
나의 흔들리는 생각에 확신을 주기 위해. 어정쩡한 동맹은 독이 되는 만큼, 나는 확실한 동맹이 필요했다.
마르바스의 공약처럼 내가 네비로스의 안에 자지를 박고 씨를 뿌리는 알 동맹을 구축하는 관계가 아닌 이상, 단순한 구두 계약으로는 뒷통수를 맞을 가능성이 높았다. 애초에 마족을 믿고 동맹을 맺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대의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자? 개소리지. 쟁탈전 하지말고 전부 마왕님 말씀 들어야 하는 세상이면 진작에 시스템에서 쟁탈전 기능을 회수하셨을 거다."
"그럼. 서로 계속 싸우라고 놔둔 거임. 싸우면서 강해지도록."
라임의 말은 솔로몬이 가진 의중의 핵심을 짚었다. 군단을 만들어놓고 쟁탈전은 계속 걸 수 있도록 시스템은 남겨둔다? 인류 연합과 본격적인 전쟁을 앞에두고 마왕군끼리 치고박고 싸우기만 한다?
아니다. 마왕은 자신의 명령에도 편법으로 싸우지 않으려는 것들을 정리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처럼 우수하고 똘똘하고 실적 좋은 자만 남기고, 나머지는 경쟁에서 도태되도록 만든 것이다.
그 말인 즉슨, 내가 꼭 탐욕의 군단과 손을 잡을 이유는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우리 군단이 당장 탐욕의 군단에게 패배하기 직전이라면 불평등조약이라도 협정을 맺었겠지만, 당장 우리에게는 탐욕의 군단이나 왕국군이나 비슷비슷했다.
결국 선택의 문제였다.
탐욕의 군단과 마왕군으로서 협력하여 왕국을 점령하느냐.
아니면 왕국 점령에 어깃장을 놓고 우리의 전공을 훔쳐가려는 탐욕의 군단을 제거하느냐.
"나는 결정했다. 다리를 안 벌려준 년을 제거하기로."
결정장애가 일어난 우리는 선택을 네비로스에게 맡기기로 결정했다. 그녀가 진정으로 나의 라스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떡정으로 맺어진 질척한 동맹이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녀가 거절하면 그에 따라 탐욕의 군단이 우리의 적이 될 뿐.
"거절했네? 그러면 방법은 하나지."
네비로스의 탐욕 군단을 물리친 존재를 파견하는 수밖에.
"미녀삼용사, 출동!"
비르고, 사지타리우스, 그리고 아리에스.
세 명의 용사는 나의 지시에 따라, 아리에스 백작령의 영지민들을 구하기 위해 우리 군단을 떠났다.
"우리는 이제 왕국을 점령하면 되는 거지. 흐흐흐."
단 세 명만을 파견한 것을 끝으로, 우리는 모든 전력을 왕도로 향하는 길에 투입했다.
"다치는 일 없이 무사히 깽판을 치고 돌아오기를."
대규모 병력을 처치하는데 있어서 셋 만큼 뛰어난 광역기를 지닌 용사는 없을 것이다.
* * *
별빛이 내린다.
야밤에 떨어지는 별똥별에 유성우는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마왕군을 덮쳤다. 탐욕의 군단 흡혈귀들은 하늘에서 달빛과 함께 떨어지는 별빛에 황급히 날개를 펼치며 몸을 피했다.
"젠장! 용사는 또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와가지고!"
인류에게 있어 갑자기 열리는 던전이 재난이라면, 마왕군에게 있어서 용사는 정말 말도 안 되는 변수다. 옷깃만 스쳐도 몸이 타들어가는 신성력을 난사하는 것만으로도 억울해 죽겠는데, 그런 용사가 무려 여섯, 일곱에 이르는 것이 어디 말이나 되는가.
"씨발, 어떻게 용사가 이렇게 모일 수 있어!"
네비로스는 비명을 지르며 병사들을 물렸다. 포위망을 구축한 흡혈좀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빛에 장렬히 산화했다. '후'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별빛은 흡혈좀비의 1/3을 휩쓸었고, '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흡혈좀비의 1/3이 분홍빛 광선에 산화되었다.
"후퇴...뭐야 이게!!"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용사들이란 말인가. 이제 한 발자국만 더 나아가면 마왕군의 승리가 확정이었는데, 정말 갑작스러운 변수의 등장에 네비로스는 손발이 덜덜 떨렸다.
"어떻게...용사라는 것들이 이렇게 갑자기 죄다 튀어나올 수 있어!"
용사라는 존재는 본디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존재다. 특히 성검 사용자는 한 명이 각성을 하면 다음 대의 각성자가 나오기까지 평균 100년을 훌쩍 넘을 정도로 텀이 길다.
"당장 백작령에서 깝치는 놈들도 억울해 죽겠는데!"
대성벽을 점령하여 넘어온 날. 네비로스는 동맹과 함께 전력을 쏟아부어 백작성으로 달렸다. 백작성을 포위하며 성을 당일에 점령하려고 했지만, 대성벽에서 시간이 걸린 바람에 마침 도착한 성녀와 용사들에 의해 포위망만 유지하는 선에서 전투가 끝나버렸다.
타우러스, 제미니, 칸세르, 심지어 갑자기 튀어나온 리브라까지. 성녀 한 명으로도 골치 아픈데 무려 네 명의 용사가 등장했다. 그리고 모처럼 승기를 잡았나 싶더니, 이제는 용사 세 명이나 나타나 군단의 병사들을 쓸어버리고 있었다.
"원거리 공격 개시! 혈마법으로 놈들을 묶어!"
고위급 뱀파이어들이 피를 엮어 채찍처럼 휘둘렀다. 아무리 용사라고 한들 몸을 구속하여 꼼짝도 못하게 만들면 그만이다. 목에 송곳니를 박아넣고 흡혈을 하면 입부터 신성력에 정화되어 타죽겠지만, 상대 용사의 몸에 뱀파이어의 피가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용사를 흡혈귀로 만들 절호의 기회. 일부러 용사들이 서로 사각이 생기도록 탈출로를 느슨하게 풀어뒀건만, 그게 오히려 독이되어 탐욕의 군단 병사들이 시시각각으로 죽어나가고 있었다.
"누가 일부러 각성시키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한 시대에 용사가 6명 이상이 나올 수 있는 건가? 네비로스는 그런 일은 결코 '없다'고 확신했다. 이건 분명 정상적인 일이 아니었고, 네비로스는 벌써 절반 이상 신성력에 소멸한 병사들에 눈물이 핑 돌았다.
"씨발...어렵게 모은 놈들인데."
신성력에 의해 소멸당하는 병사들은 모두 던전에 등록된 부하들이 아니다. 던전과는 별개로 다른 왕국이나 제국의 변두리에 열린 던전에서 납치한 인간들을 강제로 흡혈귀로 만들어 병사로 활용하고 있었을 뿐이다.
소모품이야 다시 구하면 그만이지만, 불합리한 폭력의 등장에 억울한 건 당연했다. 네비로스는 백마를 타고 성안으로 들어가는 세 명의 용사를 두 눈에 톡톡히 담았다.
"용서할 수 없...응?"
순간, 네비로스는 용사들이 탄 말들을 유심히 살폈다. 날개달린 페가수스가 아닌, 머리에 뿔이 달린 유니콘에게서 미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저거...마족아닌가?"
"군단장님! 자리를 피하시지요!!"
"...그, 그래. 일단 포위망을 물리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서일까. 네비로스는 용사가 마족 유니콘을 타고 달려왔다는 것을 이성으로는 이해했으나 받아들이지 못했다. 유니콘은 마족이 아닌 던전 주인 특유의 기운이 느껴졌으니까.
"에이, 설마."
네비로스는 소모성 병력만 소진한 채, 주력을 온전히 유지하며 병력을 뒤로 물렸다.
* * *
"안녕하세요."
"오랜만이군, 비르고."
트랄은 땀을 흘리며 말에서 내린 메어리와 포옹을 했다. 주변 용사들은 눈을 희번득 떴지만, 남녀간의 포옹이라기보다는 오랜 기간 헤어진 가족이 만나는 것 같은 분위기에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그대들도 만나서 반갑소."
"...사지타리우스."
스스로를 사지타리우스라고 밝힌 용사, 미르망은 자신이 탄 유니콘과 대비되는 검은 드레스를 입고있었다. 피부 하나 노출하지 않는 정숙한 드레스에 검은 베일, 얼굴을 가린 면사포는 미망인의 전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 쪽은...."
"이렇게 뵙기는 처음이군요."
저벅.
얼굴에 흑백의 가면을 쓴 금발의 여기사는 마찬가지로 유니콘에서 뛰어내려 트랄과 손을 맞잡았다.
"본명도, 이명도 지칭할 수 없는 자입니다. 저는 '리아스'라고 불러주세요."
"리아스, 리아스. ...음, 그렇군. 리아스."
트랄은 상대의 기색을 눈치채고 금방 정체를 깨달았다. 그리고 괜히 눈시울이 붉어져 손등으로 눈을 훔쳤다.
"정말 이렇게 만나니 감개무량하군. 형제에게 새로운 인생을 열어준 여인과 만나다니 말이야. 그 날은 여러모로 미안했네. 나도 조금 충격이어서. 그, 감옥 안에서 형제와-"
"어, 언젯적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리아스는 부끄러움에 빽 소리를 지르며 손아귀에 힘을 줬다. 트랄은 어느덧 강력해진 그녀의 힘에 눈을 반짝였다.
"크흐. 과연. 형제가 그대를 여기까지 인도한 건가?"
"그렇습니다. 그 분께서 저를 다시 태어나게 해주셨고, 이렇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는 거기에 잘 있고?"
"예."
위이잉. 리아스가 등에 걸어둔 대검이 금빛을 뿌리며 공명했다. 다른 용사들의 성검도 마찬가지로 각자 빛을 뿌리며 서로 연동되기 시작했다. 성검과 성검끼리 빛이 서로 흘러나와 하나의 줄로 이어졌고, 용사들의 눈이 각자의 빛으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어머...."
"...이걸로 상황은 대충 알겠어요."
"흐흠, 그런가. 그 때 만났던...."
"어머, 자기야. 이거 다른 사람들이 알면 난리가 나겠는데?"
용사들은 순식간에 서로의 정체를 파악했다. 특히 트랄과 함께 움직이던 일행들은 새롭게 합류한 세 명의 용사들의 정체를 깨닫고 경악을 숨길 수 없었다.
"저기요. 저만 빼고 무슨 얘기를 자꾸 하는 거예요?"
"용사들끼리 통하는 이야기."
용사들이 서로 빛으로 연결된 틈에 파고들 수 없는 유일한 존재, 성녀는 뚱한 얼굴로 새롭게 합류한 세 명의 용사에게 고개를 숙였다.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여신교단의 성녀입니다. 이렇게 먼 곳을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 분의 부름에 따라 왔을 뿐."
"그다지 멀지도 않았는데."
"말 걸지 말아요. 난 교단을 별로 안 좋아하니까."
성녀는 앞으로 내민 손을 멎쩍게 슬그머니 안으로 당겼다. 무안함과 수치심에 성녀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 그렇군요. 그래도 탈출을 도와주시는...?"
"착각하지 마세요. 우리는 마왕군을 토벌하러 온 거니까."
"...마침 잘 됐군. 이걸로 반격의 고삐를 잡을 수 있어."
"네? 자, 잠깐만요. 제가 여태까지 사람들한테 얘기한 건-"
성녀는 트랄의 소매를 붙잡았다. 그녀의 뒤에는 '용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성을 빠져나갈 것으로 생각하던 이들이 한가득 봇짐을 메고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트랄은 성검 타우러스를 뽑아 몸을 돌렸다.
마왕군이 있는 방향을 향해.
"미안하지만 퇴각 작전은 철회다. 아니, 그대로 진행해도 상관없어. 어차피 마왕군은 한 명도 이 곳을 통과하지 못할테니."
"어...."
용사들은 빛처럼 광장을 떠났다. 졸지에 홀로 남겨진 성녀를 향해, 절박한 얼굴의 사람들이 달려들었다.
"성녀님! 어떻게 된 겁니까!"
"저희는 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용사님들이 맞죠?! 그, 그런데 왜 성녀님께 그런 무례를...?!"
"성녀님!" "성녀님!"
"대답 좀 해주십시오!!"
"아, 아으...."
성녀는 군중의 틈에 파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