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비만 오크-609화 (605/800)

609회

172일차

"부어라, 마셔라, 넣어라, 싸라!"

축제는 도시 곳곳에서 진행되었다. 사치와 향락의 도시, 라스베가스는 우리 군단의 주민들을 비롯해 우리 군단의 병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술과 음료, 그리고 서로의 육체를 즐기며 승전의 축제를 벌였다.

먹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먹고, 마시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마신다. 창고를 털어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후작성 점령을 축하하는 축제는 라스베가스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축제의 꽃은 뭐니뭐니해도 술.

남작령, 백작령, 그리고 후작령을 점령하며 약탈한 술과 고기를 모조리 긁어모아, 우리는 라스베가스에서 사치와 향락을 벌였다. 성 안에 숨겨져 있던 수 십년 묵은 와인을 병나발 째 입에 대고 마시는 건 예사였고, 몇몇은 토기를 구워 만든 장독대에 고개를 처박고 빠져나올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대도 한 잔 받지."

"고맙습니다, 동지."

나는 상처를 치료한 퀘르벨스에게 음료를 건넸다. 우리 군단의 성적 기능이 함유된 음료가 아니라, 내가 이 세계에 넘어와 라스베가스를 점령하며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끝에 만들어낸 아주 좋은 음료였다.

"이것은...무엇입니까?"

"아아, 막걸리라고 하는 것이다. 넘쳐나는 밀을 어떻게 좀 해볼까 고민하다가, 한 번 만들어봤지."

이 세계의 와인이나 맥주와 비교하면 조잡하기 짝이 없는 탁주에 불과했지만, 막걸리는 만드는 방법이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마액은 아니죠?"

"크흐, 아무리 그래도 내가 남자 상대로 마액을 줄 것 같으냐?"

"그럼 감사히 잘 마시겠...푸흡. 이거 술이군요."

"크하하하! 그래! 추기경 예하께서 마시기에는 싸구려같은 술이지."

쌀로 만든 막걸리도 아니고 밀로 만든 막걸리였다. 라스베가스 인근의 밀밭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수확하고 남은 것들로 빵말고 다른 걸 만들어볼까 하다가 만들어낸 우연의 산물이었다.

"밀을 쪄내고 누룩을 섞어서, 오랜 시간 발효한 다음 천에 걸러서 만든 술이지. 어떠냐? 생각보다 달콤하지?"

"술이라서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확실히 새로운 맛이군요."

추기경은 막걸리를 연신 홀짝이며 맛을 음미했다. 일부러 술잔도 로도페리에게 부탁해 놋쇠그릇마냥 만들어, 한 입에 전부 들이켜도 될 정도로 만들었다.

"누룩과 밀을 쪄서 발효시킨 다음, 그걸 천에 걸러내는 것이다. 아, 참고로 무슨 천을 썼는지 얘기해줄까?"

"뭘 썼습니까?"

"스타킹. 크하하하! 거 참 잘 걸러지더구나. 물론 새 스타킹이니 안심해도 좋다."

유감스럽게도 엘프가 입던 스타킹으로 거르니 막걸리에 예상치 못한 향이 섞여들어가더라. 한 번도 쓰지 않은 스타킹 천으로 짜낸 막걸리는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았고, 축제는 더욱 열기를 더했다.

"으하하하! 야, 엘프 여왕! 승부다! 누가 더 술이 센 지 붙어보자고!"

"꺄아아! 누가 드워프 년들한테 술 먹인 거야?! 야, 로도페리! 얘 당장 떨어뜨리지 못 해?!"

"드워프들이여! 오늘은 섹스가 아니라 술로 승부다!"

"술판인가?! 우리도 끼지! 끄어엉!"

나의 부하들도 오늘만큼은 서로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술판에 합류했다. 바이스를 비롯하여 '살아남을 예정'인 성기사들도 갑옷을 벗어던지고 와인과 막걸리로 폭탄주를 만들어 드워프들과 대결을 벌였고, 미노타우르스들도 합류해 술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음냐, 주인님...."

"쮸릅."

새액, 새액.

나는 내 옆에 달라붙은 세 명의 여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불과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내 자지를 빠느라 정신이 없던 륜, 라임, 에일라는 마치 수면제를 마신 것 마냥 잠들었다. 본인들이 잘 의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 한 마디로 마신의 딸, 하이엘프 공주, 거기에 용사까지 재우다니. 그건 무슨 방법이지?"

"후후, 단지 부탁을 했을 뿐입니다. 이제 그대와 조용히 이야기할 시간이 지금 뿐이니."

추기경과 한 번 더 잔을 부딪혔다. 술판이 벌어지는 가운데, 그 누구도 나와 퀘르벨스 사이에 다가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마치 세상에서 나와 그만 유리된 것 마냥.

'결계인가.'

나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퀘르벨스의 눈동자가 은빛으로 빛나고 있는 이상, 이제는 이런 상황에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편이 정신건강에 더 좋았다.

"좋은 곳이로군요. 서로 다른 종족들이 하나가 되어 사는 세상이라니."

"바깥에서 보면 결코 용납받을 수 없는 곳이지만 말이야."

인간, 수인, 엘프, 마족, 천사. 인류연합과 마왕군이라는 진영으로 나뉘어져 있는 세상에서 모두가 서로 차별없이 살아가는 사회라는 건 양쪽에게 배척을 받는 회색지대나 마찬가지다. 흑과 백으로 나뉘어진 세계에서 회색으로 살아가는 건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여신께서 진정으로 바라시는 모습이 아닐까?"

"맞습니다. 싸움과 다툼이 없는 세계. 여신께서 바라시는 평화야말로 어쩌면 이런 모습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래. 지금의 여신님께서는 이런 것 보다 다른 걸 더 바라고 계실테지만."

"그러게나 말입니다. 여신님은 그냥...크흡.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와 퀘르벨스는 잔을 부딪히며 본색을 드러냈다. 내가 알고 있는 것과 퀘르벨스가 알고 있는 것을 서로 떠볼 필요도 없었다.

"여신께서 내게 꿈으로 속삭이셨다. 마왕을 따먹기 위해 네가 도와줘야겠다면서."

"세상 누가 알겠습니까. 마왕이 실은 여신에게 따먹히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는 거라는 것을."

"오, 다 아는 구만?"

"그거야 여신께서 '직접' 제게 말씀하셨으니까요. 으아아, 솔로몬 따먹고 싶다! 라고요."

막걸리 잔에 비친 추기경의 눈은 여전히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역시 나의 예상대로, 그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신성력이 느껴지지 않지만 생각하는 게 비범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보통 인간은 아니군."

"후후, 지금은 보통 인간입니다. 단지 모든 걸 버리고 직접 내려왔을 뿐."

퀘르벨스는 막걸리를 한 번 더 홀짝이며 한숨을 토해냈다. 처연한 그의 모습에는 세파에 찌든 중간관리직의 모습이 얼핏 눈에 스쳤다.

"퀘르벨스라는 건 세례명입니다. 교단에 귀의하며 받은 이름이죠. 이전의 이름은 메타트ㄹ...아뇨, 의미는 없죠. 이미 그 이름은 버렸으니. 한 대 피워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근데 나는 안 핀다. 애들 키스할 때 냄새나면 싫어하거든. 연기 이쪽으로 오게 할 생각하지마라. 임신한 몸에 안 좋아."

"흐흐. 예, 예."

퀘르벨스는 잎을 돌돌 만 연초를 태웠다. 하얀 연기는 기이하게도 향처럼 하늘로 곧장 치솟아올랐다.

"여신께서는 말입니다. 지상에 전혀 관심이 없으십니다. 그분의 힘으로 인간들이 무슨 짓을 하든 관심이 없으시죠."

"그렇기는 하지. 신은 모두에게 평등해야만 하니까."

"지상을 관리하는 것은 오로지 천사들의 몫. 신성력을 각성한 이들은 여신이 아닌 천사들이 내려준 축복입니다. 여신께서 지상에 관심이 없었기 덕분이라고 하면 이상하긴 하지만, 세계는 나름 평화로웠습니다.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말이죠."

"100년인가."

'마왕군'이 인간계에 등장한 시기와 미묘하게 맞물리는 시기다. 내 의문이 담긴 눈초리에 퀘르벨스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흑마법사가 이계의 존재를 소환하는 짓을 저지르게 됩니다. 세계의 섭리를 거스르며, 세계를 멸망시키기 위해 부른 한 존재는 오히려 흑마법사를 잡아먹고 세계에 정착하게 되죠. 그리고 그는 중간계에서 마계로 도망쳐, 마계의 왕이 되었습니다."

"솔로몬이구만."

"예. 그는 자신의 세력을 불려, 마계를 재패한 다음, 천계를 점령하기 위한 교두보로 인간계를 선택했습니다."

"마계도 있는 건가."

"안심하십시오. 마계는 멸망했습니다. 천사들은 인간계로 넘어오려는 마족들과 대전을 벌였습니다. 뭐...사람들이 천마대전이라고 부르는 전쟁은 천사들의 승리로 끝났고, 마왕은 고작 슬라임 한 마리 챙겨 인간계에 숨어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번에 인간계에 있는 세력들을 흡수하여 세력을 키웠죠. 소위 던전이라고 불리우는 마법을 통해서."

"......."

과연 추기경의 말이 모두 진실일까.

대략적으로 얼추 들어맞는 것도 있지만, 일부 내가 알고 있는 것과는 배치되는 것들이 분명히 존재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관심도 없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나는 과감히 퀘르벨스의 잔에 막걸리를 한 가득 채워넣었다.

"추기경이여. 나는 고리타분한 역사에는 관심이 없다. 내가 곧 라스토피아의 역사가 될 것이니."

"후후, 알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는 여신님을 사로잡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게 불가능 한 것도 아니지요."

"......뭐?"

퀘르벨스는 담뱃불을 바닥에 비벼 꺼뜨렸다.

"여신님께서는 당장이라도 솔로몬을 이계로 되돌려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솔로몬을 이계로 보내지 않는 이유야...뭐 아시겠죠?"

"오, 오우."

솔로몬의 여신을 따먹고 죽빵을 날려도 나는 인정하기로 했다. 여러모로 충격적인 말을 추기경으로부터 듣게 되었지만, 이미 어느정도 샤이탄과 논의를 통해 대충은 짐작하고 있던 내용들이라 너무 놀랍거나 하지는 않았다.

"널리 세상에 사랑을 퍼뜨려라."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여신과 마왕이 세계구급 규모의 사랑 싸움을 벌이건 말건, 나는 그 둘 사이에서 적당한 줄다리기를 하며 내 세력을 늘려가면 그만이었다.

마왕도 나를 이용해먹으려고 하고, 여신도 나를 이용해먹으려고 하니, 나는 양쪽에 박쥐처럼 발을 걸치고 내가 챙길 이득만 챙기면 그만이었다.

"이걸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되지?"

"거의 없습니다. 지상에는 저 한 명. 천계에서도 여신님의 최측근인 3대 천사, 마계에서는 마왕과 그 옆을 보좌하는 마신 바알 정도가 되겠군요. 그리고 이제 당신입니다."

"......내 몸값이 아주 천정부지로 뛰어오르는 소리가 들리는 구만."

고작 3성 오크였던 내가 세계의 전황을 좌지우지하는 존재가 되어버리다니. 술 기운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괜히 전신이 짜릿했다.

"어느쪽의 편을 들든 나는 내 뜻대로 하겠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다만, 여신님의 뜻을 곡해하는 그 년 만큼은 반드시 처단하여 주시리라 믿습니다."

퀘르벨스의 눈에는 명백한 '증오'가 서려있었다. 마왕이나 마족에 대해서도 아무 편견없이 이야기하던 그가, 유독 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할 때만 되면 적개심을 숨기지 않았다.

"한 가지 물어보도록 하지. 성녀는 도대체 무슨 존재지?"

"대천사가 마왕을 죽이기 위해 이계에서 불러온 존재입니다. 평범한 여자에게 자신의 신성력을 불어넣어, 마치 자신이 여신인양 사기를 치고 있는 겁니다."

"뭐? 여신은 그걸 가만히 보고 있나?"

"여신께서는 지상에 관심이 없으시니까요. 오크가 여신의 뜻이랍시고 숱한 여인들을 범하고 사기치고 다니는 것도 눈감아주시는데, 자기 직속 천사가 여신인 척 한다고 딱히 뭐라고 하실 분은 아닙니다."

"끄응.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군."

비범하다고 해야할까, 아니면 또라이라고 해야할까. 어느쪽이든 정말 '신' 답다면 신 다웠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감히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존재를 지상의 존재가 판단의 잣대를 들이밀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말이야, 그런 걸 알고 있으면서 왜 지상에 내려온 거지? 굳이 추기경이라는 이름까지 달고 말이야."

"하늘에서는 직접 개입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직접 내려와서 전파하는 방법밖에 없지요. 그리고...."

퀘르벨스는 처연한 얼굴로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그분과 마왕의 싸움으로 인해 지상의 존재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 지. 아무 힘이 없는 인간들이 얼마나 고통을 느끼는지 알고자, 평범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다행히 제가 알고 있는 그 분의 말씀이 교리와 통하는 부분이 있어, 추기경의 자리에 까지 올랐죠."

"근데 이상하군. 아무리 인간이 되었다고 하지만, 신성력이 있었으면 더 쉬웠을 텐데? 성녀를 상대로도 우위를 점할 수 있고."

드래곤에게 드래곤하트가 있는 것처럼, 신성력도 결국에는 하나의 '힘'이기에 힘이 저장되는 곳이 있다. 아무리 퀘르벨스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한들, 성검의 용사와는 비교도 안 될 신성력을 가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날개는 보이지 않는데."

"대천사에게 날개는 신성력으로 발현되는 힘입니다. 그리고 그 힘은 생명의 근원에 있죠. 신성력이 조금도 없는 인간의 눈으로 보고자, 저는 제 힘의 원천을 떼어놓아야만 했습니다. 애초에 지상으로 내려오는 조건이 신성력을 반납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설마."

나는 퀘르벨스, 그의 희생에 그만 지릴 뻔 했다.

"스스로 잘라냈습니다. 제 의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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