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비만 오크-608화 (604/800)

608회

172일차

성기사단, 반멸.

전멸이 아니라 반멸인 이유는 딱 절반만 제압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흐르는 강물을 따라 달려와 성기사단이 제압되어 일렬로 나열되어있는 곳에 이르렀다.

"흐흐, 아주 미끼를 덥썩 물었더구나."

"으으읍!"

성기사들은 슬라임들에 의해 사지가 제압당한 채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등 위에는 슬라미아들이 몸을 길게 늘어뜰이며 성기사들을 누르고 있었다.

"주인님, 미끼를 잡아왔습니다."

"퀘르벨스라고 했지? 흐흐, 이 녀석. 꼴에 기사들 살리겠다고 깝쳤지만 헛수고다. 흐흐."

나는 퀘르벨스 추기경을 붙잡아 뒤로 던졌다. 슬라미아 한 명의 몸에 안착한 그는 여전히 정신을 잃은 채 깨어나지 못했고, 슬라미아는 작전대로 퀘르벨스의 몸을 만지작거리며 음흉한 미소와 함께 라스베가스로 떠났다.

"으, 으으...!"

성기사들은 떠나가는 추기경을 향해 눈물을 흘리며 침통해했다. 자신들을 이런 곳으로 몰고들어간 장본인이 바로 퀘르벨스라는 것 조차 알지 못한 채, 성기사들은 라그비아가 나쁜 놈이고 퀘르벨스가 실은 좋은 놈이었다고 착각하게 되었다.

'실은 반대지만.'

라그비아와 퀘르벨스의 선악 반전 작전은 멋드러지게 성공했다. 이제 레비즈 안 다이할 형에 처해질 자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냐 싶다만.

"흐흐, 라그비아 대사제가 너희를 팔았다. 멍청한 성기사 놈들."

"그럴...!"

"후작성을 점령하던 때, 중간에 서큐버스들이 걸렸을 때 얼마나 노심초사 했는지 몰라. 다행히 라그비아 놈이 안에서 도와줬으니 망정이지...흐흐. 뭐, 지나간 일을 말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너희들은 죽은 목숨인데."

"크윽!"

왜 악역이 다 이긴 상황에서 조잘조잘 나불대는지 알 것 같다. 나의 뜻대로 움직여 정확히 당한 이들의 앞에서, 억울해하고 분노하는 표정을 보고 있자니 절로 등허리에 짜릿한 전류가 흘렀다.

'패자를 향한 강자의 특권.'

진 사람을 상대로 인성질을 할 수 있는 것도 우리가 이겼기 때문이다. 물론 그로 인해 역전의 기회를 마련하게 해주거나 상황이 뒤바뀔 수도 있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런 일이 전혀 없다.

"네놈들이 아무리 신성력을 쓰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 우리 군단의 신상 슬라임, 홀리 슬라임들은 신성력까지 먹어치우기 때문이지."

원래는 신성력에 노출되면 당연히 1~2성 슬라임들은 신성력에 불타 죽기 마련. 하지만 요 며칠간 성기사들의 신성력에 적응 훈련을 거친 슬라임들은 신성력 또한 먹을 수 있게 적응하고 진화했다. 몸이 적색이 아니라 은색으로 변한 것이 그 증거다.

"아아, 역시 나의 병사들이다. 이렇게 쉽게 성기사들을 제압하다니."

완벽한 작전과 그걸 수행해 줄 능력있는 부하들이 있는데 어떻게 이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흑익룡들은 모두 성기사들을 들고 던전으로 이동하라. 만약에 저항하는 자가 있다면, 들고가기 편하게 자지랑 사지를 떼버려."

"""라스."""

흑익룡들은 성기사들을 뒤에서 끌어안으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라스피카 성에서 던전까지 날아가야 하는 건 분명 먼 거리였지만, 드래곤의 힘을 얻은 흑익룡들에게는 딱히 문제가 될만한 거리가 아니었다.

"길고 긴 싸움이었다."

정말로 오랫동안 싸워, 우리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병력의 열세를 온갖 작전으로 뒤집어 승리를 거머쥐었고, 군단은 비로소 남들의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게 되었다.

"축배를 들어라, 군단이여. 오늘은 거하게 취해보자꾸나."

우리는 후작가를 상대로, 인류를 상대로 한 번 더 승리했다.

* * *

아리에스 백작가문의 백작영애가 소실된 지 어언 반 년.

조용하고 평화롭던 조디악 왕국에도 서서히 마왕군의 손길이 뻗치기 시작했다.

비르고 남작령이 멸망할 때만 하더라도 왕국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바로 옆에는 굴지의 후작가 레오 가문이 버티고 있었고, 그들의 힘은 왕국 전력의 2, 아니 3할을 차지한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강했다.

아리에스 변경백이 살해당했을 때는 다소 경계를 하기 시작했다. 성검의 용사가 갑자기 증발하듯이 사라져버린 것에 왕국은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으나, 아리에스 변경백이 남겨둔 방어 인프라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성기사단의 단장, 레비즈 안이 엘프들을 강간하여 엘프가 마왕군의 편을 들었다고 했을 때도 왕국은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성기사단의 잘못은 성기사단에서 해결하는 것이 맞는 일이었으며, 전체 수가 고작 500명도 되지 않는 엘프들이 마왕군의 편에 선다고 해서 크게 나쁠 건 없었다.

하지만 날이 가면 갈수록 마왕군의 군세가 더더욱 거세지자, 인류는 드디어 심상찮은 기류를 감지하게 되었다.

아리에스 대성벽 너머에서 준동하는 2만의 마왕군은 결국 대성벽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했다.

성녀를 비롯한 성검의 용사들이 아리에스 성을 지키는데 성공하기는 했지만, 성을 우회하여 다른 영지로 마왕군이 진격할 수 있다는 건 분명 위험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변경백의 영지와 인접한 타우러스, 피스케스 가문은 즉각 마왕군과의 전쟁 준비에 착수했다.

사지타리우스 백작가가 황야에서 나타난 마왕군의 무리에 의해 멸망했다.

백작령의 모든 주민들은 몰살당했고, 마왕군은 백악의 거성을 전부 부수고 불태워 폐허로 만들어버렸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진작에 도시를 탈출한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사지타리우스 백작가의 사람들은 모조리 죽어버려 대가 끊겼다고 전해졌다. 심지어 백작가를 돕던 드워프 공주마저 무참히 살해당했다고 전해졌다.

인류연합 최전선에서 마왕군의 주력은 드디어 인류연합의 방어선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마신 바알을 비롯한 숱한 마왕군의 주요 인사들은 엄청난 희생을 발판삼아 최전선의 방어라인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그 바람에 수많은 나라들이 마왕군이 점령한 최전선과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고, 당장 최전선과 연결되어 있는 카프리콘 령은 일대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비르고. 사지타리우스. 아리에스.

왕국 최초, 시작의 12가문 중 무려 세 가문이나 멸망했다.

피스케스 가문은 유일한 후계자인 기네비어 피스케스가 실종-사망 추정-된 것으로 가문의 혈통이 끊기기 일보직전이었고, 다른 가문들도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12가문 이외에도 숱한 귀족가들은 호시탐탐 가문의 세를 늘릴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마왕군과의 전쟁에서 영지의 힘을 늘릴 방법은 마땅찮았다.

그리고 드디어, 조디악 왕국의 역사에 변곡점이 생길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

레오 후작가의 멸망.

오피큐스 왕성에 떨어진 철판의 관속에는 슬라임 점액 속에 갇힌 한 초로의 노인이 누워있었다. 알몸으로 벗겨진 노인의 얼굴은 왕성에서, 아니 왕국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존재-고트다이할 레오 후작이었다.

- 며느리를 간살하고 흑마법에 심취한 자.

시신을 능욕하기 위함일까. 가슴팍에 피로 새겨진 글자는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았다. 마법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체를 능욕하는 행위에 왕국은 고트다이할 레오 후작을 욕보이지 않도록 화장하기로 결정했고, 후작성의 상황이 어떤지 그제서야 깨닫고 말았다.

죽은 지 최소 2주는 지난 것 같습니다.

레오 후작가, 멸망.

왕국에 전운이 서서히 감돌기 시작했다.

* * *

<조디악 왕국 왕성 '오피큐스'. 왕의 거처.>

"가버렸나...고트다이할. 하나 둘 떠나버리고 마는 군."

머리가 하얗게 샌 노인은 홀로 의자에 앉아 쓸쓸히 지팡이 위를 쓰다듬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과 함께 제국을 상대했던 친우는 마왕군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했다.

"좋은 곳으로 갔을 게야."

노인은 지팡이 끝으로 대리석 바닥을 툭툭 건드렸다. 그러자 침소 밖에 있던 시종이 조심스레 방 안으로 들어와 허리를 숙였다.

"찾으셨습니까, 국왕 폐하."

"레오 후작가로 보낸 정찰병들로부터 소식은 없나?"

"...이제 반나절이 지났습니다. 잠을 청하시옵소서."

"내가 자는 사이에 보고가 들어올지도 모르니 어찌 잘 수 있겠나. 그대는 가서 차를 내어오거라."

"예."

시종장은 왕의 명령에 따라 차를 우려내러 떠났다. 그 사이 노인, 조디악 왕국의 국왕 '오피큐스 18세'는 지팡이로 대리석 바닥을 긁으며 생각에 잠겼다.

"대략 반 년 전 즈음이었던가...변경백이 잠깐 찾아왔던 때가."

아리에스 변경백.

변경의 왕 노릇을 하는 자라고 불리우며, 국왕을 상대로 하등한 눈으로 바라보는 눈이 건방졌던 성검의 용사. 하지만 왕국의 변경백인 이상 국왕의 명령은 따를 수밖에 없던 일개 귀족.

백작가의 유일한 영애를 성인도 되지 않은 3왕자와 혼약을 맺게 만들었다. 불행히 백작 영애는 던전에서 돌아오지 않게 되었지만, 3왕자를 통해 변경백에게 굴욕을 준 것 만으로도 통쾌한 일이었다.

"끄응."

하지만 그 날 이후, 나라는 조금씩 상황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역사적으로 유서깊은 12가문이 하나 둘 멸망하기 시작했고, 상대적으로 평화롭다면 평화롭던 조디악 왕국에도 점차 전란이 감돌기 시작했다.

"내가 나설 일이 없...응?"

문 너머에서 사람의 기척이 들렸다. 국왕이 지팡이를 두드리자, 제법 건장한 금발의 청년이 쭈뼛거리며 침소로 들어왔다.

"아, 아버님."

"그래. 3왕자여. 몰라보게 컸구나."

어느덧 청년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훤칠하게 자란 3왕자의 등장에 국왕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사백안으로 찢어진 눈은 마치 뱀처럼 휘어졌고, 3왕자는 구렁이 앞의 토끼마냥 몸을 움츠렸다.

"그, 저...."

"무엇이냐?"

"저, 저도 형님들처럼 전장에 서고 싶습니다!"

3왕자는 당찬 포부를 밝히며 당당히 외쳤다. 어찌나 소리가 큰 지 침소 안의 창문이 살짝 흔들릴 정도였다.

"형님들처럼이라. 너도 왕위가 탐이 나느냐?"

"그, 그런게 아닙니다! 저는 단지 고통받는 백성들을 위해...."

"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거늘 무슨. 이것이 탐나는 것 아니더냐."

국왕은 지팡이를 들어 3왕자에게 겨눴다. 3왕자는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아래로 놓았지만, 딱히 부정은 하지 않았다.

"그래. 병사들을 가지면 마왕군을 물리칠 수 있을 것 같으냐? 네가 고트다이할보다 더 병사들을 더 잘 다스릴 수 있느냐?"

"제게 '그 남자'를 빌려주십시오!"

움찔. 3왕자의 말에 국왕은 대놓고 눈썹을 찌푸렸다.

"그를 빌려달라...그게 무슨 말인지 지금 알고 말하는 것이렸다?"

"예! 저는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무엇이 너를 그렇게 조급하게 만든 것이냐?"

"그...."

고개를 들어올린 3왕자의 눈빛은 이전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움츠러들었던 가슴과 어깨를 당당히 펴며, 이글거리는 눈빛에는 활활 타오르는 의지가 번뜩이고 있었다.

"소문을 들었습니다."

"소문?"

"예. 아리에스 영애께서, 비르고 남작령을 점령한 마왕군에 계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매일 밤마다 오크에게 범해진다는...씹어먹어도 시원찮을...소문을...!"

"하. 그것이 네 계기렸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다. 아리에스 기사단이 전멸한 뒤, 아리에스 백작 영애만 살아남았을 거라는 건 지극히 헛된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서재에 틀어박혀 책만 읽었던 소년이, 반 년간의 노력끝에 건장한 체격을 가진 전사가 된 것은 분명 좋은 징조였다. 국왕은 왕이기도 했지만, 3왕자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좋다. 그를 빌려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국왕 폐하!"

"이만 돌아가라. 차 한 잔 하고 나도 슬슬 잠들 터이니."

3왕자는 허리를 숙이며 국왕의 침소를 떠났다. 교차하듯 들어온 시종장은 국왕의 의자 옆 테이블에 따뜻한 차를 내어놓았다.

"건방진 녀석이군."

"내 아들을 두고 건방진 녀석이라니, 네가 더 건방진 놈 아닌가? 왕족을 상대로 무엄하다."

"사람을 두고 빌려달라느니 뭐니 말을 하는 것 자체가 건방지다는 거지."

시종장은 손으로 이마를 쓸어넘겼다. 하얀 면장갑이 스쳐지나가자, 시종장의 얼굴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최전선에서 개고생을 하고 왔는데 돌아오자마자 이런 일이...하아."

"한 번 확인하기는 해야한다. 네 딸, 그 놈들에게 살해당하지 않았느냐. 성기사단의 단장 말이야."

"닥쳐라. 그딴 년이 무슨 내 자식이라고 하는 것이냐."

시종장의 눈은 세로로 길게 찢어졌다.

"한 번만 더 개소리를 지껄이면 수호룡이고 뭐고 때려칠 줄 알아라."

"흐흐, 계약은 잊지 말아야지."

국왕은 지팡이를 바닥에 툭툭 건드렸다. 시종장은 인상을 마구 찌푸리며 몸을 돌렸다.

"좆같은 인간놈들."

시종장은 책장에 팔짱을 끼며 기댔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냐. 진짜 3왕자한테 병사들 쥐여줄 거냐?"

"안 될 건 없지. 1왕자가 최전선에 나가있고, 2왕자는 변경백 영지에서 활약하고 있다. 가만히 앉아서 형들의 활약을 지켜보느니, 자기도 뭔가 실적을 쌓고 싶을 터."

국왕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거울에 비친 노인의 모습은 족히 2m 가까이 되는 근육질의 거한이었다.

"레오 후작령의 탈환은 3왕자, 앤티알에게 맡겨보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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