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비만 오크-583화 (581/800)

583회

151일차

"아니, 이 개씨발 호로 잡년이?"

자신이 가진 궁극의 힘을 토해내고 기절한 하르파스를 수습하기도 잠시, 나는 내 머리 위로 지나가는 은빛의 길에 어이가 없었다.

"이 년이 기껏 만든 요새를 무시하고 지나가려고 해?!"

절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나는 하르파스를 륜에게 맡긴 뒤, 곧장 높이가 더 높은 곳으로 뛰어올랐다. 계단을 달려 올라가는 사이, 이미 인간들은 질주를 시작하고 있었다.

"사격개시! 놈들이 성벽을 넘어가지 못하게 막아!!"

얼타고 당황한 그린엘프들이 내 지시에 황급히 활을 들어올렸다. 미노타우르스들도 돌덩이를 집어던지며 견제했다. 하지만 공격은 닿을래야 닿을 수 없었다.

"이 개같은...!"

협곡에 만든 요새는 당연히 협곡의 꼭대기보다 조금 낮았다. 협곡에 난 작은 길에다가 흙을 쌓고 판자를 끼워 관문을 급하게 만들어낸 만큼, 당연히 내가 서있던 곳은 협곡 꼭대기보다는 낮았다.

이므신할은 협곡 꼭대기까지 닿는 신성력의 길을 만들어냈다. 우리의 공격이 닿지 않는 높이-최소 50m는 되어보이는 높이까지 길을 만들어 달리고 있었다.

"그게 네 년의 힘이라 이거지...!"

은빛의 길 너머, 선두에서 달리고 있는 이므신할과 눈이 마주쳤다. 은빛 갑옷의 사자를 타고 달려오는 그녀의 손에는 성검과는 사뭇 다른 검이 들려있었다. 나는 이므신할이 어디에 모든 힘을 쏟아부었는지 깨달았다.

"성검의 힘을 길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고...!"

건방이 하늘을 찌른다. 동시에 효율적인 전술에 소름이 끼쳤다. 하늘에 길을 만들 수 있다면 요새는 어떤 길로든 통과해버리면 그만이고, 하늘길을 견제할만한 공격은 이미 한 번 써버렸다.

'레비즈 포를 쓰는 건 위험해.'

이므신할의 뒤에는 성기사단이 따라 달리고 있다. 그들의 앞에서 사지 잘린 성기사단 단장을 보이는 순간, 이전의 동맹이고 뭐고 바로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이 시작된다.

와아아아아----!!

거대한 함성이 협곡에 울려퍼진다. 우리의 공격은 하늘길에 닿지 않고, 하늘을 날고 있던 흑익룡들은 오히려 하늘길에 오른 성기사단의 견제로 인해 하늘에서 쫓겨나야 했다. 더 높이 날아오르는 건 가능했지만, 이탈하는 것이 한계.

"포트라스는 여기까지인가."

나는 담담히 호흡을 골라쉬었다. 가만히 눈뜨고 당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 조치를 취하기에도 조금 늦었다. 이미 이므신할은 내 머리 위를 지나쳤다.

"한 방 제대로 먹었군."

이래서 용사를 상대하는 건 싫다. 내가 용사의 힘을 쓰는 건 상대를 엿먹이니까 좋지만, 내가 용사를 상대하며 엿을 먹는 건 정말 싫다.

"이 건방진 암사자년, 자궁에 정액빵빵하게 먹여주도록 하지."

이므신할은 나를 향해 엄지로 목을 그으며 땅을 향해 아래로 미끄러지듯 달렸다. 우리를 포위하려는 것 같기도 하면서도, 우리를 지나쳐 던전을 향해 달려가려는 것 같기도 했다.

"륜, 네가 보기에는 어떻느냐?"

"둘러싸는 것 같아요. 앞에 있는 병사들은 아직 올라오지 않고 있는 걸요."

륜의 말대로 토벌대의 절반 이상은 우리의 위를 통과하지 않았다. 아무리 사람이 달리기에는 불안한 길이라고 한들, 눈으로 대충 세어봐도 대략 천 명 정도의 인간밖에 넘어가지 않았다.

화륵. 작은 불화살 하나가 내 근처를 향해 날아왔다. 나는 손을 휘둘러 소매로 불화살을 쳐냈다.

"제가 요격할 수 있는데."

"마나 아껴야지."

건방지게 우리 머리 위를 지나가며 불화살의 마법을 날린 마법사는 우리를 비웃듯 우리 위를 지나갔다. 머리에 고속도로가 난 것으로 보아, 그린엘프의 바람화살에 두피 위가 스친 게 분명했다.

"이대로 가면 그냥 포위당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겠지?"

"어떻게 하시겠어요? A플랜으로 갈까요, 아니면 B플랜으로 갈까요?"

"B. 요새를 버린다. 륜, 그린엘프들에게 당장 협곡 위로 올라가라 명령해라. 하르파스를 데리고 잠깐 위에서 기다려다오."

"알겠어요. 주인님은...또 싸우려고 하시는 거죠?"

"흐흐, 이럴 때 한 번 재미 좀 봐야지."

나는 도끼를 들고 위치를 잡았다. 륜이 휘파람을 삑 불자, 그린엘프들은 눈을 찌푸리며 일제히 자신들이 숨어있던 참호에서 뛰쳐나가 협곡 위로 달렸다.

"지상병력은 협곡 위의 숲을 통해 잠시 이탈할테고, 공군은 하늘로 이탈하면 되고. 남은 문제는 오크들인데...."

아더가 제대로 명령을 따르기를 바라는 수밖에.

"요새를 지나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하늘길로 넘어갈 지는 몰랐지. 흐흐, 그러나 이므신할이여. 얘기했지 않느냐. 나는 상식을 초월한 존재라고."

나는 마음을 비우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캐스트 오프!"

고고고고. 요새가,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 * *

<그 시각, 차원의 틈이라고 불리우는 아스타로트 던전 지하 2층>.

"오늘도 저희 매장에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모험가 님."

"그래. 당신도 잘 지내고."

모험가 길드 지부장은 씁쓸한 미소를 짓는 드라이어들의 표정에 괜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미 한 차례 여신의 '세례'를 받은 그로서는 드라이어드가 왜 슬퍼하는 지 잠시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아녜요. ...실은 이제 이 만남도 거의 끝날 지도 모를 것 같아서 그래요."

드라이어드의 말에 지부장은 손끝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만남이 끝난다니! 그게 무슨?!"

"...차원의 틈이 열린 던전도 슬슬 공략되기 직전이고, 너무 많은 모험가 분들이 다녀가셨어요. 차원의 틈은 말그대로 세계와 세계 사이를 잇는 작은 틈. 구멍이 너무 벌어지면 감당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열린 문은 당분간 닫히게 될 거예요."

지부장은 드라이어드와의 만남이 이제 끝난다는 불안감과 동시에, 드라이어드이 목소리가 너무 커서 주변에 다 들린다는 것에 대하여 조급함을 느꼈다. 자신을 향해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동료들은 예사고, 다른 점원들도 하나 둘 그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했다.

"그, 그러면 던전을 공략하지 않으면?"

"...유감이지만 그런 편법은 통하지 않아요."

"큭...."

지부장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드라이어드의 속살도 속살이지만, 차원의 틈에서 얻는 막대한 자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그에게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럼 이제...."

"네. 문이 닫힐 지도 모르는 거죠."

"......."

지부장은 아쉬움에 입맛만 다셨다. 확실히 던전은 가장 깊숙한 곳을 제외하고 전부 다 공략이 끝났고, 사실상 뒷 마무리만 남은 상태였다.

"...잠깐 마지막으로 구경이나 좀 하고 가지."

"네, 안녕히 가세요."

지부장은 드라이어드에게서 양해를 구한 뒤, 마석으로 한 보따리 쇼핑을 마치고 몸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 자신의 인생에 2막을 열어준 여신의 성지를 조금이라도 눈으로 담고 싶었다.

"응...?"

순간, 지부장은 전이문의 옆에 난 작은 통로를 발견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지부장은 절로 호기심이 들었고, 혹시나 또다른 던전으로 통하는 곳이 아닐까하여 몰래 통로로 들어갔다.

"큭, 여기, 제법 좁은...?"

"어머나. 거기로 들어가시면 안 되는데."

등 뒤에서, 드라이어드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아, 아하하. 그게,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기자니-"

"안녕이라고 했죠?"

"...뭘?"

의미심장한 드라이어드의 말에 지부장은 침이 꼴깍 넘어갔다. 드라이어드는 옅은 미소와 함께 손을 움켜쥐었다.

"아쉽네요. 그대로 걸어나갔으면 살아서 나갈 수 있었을텐데."

콰득.

벽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지부장의 몸을 덥썩 잡아버렸다.

* * *

<성벽에서 조금 떨어진 곳, 터널 인근 임시 진지>.

"전차의 수리는 모두 끝났나?!"

"바퀴만 갈면 됩니다, 대장님!"

오크들은 빠르게 전차의 바퀴를 갈아끼웠다. 아더는 인간들의 요새를 습격했던 전차의 상한 바퀴를 교체하는 오크들을 독촉했다.

"아직 갈지 못한 이들은 빠르게 갈아라! 우리가 적의 배후를 쳐야한다!"

아더는 정찰병으로부터 들은 정보에 계속 초조해졌다. 야습 이후, 성벽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한 군단장과는 달리 오크들은 터널 근처에 있는 절벽 사이의 진지에 숨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가만히 숨죽이고 있으면 걸리지 않지만,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적에게 들키는 위치.

오크들은 가만히 숨을 죽인 채 쉬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뒤를 습격하기 위해 급히 전차를 정비했다. 바퀴를 갈아끼우고, 프레임을 급히 수리하고, 바퀴에 임시로 스타킹을 씌워 땅과 닿는 부분을 보강했다.

"빨리 가야한다. 인간들이 성검의 힘으로 요새를 넘었어. 이대로는 포위될 것이다."

"형님!!"

활을 든 오크, 트리스탄이 유니콘을 타고 달려왔다.

"아버님이 요새를 포기하셨습니다!"

"뭣이...?!"

"구하러 갑시다, 당장!"

"......진정하라."

아더는 '매뉴얼'을 떠올렸다. 교범수칙이라며 전해진 명령에는 요새를 포기하는 다양한 경우가 담겨있었다.

"요새는 지금 어떻게 됐지?"

"외부 장갑이 전부 터졌습니다."

"......그럼 아버님께서 일부러 의도하신 것이다."

아더는 전차에 뛰어올랐다. 그의 앞에는 자신의 파트너인 워울프가 전차의 줄을 입에 물고 있었다.

"아버님을 믿고, 우리는 놈들의 배후를 친다. 모두 진격 준비! 아직 안 된 놈들은 한 전차에 둘이서 타라!"

아더의 지시에 전차 부대는 즉시 준비를 마쳤다. 트리스탄은 한창 전투가 이루어지고 있는 요새 방향을 가리켰다.

"좋습니다, 형님. 갑시다!"

"우리가 갈 곳은 저곳이 아니다."

아더는 기수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우리는 인간들의 배후...인간들의 도시를 친다."

- 적의 후장, 아니 후방을 털어라. 너희는 게릴라가 되어 마을을 습격하고 인간들을 겁탈하라.

별동대.

그것이 라스푸틴의 명령이었다.

* * *

판자와 철판으로 세워진 성벽의 겉면이 안쪽에서부터 바깥으로 폭발하듯 터져나갔다.

아아악!

요새 근처까지 다가와있던 토벌대는 날아든 철판에 폭격을 당했다.

"철판이라도 맞으면 당연히 아프지. 흐흐."

살상력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눈 먼 화살에 맞듯 얼굴을 철판에 얻어맞는 이들이 분명히 있었다. 요새가 '변신'하며 생긴 거대한 흙먼지에 시야가 가려진 탓이 있기도 했다.

"영광으로 알아라, 인간 놈들아. 내가 이 전술을 쓰는 건 네놈들이 처음이니."

구구궁!!

요새가 무너져내리며, 안에 자리를 잡고 있던 스톤골렘들이 하나 둘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들의 몸에 진흙처럼 달라붙어있던 협곡의 잔재들이 흙먼지와 함께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새끼들, 내가 지들 편하게 보내주려고 일부러 힘겹게 잡아죽이고 있었건만."

갑작스레 요새가 파괴되며 나타난 골렘 무리에 인간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몇몇 베테랑들을 중심으로 거리를 벌리며 골렘에 대처하기 위해 물러서기 시작했지만, 이미 하나하나가 7m가 넘는 골렘이 모습을 보인 순간부터 인간들의 운명은 정해져있었다.

"미안하지만 그냥 골렘이 아니라서 말이지."

키에에엑!!

흙먼지를 털어낸 골렘들은 하나같이 전부 겉이 검은색이었다. 몸통은 근육질의 거한이었고, 관절부는 나무뿌리로 이어져 있으며, 머리통은 우리 군단의 또다른 상징이기도 한 까마귀를 닮아있었다.

"키메라 스톤골렘. 스톤골렘을 베이스로 만들어낸 우리 군단의 이동요새이니라."

스톤골렘을 베이스로 하여, 안드라스의 알, 드라이어드의 알, 그리고 블랙 레이븐을 합성했다.

'마르코시아스 던전의 키메라들을 보고 떠올린 아이디어지.'

여러 마수를 합성하여 하나의 새로운 괴수, <키메라>로 만들어내는 것. 나는 라스베가스의 성벽으로 쓰던 골렘들까지 모조리 동원하여 여러 마수, 알들과 합성했다.

뼈, 스톤골렘의 단단한 몸체.

근육, 드라이어드의 나무뿌리.

피부, 블랙 레이븐의 강철깃털.

뇌, 안드라스의 까마귀 머리.

까아아아아악!!!

그리하여 태어난 까마귀 머리의 키메라 골렘들은 뒤로는 단단히 몸을 굳힌 채, 앞으로는 모두 크라우치 스타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잘 부탁한다, 골렘들이여."

나는 연식이 가장 오래된 키메라 골렘의 어깨 위에 올랐다.

"너희들이 할 일은 단 하나, 달리는 것."

우리 군단에서 최초의 스톤 골렘으로서, 과거 레비즈의 창에 무참히 심장이 꿰뚫려 죽었던 골렘은 어느덧 합성마수가 되어 이성과 의지를 지니게 되었다.

"인간들이여, 보아라. 이것이 바로 '워 러시'라고 하는 것이다."

휘이잉----

협곡 위에서 은빛의 화살 하나가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하르파스를 안은 미르망은 하늘로 은빛의 볼트를 날렸고, 골렘들은 일제히 나무뿌리 관절을 구부리며 하체에 힘을 줬다.

"전부, 깔아 뭉게버려라!!"

파--앙.

"진격-------!!"

폭죽처럼 터진 은빛 화살과 함께, 키메라 골렘들이 일제히 전방을 향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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