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비만 오크-598화 (594/800)

598회

158일차

성을 포위하기 위해서는 수비병력보다 몇 배는 더 많은 병력을 준비해야하는 것이 공성의 기본이다.

하지만 우리 던전, 마왕군의 특성은 소수정예가 기본이라 병력의 수가 압도적으로 부족하다.

아무리 하위던전을 통해 병력의 수를 늘렸다고는 한들, 20명씩 찔끔찔끔 올리는 정도로는 후작성을 상대로 승리하기에는 다소 역부족인게 현실이었다.

"그래서 병력을 현지에서 조달했지. 이야, 장관이구나."

에일라와 함께 후작성 근처에 마련된 진지에 도착한 나는 넓은 후작성을 에워싸는 우리 군단의 병사들에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이게 바로 진정한 라스터 콜이지."

슬라임, 구울, 인간, 오크, 엘프, 드워프, 드라이어드, 안드라스, 하피, 미노타우르스, 드라고니안.

하위 분류를 제외하고 최상위 그룹으로 종족을 구분해도 벌서 10종류를 넘어가는 수많은 마족들이 성을 포위한 채 나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중 가장 많은 수의 병사들을 단연코 '구울'이었다.

"역시 구울은 현지에서 구하는 게 최고라니까."

"전부 후작성 밖에 있던 마을의 주민들입니다. 복상사로 가버린 자들을 구울로 다시 되살렸습니다."

"잘했다. 이왕 죽을 거라면 한 발이라도 더 싸고 죽어야지."

성을 포위한 구울들은 정식으로 던전에 등록된 이들이 아니다. 후작령 내의 소규모 마을이나 화전촌에서 죽은 이들로, 라스투자드의 구울 리치들이 저들을 부활시켰다.

"흐흐흐. 저 놈들은 알기나 할까? 자기들이 있는 위치를 까발린 이들이 후작성의 기사들이라는 걸."

"그 기사들도 정작 지금 후작성을 향해 칼을 겨누고 있죠."

"그렇다. 배신의 묘미는 역시 주인의 등에 칼을 박는 것이지."

안다이할의 암컷 기사단은 대부분 군단 곳곳에 흩어져 각 종족별 소규모 부대에서 무기를 들고 있었다.

자신의 양심을 속이기 위해 일부러 성 쪽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고 있지만, 정작 싸움이 시작되면 혼란에 힘입어 후작가의 병사들을 무참히 썰어버릴 것이다. 본디 인간이었던 이들인 만큼, 본성은 이기적이니까.

"오셨어요?"

"그래. 이렇게 다들 쭉 늘어져있으니 정말 가슴이 두근거리는구나."

륜부터 시작하여 한 때는 1Q2W 이하생략이었던 자간까지. 사실상 우리 던전에서 고유의 이름을 가진 모든 존재가 나의 옆으로 시립한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내 옆을 지키는 이는 륜과 에일라.

우리 군단의 시작부터 함께 해온 삼두마차 중 두 명으로, 왼손이 들어갈 보지가 륜이라고 한다면 오른손이 만질 가슴은 에일라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 던전 보호를 위한 샤이탄을 '제외한' 모두가 총출동한 상황. 후작성을 점령하기 위한 건곤일척의 승부를 위해, 나는 모두의 앞에 서서 앞으로 나아갔다.

"로도페리."

"예, 군단장님."

평소에는 말을 편하게 하던 로도페리조차 나에게 예의를 갖추고 도끼를 건넸다. 그녀가 영혼을 갈아넣어 만들어낸 흑요석 양날도끼의 안에서 녹색의 기운이 모세혈관처럼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아...!"

"<마검화>. 이제 이 도끼는 마검이다. 도끼지만."

색스 Mk.74, 이제는 색스-<할레오>라고 불러야 할 마검의 발현에 마왕군은 넋을 잃었다. 나의 등에 타오른 문신에서 붉은 오라가 흘러나와 거대한 사자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이거 주인을 찾으러왔는데 주인이 어째 보이질 않는군."

나는 내가 서있는 정면의 성문 위, 성벽을 향해 할레오를 들어올렸다. 성문 위에 올라가있던 수비대장은 내가 자신을 향해 도끼날을 겨누자 금방 방패 뒤에 숨어버렸다.

"나와라, 이므신할 레오!"

"""나와라스! 나와라스!"""

나의 외침과 함께 모든 병사들이 하나가 되어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하늘 위를 날아다니는 흑익룡들도 성벽을 향해 브레스가 아닌 함성을 질러 소리를 더욱 넓게 퍼뜨렸다.

"어디에 숨은 것이냐! 성검을 빼앗기고 몰래 숨은 것이냐? 성검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년 같으니!"

고오오.

어디선가 진한 살기가 느껴졌다. 성벽 위에서 산발이 된 이므신할이 방패 사이에서 나타나, 나를 향해 활을 겨누고 있었다.

"죽어----!!"

죽으라는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쏜 화살은 빛처럼 내게 날아들었다. 하지만 나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화살을 막아냈다.

"느리구나. 차라리 분수쇼로 터져나오는 오줌보가 더 빠르겠다."

크르르.

붉은 기류의 사자는 입에 문 화살을 반으로 으깨 땅에 뱉었다. 단지 내 넘치는 정력이 발현되었을 뿐인 오라가 현실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에 이므신할은 입을 쩍 벌렸다.

"어떻게...?"

"네 년으로부터 빼앗은 마검 할레오의 힘이다. 우쭈주, 잘했다."

나는 오라로 발현된 할레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게 머리를 비비며 애교를 부리는 사자는 금방 다시 도끼로 돌아갔다.

"보이느냐, 인간 놈들아. 성검 레오는 완벽히 내게 굴복했다는 것을."

성벽 위에 수성을 위해 올라온 병사들 중 일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들은 모두 협곡에서의 전투에서 성검 레오의 진면목을 봤던 이들이고, 내가 오라로 발현한 마검 할레오의 모습이 성검 레오의 모습과 똑같다는 걸 분명 깨달았을 것이다.

"흐흐흐. 갸루라고 들어는 보셨나 모르겠네."

순박한 소꿉친구가 고작 일주일 사이에 피부를 태닝하고 암컷 타락한 모습들 본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병사들의 충격도 충격이겠지만, 성검 레오의 주인이었던 이므신할은 모든 걸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리라.

"성검이 없는 이므신할 레오에게 이제 남은 게 뭔지 모르겠어."

쿵.

나는 성벽 가까이 다가가 할레오를 바닥에 찍었다. 인간들은 나를 향해 활촉을 겨누거나 마법 지팡이를 겨누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함부로 공격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두려운가? 타락한 성검이 가진 힘이. 성검은 그대로 사용하고 있지만, 성검의 힘을 가지고 마왕군의 편에 선 '용사'들의 힘이."

비르고의 용사, 메어리.

사지타리우스의 용사, 미르망.

아리에스의 용사, 에일라.

당장 셋만 하더라도 후작성은 커녕 어지간한 던전은초토화시킬 수 있는 전력이건만, 그들을 보좌하는 수 백 수 천의 마왕군 병사들이 있다.

"들으라. 인간들이여. 너희는 오늘 패배했다."

"""들으라, 인간들이여!"""

오라를 통해 뿌린 나의 목소리가 하늘 위를 나는 유익종들이 목소리에 담겨 후작성 전체로 울려퍼졌다.

"나는 여신의 명령에 따라, 여신의 뜻을 왜곡하고 참칭한 자에게 벌을 내리러 왔노라!"

자.

개수작의 시작이다.

* * *

"......저게 뭔 개소리래?"

마르바스는 오크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저게 성검을 타락시키더니 돌아버렸나?"

성검 레오를 속에서부터 공략한 건 분명 훌륭한 전술이었다. 목숨을 걸고 내부에서부터 오염시킨 그의 정력에 마르바스는 자궁이 꾹꾹 울렸다.

'성검조차 타락시키는 가능성의 정자!'

이건 분명 먹힌다. 오크에게는 신성력을 무력화 할 수 있는 힘이 있고, 그에 가장 강력한 매개체는 정액이었다.

더럽다는 생각보다는, 성검조차 타락시키는 엄청난 가능성에 마르바스는 반하고 말았다. '이므신할 레오'는 사로잡지 못했지만, '용사 레오'는 죽여버리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진심으로 자신의 '파트너'로 삼아줄까 생각했건만, 기절하고 나서 바로 후작성의 포위망으로 달려온 그는 던전 주인인 주제에 여신의 이름을 운운하기 시작했다.

"인류여, 들으라! 너희 후작성에는 여신의 이름을 참칭하고, 그 뜻을 왜곡하여 전파한 이가 다녀갔다! 그 자가 색수병이라는 역병을 퍼뜨린 근원이고,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씨앗을 품은 자다!"

인간들은 오크의 말을 막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화살을 쏘고 마법을 날리며 오크를 공격했지만, 오크의 근처에 있는 부하들은 몸을 날려 공격을 전부 튕겨냈다.

"누군지는 너희들 스스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게 누군데. 마르바스는 혹시나 인간들이 아는가 싶어 고개를 돌렸지만, 성벽 위의 인간들은 긴가민가한 눈치였다.

- 고트다이할 후작 아니야?

- 안다이할 그 놈 일지도 모르지.

- 아니야. 여신의 이름이라고 했잖아. 추기경 그 새끼 아님?

- 추기경? 글쎄. 오히려 여신님의 이름을 더 많이 얘기하고 다닌 라그비아 대사제님 아니여?

- 멍청이들아. 다녀갔다고 하잖아. 그럼 후보는 둘 뿐이지.

인간들은 하나 둘 오크가 말한 '범인찾기'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간들은 오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과연 누가 성욕의 폭발이라는, 유사 이래 단 한 번도 없던 성병를 퍼뜨린 재앙의 근원이란 말인가.

"그 자는 여신의 뜻을 왜곡하여 진실을 은폐했다! 그 자는 여신의 뜻을 따르기를 거부하며, 자신의 멋대로 여신의 뜻을 해석하고 제 사리사욕을 챙겼다!"

그러니까 누구냐고. 후작성 안까지 퍼져나가는 목소리에 숨죽이고 있던 주민들은 하나둘 서로 의견을 주고받기 시작했고, 저마다 가진 의심에 따라 후보를 줄여나가기 시작했다.

"레오 가문! 여신의 뜻을 참칭한 죄를 빌어, 나 라스푸틴이 단죄하겠노라!"

"네 이 노 오 오 오 옴!!"

오크의 외침을 뒤덮는 노인의 절규어린 비명이 울려퍼졌다. 이므신할의 옆에 선 반백의 노인은 벗겨진 정수리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감히 마족의 입에서 여신님의 이름을 운운하다니, 천벌을 받을 지어다!"

그게 맞지. 마르바스는 라그비아 대사제의 말에 동조했다. 아무리 여신이 지상에 간섭하지 않는 존재라고 한들, 여신의 아래에 따르는 수많은 천족들은 여신의 뜻에 따라 지상에 얼마든지 간섭할 수 있다.

"여신이시여!"

그게 바로 신성력이고, 천사들의 의지를 대변하는 이들이 바로 사제들이었다. 라그비아 대사제는 그중에서도 그 누구보다 가장 많은 신성력을 보유한 존재로, 마법사로 치면 대마법사-아크메이지 급의 능력자였다.

"여신의 철퇴를 받아라!"

"흐하하! 그것이 여신의 철퇴인가, 아니면 네 놈의 철퇴인가!"

"뭣이?!"

하늘에서 거대한 은빛 망치가 생성되어 오크의 위에 떨어졌다. 오크는 자신의 몸보다 더 거대한 망치를 향해 도끼날을 세웠고, 은빛 망치는 너무나도 쉽게 부서져버렸다.

파스스.

망치는 도끼에 의해 반으로 갈라지며 빛무리로 사그라들었다. 할레오를 위로 들어올린 오크는 목청껏 소리쳤다.

"보아라, 인류여! 여신의 철퇴가 고작 오크 하나를 짓누르지 못할 리가 없다! 하지만 저자의 철퇴는 부서졌지! 그 말이 무엇이겠느냐?! 나를 죽이려는 것이 여신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으, 으으으!! 아니다! 나의 신앙심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다! 여신님을 모독하지 마라!"

"신앙심?! 네 놈이 부족한 건 신앙심이 아니라 머리숱이겠지! 여신님께서 너를 진정으로 보듬어주셨으면 진작에 사자갈기처럼 풍성해졌을 것이다!!"

"커허어억!"

라그비아 대사제는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갑작스러운 인신공격에 마르바스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여신에게 기도를 올린다고 한들, 탈모를 고쳐주지는 않으니까. 다리가 잘린 것도 신성력으로 회복시켜줄 수 있는 신성력이 머리칼을 자라나게 해주지 못하는 건 분명 조금 이상하기는 했다.

탈모는 병이 아닌 건가. 마르바스는 오크의 이유 모를 언행에 머리가 혼란스러워 진 사이, 하늘에서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구름 속에서 펄럭이는 하얀 깃털을 본 순간, 마르바스는 등줄기에 전율이 튀었다.

"저건...!"

"나는 비록 마족의 몸이지만, 여신이 말하는 대의와 뜻에 잠깐이나마 따르기로 했다! 마족을 팔아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간악한 자들에게 천벌을 내려주기 위해 온 것이다! 아아, 여신이시여! 제 목소리가 들리신다면 부디 증명하여 주시옵소서!"

짝! 오크는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하늘에서 찬란한 금빛이 구름을 갈랐고, 등에 하얀 날개가 달린 여인들이 하얀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추듯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진짜 천사들이라고?"

"아아, 라스푸틴. 마의 세계에서 태어났지만, 정의를 위해 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준 아이야."

천사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금발의 여인은 누구보다도 찬란한 13장의 하얀 날개를 펄럭이며 천천히 내려왔다. 인류는 하늘에서 '마왕군'을 향해 내려오는 천사들을 바라보며 경악했다.

"나의 이름은 루시엘, 겸손의 대천사. 그 분의 진정한 뜻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이 땅에 내려왔노라."

"나의 천사여! 그 분의 뜻을 곡해하고 음해를 일삼는 자들에게 천벌을 내려주소서!"

"아니, 아닙니다! 자비로운 대천사 루시엘이시여! 저들을 마왕의 끄나풀입니다! 마족들에게 천벌을 내려주소서!!!"

라그비아 대사제의 절규에 대천사 루시엘은 오만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날개를 펄럭이던 그녀는 인류를 지켜주는 성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오만한 인간들에게 천벌을."

딱.

루시엘이 손가락을 튀기자마자, 후작성을 감싸고 있던 성벽이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르바스는 아래에서부터 붕괴되기 시작하는 성벽을 보며 입을 쩍 벌렸다.

"...천벌."

인류를 지켜주는 유일한 방패, 성벽은 모래성처럼 무너져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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