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크림과 함께, 무언가 넘어가서는 안 될 것 같은 것이 목구멍 아래로 쑥 파고들었다.585회
151일차
요새를 뛰어넘는 순간, 이므신할은 확신했다.
이 싸움, 인류의 승리다.
요새라는 벽을 넘어간 순간부터 주도권은 토벌대가 가지게 되었다. 이므신할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만들어졌고, 어느쪽을 선택하든 인류가 유리한 건 변함이 없었다.
포위해서 섬멸하느냐, 아니면 무시하고 던전을 향해 진격하느냐.
이대로 달리면 토벌대는 승리를 거머쥘 것이다. 잠시 행복한 꿈에 부풀었던 순간, 이므신할은 땅에서 울리는 진동에 숨이 턱 막히고 말았다.
"성벽이...?"
성벽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외부 장갑이 떨어져나가듯 무너져내렸고, 안에서 까마귀 머리의 거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끼요오옷!"
거인들의 일부가 라스푸틴의 지시와 함께 후작령 방향으로 달렸다. 그리고 남은 일부 거인들은 서로 팔짱을 끼고 꿇어앉아 길을 막았다.
넌 못 지 나 간 다
그들의 가슴팍에는 마치 이 상황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것처럼, 이므신할과 기사단을 향한 조롱이 골렘마다 가슴팍에 박혀있었다.
끼히히힉!
심지어 까마귀 머리의 골렘들은 붉은 안광을 뿌리며 부리를 딱딱거리고 있었고, 그건 마치 하늘길을 넘어간 인간들을 무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젠장, 기수를 돌려! 돌아간다!!"
캬오오오!!
성검 레오의 포효가 울려퍼지자 하늘길은 8자를 그리며 땅에서 다시 뒤로 이어졌다. 이므신할과 성기사단은 땅에 닿기 직전 유턴을 하며 하늘길을 계속 달렸다.
"다시 돌아간다!!"
길은 그리 멀지 않다. 하늘길로 다시 올라가도 되고, 땅으로 달려도 된다.
하지만 그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마왕군이 아니다.
"사격개시!!"
어느새 협곡 위에 올라간 그린엘프들이 병사들을 향해 바람화살을 난사하고 있었다.
"저 망할 놈들이!!"
기사단에게는 쉽게 움직이지 못하는 견제사격만 하면서, 일반병사들에게는 목이나 심장같은 급소만 정확히 노리며 조준사격을 날렸다.
"달려!!"
하늘길이 골렘들의 위로 다시 돌아갔다. 너무 높게 올라간 길 한참 아래, 골렘의 머리 위를 스치듯 만들어진 길은 거의 평지와도 같았다.
"어딜!"
하늘에서 은빛의 화살이 떨어졌다. 대낮임에도 무지개빛으로 반짝이는 별똥별은 집중호우처럼 쏟아져 하늘길을 깨부쉈다.
"큭, 용사여!!"
"주인님을 괴롭히지마!"
페가수스를 타고 달려온 가면의 용사는 이므신할과 기사단을 향해 석궁을 겨누며 별빛의 화살을 날렸다.
"크윽, 이 더러운 마족 새끼...! 저게 옷이냐!!"
이제는 검은 타이즈마저 사라지고 비키니 아머만 입은 그녀는 얼굴, 유두, 고간부를 제외하고 몸의 95% 가량을 노출하고 있었다.
"용사! 정신차려! 당신이 지금 얼마나 파렴치한 옷을 입고 있는지 알고나 있어?!"
"시끄...러...."
비키니 아머의 용사는 몸이 잔뜩 붉어진 채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한손으로 얼굴을 덮고 거친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내가...왜...?"
"당신!!"
[건방진 인간 놈들이구나.]
용사의 뒤에서 검은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나타났다. 로브 아래에 해골 얼굴을 드러낸 리치는 지팡이를 앞으로 겨눴다.
[분노의 주인께서 명하셨노라, 인간들을 죽여라.]
"나, 나는...!"
카앙, 카앙, 카앙---!!
맑고 경쾌한 소리가 협곡에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마왕군 전체에 붉은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고, 용사의 하복부에는 음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저...!"
마치 자궁은 연상케하는 기하하적 문양에 이므신할은 눈이 훼까닥 돌아갔다. 그리고 용사는 괴로움에 숨을 헐떡 거리다 천천히 얼굴을 들어올렸다.
"쥬, 쥬지님을 위하여!"
"용사!"
타락용사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고, 곧 마른 하늘에서 별빛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유성우처럼 떨어진 별똥별은 하늘길 위에 우박이 되었다.
와장창!
별똥별과 하늘길은 서로 부딪혀 은빛 가루가 되었다. 같은 신성력의 힘에 의해 요새를 훌쩍 넘어오는 하늘길은 산산조각 나버렸다.
"돌아갈 길이...!"
"젠장...!"
퇴로가 막혔다. 음문이 반짝이기 시작하자마자 타락용사는 인류를 상대로 공격을 재개했다.
"후작님! 저걸 상대할 시간은 없습니다!"
"나도 알아! 하지만!"
"지금은 영지민들을 구할 때입니다!"
"크윽...!"
이므신할은 이를 갈며 고삐를 잡아당겼다. 타락용사의세뇌만 풀어내면 큰 전력이 될 것 같았지만, 좀처럼 쉽게 세뇌를 해제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기사단이여, 병사들이여! 저 길을 뚫는다!!"
이므신할은 하늘길을 넘어온 병사들을 재정비하여 전열을 갖췄다. 삼각쐐기 모양으로 갖춘 군대의 최전방에 선 이므신할은 전신에 신성력을 둘렀다.
"골렘 따위, 힘으로 뚫어버리자!"
"""여신이시여!!"""
사자의 용맹한 포효와 함께, 은빛을 머금은 기병대가 협곡을 향해 달렸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바람화살은 선두에서부터 뿌려지는 은빛의 기류에 튕겨나갔다.
"내가 선두에 서겠다!"
이므신할은 뒤따르는 기사단보다 먼저 빠르게 앞으로 달렸다. 군마의 속도를 훨신 앞서는 하얀 사자는 땅을 박차고 높이 뛰어올랐다.
캬아아악!!
콰득.
사자는 앞발을 휘둘러 골렘을 베어버렸다. 옆에 있는 다른 골렘과 팔짱을 낀 골렘은 선 채로 굳어버렸다.
쩌적, 쩌적, 쿵!
골렘의 몸은 손톱에 의해 사선으로 쪼개졌다. 까마귀 머리의 붉은 안광이 점점 사그라들었고, 검은 몸이 회색이 되며 돌덩이가 되어 무너져내렸다.
갸아아악!!
옆에 있던 다른 골렘들이 사자의 발을 붙잡았다. 마갑처럼 채워진 신성력의 갑주가 붙잡히자 성검 레오는 당황하며 발버둥을 쳤고, 이므신할은 등에서 떨어질 뻔한 걸 간신히 견뎌냈다.
"기사단 뭐해!!"
이므신할의 외침에 기사단은 빛처럼 달려와 골렘들을 습격했다. 서로 몸을 밀착하여 발길질로 기사들을 걷어찼으나, 중갑에 신성력의 힘까지 두른 기사단에게 큰 데미지는 주지 못했다.
[막아라, 분노의 무리여! 저들을 이 협곡에 싸늘한 주검으로 버려지도록 하라!]
"자지님을 괴롭히지마!"
구울 리치가 지팡이를 높이 치켜들자, 미노타우르스들이 돌덩이를 협곡 아래로 굴러 떨어뜨렸다. 공처럼 굴러가며 부서진 돌덩이 안에서 붉은 빛으로 반짝이는 구울들이 두 주먹을 앞으로 뻗으며 떨어지고 있었다.
[콥스 익스플로젼!!]
키에에엑!!
하늘에서 구울들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구울이 폭발하며 사체를 사방에 흩뿌려 인간들의 몸 곳곳에 튀었다. 하지만 주변에 신성력을 방출하고 있는 성기사단이나 용사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파지직.
구울의 파편은 신성력을 가진 인간들의 근처에 닿자마자 재처럼 사그라들었다. 타락용사가 황급히 하늘에서 별똥별을 떨어뜨렸지만, 인간들은 낙하 지점에서 산개와 합류를 반복하며 타락용사의 공격을 최대한 피했다.
"여신이시여!!"
[막아, 막으란 말이다!!]
까드드득!!
키메라 스톤골렘들이 몸으로 막아선 방어선은 조금씩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 * *
"더 빨리 쏴! 놈들이 성벽을 넘어오기 전에 최대한 많이 죽여야 한다!!"
나는 발치에 떨어진 돌멩이를 주워 키메라 스톤골렘의 틈 사이로 집어던졌다. 막 틈을 노리고 창을 찌르려던 병사의 얼굴은 짱돌을 맞고 뒤로 넘어갔고, 방어벽 역할을 하던 키메라 스톤골렘이 주먹을 내질러 놈을 제압했다.
"주인님, 마법 날아와요!!"
"큭!!"
병사들만 대처하면 된다고 생각했건만, 갑자기 또 마법사 무리가 튀어나와 우리를 향해 마법을 날리려고 마나를 모으고 있었다. 나는 바닥에 토템처럼 꽂아둔 도끼를 들어올렸다.
"륜, 마법사들은 어디에 있지?!"
"남동쪽이요!"
"좋다! 골렘들아, 일어나라!"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묵묵히 방어만 하던 골렘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안에서 밖으로 사격을 하던 부하들도 공격을 멈췄다.
"달려--!"
쿵, 쿵, 쿵!
나는 골렘들이 달리는 속도에 맞춰서 땅을 달렸다. 골렘들이 한 걸음을 걸을 때 우리는 두 세 걸음을 달려야 했지만, 진형을 유지하는 상태로 달리려면 어쩔 수 없었다.
"앞을 가로막는 놈들은 전부 밟고간다!"
남동쪽을 향해 달려가는 골렘들의 쾌진격에 토벌대 병사들은 좌우로 흩어졌다. 골렘들은 보병들을 쫓아 좌우로 갈라졌고, 나는 골렘들이 열어준 길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우오오오!!"
나는 도끼를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앞으로 달렸다. 골렘이 아닌 나라는 존재는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인간 놈들은 은근슬쩍 방패를 들고 내 앞길을 막아섰다.
"건방진 놈들!"
서걱! 나는 방패병을 방패와 함께 도끼로 베어버렸다. 몸통을 사선으로 갈라버린 다음, 놈의 시체를 밀치고 앞으로 내달렸다.
"히이익!"
모여있던 다섯 마법사들은 내 접근에 비명을 질렀다. 둘은 도망치려는 듯 주변을 훑고, 셋은 골렘들을 끝까지 바라보며 마법을 쏘려고 마나를 모으고 있었다.
"륜!"
내 어깨를 스치고 날아간 바람화살이 도망치려고 간을 보던 마법사의 정수리를 꿰뚫었다. 마법사들은 동료의 죽음에도 이를 악물고 마나를 방출했고, 마법사들의 위에는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생성되어 있었다.
"어딜!"
나는 도끼를 수평으로 놓고 몸을 돌렸다. 휠 윈드를 돌듯 세바퀴를 돌아, 적당히 되었다싶은 순간에 얼음덩어리를 향해 흑요석 도끼를 놓아버렸다.
"투척!"
카--앙!! 마나로 빚어진 얼음덩어리에 도끼날이 박혔다. 막 얼음덩어리를 발사하려던 마법사들은 나의 도끼 투척이 얼음덩어리에 닿자마자 입에서 피를 뿜어냈다.
"마법을 쓰다니, 치사한 놈들!"
나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놈들에게 접근했다. 가장 거리가 가까운 마법사를 향해 달려가 손으로 하관을 붙잡았다.
"친구야, 미안하다! 내가 좀 바빠서!"
콰득! 손아귀 힘으로 턱관절을 뽑아버렸다. 마법사는 눈을 까뒤집으며 괴로워했고, 나는 그의 명치에 주먹을 날린 뒤 멱살을 집어들었다.
"프렌드 실드!"
나는 마법사 친구의 시체를 들고 앞으로 달렸다. 동료 마법사가 나를 향해 날린 전격의 화살은 마법사 친구의 등에 꽂혔고, 나는 걸레짝이 된 마법사 친구를 내동댕이치고 새로운 친구를 찾았다.
"네가 내 다음 방패로구나!"
"으아악!!"
빠악. 나는 놈의 뒷통수를 후려쳤다. 전력을 다해 손을 휘두른 바람에 놈은 목뼈가 뒤틀려 앞으로 고꾸라졌다.
"싫어어어!!"
"어딜 도망가?"
나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도끼를 붙잡아 놈에게 집어던졌다. 뒷통수부터 등허리까지 척추를 따라 박힌 도끼날에 마법사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나는 도끼를 회수한 뒤 곧장 나를 중심으로 소리쳤다.
"포트라스, 다시 집합!"
끄어어어!!
나를 중심으로 병사들이 동심원을 만들었다. 동시에 키메라 스톤골렘들이 각자 기묘한 포즈를 취하며 원의 가장 바깥에서 방패가 되었다. 거의 3초에 한 번씩 자세를 바꾸며, 인간들의 공격을 피하는 춤추는 방패가 된 것이다.
"마법사들은 처리했다! 다시 안에서 난사 개시!!"
나는 다시 도끼를 두드렸다. 나의 오라는 사방으로 흩어져 부하들의 힘이 되었고, 적을 죽이는 살상력이 되었다.
"주인님, 또 마법이 날아와요!"
"쳇, 막을 시간 없어! 피하자! 골렘들이여, 우로 10보 가!"
나의 지시에 부하들은 오른쪽으로 골렘의 이동을 따라 움직였다. 우리가 있던 곳에 칼날과도 같은 얼음화살이 꽂혔다.
"륜! 하늘에 포격 지원 사격을 날려라! 위치를 알려!"
나의 지시에 륜은 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빠르게 바람화살을 날렸다. 보이지는 않지만 륜 특유의 마나가 담긴 표시는 그린엘프들의 원거리 사격 지원을 바라는 신호였다.
아아악!!
하늘에서 떨어지는 바람화살의 비에 골렘들은 몸을 밀착하며 우리를 보호했다. 피아를 가리지 않는 무차별 난사는 스톤골렘의 방어력을 뚫을 정도는 아니었다.
"흐하하! 이대로라면 나의 승리가 확실하구나!"
암사자의 본대에 큰 상처를 입혔다. 성기사단이 섞인 기사단, 그러니까 하늘길로 성벽을 넘어간 놈들이 주력이자 본대라고 할 수 있지만, 절대적인 사람 수는 이쪽이 훨씬 더 많았다.
'최소 천 명.'
성벽에 남은 키메라 스톤골렘들이 시간을 버는 사이, 우리는 정말 신나게 인간들을 공격했다. 이제 남은 건 이므신할이 되돌아 오기 전에 최대한 많은 인간들을 정리하는 것.
"이 싸움, 우리의 승리-"
고고고고.
우리가 만들어둔 요새 포트라스 방향에서 엄청난 은빛이 터졌다. 나는 미르망이 썼던 기술보다 더 거대한 신성력의 빛에 눈이 멀 것 같았다.
"씨발, 저게 뭐야...?"
상처입은 암사자의 자존심은 엄청나게 거대했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영체같은 사자는 머리가 협곡의 위에 닿을 정도로 거대했다. 족히, 10m는 커녕 20m가량 되어 보이는 괴물이었다. 나는 은빛으로 반짝이는 사자의 이마에 상반신만 드러낸 이므신할을 보고 절로 쌍욕이 튀어나왔다.
"아씨. 성검 존나 싫다."
우리집 성검은 저런 거 안 되는데. 내가 억울함에 이가 갈리는 사이, 더 몸집이 커진 은빛 사자는 스톤골렘을 짓밟으며 하늘을 향해 포효를 내질렀다.
캬오오오오----!!
"드래곤이랑 다를 게 뭐냐, 씨바."
신성력의 사자, 성검 레오의 실체는 거의 성체 드래곤과 맞먹는 크기였다.
"......우리 이번 전투는 무승부로 하고, 서로 정비해서 다시 붙지 않을래?"
크아아아아아아!!
쥐뿔도 듣지 않더라 나는 눈물을 머금고 도끼를 움켜쥐었다.
"젠장! 드래곤 슬레이어 대신 라이언 슬레이어 한 번 해보자, 이 망할 년아!"
나는 성검의 용사, 레오를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