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6회
172일차
새벽 4시.
인간이 가장 깊게 잠든 시기이기도 하지만, 하늘에 은빛 달이 떠있는 밤이라는 시간은 마왕군에게도 휴식이 필요한 시간이다.
하루의 일과를 인간의 시간에 맞게 맞춘 군단의 생활리듬은 오전부터 오후에는 열심히 일할 지언정, 인간이 자는 밤에도 마족들이 잠을 자도록 되어 있었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습니다."
바이스는 성기사들을 한 자리에 불러모았다. 성기사들은 기절한 그린엘프들을 가지런히 한 자리에 눕혔고, 모두 손에 신성력으로 반짝이는 검을 들고 있었다.
"퀘르벨스 추기경을 구하는 것. 라그비아 대사제를 찾아서 진실을 추궁하는 것. 그리고 또 한 가지 목표가 생겼습니다."
"살아서 인류에게 진실을 알리는 것."
마왕군은 천사들을 세뇌하고 엘프들을 세뇌하여 성노예로 삼고 있다. 그 중심에는 스스로를 '라스푸틴'이라고 부른 오크가 있고, 현재 조디악 왕국의 북부 일대를 점령하고 있다.
더이상 이곳은 인류에게 있어 후방이 아니었다. '분노의 군단'은 인류의 적인 동시에 반드시 구축해야 할 기생충과도 같은 존재들이었다.
"천사님과 그린엘프 분들은 어떻게 합니까?"
"...데리고 가는 건 무리입니다. 저들을 데리고 갔다가는 분명 짐이 될 게 분명합니다."
"바이스 경, 하지만 선량한 피해자들을 구하지 않는 건 기사 된 도리가 아닐세."
바이스와 다른 성기사들이 의견충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냉정하게 버리고 가자는 바이스의 말에 성기사들은 차마 그린엘프를 두고 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무리 세뇌에 당한 이들이라고 한들, 그린엘프들의 육체와 살을 섞은 경험은 냉철한 판단을 내리는 데 큰 장해가 되었다.
"형제님들. 지금은 안됐지만 우리가 살아서 도망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들은 성검의 용사까지 타도한 자들. 지금 우리는 적진 한 가운데에 끌려들어온 셈입니다."
"크윽, 무서운 마족 놈들. 우리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깊게 세뇌하다니...."
"........"
사실은 그냥 이 여자 저 여자에 홀려 밤낮으로 섹스에 몰두해 있었을 뿐이지만, 성기사단을 성행위밖에 모르는 멍청이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세뇌외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들의 몸속에 음충이 깃들지 않았다는 것 정도.
"세이지 형제님,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저희는 던전 안의 구조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 두 분 정도의 도움은 받을 수 있죠."
세이지는 자신이 자지를 찔러넣었던 그린엘프를 일으켜세웠다. 흐리멍텅한 눈동자로 영혼이 빠져나가있던 그린엘프는 곧 창백한 얼굴이 되어 성기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으, 오지마...!"
"정신차리십시오!"
성기사들은 그린엘프를 진정시키느라 갖은 애를 썼다. 남자의 접근을 격렬히 거부하는 듯한 행동을 하는 그린엘프는 영락없는 강간 피해자를 연상케했고, 성기사들은 자신들이 세뇌라는 명목으로 저지른 행위가 얼마나 참혹한 짓인지를 깨닫고 말았다.
"진정, 진정하십시오."
"흑, 흐윽...여신이시여...."
그린엘프는 서러운 눈물을 뚝둑 흘리며 흐느꼈다. 행여나 밖으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그린엘프는 간신히 진정하고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까지 정신을 차렸다.
"저, 저는 '니무에 마크투'라고 해요."
"니무에 마크투 님, 혹시...."
성기사단은 스스로를 니무에라고 소개한 여인에게 던전 안의 구조에 대해 물었다. 그녀에게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파헤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나, 던전 안에서 신속하고도 빠르게 도망치기 위해서는 니무에에게 의지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던전의 탈출구를 아십니까?"
"흐끅. 네, 여기서 밖으로 나가야 해요. 그리고 꺾어서 나가면 폭포수가 흐르는 곳이 있어요."
"폭포수?"
"네. 거기서 아래로 내려가면 지하 2층이 있는데, 거기에...흑, 흐흑!"
니무에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니무에로부터 대략적인 던전의 구조를 들은 성기사들은 빠르게 작전을 정리했다.
"갑시다. 니무에 님, 일어나실 수 있겠습니까?"
"저, 저는 가지 않겠어요. 제가 사라지면, 분명 동료들이...."
"남아있으면 마족들에게 범해질 수 있습니다."
"이미 더럽혀진 몸이에요. 저 하나 더 깨끗해지겠다고 동료들을 더 고통스럽게 할 수는 없어요."
니무에는 완강한 자세로 다른 그린엘프들과 함께 남기를 바랐다. 성기사들은 어쩔 수 없다는 눈으로 몸을 돌렸다.
"갑시다! 던전을 빠져나가죠!"
바이스의 외침과 함께 성기사단은 모두 복도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잠시 뒤.
천사 한 명과 남겨진 그린엘프들은 하나 둘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갔냐?"
"갔어요."
실눈을 든 그린엘프들은 하나 둘 몸을 일으켰다. 세뇌당했다는 것을 깨닫고 절망과 좌절에 기절해있던 이들은 사라지고, 능숙한 손길로 질속에 남은 정액을 손가락으로 긁어내는 섹스의 스페셜리스트들만 남아있었다.
"......어우, 터지는 줄 알았네."
"웃겨. 지들도 다 박았으면서 마족들한테 박힐 걸 걱정하다니."
니무에를 비롯한 그린엘프들은 손으로 자신의 엉덩이를 슬쩍 들어올렸다. 그러자 성기사들을 피해 곳곳에 숨어들었던 음충들이 다시 있어야 할 곳으로 귀두를 밀어들고 기어들어갔다.
"아아, 여기는 니무에. 물고기들이 미끼를 물었습니다."
[알았다.]
니무에는 허공에 대고 보고를 올린 다음 눈을 감았다.
"흐아암. 오랜만에 별미 먹으니까 맛있네. 오크 오빠들 요즘 바빠서 영 못하고 다녔는데."
"그래도 쟤들 별로였어요. 지들이 잘난 줄 알고 막대하는데...."
"그렇지? 역시 군단 남자들이 훨씬 좋다니까. 걔들은 우리가 쉬자고 하면 시무룩하기는 해도 우리 페이스 챙겨주잖아."
성기사단에 비해 피지컬이 밀릴 지언정, 그린엘프들은 군단의 남정네들을 더욱 높여주었다.
"역시 서로 배려해주는 섹스가 최고지. 아, 근데 몇몇은 좀 잘 하더라?"
"성기사가 아니라 성기인 줄 알았다니까요. 깔깔."
그린엘프들은 자신들이 상대한 성기사들의 품평회를 열었고, 혼자서 멀뚱멀뚱 남게 된 천사는 조심스레 근처에 있던 그린엘프에게 물었다.
"저기...진짜 이러고 저희는 끝이에요?"
"응? 아, 너 신입이구나. 후후, 그래. 우리 역할은 이걸로 끝."
그린엘프는 손으로 대딸을 하듯 움켜쥔 손을 허공에 대고 흔들었다.
"우린 다른 분들이 잡아올 성기사들, 어떻게 따먹고 죽일 지 생각하면 돼."
"......."
이래도 되나.
천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린엘프들이 하나 둘 킥킥거리며 다시 누으려던 순간.
테에에엥------
던전에 요상한 경보가 멀리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 * *
"흐아아앗!"
성기사들은 자신들을 가로막는 그린엘프들을 제압하여 바닥에 구속했다. 눈에 붉은 기가 감도는 그린엘프들은 성기사들에게 무참히 공격을 퍼부었지만, 성기사들은 압도적은 힘으로 그린엘프들을 제압했다.
"큭, 이제 대놓고 본색을 드러내는 건가...!"
"말할 시간에 음충을 빼내란 말이야!"
푸욱.
그린엘프들은 비명과 함께 기절했다. 신성력에 딸려나온 음충들은 한 마리도 죽지 않고 곳곳으로 숨어들었고, 성기사들은 기절하며 세뇌가 풀린 그린엘프들을 반듯하게 눕히며 치를 떨었다.
"젠장...! 마족이라면 시원하게 죽여버렸을텐데!"
"그만큼 놈들이 악랄하다는 거지."
성기사들은 마왕군의 악독함에 치를 떨었다. 어디선가 '테에에에엥'하면서 들려오는 경보 소리가 울리자마자, 복도에 돌아다니던 그린엘프들은 성기사들을 향해 무차별 공격을 퍼부었다.
진짜로 죽이려고 드는 통에 성기사들은 전력을 다해야했지만, 차마 그린엘프들을 죽이지는 못했다. 그들 또한 마왕군의 피해자였고, 성기사들은 차마 그들을 무참히 죽일만큼 모질지 못했다.
세뇌당했다고는 한들, 다들 성기사들을 한 번 씩 절정으로 보내준 엘프들이었다. 그들을 죽이는 건 마족보다 더 악랄한 짓이나 마찬가지였다.
"찾았습니다!"
구석까지 달려온 성기사들은 구석에 처박힌 작은 뒤주를 발견했다. 짙은 혈향이 느껴지는 나무 상자를 급히 부수자, 안에서 찐득한 피냄새와 함께 온몸이 피에 젖은 추기경이 굴러떨어졌다.
"예하!"
성기사들은 하나 둘 달라들어 추기경의 몸에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인 추기경의 호흡이 점점 안정되기 시작했고, 바이스는 눈물을 글썽이며 추기경의 등에 박힌 단검을 뽑아냈다.
"으으...여기는...."
"정신이 드십니까, 추기경 예하?!"
"경...?"
퀘르벨스 추기경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가, 곧 창백한 얼굴로 바로 옆에 있는 성기사의 갑옷을 움켜쥐었다.
"라그비아! 라그비아 대사제를 붙잡아야 하오! 그는 이단이오!"
"예하, 그건-"
"그를 가만히 두면...성녀님까지...커헉!"
추기경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바이스는 기절한 추기경을 등에 업고 눈빛을 보냈다.
"계단, 올라갑시다."
지하 1층에서 추기경을 구해낸 성기사들은 라그비아 대사제가 있을 곳, 던전의 중심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테에에에에엥! 마마아아앙!!"
"크게 외치지 말아줄래? 부끄러우니까."
"루나찌찌빵빵!"
"야!"
나는 루나에게 정강이를 얻어맞았다. 예전에는 더럽게 아팠지만, 이제 90레벨이 된 덕분에 그다지 아프지는 않았다. 루나의 뒤에 있는 쿠키엘프들은 키득거리며 웃음을 참았다.
"왜?! 지금 성기사 놈들 어그로 끌려서 동작 빠릿빠릿 해진 거 안 보여?"
"안 보여! 너는 시스템으로 보고있지만, 나는 아니라고!"
"크흠. 미안하다. 지금 지하 1층에서 위로 뛰쳐나오려고 하고 있다."
천장 위에 미리 대기시켜놓은 슬라임들은 CCTV가 되어 나의 눈이 되었다. 바이스를 위시한 성기사단은 지하 1층 곳곳을 누비며 추기경을 찾으러 다녔다.
"진짜 쟤들 그냥 놔뒀으면 좆될 뻔 했네."
지하 1층은 순식간에 파악당했다. 단순히 평균 레벨이 대략 60전후 정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성기사들은 평균 레벨이 무려 80 수준에 이를 정도로 강했다.
"한 명 한 명이 3성 시절의 나 정도라니, 정말 무서운 놈들이로군."
"그게 무서워하는 놈의 태도야? 벌써부터 어떻게 죽일까 고민하는 게 눈에 훤히 보이는데."
"흐흐. 지금 나야 5성에다가 이렇게 믿음직스러운 부하들이 있지 않느냐. 그렇지, 로도페리야?"
"......빨리 저것들 죽이거나 쫓아내면 안 돼?"
로도페리와 드워프들은 심통맞은 얼굴로 무기를 땅에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성기사단을 꾀어내기 위해 지하 1층에 기거하는 이들을 모조리 빼내는 바람에, 드워프들은 무기를 만들다 말고 1층으로 올라오게 되었다.
"왜?"
"빨리 마검을 만들고 싶단 말이야."
로도페리를 비롯한 드워프들은 마검을 '제련'하다가 올라왔다. 마검 할레오로부터 파생된, 그러니까 이므신 할레오가 내 씨로 낳은 마검은 골렘이나 가고일과 비슷한 무기생명체로 태어났다. 지금도 할레오는 방금 나의 씨를 머금고 새로운 마검을 잉태하여 품에 머금고 있다.
"<파종> 씨를 뿌린다. 열매가 수확되는 시기는 천차만별이다.
# 파종대상 : 사자검 레오 ★★★★★
# 예상시각 : 22시간 57분 뒤."
산란 텀은 23시간. 하루에 한 개의 마검을 낳는 덕분에 나는 아더부터 랜슬롯까지 마검을 한 자루씩 쥐어줄 수 있게 되었다. 드워프들은 마검을 지옥대장간에서 내 아들딸의 취향에 맞는 무기로 바꾸는 개조 작업을 하고 있었고, 그러던 와중에 성기사단의 궐기가 발생하고 만 것이다.
"중간에 멈춘다고 결과물이 달라지는 건 아니잖냐. 잠깐 휴식을 취한다고 생각해. 어차피 쟤들 대장간에는 들어가지 못해."
"저희가 입구를 막았으니까요. 후후."
아스모딘은 드라이어드들과 나무뿌리로 던전의 넓은 공동에 벽을 만들었다. 나무뿌리의 벽 바로 뒤에는 우리 던전의 소환시설과 다른 곳으로 향하는 포털이 산적해있었다.
루나, 로도페리, 아스모딘. 각각 엘프와 드워프, 드라이어드의 대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그만큼 내 침대가 있는 던전의 중심은 우리 군단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모든 포진은 끝났다. 와라, 성기사단이여."
나는 임신한 할레오 색스와 함께, 성기사단이 복도에서 뛰쳐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너희들이 찾는 라그비아 대사제는 여기에 있다! 라그비아가 물고 있는 젖을 떼라!"
"테에에에엥!! 찌찌, 찌찌! 츄릅, 츕."
성기사단이 구해야 할 사람 중 하나, 라그비아 대사제는 내 바로 옆에서 서큐버스의 젖꼭지를 입에 물고 아기처럼 옹알이를 하고 있었다. 서큐버스는 그의 벗겨진 머리를 쓰다듬으며, 라그비아를 꿈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어찌할테냐."
1층에서 나오는 곳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온다.
거기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탈출구인 폭포로 향하게 된다.
"어이쿠, 갈림길이네?"
구하거나, 도망치거나.
"딱 반으로 나뉘기 좋은 위치 아니냐?"
나는 두 팔을 벌려 통로 너머에서 뛰쳐나온 성기사들을 맞이했다.
"너희들은 모두 '레비즈 안 다이할 형'에 처한다."
반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