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7회
177일차
"색욕의 군단장 답네. 혹시 인장 때문에 뇌수에 섹스만 찬 게 아닐까?"
던전을 떠나온 네비로스는 하품과 함께 본진으로 귀환했다. 자신의 던전이 있는 대성벽 너머까지 가는 것이 아니라, 대성벽'에' 돌아왔다. 네비로스는 대성벽의 한 가운데, 붉은 융단이 깔린 넓은 방의 옥좌에 다리를 꼬며 앉았다.
"다녀왔다, 나의 권속들아."
"""오셨습니까, 밤의 군주시여."""
부하 마족들은 모두 네비로스의 귀환에 허리를 숙이며 그녀를 맞이했다. 리자드맨부터 오우거, 수인족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족들은 적안에 송곳니가 날카로웠다.
흡혈귀가 아닌 종족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모든 이들이 전부 흡혈귀였다.
"자간 던전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예상치 못한 이득이 있었고, 예상치 못한 또라이가 있었어."
"네?"
네비로스는 자신이 보고 들은 모든 것을 밝혔다. 어떤 부하는 분노하고 어떤 부하는 광소하고, 또 어떤 부하는 기가 막힌 듯 혀를 차는 등 서로 다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반응은 하나.
"색욕의 군단장이라서 그런 걸까요?"
"그러게. 인장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네비로스는 자신의 혓바닥 위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다른 부하들도 제 몸 어딘가에 있는 탐욕의 인장을 손으로 긁었다.
"다들 한 잔 하면서 이야기하지. 오늘의 피는?"
"아리에스 영지의 병사들을 사로잡아 채혈했습니다. 단련된 병사들에게서 뽑아낸 싱싱한 피입니다."
마치 인간 귀족들이 와인잔에 최고급 와인을 따라마시듯, 네비로스를 비롯한 흡혈귀들은 잔에 붉고 끈적한 피를 채우며 향을 음미했다. 혈향이 흡혈귀들의 코를 간질이자, 흡혈귀들마다 가진 탐욕의 인장이 붉은 빛을 뿌렸다.
"마왕님을 위하여. 건배."
"""마왕님을 위하여!"""
마족들은 허공에 잔을 들어올리며 피를 한 입에 들이켰다. 네비로스는 짧게 피로 입가심을 한 뒤, 본격적인 회의에 들어갔다.
"그래서 색욕에 미쳐서 제대로 대화도 불가능한 상대는 어떻게 대하면 좋을까?"
"부하 놈들도 죄다 성교에 미쳐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저희가 피에 대한 갈증을 느끼는 것처럼."
"그렇지? 분명 서큐버스 같은 것들만 주구장창 보내줄 거야."
흡혈귀와 흡정귀의 싸움. 피가 빨리느냐, 좆이 빨리느냐 하는 싸움이 발생할 가능성이 분명 높았다. 서큐버스와 뱀파이어는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먹잇감이었으니.
“주력은 오크에 드라이어드겠지?”
“드라이어드요?”
“인장이 드라이어드였어. 걔네는 조금 의외네. 그런 식으로 살려두고 말이야.”
탐욕의 군단 간부들은 슬그머니 네비로스 뒤에 있는 여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비로스와 똑닮은 여인은 십자가에 꽁꽁 묶여있었다.
“우리처럼 힘을 얻는데에는 사용하지 않나봐.”
“그냥 색욕을 채우는 데 사용하는 거 아닐까요?”
“그런 건가….”
상대 군단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네비로스는 상대가 정직한 변태인지 아니면 사기꾼인지 확인하기 위해, 마도구를 통해 잠시 어디론가 순간이동으로 다녀왔다.
“확인해봤어. 확실히 아스타로트 던전은 쟁탈전이 걸려있는 거 맞아.”
“그럼 그 말은 사실이겠군요? 마르코시아스라는 자가 하극상을 걸어서 상대하는 중이라는 게.”
“그래. 귀찮은 등위의 녀석을 상대로 제법 고생하나봐. 쯧, 그러면 사실상 지원은 어렵다고 봐야겠네.”
군단이기는 하지만 생각보다 그들의 힘은 보잘 것 없는 듯 보였다.
“그냥 우리끼리 싸운다고 가정하자. 동맹은...맺는 걸로.”
“그래도 고블린 손이라도 빌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필요없어. 고블린도 분명 음흉하게 있다가 뒤에서 엉덩이에 자지 꽂을 놈들이야. 그런 놈들을 어떻게 동료라고 믿고 싸울 수 있겠니? 됐고 우리 싸움이나 보자구.”
네비로스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테이블 위에 펼쳐진 지도를 가리켰다.
“백작성에 있는 주민들은 아직까지 농성 중이지?”
“예, 그렇습니다. 놈들이 슬슬 움직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마냥 굶어 죽을 것 같지는 않지요.”
“그래. 성이 포위된 지도 벌써 얼마나 시간이 많이 흘렀니? 비축된 식량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거덜나기 마련이야. 우리처럼 피가 주식인 것도 아니고.”
흡혈귀들은 낄낄 웃으며 전략을 가다듬었다. 아리에스 영지를 완벽하게 점령하기 위해서는 압도적인 힘이 필요했고, 탐욕의 군단은 그걸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쳐놓았다.
“모든 것은 마왕님을 위해!”
“””마왕님을 위하여!!”””
***
“건방진 년 같으니라고. 감히 꼴리는 몸을 하고 그냥 떠나?”
용서할 수 없다. 네비로스는 그냥 떠나버렸고, 생각보다 가드가 단단한 여자였다.
“젠장, 조금도 대화의 여지가 없었다니. 유감스러운 걸 넘어서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군.”
“그게 보통 정상 반응이기는 합니다.”
“다짜고짜 섹스하자고 하는데 좋아할 여자가 어디있어요? 그것도 옆에 다른 여자 끼고.”
“끙….”
군단의 주요 요인들을 불러모은 자리에서 혼나는 건 조금 무안했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네비로스가 너무 꼴리게 생긴 나머지, 나는 제대로 급발진을 하고 말았다. 일단 몸의 대화부터 나눠보자는 말을 한 나머지, 그녀는 내 자지가 진짜로 세뇌기능이 있는 걸로 착각하고 떠나버렸다.
“빡대가리가 그지 없군. 그런 말을 하면 당연히 섹스 안 해주지. 끙.”
“그러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동맹은 끝?”
“일단 네비로스가 어떻게 나오는 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음...아, 그래. 그 방법이 좋겠어.”
아무리 왕국이라는 공동의 적을
상대로 한다고 한들, 군단 끼리 꼭 서로 협력할 필요는 없다.
결국 네비로스도 내가 쟁탈전을 걸 수 있는 대상이나 마찬가지. 순순히 다리를 벌리지 않으면 강제로 다리를 벌려 싸게 만들면 그만이다.
애초에 우리에게는 동맹보다 전쟁과 승리, 그리고 약탈이 익숙하다.
“분명 자간 던전은 아리에스 영지와 이어져 있었지. 놈들은 아리에스 성을 포위하여 성 안의 인간들을 고사시키는 작전을 계획중이고.”
“예. 분명 그렇게 파악했습니다.”
자간이 보낸 드라이어드 정찰대는 아리에스 영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정확히 파악해냈다. 그리고 이제 슬슬 백작령의 인간들이 버티지 못하게 될 정도로 몰렸다는 것 또한 알아냈다.
“효율적이고 유효한 작전이지만 괜히 배가 아프군. 우리가 차지해야할 것들을 놈들이 차지한다는게.”
아리에스 영지 또한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한다. 아리에스의 유일한 혈통이 우리 군단에 있는데, 당연히 그 땅은 우리에게 소유권이 있다.
“좋아. 동맹을 맺지.”
“그러면 새로운 아군으로 영입하는 겁니까?”
“아니. 표면적으로는 동맹을 맺는다. 생각을...달리하도록 하지. 안 대주면 싸운다.”
지극히 심플한 개전 조건이었다.
“원군을 파견해달라고? 그래, 얼마든지 파견해주마.”
원군이 과연 어디에 도움이 될 지는 내일, 네비로스가 와서 어떤 선택을 내리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될 것이다.
* * *
<다음 날, 자간 던전>.
“왔군. 보지 보여줄 생각이 드디어 들었나?”
“개같은 소리하지마. 너랑 얘기하면 머리가 아파지니까 결론부터 얘기해. 동맹만 맺어. 서로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야.”
“음….”
동맹은 썩 나쁘지 않다. 하지만 동맹을 걸면서 아무런 떡고물 하나 챙겨오지 않은 건 분명 선을 많이 넘는 행위였다.
“진짜로 알동맹을 맺을 생각 없나? 아니면 동맹을 맺은 기념으로 도장을 찍어야 하지 않겠어? 자궁구에 귀두 도장을 찍는 건 어떠냐?”
“싫어. 내가 뭐하러 너랑 섹스를 하니?”
네비로스는 단호한 목소리로 나와의 동맹을 거절했다. 당연히 내가 뒷배로 설정한 분노와 오만의 군단과도 동맹을 체결했다.
“진짜 섹스 안 해?”
“한 번 만 더 섹스 얘기를 꺼내면 동맹이고 뭐고 싸울 줄 알아. 같은 군단끼리 왜 자꾸 그렇게 나를 못 먹어서 안 달이야?”
“라스….”
같은 마족끼리 인류를 상대로 연합하여 대의를 위해 힘을 합치자는, 마왕에게 충성을 바치다 못해 모든 것을 마왕을 위한다는 네비로스의 뜻은 나와 그다지 잘 맞지 않았다.
내게 있어서 마왕은 언젠가 넘어야 할 산이자 철저하게 이용해먹을 상대.
“너도 마왕님의 던전 주인으로 은혜를 입었으면 갚을 생각을 하란 말이야!”
하지만 네비로스에게 있어 마왕은 신이요 빛이여 진리였다. 같은 대상을 상대로 서로 바라보는 시각이 명백히 다른 것에 나는 괜히 씁쓸했다.
“씨발. 섹스 한 번을 안 해주네. 야! 같은 대의를 가진 동지끼리 섹스 한 번 못 하냐?!”
“자꾸 섹스, 섹스. 색욕의 인장에 머리가 오염이라도 된 거야? 흥, 대화가 도무지 통하지 않네. 나 간다.”
네비로스는 사라졌다. 그녀는 자기 할 말만 하고 그냥 떠나버렸고, 나는 미리 생각해뒀던 플랜 A를 작동시켜야 했다.
대주지 않았을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결론은 이미 나와있다.
“원군을 보내겠다.”
왕국에. 딱 세 명만.
"대주지 않으면, 강제로 취해버리겠어."
* * *
<그 시각, 아리에스 백작령 하말 성>.
"...정말 살아서 도망칠 수 있을까?"
아리에스 백작령의 주민들은 모두 침통한 얼굴로 배낭을 움켜쥐었다. 살기 위해 집과 모든 재산을 버려두고 최소한의 물건만 챙겨 도망치는 이들에게는 희망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저 짙은 절망과 좌절 뿐.
마왕군이라는 재앙의 앞에서 인류는 한낱 부평초처럼 떠돌아다닐 수 밖에 없었다. 설령 용사에 성녀까지 와서 돕는다고 하더라도.
"갑시다, 여러분. 왕도까지 가면 분명 방법이 있을 겁니다!"
성녀는 주민들을 다독이며 위로했다. 도착하고 나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난민들은 어떻게 지낼 것인가? 무작정 왕도로 가면 그들이 과연 받아줄 것인가? 온갖 걱정들이 앞섰지만, 당장 등 뒤에서 날아오는 마왕군의 공격을 피하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었다.
일단 마왕군의 공격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포위망을 뚫을 수 있는 건 지금 뿐이고, 성녀와 용사들은 탈출을 결정했다.
결정에 따르지 않으면 아사할 뿐. 백작령에 원군은 오지 않았다.
"여기 인간들은 버림받은 거네."
"타우러스. 너 혹시 아는 거 있나? 원래 이곳에 있던 용사인 변경백의 소실에 관해서."
"......나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나는 저들에게 은혜를 입었다는 것이다."
트랄은 영지민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폈다. 그가 변경백의 도움으로 아리에스 영지에 있을 때, 괴상망측한 투구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을 때 아무 편견없이 그를 돌봐준 이들이었다.
"은혜를 입었으면 반드시 갚을 것. 아아, 그것이야말로 사람된 도리라고 할 수 있지."
"너 사람 아니잖아."
"인간이기 이전에 한 명의 지성체로서 하는 말이다. 그나저나 성녀, 생각보다 사람들을 잘 다독이는 군."
용사들은 피난민들을 다독이는 성녀를 멀찍이 지켜보며 표정을 굳혔다. 성녀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피난의 당위성을 언급하며 믿으라고 돌아다니는 통에, 그녀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과 신뢰는 더욱 확고해졌다.
"저를 믿고 따라와주십시오, 여러분! 성녀의 이름으로 반드시 여러분들을 지켜드릴 겁니다! 여신께서 굽어살펴주실 겁니다!"
"오오, 성녀님 만세!!"
영지민들은 성녀를 연호하며 희망의 불씨를 태웠다. 성녀의 뒤만 따라가면 살 것만 같은 환상에 빠지는 것만 같았다.
"타우러스, 저러면 성녀만 좋아지는 거 아니야? 그래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거야?"
"성녀에 대한 대중의 인상이 좋아진다고 한들, 일단 지금 당장은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용할 건 이용해야지. 내 형제가 그러더군.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개똥이라도 필요하면 써야한다고."
"개똥...푸흡. 그래, 그래. 일단 나중에 생각하고, 지금은 사람들 구하는데 집중하자 이거지? 알았어."
"하지만 자기야, 그러기에는 지금 전력이 부족한 걸?"
리브라는 성검의 끝으로 바닥을 그어 피난민의 행렬을 그렸다. 길게 쭉 이어진 행렬을 중심으로 네 방향으로 퍼진 성검의 용사들은 각자 위치를 사수하였으나,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이 없잖아 있었다.
"으으...우리가 조금만 더 광역기를 쓸 수 있었다면."
"어째 죄다 대인전에 특화된 이들만 모였군 그래."
"이대로 가다간 우리가 싸우는 동안 우리를 피해서 피난민들을 습격할 거야. 어떻게 하지?"
용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던 순간, 모두의 성검이 부르르 떨렸다. 어디선가 느껴진 비슷한 기운에 용사들은 씩 미소를 지었다.
"역시!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지!"
"......변경백."
트랄은 멀리서 느껴지는 기운에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딸에게 모든 걸 맡기는 길을 선택한 건가. 그리고...."
멀리서 느껴지는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인 기운에, 트랄은 쓰게 웃으며 타우러스를 집어들었다.
"......나의 위험을 알아채고 나를 도우러 자신의 소중한 이들을 보내다니. 역시 형제다."
백작성 너머.
세 명의 여인들이 페가수스와 유니콘을 타고 마왕군의 포위망을 뚫고 달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