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9회
158일차
"씨발, 좆됐다."
레오 후작가의 종기사, 베이신 가므필은 사방에 펼쳐진 포위망에 죽음을 느꼈다.
성벽 전체를 에워싸는 구울들은 모두 허름한 복장을 입은 농노들이었고, 기사들이 심심하면 달려가 멋대로 세금을 착복했던 화전촌의 주민들이었다.
"젠장, 진작에 내성 안으로 안들어오고...!"
오크 별동대.
협곡에서 싸운 주력 군대 사이의 전투 이외에도 후작령에는 온갖 장소에서 전투가 발생했다. 특히 후작령 전역을 돌아다니며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오크 기병대의 살육은 차마 말로 할 수 없을만큼 잔혹하기 짝이 없었다.
저항이 심한 자는 물리적으로 죽이고.
저항이 약한 자는 복상사로 죽이고.
저항하지 않는 자들의 이마에는 '마물박이'라는 낙인을 박고.
투항하는 자에게는 사상검증이라는 명목으로 마물과 한 번 성행위를 하도록 하는 행위에 절로 치가 떨렸다.
하지만 치가 떨릴 뿐, 베이신에게 할 수 있는 수단은 크게 없었다. 그는 정식으로 서품을 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파릇파릇한 기사였고, 홀로 검을 들고 나서서 마왕군을 쓸어버릴 만한 실력도 없었다.
용사가 아닌 한에야, 자신의 힘으로는 승리할 수 없다. 베이신은 자신이 충성을 바칠 대상인 이므신할이 용사라는 것에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정작 성검 레오는 오크의 손에 타락하여 마검이 되었다. 베이신은 이므신할의 고군분투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나, 막상 이므신할이 성검을 빼앗겼다는 생각을 하면 할 수록 화딱지가 치밀어올랐다.
'머저리같은 년!'
모든 것은 결과가 말해주는 법.
그녀의 예고대로 던전을 박살내어 기사 하나마다 엘프 한 명씩 받는다면 충성의 맹세를 다시금 하겠으나, 지금은 충성은 커녕 반란이라도 안 일으키면 다행일 정도였다.
'씨발, 지금 여기서 말라죽게 생겼다고!'
식량창고는 폭발했다.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된다는 것도 기사들이나 가능한 일이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빈민가의 주민들은 당장 내일 먹을 음식이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다. 오크와 구울들을 비롯한 마왕군이 성을 포위하지 않았다면, 진작에 성을 탈출해 먹을 것을 찾으러 떠났을 것이다.
"들으라, 인간들이여!"
적의 대장으로 보이는 오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오크의 힘을 멀리서나마 간접적으로 경험한 베이신은 두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지만, 하필이면 자신이 선 위치가 이므신할 레오와 그리 멀지 않은 곳이어서 눈치가 보였다.
'여신의 뜻을 날조해? 분명 레오 후작가다, 이거.'
라그비아 대사제의 신성력은 조금도 오크에게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오히려 오크의 도발에 각혈하며 쓰러질 정도였고, 그 말은 솔직히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진짜 여신이...?"
여신이 인간들의 편을 드는 게 아니라, 마왕군의 편을 든다. 어째서? 그 이유는 무엇인가?
"누군가, 누군가가 진실을...."
"여신이시여!"
오크가 하늘을 향해 외친 기도가 닿은 걸까. 구름이 서서히 걷어지고 금색의 찬란한 빛이 세상에 드리웠다. 베이신은 하늘에서 날개를 나풀거리며 내려오는 천사들을 보며 입이 떡 벌어졌다.
"세상에."
설마 살면서 진짜로 천사들을 보는 날이 올 줄이야. 여신교단의 성지에서도 1년에 1번 볼까말까한 천사들이, 그것도 날개를 13장이나 펄럭이는 대천사가 천사들을 기끌고 내려오는 건 두 눈을 뜨고도 믿을 수 없는 장관이었다.
"여신이시여."
베이신은 속으로 기도했다. 부디 저 간악한 오크의 말에 천벌을 내려주기를.
"새끼, 여신님을 들먹이다가 좆됐죠?"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오크는 분명 당황하고 있으리라. 자기 마음대로 여신을 들먹이며 팔아치워 선동을 하려했건만, 갑자기 하늘에서 대천사가 천사들과 함께 내려와 신성력을 뿌리기 시작했다.
라그비아 대사제조차 범접할 수 없는 압도적인 신성력의 향연에 베이신은 확신했다. 저들이야말로 여신의 진정한 뜻을 담고 내려온 자라는 것을.
"천벌을."
구구구구.
자신을 루시엘이라고 말한 대천사는 신성력이 가득한 손을 앞으로 뻗었다. 인간들을 향해. 베이신은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하면서도 자신의 이성을 부정했다.
"그, 그럴 리가 없잖아. 천사가 왜 마왕군의 편을 들어?"
정말로 누군가가 저지른 것인가? 오크의 말대로 여신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여신의 말을 왜곡하고 자기 사리사욕을 챙기는 자가 있기에, 분노한 여신이 오히려 마왕군의 편을 들어준 것인가? 여신은 인류의 편이 아니었단 말인가?
온갖 혼란이 베이신의 머리를 들쑤시는 가운데, 천벌이 무엇인지 드러나기 시작했다.
구구구구.
베이신이 서있는 성벽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성벽 위에 서있던 이들은 하나 둘 혼란과 공포에 빠졌다.
"으, 으아아아아!"
수 백년 동안 한 번도 무너지지 않은 레굴루스 성의 성벽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게 아닐까 싶었지만, 지진과는 사뭇 다른 진동이었다. 땅에서 흔들리는 진동이 아니라, 성벽 자체가 흔들리는 진동이었다.
"성벽이...."
"무너진다아아아!!"
베이신은 비명과 함께 자리를 이탈했다. 기사가 자리를 이탈한 것은 기사 작위를 박탈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참수형을 당해도 시원찮을 판이었으나, 당장 발을 디디고 서있는 발판이 무너지는 것에 본능이 이성을 잠식했다.
"으아아악!"
쿠구구구!!
성벽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은 아래쪽부터 무너져내리기 시작했고, 성벽은 한 곳도 빠짐없이 흔들리며 벽돌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게...천벌?"
쿠구궁!
눈 깜짝할 새, 성벽 전체가 폭삭 무너져내렸다. 베이신의 몸은 무너지는 바닥과 함께 아래로 떨어졌다. 기사인 자신 뿐만 아니라, 성벽 위에 있던 모두가 아래로 떨어졌다.
"으아아악!!"
베이신은 비명을 지르며 허공에 손을 뻗었다. 흙먼지 속에서 뻗은 손은 주군인 이므신할이 아닌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를 향하고 있었다.
"제발! 나는 아무 잘못도 안 했어! 살려주세요, 여신님!"
쿵! 등허리부터 땅에 떨어졌다. 투구 안이 흔들리는 충격에 정신이 날아갈 뻔 했으나, 철갑이 몸을 보호해준 덕분에 즉사하지는 않았다.
"으으...."
하지만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나마 기사인 자신은 임기응변으로 살아남을 수 있어서 망정이지, 흙먼지 아래에서 '우지끈'하며 무언가가 터지고 짖이겨지는 소리가 울려퍼져 베이신의 속을 뒤틀리게 만들었다.
"왜 그러는 거야! 대체 왜 그러는 거냐고!!"
"여신의 이름을 팔아치운 자. 교리와 금기라는 이름으로 여신의 뜻을 왜곡하여 전한 자. 그들의 말에 의심하지 않은 죄."
나지막한 천사들의 말에 베이신은 숨이 넘어갈 뻔 했다.
"설마...."
범인은 여신교단이었단 말인가. 베이신은 성벽의 잔해에 깔려 머리만 반짝이고 있는 라그비아 대사제를 향해 쌍욕을 퍼부었다.
"교단 씹쌔끼들아----!!"
쿵!
성벽은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 * *
"역시 개수작의 꽃은 공병이라니까."
약간의 연출과 화려한 언변만 있다면 인간들을 충분히 혹세무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숱한 전투를 통해 선동과 날조를 거듭해왔고, 거짓을 진실로 만들어 인간들을 물리쳐왔다.
"이걸로 여신 교단은 끝이다."
여신의 뜻을 전달하는 천사들이 마왕군의 편을 들었다. 여신교단 전체에 큰 영향력을 행사함과 동시에, 여신교단과 인류 연합이 서로 유리될 수 있도록 판을 만들었다.
'마왕군과의 싸움은 사실 여신교단 때문에 벌어진 거 아닌가?'
의심의 씨앗은 싹을 터서 불신이라는 열매를 맺을 것이다. 서로 믿고 함께 싸워야 할 인류가 서로를 믿지 못하여 배신하고 반목하는 상황이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마왕군은 더욱 더 유리해진다.
"군단이여. 우리를 귀찮게 할 성벽은 무너졌다."
꾸르륵.
내 발치에서 튀어오른 점액 덩어리가 나의 등에 뱀처럼 안겼다. 내 좆에서 떨어져나와 몇 주간 성에 공작을 벌였던 나의 삼두마차 중 한 명, 라임이 드디어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왔다.
"고생했다, 라임아. 네 덕분에 성벽은 무너졌다."
"무너뜨리는 건 내 주특기임."
무엇을 숨기랴. 라임을 비롯한 슬라미아들은 고된 노동을 하고 지하수에서 땀을 씻어냈다.
지하수로의 수원에서 미약섞인 점액을 뿌리며 논 것은 단순히 물을 오염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성벽을 무너지기 일보직전인 상태로 만드는 중노동을 하며 묻은 이물질을 씻어내기 위한 샤워였다. 그리고 그 고된 노동의 결실이 오늘에서야 빛을 발한 것이다.
"군단이여! 거지같은 성벽은 무너져내렸다! 너희들에게 내릴 명령은 단 한 가지!"
"""라스!!"""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외쳤다. 성기능이 없는 구울들이 성을 포위하여 개미 새끼 하나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틀어막을 것이며, 그 사이 우리 군단의 병사들은 인간들을 무참히 공격할 것이다.
"돌격!"
나는 할레오를 들고 정면으로 달렸다. 내 질주에 뒤따라오는 군단의 부하들이 내 발걸음을 재촉했고, 나는 할레오를 꽉 움켜쥐고 힘차게 뛰어올랐다.
"저항하는 자는 모조리 죽는다!"
무너진 정문 성벽의 잔해 속에 그녀가 있다. 나는 할레오를 뒤로 넘겨, 힘차게 앞으로 투척했다.
"죽어라!!"
"여신이시여...!!"
잔해 속에서 튀어나온 라그비아 대사제가 정수리에 피를 흘리며 뛰쳐나왔다. 내가 투척한 할레오를 막기 위해 거대한 방패를 만들어냈으나 소용이 없었다.
"커흑!"
신성력의 방패를 꿰뚫은 할레오는 대사제의 이마를 스치듯 날아가 땅에 박혔다. 자신의 머리 위에 실핏줄이 터진 대사제는 스쳐지나간 도끼날에 겁에 질렸다.
털썩.
자신이 자랑하는 신성력의 방패가 무참히 깨진 것으로도 모자라 죽을 뻔 했다. 할레오는 땅에 처박혀막대한 흙먼지를 일으켰고, 나와 우리 부하들을 향해 활을 쏘려고 하던 병사를 정확히 반으로 갈라버렸다.
"라그비아 대사제. 정녕 여신 교단의 뜻이 진정으로 여신의 뜻이라고 생각하나?"
나는 라그비아의 앞에 섰다. 그의 눈은 내 옆에 나를 보좌하듯 선 대천사, 루시엘-이라는 이름의 루시펠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기는. 여신께서 나를, 우리를 보듬어주시까 그런 거지."
나는 루시펠의 허리를 휘감아 안은 다음, 강제로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깜짝 놀란 루시펠이 눈을 번쩍 떴지만, 이내 곧 게슴츠레 눈웃음을 치며 내 키스를 받았다.
"아, 아아...!"
"푸하. 미안하지만 짧게 하지. 내가 지금 바빠서 말이야."
"그분의 뜻을 따르시는 분께, 푸훕, 제가 어떻게 재촉을 하겠습니까. 저는 당신을 위해 그 분께서 보내주신 사자. 뜻대로 하시옵소서."
루시펠은 내 손을 자신의 고간부에 쓸게 한 다음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올렸다. 천사가 스스로 오크에게 음란한 신호를 보내는 것에 라그비아 대사제는 진심으로 절망한 눈빛이었다.
"아아악!"
"그만둬! 살려줘!"
"저항하면 죽인다. 저항하지 않는 자들은 복종의 표시로 바지를 벗어라."
내 지시에 부하들은 사로잡은 인간들을 강제로 바닥에 눕혔다. 과도한 저항을 하며 우리 군단을 향해 칼을 휘두른 이들은 구울이 되었고,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한 이들은 관속에 눕는 것처럼 바닥에 누워 바지가 벗겨졌다.
"여신께서 말씀하시길, 인류의 출산율이 너무 낮아 인류의 멸망이 의심된다고 하시더구나. 그래서 내 가 세계의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이렇게 나타났다."
짝. 내가 손뼉을 치자 뒤에서 서큐버스 하나가 조심스럽게 나타났다. 바지가 벗겨진 채 흉물스러운 자지를 내놓고 있던 라그비아 대사제의 자지는 색수병에 걸린 것처럼 서서히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아, 아아...!!"
"여신께 감사하라. 여신께서는 네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셨나니."
서큐버스는 라그비아의 앞에 무릎을 꿇고 치마를 들어올렸다. 검은 스타킹 속에 가려진 순백의 속옷에 라그비아의 눈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선택하라. 종족을 초월한 사랑으로 여신의 뜻을 따를 테냐, 아니면 편협한 사고 속에서 죽음을 맞이할테냐?"
"마망의 품에 안기렴...?"
"으아악!"
라그비아는 서큐버스의 가슴에 안겼다. 오열하는 대사제가 서큐버스의 품에 안긴 것을 시작으로, 주민들은 하나 둘 선택의 기로에서 편한 쪽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그어어어.
성벽 아래에 깔렸던 인간들은 구울이 되어 부활했다. 저항하는 이들은 모두 구울들이 쳐죽였고, 그들은 좀비가 태어나는 것 마냥 새롭게 구울이 되어 인간들을 제압했다.
"끝났군."
나는 할레오가 박힌 잔해를 향해 다가가 바윗덩어리를 치웠다. 그곳에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벌벌 떨고 있던 전 주인, 이므신할 레오가 공포에 질린 채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도망쳐도 소용없다. 전 주인이 어디에 있는지도 설마 모를 것...크흐흐, 지렸군."
이므신할의 아래는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그녀의 목을 정확히 스친 할레오의 일격으로 인해,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지려버린 게 틀림없었다.
"내게서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았느냐. 흐흐흐, 가자. 네 성으로."
나는 이므신할을 강제로 일으켜세웠다. 성검의 용사도 아닌 그녀는 한낱 여인에 불과했고, 나의 힘을 이겨낼 수 없었다.
"고트다이할 그 양반, 아직 살아있나? 그럼 눈앞에서 보여주도록 하지."
나는 할레오에게 손가락을 튕겼다. 흑요석의 도끼는 붉은 안개와 함께 모습이 변했고, 곧 은발에 갈색 피부로 태닝을 한 사자귀 이므신할이 나타났다.
"네가 직접 끌고와라, 할레오."
"예, 주인님! 그럼 그거 하시나요?!"
색욕과 유열을 깨달은 할레오는 내가 하려는 행위를 알고 벌써부터 두근거림을 참지 못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성을 향해 느긋하게 걸었다.
"그래. 집주인이랑 식사 자리에 빈 손으로 갈 수는 없지."
먹을 건 내가 직접 챙겨간다. 나는 이므신할의 목에 채워진 목줄을 건네받아, 레굴루스 성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이다, 고트다이할! 오랜만에 만났는데 식사 한 번 하자!"
성문 바로 앞에서 나를 기다리는 늙은 후작은 내게 제압된 딸을 보자마자 각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