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1회
151일차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
나는 칠흑같이 어두운 공간속에서 의식을 되찾았다.
"여긴...?"
"정신이 드냐?"
중후한 목소리와 함께, '그'는 내 앞에 나타났다. 원형의 철제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석쇠에 돼지껍데기를 노릇노릇하게 굽고 있는 그는 나를 향해 자리를 권했다.
"앉아."
나는 그의 말대로 순순히 의자에 앉았다. 그는 익숙한 손길로 테이블 위에 올려진 리모컨을 눌렀고, 나는 옆에 떠오른 80인치 텔레비전을 통해 나의 '최후'를 볼 수 있었다.
"저건...."
"꼴에 자기 여자들 살리겠답시고, 엘프랑 용사를 집어던졌지."
영상 속 오크는 자지를 박고 있던 용사의 말 위에서 풀쩍 뛰어올랐고, 뒤에 안겨있던 엘프 여왕을 다른 곳으로 집어던졌다. 드래곤만큼 거대한 은빛 사자는 나를 향해 손톱을 휘둘렀다.
콰직.
화면이 붉은 피로 물들었다. 불에 익어가던 껍데기 하나가 뻥 소리가 나며 터졌고, 그는 익은 껍데기를 익숙한 손길로 가위로 적당히 자르기 시작했다.
"세뇌는 개뿔. 세뇌한 대상이면 저런 식으로 살리면 안 되는 거 아니냐?"
"지랄. 나 때문에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그러고 뒤지면 그게 의미가 있냐?"
"의미가 왜 없어? 내 여자 살리려다가, 내 여자 뱃속에 있는 내 아이 구하려다가 죽은 게 뭐가 대수라고."
"그러면서 속으로는 존나 대수라고 생각하고 있으면서 허세는."
그는 내 잔에 묻지도 않고 소주를 때려넣었다. 나는 그걸 한 입에 털어넣었다. 정말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싸구려같이 톡 쏘는 맛에, 절로 속이 쓰렸다.
"크으으...."
"왜 졌다고 생각하냐?"
"진 거 아니거든?"
"졌어. 성검의 용사들을 쉽게 제압했으니, 이므신할도 쉽게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지. 섹스로 혼란을 주면 전부다 해결 될 거라고 생각했고."
그의 말에 나는 한 마디도 반박하지 못했다. 그가 하는 말은 모두 촌철살인이나 다름 없었고, 시쳇말로 팩트폭격이었다.
"인간이 성욕에 패배하는 순간이 언제인지 아나? 사회적인 시선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할 때다. 인간들을 상대로 충격과 공포에 빠뜨리는 선에서 끝냈으면 모를까, 그걸로 인간들을 꼬드기겠다는 건 너무 과욕이었어. 적어도 5천명 인간들이 바라보는 앞에서 할만한 짓은 아니었다."
"그래, 인정한다, 씹쌔끼야."
나는 그의 잔에 소주잔을 콸콸 쏟아부었다. 표면장력에 의해 아슬아슬하게 잔이 차올랐고, 그는 입꼬리를 비틀며 잔을 들어올렸다. 그는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잔을 입에 털어넣었다. 그 모습에 내가 다 속이 쓰라렸다.
"성검 레오만 상대했으면 모를까, 토벌대까지 전부 상대한 건 무리였다. 사자의 위상을 드러낸 순간, 바로 도망을 쳤어야 해."
"하지만 이것만 견뎌내면 후작성까지 일직선 아니냐."
"그걸 견디지 못해서 개발렸잖냐. 애초에 어그로를 끌려고 했으면 미르망의 위에 타서 날지 말았어야지. 미르망 보지에 앞뒤로 퍽퍽 문지르면서 성검 레오 공격을 다 피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게 양심없는 거 아니냐? 너는 90레벨이고, 걔는 100레벨 수준인데."
"씨벌, 아니까 좀 닥치지?"
"어떻게 닥치냐? 크흐흐."
그는 비릿하게 웃으며, 갑갑한 정장 넥타이 아래에 걸린 사원증을 집어들었다. 그의 얼굴이 담긴 플라스틱 사원증에 내 모습이 비쳤다.
"자, 그러면 오늘의 교훈. 혼자서는 모든 걸 구할 수 없다."
"그거 교훈치고는 괜히 망하는 거 아니냐? 결국에는 혼자서 다 해결하던데."
"그 건 슈퍼-한 사람이지 슈퍼 오크가 아니잖냐. 혼자서 다 하고 싶으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어야지."
"씨벌, 오크로 태어난 걸 어쩌라고. 오크로 환생한 덕분에 지금까지 이렇게 살 수 있었잖아."
오크였기에 지금의 <라스푸틴 아스타로트>까지 이를 수 있었다. 평범한 마을 청년 A였다면, 아마 마왕군에게 오히려 사냥을 당해 진작에 죽어버렸을 것이다.
"그래. 오크로 지금까지 쌓아온 금자탑이 얼마냐. 그걸 활용하라고, 활용을. 아끼다 똥 되는 거 모르냐?"
"그래서 과감하게 더 풀었잖아."
"더 풀어야지. 솔로몬 봐라. 그 놈은 뒤에서 떡이나 치고 있고, 밑에 부하들보고 싹다 나가서 싸우라고 하잖냐. 어깨, 아니 배에 짊어진 무게를 좀 덜어낼 필요가 있지 않겠어?"
팡. 돼지껍데기의 겉면이 터지며, 기름이 줄줄 새어나왔다. 그는 바싹 타버린 껍데기를 내 접시에 올리며 잔을 들어올렸다.
"마왕과 여신을 동시에 범할 그 날을 위하여, 건배."
"......씨발, 어디서 속내 말하면 바로 모가지 날아가겠군."
"'나'니까 이런 얘기 할 수 있는 거 아니냐. 사람마다 누구든 자신만의 대나무숲이 필요한 법이지. 크흐흐."
그는 단 번에 잔을 비워버렸다. 나 또한 타오르는 갈증을 한 입 크게 털어넣어 깔끔하게 비워버렸다.
"다시금 상기시켜줘서 고맙다. 젠장, 어떻게든 최대한 많이 살려서 튀어봐야겠군."
"가기 전에 하나, 착각을 정정하지. 왜 발렸다고 생각하는 거지?"
"뭔 개소리야."
"네가 쌓아온 업적, 네가 쌓아온 길에 너 혼자 걷는 건 아니잖냐."
딱.
불빛이 켜졌다. 어둠이 환하게 걷히며, 내 뒤에 서있는 수많은 이들이 보였다.
"슈퍼-한 사람조차 연인이 있고 가족이 있다. 너는 이제 밑에서 아둥바둥거리던 조무래기 사원이 아니다. 현실로 치면 이제 좆소기업에서 머기업으로 올라갈 단계에 있는 거야."
"존나 오래 걸린 것 같은데."
"허구한날 떡이나 쳐대니까 그러지. 그러면 나는 여기까지."
그는 넥타이를 풀고, 사원증을 숯불에 집어던졌다. 아주 먼 옛날, 당당하게만 생각하던 이름 석자가 불에 활활 타올라 사그라들었다.
"야. 용사 상대로 가장 효율적인 전술이 뭐게?"
저벅, 저벅.
그의 뒤에서 다가오는 두 명의 여인을 보며, 나는 속에서 복받쳐오르는 무언가를 마지막 한 잔과 함께 씻어내렸다.
"다구리."
"정답이다, 라스푸틴."
짝.
그의 박수와 함께, 세계가 다시 색을 되찾아갔다. 은빛이 출렁거리는 세계 속에서, 찬란한 금빛을 뿌리는 그녀는 내 앞에 당당히 선 채 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도 기다렸습니다."
나지막하게 말하는 그녀는 처음보는 검으로, 사자의 손톱 끝을 가로막으며 나를 향해 싱긋 웃었다.
"...믿고 있었다고, 젠장!"
"주인님, 저의 이름을."
나는 남들의 귀에 들리지 않게, 하지만 그녀에게만큼은 확실하게 들리도록 목에 힘을 주고 말했다.
"에일라, 아리에스!!"
<에일라 R 아리에스>, Lv.100, ★★★★★★.
드디어, 나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자를 뽑아냈다. 나는 에일라를 뒤에서 끌어안고, 에일라는 고간부와 허벅지 사이로 파고드는 자지를 아주 여유롭게 받아들이며 내 자지를 애태웠다.
"6성 초월자의 처녀를 그냥 이런 곳에서 취하실 생각이십니까?"
"당근 아니지. 나중에 침대에서 고히 잡아먹을 거다. 흐흐."
6성. 신수나 요정왕과 마찬가지로, 에일라는 초월자의 반열에 이르렀다. 아직 레벨은 그들에 비하면 현저히 낮은 수준이지만, 그녀는 파종의 힘으로 나조차도 뛰어넘는 레벨로 성장하는데 성공했다.
"주인님 덕분에 더욱 강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이 몸, 주인님께 드리는 것이 맞지요."
"그래, 너의 처녀조차도. 흐흐, 한 여자의 처녀를 두 번이나 먹게 되다니."
이것이 기적이 아니고 또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내 자지를 품고 애태우듯 손가락으로 귀두를 쓰다듬는 에일라의 손길에 등허리가 짜릿하게 울렸다. 검을 잡느라 거칠었던 에일라의 손은 양갓집 규수보다 더 보드랍고 말랑거렸다.
"그런데 주인님. 그거 아십니까?"
"응?"
"배, 살짝 긁혔습니다."
"......오."
나는 에일라에게서 떨어져 내 배를 확인했다. 자문자답의 환상 속에서 본 영상은 역시 내가 성검 레오에게 일격을 맞는 순간의 모습을 담은 영상이었다.
나는 공격을 당하기 직전, 본능적으로 성검 레오의 방패보다 더 단단한 나의 배를 내밀었다. 나의 배는 X자로 크게 긁혀있었고, 배꼽 근처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히익?!"
오크 생애 처음으로 배에 상처를 입었다. 나는 손으로 배를 훌쩍 만져보았고, 대략 1/3 정도 살이 줄어들었음을 깨달았다.
"이건...도대체...?"
"주인님, 지금 중요한 건 저 자를 쓰러뜨리는 겁니다. 지시를."
"그, 그래. 그래야지."
성검 레오는 성검 아리에스의 사용자가 등장하자 제대로 당황했다. 말조차 꺼내지 못한 채 어버버거리며 뒷걸음질쳤고, 에일라는 황금빛 검으로 성검 레오의 발톱을 여유롭게 튕겨냈다.
"이 전투, 저 괴물만 쓰러뜨리면 이기는 거군요."
"그래. 근데 문제는 저걸 쓰러뜨릴 만한 힘이 부족하다."
"걱정마십시오. 제가 각성을 하기도 했지만, 저만 온 게 아닙니다."
쩌저적!
성검 레오를 중심으로 분홍빛 꽃잎이 피어올랐다. 주춤거리다가 꽃잎, 성기방패를 건드린 성검 레오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굴렸다.
콰---앙!!
성검 레오의 몸이 닿았던 성기방패가 폭발했다.
"짜잔. 아빠, 놀랐죠?"
내 뒤에서 나를 가슴으로 받치며 장난스레 말하는 목소리에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원래라면 적 던전을 틀어막고 있어야 할 메어리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너!"
"마르코시아스를 여차저차."
"잘했다! 역시 똑똑하구나! 역시 나의 딸이야!"
적 던전의 주인을 생포하여 항복도 못하게 만들다니. 쟁탈전이 끝나지 않는 이상 내 던전을 상대로 쟁탈전은 걸리지 않는다. 나는 메어리의 기지에 메어리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내 주변으로 하나 둘 나의 부하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에일...! 아, 여기서는 어떻게 불러야하죠?? 이름이나 성이나 둘 다 들킬 것 같은데."
"어느쪽이든 괜찮습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죽거나, 군단의 하수인이 될 테니."
에일라의 선전 포고에 성검 레오의 표정이 굳었다. 성검의 용사가 무려 셋이나 자신의 적이 되었다는 것에 상당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캬오오오!!]
성검 레오는 포효를 내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그녀를 중심으로 거대한 반구형의 원이 펼쳐졌고, 그녀의 주변에 뿌려져있던 성기방패들이 모조리 폭발했다.
"뭐야, 결계인가?"
"결계까지는 아니에요. 그냥 사방으로 방출한 신성력이 눈에 보일 정도로 남아있을 뿐이에요."
"...아니 무슨 신성력이 저렇게 많아?"
메어리나 미르망을 보고도 제법 신성력의 총량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이므신할이 가진 성검 레오의 신성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다. 언제 전부 다 떨어지나 오히려 기대가 될 정도였다.
"하지만 저런 광역기를 사용했다는 건...."
"적이 궁지에 몰렸을 때! 주인님께서 말씀하셨죠."
성검 레오가 사방에 뿌린 신성력이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막대한 흙먼지를 일으키며 주변에 폭발을 일으킨 성검 레오의 주변에는 지직거리는 전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오우, 변신인가? 번개를 두른 사자라니, 좀 많이 그런데."
"자세히 보세요, 아빠. 저거 신성력이에요."
"신성력이 전격을 띄고 있는 겁니다.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는 자로군요, 레오는."
에일라가 대검을 앞으로 겨눴다. 메어리가 지팡이를 높이 들어올렸다.
"이렇게 다같이 싸워보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
"다같이 한 자지를 상대로 싸운 적은 있었죠."
루나가 희미하게 빛나는 성흔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활을 들어올렸다. 옆에 함께 선 륜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활을 꺼내들었다.
하르파스가, 미르망이, 안드라스. 하나 둘 모여드는 나의 여인들에 나 또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게 지금까지 내가 쌓아온 것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내가, 이렇게 수많은 부하이자 동료이자 동반자들의 도움을 받아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나는 울컥한 속을 가다듬고, 가벼워진 뱃살과 함께 두 다리에 힘을 모았다.
"에일라, 네가 총대장이다. 네가 대장이 되어 우리 군단에 지시를 내려라."
"주인님?"
"너희들에게 모두 맡기기에는 좀 그래서 말이야. 흐흐."
'나'는 '내'게 더이상 혼자 모든 걸 할 필요 없다고 따끔하게 말했지만,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은 내가 혼자서 싸우는 것도 아니다.
"인간들과 성검 레오를 동시에 상대한다라. 재미있군요."
"우리는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까, 에일라 대장님?"
"주인님이 하시는 것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래. 나는...."
나의 부하들이 밖에서 싸우는 동안, 나는 안쪽에서 성검 레오의 변신을 강제로 풀어내게 만들어야 했다.
"성검 레오의 안으로 들어가, 놈을 무력화시키겠다."
"네? 그런 게 가능해요?"
"한 가지 가능성이 있지."
나는 메어리의 성검 비르고의 손잡이 부분이 녹색과 붉은색으로 물든 걸 보고,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강력한 사자라고 한들, 뱃속의 기생충 한 마리 때문에 죽기 마련이다."
"기생충이요...?"
"그래."
나는 성검 레오의 입을 향해 크라우칭 스타트 자세를 잡았다.
"음충이, 내가 된다."
작전명, <심장ㅅㅅ충>.
"길을 열어다오, 에일라!"
"전 군단, 위치로---!!"
에일라의 지휘와 함께, 나는 앞으로 번쩍 달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