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6회
151일차
<그 시각, 마르코시아스 던전>.
"......젠장."
마르코시아스는 마법서로 얼굴을 덮었다. 수척해진 얼굴에는 핏기가 가셔있었고, 며칠동안 제대로 밥도 먹지 못해 피로는 한가득 쌓여있었다.
"모험가들 갔냐?"
"예, 갔습니다. 제 심장에서 마석을 뽑아낸 다음, 떠났습니다."
마르코시아스 앞의 남자는 처연한 미소로 주저앉았다. 모험가들에게 <도플갱어>라는 네임드 마족이 된 그는 하루에도 3~4번을 죽고 부활하며 던전에 침입하는 모험가들을 막아냈다.
"이제 더 안 오겠지?"
"예. 마지막에 들어온 모험가 일곱 명 이후로 더는 없습니다. 당분간 쉬셔도 될 것 같습니다."
마르코시아스는 부하 마인의 말에 눈물을 찔끔흘렸다. 괜히 이상한 곳에 하극상을 일으킨 바람에, 그들은 매일매일 모험가들이 던전에 '출퇴근'하는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나쁜 자식들...어떻게 인간들을 구슬린 거야. 어떻게 모험가들이 우리 던전으로 바로 들어오게 하는 거냐고...."
"포털 넘어갔을 때는 분명 적진이었습니다. 전이문을 바로 앞에 뒀다가, 시간이 되면 해제하고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모험가들이 드나드는 시간은 정해져있었다. 이른 아침에 포털이 아른거리다싶으면 바로 모험가들이 던전에 들어왔고, 그들은 마르코시아스 던전을 약도까지 그리며 안을 드나들었다.
마르코시아스는 모험가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35위 던전은 마냥 폼이 아니었고, 모험가들도 제법 많이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모험가들로부터 어떤 정보도 캐낼 수 없었다.
"이번에 잡은 놈 있어?"
"잡긴 했습니다. 고문 기구에 넣고 자백제를 투여한 순간,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죽었습니다."
"...왜 자꾸 죽는 거야, 대체."
"그것이."
마인은 자신이 사로잡은 남자 모험가의 시신을 가운데에 놓았다. 눈을 까뒤집고 혀를 앞으로 내밀며 죽은 그는 쾌락속에서 죽은 듯 보였고, 마르코시아스는 그게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 번 보십시오."
서걱, 서걱. 마인은 마기를 가득 머금은 손으로 모험가의 등허리를 푹 찔렀다. 그리고 그는 속을 헤집으며 무언가를 잡아 끄집어냈다.
키에엑!
마인의 손에 붙잡힌 음충은 귀두를 흔들며 괴로워했다. 마인은 음충을 손으로 붙잡아 터뜨렸고, 하얗고 꾸덕한 점액이 마인의 손에서 흘러내렸다.
"이게 모험가들의 안에 있던 것들입니다."
"음충?"
"모험가들을 조종한다거나, 아니면 모험가들이 자백에 준하는 짓을 하는 순간 안에서 수작을 부리는 게 틀림없습니다."
마인은 모험가의 등허리에 새겨진 문장을 가리켰다. 비록 지금은 남자 모험가를 잡았지만, 음충들이 발견되는 모험가들의 시신은 분명 한둘이 아니었다.
"사로잡은 모험가들의 시신을 먹어치운 키메라들이 왜, 발정났지 않습니까. 분명 이 놈들의 짓이 틀림없습니다."
"...그래. 그래서 부활도 못 시키고 있잖아. 주인을 감히 범하려고 해서."
모험가들의 시신은 마족들에게 별미 중의 별미다. 하지만 그걸 먹어치운 키메라들은 갑자기 발정이 나서 마르코시아스를 덮치려고 했고, 마인이 황급히 나서서 키메라들을 전부 죽여버렸다. 몸에 들어간 음충들은 숙주와 함께 불타 죽었다.
한 번 성욕을 깨우친 키메라들은 던전의 주인이고 나발이고 호시탐탐 마르코시아스를, 암컷을 노리고 있었다. 거세를 해놓으면 태업을 일삼고, 가만히 놔두니 마르코시아스를 계속 노렸다. 아무리 약육강식이 마족들의 삶의 기반이라고 한들, 주인을 범하려는 던전의 부하는 폐기해야만 했다.
"적 전력을 무력화시키고, 자기들은 모험가들을 보내서 누워서 구경이나 하고. 대단해. 존경스러워. 근데 왜 그 짓을 나한테 하냐고...."
"그거야 주인님께서 먼저 선공을 날렸으니까요."
"그러니까 그런 거야. 으으.... 왜 그때 더 강하게 말리지 않았어!"
"저 그 날 다른 던전 노리자고 말씀 드렸다가 주인님 손에 세 번 죽었습니다."
"......."
마르코시아스는 마법서로 얼굴을 눌러버렸다. 던전은 자신의 옥좌와 소환시설이 있는 방 하나 빼고 모조리 모험가들이 다녀갔고, 부하들은 이제 마인 한 명 빼고는 모두 죽었다. 그들을 부활시킬 수 있는 마석도 전부 사용해버렸고, 부활 패널티로 줄어든 레벨을 복구할 마물강화권도 다 써버렸다.
즉, 이제 더이상 싸울 수 있는 전력이 없다. 모든 것은 자신의 실수이며 책임이었고, 이제 남은 방법은 둘 뿐이었다.
"항복하자."
"주인님."
"끝까지 항전했잖아. 이 정도면 우리 저력을 인정해 줄 거야. 졌지만 잘 싸웠잖아? 안 그래?"
마르코시아스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내가 가서 무릎꿇고 항복하면 돼. 그럼 너는 살 수 있어."
"그건 안 됩니다, 주인님. 차라리 제가 가겠습니다."
"아니야, 아니야.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인 걸. 언제까지...네 도움을 받고 지낼 수는 없잖아?"
마르코시아스는 마인의 볼을 쓰다듬으며 옅게 웃었다.
"너는 내 첫 부하야. 내 첫 남자야. 이제는...이만하면 됐어."
"...주인님."
마인은 손을 들어, 마르코시아스의 얼굴을 상냥히 쓰다듬었다.
"쉬십시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슬립."
"뭐-"
스르르. 마르코시아스는 마인의 품에서 눈을 감았다. 색색거리는 숨은 끊어질 것처럼 가늘었고, 마인은 마르코시아스를 침대에 눕혔다.
"......."
하얀 침대 시트를 조금 찢어, 마르코시아스가 모험가들을 상대하다 부러진 지팡이 끝에 깃발처럼 걸었다. 항복의 기를 들고 심호흡을 하며, 마인은 포털을 향해 힘차게 걸었다.
"주인님을 위하여!!"
설령, 108번째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주인만큼은 살리자. 마인은 결연한 의지와 함께 포털을 뛰어넘었다.
"잠깐! 쏘지마! 항복하겠다!!"
"......."
포털 앞에는 정장을 입은 분홍 머리칼의 여인이 모험가들을 상대로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모험가 여인은 마인을 보고 깜짝 놀라며 여인을 향해 눈을 돌렸다.
"요, 용사님? 이게 무슨...?"
"...기껏 지도 다 알려드렸는데 설마 항복을 할 줄이야."
용사 비르고는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싱긋 웃었다.
"던전 공략 끝났네요. 이제 모험가님들은 필요가 없어졌어요."
"뭐?!"
푸-욱.
가장 가까이 있던 모험가의 명치에 분홍빛 빛이 파고들었다. 용사는 모험가의 흉부 정중앙을 성검으로 찔렀다.
"이런 미친?!"
뒤에 있던 모험가들은 용사의 갑작스러운 배신에 저마다 무기를 꺼내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무기를 꺼내들기도 전에, 천장에서 아래로 뻗어내려온 촉수 가지가 모험가들을 전부 구속해버렸다.
"허...지금...우리를 공격하려던 모험가들을 역으로...?"
"아아, 이건 손절이라고 하는 거예요."
마인은 모험가들을 구속한 용사를 보고 하얀 깃발을 떨어뜨릴 뻔 했다. 모험가들의 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촉수에 마인은 차마 하려던 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하얀 깃발이라...항복하러 온 거예요? 항복하러 온 거면 이야기를 하고, 아니면."
용사는 성검을 장난스레 흔들며 윙크했다.
"제가 쳐들어가고요. 어떻게 하실래요?"
"......."
마인은 무릎을 꿇었다.
* * *
라스푸틴이 있는 곳에 마르바스가 있다.
그녀는 영체인 상태에서 남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위치에서 라스푸틴을 구경하고 있었다.
'스톤골렘들을 움직여서 이동형 요새를 만든다. 메모.'
마르바스가 5위 던전의 주인이 된 근본은 다른 이들의 장점을 흡수하는데 있었다. 모든 던전 주인들이 저마다 가진 노하우가 있고, 마르바스는 그 노하우를 잘 흡수하여 강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이건 우리 던전에서는 못 써먹겠는데.'
스톤골렘을 방패병으로 세우고, 그 안에서 사방으로 난사를 한다. 방패병과 달리 골렘의 몸만 움직이면 되기에 이동도 용이하다.
'마법이랑 신성력에 취약하기는 하지만, 그건 합성으로 보완하면 돼.'
약점은 보완하라고 있는 법.
스톤골렘은 마법에 취약한 대신 물리 방어력 하나는 상당히 높았고, 그에 따라 당연히 마법사들을 우선적으로 제거해야하는게 기본이었다.
라스푸틴은 그 일을 철저히 수행했다. 마법사들이 있는 곳을 찾아내어 빠르게 박살을 내고 다녔다.
'벌써 오백은 넘게 죽인 것 같은데?'
골렘들이 구르고 달리며, 안에서 원거리 공격을 사방으로 뿌리는 덕분에 인간들은 손쉽게 죽어나갔다. 그러면서도 마왕군의 피해는 체력과 마나의 손실만 있을 뿐, 사상자는 일절 없었다.
'부하들 엄청 아끼네. 저러다 4성인 애들 잃으면 어떻게 하려고.'
던전 밖으로 나와서 싸울 때는 던전에 등록된 부하들이 아니라, 던전 밖에서 자연적인 방법으로 만들어낸 마수를 사용하는 것이 보편적인 룰이었다.
'그래도 부하들 충성심 하나는 더럽게 높네. 적진 한 가운데에서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아.'
시스템의 지원을 받지 않아 1-2성 급의 약한 마수가 대부분이었지만, 던전의 부하들이 죽으면 부활은 가능해도 마석이 소모되니 아까울 따름이었다.
'제법 잘 싸우는데? 90레벨 이상급의 전력이 셋 정도만 있어도 충분히 10위권 안에서 놀겠어.'
모든 전력을 확인한 건 아니지만 이 정도면 제법 준수하다. 흔히 말하는 고인물들의 리그에는 아직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지만, 라스푸틴에게는 가능성이 분명히 있었다.
'이러면-'
충분히 할만하다라고 생각한 순간, 요새 방향에서 은빛이 터져나왔다.
'끝났네.'
마르바스는 영체를 급히 하늘 위로 날렸다. 어지간한 성체 드래곤 급의 크기를 자랑하는 은빛 사자에 마르바스는 크게 하품했다.
"하여튼 용사들은 하나같이 사기야, 사기."
저런 놈들이 무려 12명이나 된다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갓 성검의 힘을 깨우친 약한 용사는 자신도 병력을 소진하면 잡을 수 있지만, 저런 식으로 충분히 전투 경험이 쌓인 용사는 자신도 잡기 힘들다.
"명복은 빌어줄게."
마르바스는 마신을 향해 기도를 올리며, 라스푸틴의 패배를 점쳤다.
"이거 이기면 진짜 내가 씨 받아간다."
용사조차도 이기는 오크의 씨. 직접 자신의 몸으로 낳아도 자궁이 아깝지 않으리라. 마르바스는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싸움을 구경했다.
* * *
"씨바아아알!!"
나는 쌍욕과 함께 도끼를 휘둘렀다. 막 골렘의 안을 파고들려고 했던 불의 정령의 대가리를 반으로 쪼개버린 뒤, 골렘 부스러기를 주워 정령사의 안면에 날렸다.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어?!"
싸우면 싸울수록, 쌍욕이 나오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다.
"마망, 어떻게 좀 해봐!!"
"쥬, 쥬인님을 위하여...!!"
페가수스의 위에 타서 날아다니는 미르망은 거대사자를 향해 견제사격을 날렸지만 좀처럼 효과가 없었다. 흑익룡들이 제공권을 장악하여 브레스를 내뿜었지만, 성검 레오는 조금도 상처가 없었다.
"젠장! 이러다 진짜 좆되겠는데?!"
캬아아아!!
성검 레오는 포효와 함께 앞발을 크게 휘둘렀다. 흑익룡들은 정신을 차린 하르파스의 지시 하에 재빨리 하늘로 솟구쳤고, 성검 레오의 할퀴기는 허공을 갈랐다.
부----웅!!
손을 한 번 휘저었을 뿐인데 공중에 소닉붐이 일어난다. 엄청난 힘을 가진 용사의 진면목에 나는 부랄이 덜덜 떨렸다. 저 망할 암사자는 지금 내 부랄을 뜯겠노라 이를 갈고 있었다.
'성검만 있으면 차라리 다행이게!'
나는 괜히 눈물이 핑 돌았다. 성검 레오만 상대한다면 차라리 나았지만, 우리의 적은 성검 뿐만 아니라 다른 적도 있었다. 아니, 다른 적-토벌대가 메인이었다.
"와아아아아!!"
용사의 위세에 자신들이 강해진 것 마냥 착각에 빠진 토벌대가 골렘 방어선을 향해 달려들었다. 인간들의 공격은 전혀 통하지 않았지만, 잠시라도 발이 멈췄다는 것이 위험했다.
"젠장, 산개!!"
나는 륜을 안고 급히 몸을 앞으로 날렸다. 우리가 있던 장소에 은빛의 앞발이 떨어졌다.
우지끈!
키메라 스톤골렘 하나가 발톱에 삶은 감자처럼 바스라졌다. 신성력의 힘으로 파편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어버린 골렘은 모래처럼 흩어졌다.
"이런...미친...."
아무리 성검이라고 하지만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크기도 적당히 커야지, 마음의 준비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진짜 드래곤을 상대하는 것처럼 몸이 커버리면 어쩌자는 말인가.
"안 되겠다. 최후의 수를 쓰는 수밖에."
캉, 캉캉!
나는 라스터콜을 울렸다. 성난 암사자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군단 전부의 힘을 하나로 모을 필요도 없었다. 나는 내 몸을 덮은 검은 로브를 벗어던졌다.
쿵.
"정체를 숨길 필요도 없다."
수 Kg은 되는 듯한 로브가 무겁게 떨어졌고, 나는 스타킹 이너아머와 함께 만천하에 나의 [라스푸틴]을 드러냈다.
"우리의 정체를 드러낸 이상, 이곳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이 자리에서 죽는다."
전력을 담아 인간들을, 용사를 쓰러뜨린다. 그 선두에는 내가 있다. 그리고 나와 함께 우리 군단을 승리로 이끌 존재가, 내 로브 뒤에서 안겨있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앞부분으로 도킹이다, 루나!"
"기다리고 있었어!!"
빠-----악!!
나는 성검 레오의 턱을 향해 루나포를 발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