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7회
172일차
마왕군의 병사들은 전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좁은 공간에서의 전투를 피하고자 하는 듯 했고, 다소 넓은 공도에서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하여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어가고 싶어하는 듯 보였다.
"어떻게 하죠? 엘프에 드워프, 드라이어드까지 진을 치고 있습니다."
"걱정마라. 항문에 손가락만 집어넣으면 바로 세뇌는 풀 수 있으니까."
"죄다 손가락 안 들어갈 것 같은 바지를 입고 있습니다."
"......그럼 세뇌를 못 풀잖아."
목숨을 걸고 세뇌당한 이들의 세뇌를 푼다는 작전은 기각되었다. 엘프, 드워프, 드라이어드의 수는 성기사단의 수를 훌쩍 넘어보였고, 그들이 입고있는 청색의 바지는 척 보기에도 잘 찢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면 어떻게 하지? 저 오크를 죽이면 세뇌가 풀리나?"
"죽일 수 있겠습니까? 저것 보십시오. 저 놈이 들고있는 무기는 분명 성검 레오입니다. 이므신할 후작으로부터 성검을 빼앗아 마검으로 타락시켰지 않습니까."
"크윽.... 성검을 마검으로 타락시키다니. 오크의 세뇌는 정도를 모르는 건가!"
"용사도 세뇌하는 마당에 성검이라고 다를 리가 있겠나. 씁. 오크 하나만 있으면 어떻게든 해볼 법 해보이는데...."
성기사단은 통로 너머에 보이는 마왕군의 포진에 숨이 턱 막혔다. 오크와 세뇌병사들 둘 중 하나만 있으면 어떻게든 해 볼 수 있을 것처럼 보였으나, 둘이 같이 잇는 이상 상대하기가 여간 껄끄러웠다.
"경, 우리는 살아서 도망치는 게 목적 아닙니까? 굳이 싸울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라그비아 대사제에게서 진실을 들어야 하오."
"라그비아 대사제 또한 세뇌를 당한 걸지도 모릅니다. 그는 색수병을 퍼뜨리는 서큐버스를 살려주지 않았습니까?"
"그게 오히려 마왕군과 내통하고 있었다는 증거야! 그러니 우리는 저 자의 입으로 직접 배신했다는 걸 들을 필요가 있다고!"
성기사들은 의견을 좀처럼 조율하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선택의 기로에서 양자택일의 선택을 해야만 했다.
"저들과 싸웁시다! 여신께서 굽어살펴주실 겁니다."
"라그비아 대사제가 세뇌당한 거라면 구출해야하고, 그게 아니라면 이단심문을 해야합니다."
"만약 저들 모두가 세뇌당했다면, 우리 말고도 다른 이들이 크게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악의 싹은 진작에 잘라버려야 합니다."
바이스 엑슈얼을 위시한 성기사들은 결사항전을 주장했다. 마왕군과 전투를 벌여 세뇌당한 여인들을 구하고 라그비아 대사제를 구하고, 타락한 마검을 봉인하고 만악의 근원인 오크를 죽여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건 위험하오. 때로는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하는 법. 우리는 이 던전에서 있었던 일들을 인류 연합에 널리 알릴 필요가 있소."
"성검의 용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용사조차 세뇌하는 이의 존재를 알게 된 이상, 다른 용사들도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퀘르벨스 추기경은 구출했지 않습니까? 목표는 이미 절반 이상 달성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저곳을 공격하러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입니다."
여러 고위급 성기사들과 세이지 클라크를 비롯한 친 성녀파 성기사들은 던전에서의 이탈을 주장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수준은 아니지만, 양패구상이 얼핏 보이는 전투를 강렬히 주장하는 바이스 이하 추기경파 성기사들의 태도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대체 왜 저들을 그렇게까지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저들이 여신님의 이름을 팔아 인류를, 세계를 속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걸 만천하에 당장 알려야...."
"그럼 경들은 이대로 도망치십시오! 나는 남아서 싸우겠습니다!"
바이스는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은은한 신성력이 그의 검에서 흘러나왔고, 바이스는 무언가에 홀린 듯 홀로 복도로 튀어나가 공동을 향해 달렸다.
"여신의 이름으로!!"
""우오오오!!""
바이스를 비롯한 추기경의 추종자들이 하나둘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몸에 신성력을 두르고 던전을 달리는 기사들의 모습은 숭고해보이면서도 얼핏 미련해보였다.
"젠장...! 자살행위야!"
세이지는 무작정 안으로 달려가는 성기사들을 붙잡지 못했다. 갑자기 던전의 통로가 흔들린다 싶더니, 바이스를 비롯한 일부 성기사들이 달려나간 통로 천장에서 흙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천장이 무너집니다!!"
던전은 마치 성기사들의 선택을 강요하듯 통로가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졸지에 추기경을 업게 된 세이지는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돌렸다.
폭포 방향을 향해.
"세이지 경?!"
"추기경 님을 안전한 곳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리고 차라리, '그 분'을 찾아서 이 사태를 말씀드리는 것이 더 나을 겁니다!"
세이지는 이를 악물고 추기경을 업었다. 많은 피를 쏟아낸 그는 종잇장처럼 가벼웠다.
"여신, 여신께서...."
"크으읏...!"
비록 뜻은 다르지만 같은 여신교단의 사람이 마왕군에게 크게 당한 것은 가히 보기 좋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통로 안쪽으로 달려가버린 바이스와 성기사들을 떠올리며, 세이지는 입술을 깨물었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
인류연합에 하루라도 더 빨리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바이스와 성기사들은 자신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목숨을 걸고 안으로 달려간 걸지도 모른다.
"빠져나갑시다!"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세이지는 통로를 앞으로 쭉 달렸다. 긴 직선형 통로의 끝은 깎아지른 절벽이었고, 아래로 내려가는 비탈길 밑으로 유속이 빠른 폭포가 흐르고 있었다.
"크윽...!"
"크어엉! 저기다!"
비탈길 가장 아래에서 미노타우르스들이 콧김을 뿜으며 올라오기 시작했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진퇴양난의 포위망에 갇히게 된 성기사들은 눈을 질끈 감으며 몸에 신성력을 둘렀다.
"여신의 이름으로!!"
첨벙---!!
세이지를 비롯한 성기사들은 신성력만 믿고 폭포수에 몸을 맡겼다.
* * *
"......."
"......."
나의 마왕군과 바이스의 성기사단은 서로 무기를 겨눈 채 시선만 주고받았다. 약속된 이들이 들어오자마자 격벽을 내려 통로를 막아버렸고, 나는 '살아남을' 성기사들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역시 퀘르벨스와 뜻을 같이하는 자들 답군. 아주 성공적으로 놈들을 폭포수로 보내버렸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바이스는 검을 집어넣었다. 그와 동시에 성기사들은 모조리 검을 집어넣었고, 우리 군단의 여인들은 그들이 입은 갑옷을 직접 옆에서 벗겨주며 몸단장을 하도록 했다.
"라스베가스 옆에 강이 하나 흐르고 있다. 그곳으로 가서 몸을 씻은 다음, 떠나도록 하라. 너희들이 그린엘프들을 독점하는 바람에 주민들의 원성이 아주 자자해."
"하하. 잠깐 동안 독점했을 뿐인데 그렇게 화가 나셨다는 말입니까? 그거 미안합니다. 그린엘프 분들이 저희 형제님들을 영 놓아주지를 않으셔서."
"그래, 그래. 너희들 좆 크다. 됐냐?"
"흐흐흐."
신성력과 성기의 크기는 비례하는 걸까, 아니면 성기가 큰 놈들이 신성력을 각성하는 걸까. 성기사들은 죄다 하나같이 오크들의 평균 사이즈와 비슷할 정도로 거근이었다.
'분명 신성력이 자지를 키운 걸 거야.'
엘프 여왕 루나가 성흔을 받으며 메론우유통이 수박우유통으로 늘어난 것처럼, 신성력의 상승과 성적인 부분의 강화는 분명 연관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기네비어가 랜슬롯의 기둥 서방을 하고 있는 것도 기둥이 오크급이라서 그런 것도 있고, 그들의 자녀인 오크 성기사 갤러해드는 4성 시절의 나와 견줄만큼 거대한 것도 분명 관련이 있을 것이다. 성적 매력이 높다는 것은 곧 번식에 직결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런데 라스의 주인시이여. 이제 성기사들을 어떻게 사로잡으실 생각이십니까?"
"응?"
"협곡에 흐르는 강물의 유속은 엄청나게 빠르다고 들었습니다. 괜히 한 명이라도 놓친다면...."
"아, 걱정하지마라. 그거 그냥 물이 아니니까."
성기사들이 협곡에 뛰어든 순간, 이미 게임은 끝났다.
"우리가 어쩌다보니 알게된 건데 말이야, 협곡에 흐르는 강물이 쭉 흐러가다보면 남작성이랑 이어져있거든? 거기서 대기하면 물고기 잡히듯 다 잡을 수 있다 이거야."
"...호오? 그런 걸 말해주셔도 되는 겁니까?"
"너라면 괜찮다. 만약 네가 배신을 하려고 한다면, 네 안의 녀석이 너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흐흐. 물론입니다."
바이스는 자신의 배를 만지며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별로 알고싶지는 않았지만 그와의 거래를 통해 알게된 그의 성벽은 가히 정상이라고는 하기 어려웠으나, 우리 군단은 그의 섹스 판타지를 충족시켜 줄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뭐, 나는 그쪽으로 취향은 없지만 알아서 잘 즐겨라. 씁, 굳이 알 필요도 없는 걸 알아버렸군."
"흐흐, 궁금하지는 않으십니까? 상대가 누군지?"
"닥치고 꺼져. 확 슬라임 밥으로 만들어버리기 전에."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슬라임 밥이요?"
"그래. 슬라임."
나는 색수병, 에스트라스를 일으켰던 매개체인 성액과 성유를 흔들었다.
"우리 군단은 슬라임으로 시작해서 슬라임으로 끝나는 법이지."
* * *
"푸하, 푸허업!"
세이지는 급류에 연신 물을 토해내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신성력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음에도 뼛속까지 시린 물의 온도에 괜히 뛰어내렸나 싶을 정도였다.
'아니야, 그러면 도망치지 못했어.'
절벽을 올라가는 것은 의미가 없다. 적의 마족 병사들 중 가장 개체수가 많아보였던 이들은 날개 달린 까마귀 드래곤같은 공중병력이었고, 절벽을 타고 올라가는 즉시 놈들에게 쪼여 죽을 게 뻔했다.
"푸하! 그래도, 크흡. 이쪽이...."
세이지는 급류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평야에 안도했다. 강물은 아래로 흐르고 흘러 작은 성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고, 그곳은 세이지가 이미 전해들었던 장소 중 하나였다.
'스피카 성!'
비르고 남작령의 중심지인 성은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세이지는 서서히 유속이 느려지는 것을 몸으로 체감했고, 몸의 컨트롤을 되찾으며 천천히 뭍으로 빠져나가려했다.
"끼요오옷!"
"뭣?!"
순간, 세이지의 머리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손에 든 검을 하늘로 치켜올릴 시간도 없이, 노란 부리 후드를 뒤집어 쓴 검은 여인은 세이지가 등에 업고 있던 퀘르벨스 추기경을 납치하여 하늘로 치솟았다.
"저, 저...!"
"형제여! 물속에 뭔가 있네!"
세이지와 함께 강물을 떠내려 온 성기사 하나가 온몸을 휘젓기 시작했다. 마치 몸에 달라붙은 무언가를 떨쳐내려고 하는 듯한 움직임에 세이지는 오한이 들었다.
'물속에 뭔가가 있다!'
세이지는 물속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흘러내려가는 강물 너머, 물속에서 투명하게 반짝이는 물체들은 분명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바다 근처 마을에서 자란 세이지는 눈앞의 물체가 무엇인지 금방 깨달았다.
'해파리?!'
해파리, 를 쏙 닮은 투명한 슬라임들이 세이지의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 팔과 다리에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고, 세이지는 팔다리를 휘저으며 슬라임들을 떨쳐내려고 했다.
으적, 으적.
슬라임들은 성기사단이 입은 갑옷을 야금야금 갉아먹기 시작했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피부를 뚫고 몸까지 먹힐 것만 같은 공포에 세이지는 남아있던 신성력을 모두 긁어모았다.
"흐으읍!"
전신의 피부에 신성력이 흐르기 시작했다. 슬라임 따위의 마물은 금방 신성력에 지져버려도 시원찮을 강대한 힘에 세이지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고작 이 정도로-'
으적, 으적.
슬라임들은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신성력으로 몸을 강화했는데도, 그걸 오히려 맛있다는 듯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으아악!"
세이지는 수면 위로 떠올랐다. 높이 들어올린 팔에 달라붙은 슬라임은 그가 이전에 봤던 것과는 달리, '은빛'을 띄고 있었다.
"이, 이게 뭐야...?"
"슬라임은 뭐든지 먹어치우는 거임."
어디선가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갑자기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었던 유속이 어느 순간 뚝 하고 멈춰버렸다.
"오호호! 동료를 버리고 저 혼자 살겠다고 도망친 놈들. 내가 예전부터 성기사라는 놈들을 꼭 이렇게 잡아버리고 싶었어."
세이지를 중심으로 펼쳐진 물방울은 공처럼 굴러 뭍에 안착했다. 지팡이를 든 붉은 머리칼의 엘프-타천사(?)는 손가락을 튕기며 세이지에게 윙크했다.
"저항하면 슬라임들에게 몸까지 뜯어먹히게 될 거야. 신성력을 보유한 슬라임이라, 성기사들에게도 통하지롱!"
"우리 군단 슬라임들은 신성력도 먹는 거임."
"그, 그게 무슨...."
세이지는 하나 둘 물방울에 갇혀 뭍으로 굴러들어오는 성기사들의 모습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들은 모두 사지와 고간부에 은빛의 슬라임들이 달라붙어있었다.
"<레비즈 안 다이할> 형. 사지를 뜯고, 여체로 만들어 알만 낳는 몸으로 만들어버리는 우리 군단의 극형이지. 오호호."
"주인님께서 너희를 죽이려고 마음먹으신 거임. 이제...도망칠 수 없어."
붉은 슬라임의 몸이 변했다. 세이지는 슬라임이 변한 자의 모습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
"버지나니야 비르고?!"
"비르고 남작이 명한다."
버지나니야 비르고라임이 손을 들어올리자, 강물 근처에 수많은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성기사단에 기회를 빼앗긴 분노의 군단 주민들이었다. 하나같이 스타킹 아머와 드워프제 무기로 중무장한 그들의 무기에는 은은한 신성력이 담겨있었다.
"도, 도대체...?"
"원리가 궁금해? 이제 몸으로 알게 될 거야."
"마왕 님의 위대함을 직접 체험해보렴! 앞으로 너희들은...."
짝.
강물 근처에 포진한 분노의 군단 병사들은 일제히 물방울을 향해 무기를 겨누기 시작했다.
"홀리 카우. 신성력이 담긴 젖이 나오는 젖소가 될 예정이란다. 꺄하하!"
"사지가 묶여 레비즈, 암컷으로 전생해서 안다이. 주인님께서는 한 번 죽이겠다고 마음먹은 적은 놓치지 않아."
콰득.
슬라임 하나가 고간부를 스쳐지나감과 동시에, 세이지 클라크는 성욕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