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회
172일차
축제는 끝났다.
우리는 하루동안 질펀하게 먹고 마시고 싸고 지리며 축제를 즐겼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살아남은 성기사단에 경례."
나는 우리 던전에서 탈출한 성기사들에게 가는 동안 먹을 건량을 제공하고 옷을 나눠줬다. 휘황찬란한 갑옷은 전부 벗어던졌지고 누더기를 걸쳤지만, 성기사들의 내의는 모두 우리 군단 최신 스타킹과 타이즈로 몸을 따뜻하게 해주고 있었다.
"이 옷은 정말이지 신기하군요. 이렇게 얇은데 이렇게 따뜻하고 단단하다니."
"아아, 스타킹은 위대하기 때문이다."
성기사들이 입고 있는 누더기 또한 겉면을 덕지덕지 기워놨지만, 저게 다 스타킹을 만들고 남은 천쪼가리로 만든 빈티지 로브다. 그들이 입고 왔다가 전투로 걸레짝이 된 갑옷과 비교하면 방어력은 10% 정도 낮을 지 몰라도, 무게는 1/10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가벼웠다.
장거리 이동에 있어서 어차피 걸레짝이 된 옷을 입어야 한다면, 당연히 누더기지만 더 실용적인 쪽으로 입고가는 편이 더 나았다.
"크험. 추기경이여,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있기를 바라지."
"물론입니다, 동지. 이단이 있는 곳에서 다시 만나기를 바랍니다."
나는 퀘르벨스와 두 손을 맞잡고 악수를 나눴다.
오크와 인간으로 서로 종족도 다르고 진영은 다르지만, 여신의 말을 따른다는 것에 더불어 타도 성녀라는 기치 아래에 의기투합한 우리는 이 세상 그 누구도 모를 동맹이 되었다.
"라그비아 대사제는 죽음과 대머리가 두려워서 인류를 배신한 자."
"후작령에 에스테라스가 퍼진 이유는 성녀가 다녀갔기 때문."
"사람들이 성녀의 음몽을 꾸는 것도 다 성녀가 저지른 원죄에 대한 천벌이기 때문."
"성녀는 그저 신성력을 많이 가지고 있는 존재일 뿐, 진짜로 여신의 계시를 받은 건 아니다."
"인류가 진정으로 여신의 보살핌을 받기 위해서는 당신의 말씀을 왜곡하고 세상에 잘못 퍼뜨리는 성녀를 화형시켜야 한다."
"이단은 화형. 그것이 이단심문관으로서 반드시 해야할 일."
퀘르벨스는 세례명 답게 성녀를 처리하는데 있어서 선날승을 서슴지 않았다. 그의 배경을 듣지 않았다면 진심으로 그를 내 동지이자 부하로 영입하고 싶었을 정도로 그는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서로 이용하는 셈이지만.'
이독제독.
그는 나를 이용해 성녀를 제거하려고 하고, 나는 그를 이용해 성녀를 따먹으려 한다. 기묘하게 들어맞는 서로의 목적과 이해관계에 따라,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마지막 맹세를 나눴다.
"라스토피아를 위해."
"모든 것은 사랑이 넘치는 세계를 위하여."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서로 싸우지 말고 사랑하여, 이 세상 널리 사랑의 결실을 퍼뜨리라."
"성녀를 제거함으로써, 진정으로 그 분의 말씀이 지상에 드리워지기를."
내가 바라는 것과 추기경이 바라는 것은 서로 다르지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마왕군의 장군이자 군단의 주인으로서, 이단심문관이자 여신교단의 추기경으로서.
"가는 길 배고프지 않도록 육포 많이 넣어뒀으니 아끼지 말라."
"걱정마십시오. 이 주는 거뜬히 행군해도 될 정도로 충분한 양입니다."
이 주.
던전에서 탈출한 성기사단이 '세뇌되지 않은 엘프 게릴라의 도움을 받아' 엘프의 숲을 가로질러, 비르고 영지의 '억압받는 주민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산맥을 지나 이웃 영지인 리브라 령에 도착하기까지의 시간이다.
"최대한 빨리 도시로 가서 사람들에게 알려야하지 않겠습니까. 이 곳에 있는 마왕군의 힘을."
한 달 정도 느긋하게 움직이는 것도 한 방법이기는 했지만, 추기경을 비롯한 성기사들은 재빨리 교단에 알려야 할 중요한 정보가 있었다.
남작가와 후작가를 점령한 마왕군은 인류를 세뇌하여 노예로 삼고 있다!
엘프 여왕도 오크에게 세뇌를 당했다!
심지어 용사들마저도 오크에게 세뇌를 당했다고 하더라!
굳이 엘프와 용사들이 세뇌에 걸린 척 사람들을 속이는 이유는 별 거 없다.
'세뇌 작전이 제법 쏠쏠하게 먹히니까.'
세뇌를 풀어보겠다며 덤벼드는 어중이 떠중이들을 사로잡기 위한 것 이외에는 별다른 목적은 없었다. 어차피 인간들은 하나 둘 우리 군단의 영토를 찾아들 것이고, 어차피 끌릴 어그로라면 거하게 끌리는 게 훨씬 더 나았다.
"이제 슬슬 스스로를 '용사'라고 칭하는 놈들을 처리할 때가 되었지."
100레벨 용사들이 아니라, 막 목검을 들고 정의를 실천하겠다며 제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나뒹구는 불나방들을 사로잡을 때가 되었다.
"혹시 뭐 말하고 싶은 거 있나?"
"라그비아 대사제는 가급적 죽이지 말아주십시오. 잘못된 이의 말을 따르기는 했지만 그 또한 여신님의 신자. 언제든지 회개하여 갱생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잔인하군. 내가 그를 어떻게 다룰 지 알면서 말이야."
퀘르벨스는 쓰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나는 일부러 대답을 하지 않는 그를 보며 새삼 그가 참 평범한 사람답지 않다는 걸 다시 한 번 더 느꼈다.
'솔직히 라그비아도 성기사단이 구출한 척 보내도 되는데.'
성기사들을 조롱하는 데 쓴 것으로 라그비아 대사제는 쓸모를 다했다. 리치가 되니 뭐니 하는 선동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문제지만, 퀘르벨스는 그걸 성녀를 몰락시키는 데 이용하려고 했다.
라그비아 대사제가 성녀의 파벌이라는 이유로.
대쪽같은 절개를 가진 그가 아무리 성기사단에 의해 구명을 받았다고 한들, 잘못된 교리를 믿으며 성녀를 지지할 거라는 이유로 라그비아는 퀘르벨스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일단 맡아뒀으니 잘 키워보도록 하지. 여신의 뜻에 따라 죽기 전까지 세상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갈 수 있도록 갱생시켜주마."
"좋은 마음가짐입니다. 동지."
"물론 본인이 갱생을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라그비아는 인류를 배신한 쓰레기가 되겠지만 말이야. 흐흐."
라그비아 대사제가 인류를 배신한 이유는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
늙은 노인이 불로불사를 바라다가 잘못된 선택을 내리는 건 으레 있는 일이다. 고트다이할이 흑마법에 심취했다는 선동을 퍼뜨릴 때도 불로불사는 제법 잘 먹혀들었고, 특히 '리치'로 다시 태어난다는 낭설은 상당히 그럴 듯 했다.
"그래도 대사제인데 라그비아를 이렇게 우리가 맘대로 해도 되는 건가?"
"라그비아는 다시 태어나야합니다. 이미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 어차피 다시 태어나면 오명을 전부 씻어내릴텐데, 그 전까지 오명을 계속 뒤집어 쓰더라도 문제될 건 없지요."
"역시 너는 퀘르벨스다. 가차없군."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모든 것은 이단을 처단하기 위하여."
퀘르벨스의 생각은 이해하기가 다소 난해했지만, 그의 생각은 결과적으로 내게 이득이 되는 방향과 합치되었기에 별다른 태클을 걸지 않았다. 이해하려고 들지 않고, 이용하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남아있는 성기사들도 우리가 멋대로 사용할 것이다. 나중에 왔을 때 동료가 전부 마석이 되어버렸어도 뭐라고 하면 안 된다?"
"후후, 그건 조금 선처해주시길 바랍니다."
"농담이다. 내가 설마 성기사들을 죽이기야 하겠어?"
"좋아 죽게 만드시겠죠. 흐흐."
나와 퀘르벨스는 손을 가볍게 흔든 뒤 몸을 돌렸다. 나는 던전으로 돌아가고, 그는 가장 가까이 있는 도시의 교회로 가야만 했다.
"다음에 만날 때는 다른 모습으로 만나기를 기대하지."
"...달빛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응?"
"언젠가 알게 되시는 날이 올 겁니다. 군단장."
퀘르벨스는 하늘을 가리키며 몸을 돌렸다.
"부디 오래, 오랫동안 살아서 저곳에서 다시 만나기를."
"......."
왠지 무시무시한 소리를 들은 것 같지만, 나는 흘려넘기기로 했다.
* * *
"......예하. 정말로 괜찮은 겁니까?"
"예. 물론. 그는 믿을만한 존재입니다. 그에게 내려진 가호가 그 증거입니다. 그대도 느꼈죠?"
"예. 가브리엘 님의 가호가 있었지 않습니까. 그것 때문에 추기경께서 후작령까지 오셨기도 하고요."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왜 마족에게 대천사의 가호가 있나 싶었는데, 역시 그 분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기도는 만물의 권리. 설령 마족이라고 한들 신의 말씀을 따르고 실천한다면, 그가 바로 그 분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제이자 천사가 아니겠습니까."
오크가 대천사라. 추기경의 말에 바이스는 멎쩍게 웃었다. 오크의 자지에 13장 날개의 대천사가 자지러지는 건 본 적이 있어도, 오크가 알몸으로 날개를 펼치고 하늘로 승천하는 것은 선뜻 떠올리기 조차 싫었다.
"어휴. 이러다가 나중에 여기에 여신교단의 교회라도 세우시겠습니다."
"그 건에 대해서는 이미 얘기가 끝났습니다. 여신교단이 진정으로 다시 태어나는 날, 라스토피아의 땅에 교구를 편성하기로. 스스로를 여신의 재림이라고 부르는 자 같은 사이비를 제외하면, 가급적 그 어떤 종교도 박해하지 않겠다 약속을 받았습니다."
"...여신교단도요?"
"예. 여신교단도. 심지어 교회도 직접 지어준다고 하더군요. 여신님을 기리는 여신상도 만들어준다고 했습니다. 아아, 저 들으라고 하는 건지 몰라도 입 발린 소리였지만 듣기에는 정말 좋더군요."
"......입 발린 소리가 아니라 진짜로 할 것 같아서 무섭습니다만."
"후후. 그랬으면 더 좋겠군요."
퀘르벨스와 바이스는 선두에서 단 둘이 대화를 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의 뒤를 따르는 성기사들은 묵묵히 둘의 뒤를 따르며 숲을 헤치고 나아갔다.
"그런데 말입니다, 추기경 예하. 정말 무슨 바람이 들어서 그 자에게 가호를 내려준 걸까요. 가...님은."
"저런. 옆에서 그렇게 보고도 모르시겠습니까? 그의 옆에 있던 그 천사 말입니다. 13장의 대천사."
"...그 마석 낳던 타천사 말씀이십니까?"
바이스는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내비쳤다. 성기사들이 궐기를 일으킨 계기는 다름 아닌 '루시펠'이라는 이름의 타천사가 오크와 통정을 하여 마석을 낳는 걸 세이지라는 성기사가 봐버렸기 때문이었다.
- 흐아앙! 주인님 자지 덕분에 여신님 곁으로 가버려어어엇!
성서에서 보던 천사의 이미지가 상스러워진 순간이었다. 천사이기 이전에 한 명의 여인이 되어버린 대천사를 비롯하여, 온갖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타천사에 바이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지를 직접 넣어봤더니 천사나 엘프나 다를 게 없더라.
"정말 그 타천사, 누구 날개에서 태어난 존재인지 궁금합니다. 천사들은 날개에서 태어난다고 들었는데. 으으."
"날개가 아닙니다. 자궁에서 태어난 존재입니다."
"...예? ......천사 님들은 날개에서 날개로 이어지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배웠...."
"당신은 모를 수밖에 없지요. 다들 쉬쉬하던 일이니까. 그냥 흘려들으세요."
퀘르벨스는 검은 로브 안주머니에서 사자의 육포를 하나 집어 입에 물었다.
"예전에 마왕 솔로몬이 한창 현역으로 뛰어다닐 때, 한 천사가 솔로몬에게 붙잡혔던 적이 있습니다. 기억합니까?"
"예. 모두가 죽을 줄만 알았던 그 분께서 1년만에 던전을...도망쳐 나왔...."
바이스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자신들 또한 던전을 도망쳐 나왔고, 그 대가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성기사로서 가진 우수한 씨를 곳곳에 뿌려 빠져나올 수 있었다. 생존을 위해 마족과의 번식을 선택했다. 사실 그게 여신께서 바라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런 겁니다."
"아, 아니. 잠시만요, 예하. 그게 가능합니까? 그러면 설마 마왕과 대천사의 딸이...."
"거기까지. 그만하면 됐습니다."
퀘르벨스는 피식 웃으며 육포를 마저 입에 집어넣었다.
"그 이상 얘기하면 하늘에서 푸른 번개가 떨어질 겁니다, 바이스 경."
"그럼 그걸 제게 말씀해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천벌에 맞아 죽으라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바이스는 생명이 위태로워진 것에 조급함을 보였다. 퀘르벨스는 나지막하게 웃으며 앞을 턱으로 가리켰다.
"......여러모로 당신은 우수한 인재입니다. 과감한 결단력, 신실한 신앙심, 그리고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조차 사랑하는 배려심을 가진 존재죠."
"아, 그거야 그...."
"계속, 함께갑시다. 후후. 하늘을 그렇게 꽉 막힌 곳이 아니라, 당신이 바라는 대로 지낼 수 있을 겁니다."
퀘르벨스의 말에 바이스는 입을 쩍 벌리며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벙찐 바이스의 옆으로 성기사들은 은근히 부러운 눈치로 그를 제치며 앞으로 나아갔고, 바이스는 한동안 가만히 서있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뒤를 따랐다.
"하 씨. 저 양반 밑에서 평생을 일해야한다고...?"
바이스는 실실 웃으며 후미에서 발걸음을 옮겼다.
"......흐흐, 죽어서 지옥갈 일은 없겠군."
바이스는 생각하기를 포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