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2회
151일차
무너진 동굴.
하늘에서 떨어진 폭격의 연기 속에서, 나는 바깥으로 하나둘 빠져나가는 구울들의 틈에 숨어들었다.
[군단의 주인이시여, 어서 오르소서.]
동굴의 안에는 이미 진작에 나를 기다리고 있던 언데드 리치, 라스투자드가 넓은 판자 수레를 끌고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힘겹게 수레의 위에 올랐고, 앞에는 내가 가장 신뢰하는 구울 기사가 수레를 잡고 있었다.
"도망치자, 하서스. 라스투자드여, 너도 올라라."
[명을 따릅니다.]
라스투자드는 나를 지키듯 뒤에 서서 지팡이를 밖으로 겨눴다. 무너진 동굴 위로 구울들이 레밍 때처럼 달리기 시작했고, 나는 구울들의 틈을 가로지르고 달리는 하서스의 수레에 실려 후방으로 이송되었다.
"길을 막아버려. 놈들이 쫓아오지 못하게."
[시폭 대기 중입니다. 바로 터뜨리겠습니다.]
라스투자드는 내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바로 구울들을 폭파시켰다. 이미 아래에서부터 하나 둘 터지기 시작한 구울부터 시작하여, 우리 지나가는 길마다 연쇄적으로 폭발하는 구울은 모두 복상사로 죽은 놈들을 구울로 재활용 한 놈들이었다.
영지의 주민들.
우리가 몰래 열어둔 터널로 빠져나가 납치해온 사람들은 모두 구울이 되었다. 포로 전향이라는 이름으로 라스를 강제했고, 복상사로 죽은 자들은 모두 구울로 재활용하여 시체폭발에 사용했다.
"이거로 크게 한 방 먹였군."
구체적으로 수를 헤아릴 수는 없지만, 최소한 적 전력의 1할은 깎아내는데 성공했다. 이제 남은 건 하루가 또 지나기를 기다리는 것 뿐.
"하서스여. 드디어 때가 되었노라."
나는 앞에서 묵묵히 땅굴을 달리고 있는 하서스를 향해 엄지를 들어올렸다.
"내가 만져보니까 순산형이더라고."
...수레가 조금씩 덜커덩거리기는 했지만, 나는 무사히 본진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 * *
<새벽, 토벌대 진지>.
"하늘에서 떨어진 불덩어리에 죽은 병사가 100명이 넘습니다. 특히 불덩이에 집이 무너져내리는 바람에 빠져나오지 못해서 죽은 이들이 제법 됩니다."
"오크들의 공격으로 죽은 병사들도 제법 됩니다. 사상자만 무려 200이 넘고, 개중에는 마법사들도 있습니다."
"......제대로 한 방 먹었군."
이므신할은 가운데 펼쳐놓은 지도를 살피며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가만히 생각만 하며 아무말도 하지 않는 이므신할의 모습에 부관들은 침을 꼴깍 삼켰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어느쪽으로든 당하기만 하겠어. 음충을 던지질 않나, 밤에 불덩어리를 던지질 않나, ...심지어는 후작성에 개수작을 부리지 않나."
부관들은 모두 고개를 떨구었다.
"그, 저희가 대처하기에는...."
"알아. 놈들이 저지르는 짓드리 하나 둘 미친 짓이지. 그래, 상식을 초월해? ...흐흐."
마왕군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준비한 수를 펼치며 빠른 기동전을 펼쳤고, 인류는 쉽게 대처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다. 그나마 본진이라고 할 수 있는 후작성에는 모험가들이 있어서 마음은 놓였지만, 소수 병력에 의한 식량 창고 파괴같은 짓이 또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그럼 이쪽도 멋대로 한다. 상식을 초월하라고 하니, 상식의 힘으로 이겨야지."
"예?"
"우리가 적보다 훨씬 유리한 것을 살려서 적을 쓰러뜨리자는 말이지. 마왕군을 상대로 던전이 어떻게 생겼는 지도 보지 못하고 이대로 농락당할 수는 없으니."
사락. 이므신할은 성검을 집어들었다.
"출정 준비를 하라. 세 시간 뒤, 성벽을 향해 진격하겠다."
이므신할의 눈은 분노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 * *
<그 시각, 포트라스 성벽>.
"으아,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으으, 허리 괜찮으세요?"
"걱정마라. 허리보다 등허리살이 먼저 떨어졌으니. 이게 나름 쿠션이 되서 아프지도 않더구나. 흐흐.'
나는 륜의 허리 마사지를 받으며 휴식을 취했다. 내 등허리 위에 걸터앉은 륜은 몸을 앞뒤로 움직이며 엄지로 내 허리를 꾹꾹 눌렀고, 나는 륜의 따스한 손길에 잠이 스르르 올 정도였다.
"하르파스, 하늘에서 봤을 때, 얼마나 죽었을 것 같으냐?"
"글쎄. 최소 300?"
"쯧, 고작 그것 밖에 안 되는 건가. 한 500, 아니 이왕이면 천 명 정도는 불타 뒤졌으면 좋았을 텐데."
모처럼 하룻밤 동안 고생을 해서 벌인 야습이 고작 300명 밖에 죽이지 못했다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그만큼 적이 강한 상대로 생각하기에는 우리가 너무 안전하게 움직인 경향이 없잖아 있었다.
"끄응. 용사랑 성기사단, 둘 중 하나만 없어도 할만할 것 같은데."
"그러니까 계속 전력을 깎아야죠. 둘이 따로 움직일 가능성이 없으니."
"젠장. 성벽에서 버티면서 계속 전력을 깎는 방법밖에는 없나?"
시간을 끌수록 불리해지는 건 우리다. 유리해지는 측면도 없잖아 있지만, 그건 요새에서 벌이는 대치상황이 종료된 다음 단계에서나 우리에게 득이 되는 거였다. 지금 당장 시간을 며칠 번다고 해서, 토벌대를 한 방에 쓰러뜨릴 수 있는 비기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젠장. 뭔가 놈들을 싹다 죽여버릴 방법은 없나?"
"주인님, 예전부터 생각한 게 있는데요."
"뭐냐, 륜."
"미약 대신에 그냥 바로 죽어버리는 독을 뿌려버리면 안 되나요?"
하이엘프 공주는 엘프 답지 않은 제법 살벌한 작전을 제안했다. 나는 내 앞에 둘러앉은 나의 부하들을 둘러봤고, 그들도 딱히 륜의 말에 반기는 들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인간들이라면, 그냥 깔끔하게 보내주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배때지에 칼빵 맞아 죽는 것 보다는 섹스하다가 죽는 게 낫지. 미안하지만 그건 양보할 수 없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나는 가급적이면 내가 죽일 인간들을 절정의 쾌락 속에서 보내주고자 했다. 그것 때문에 의도치 않게 자꾸만 별의별 짓을 다하며 개고생을 하기 일쑤였지만, 적어도 죽은 다음에 '그래도 엘프랑 떡치고 죽었으니'하는 위안 거리는 남겨주고 싶었다.
"그리고 미약, 색수병을 퍼뜨리는 게 꼭 나쁜 건 아니다. 꼭 독이나 마비를 걸어서 전력에 영향을 주는 건 아니더라도, 색욕에 물들게 해서 우리 편으로 세뇌하기 쉽게 만드는 과정이지."
[군단장 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여왕이시여. 실제로 색욕에 물든 이들이 더 쉽게 우리 군단에 들어오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 여왕.... 그,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네요! 주인님의 뜻대로 할게요. 히힛."
륜은 웃으며 내 허리를 다시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나는 부하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잠시 눈을 감았다.
'확실히 힘들어하는군.'
다른 누구도 아닌 륜이 분노의 군단식 전투에 피로감을 호소할 정도로 토벌대는 강력했다. 확실히 쉽게는 이기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계속 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내가 불안감을 내비치면 부하들도 두려워할 것이 분명했다.
'리더는 자고로 묵직해야 하는 법.'
방향을 정했으면 흔들림없이 나아가야한다. 이므신할과 후작성을 따먹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우리는 반드시 저들을 겁탈해야만 하는 것이다.
'고작 이 정도로 무너지면 큰 물에서 놀 때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다른 이들은 애써 모른척 하고 있거나 모른척 하지만, 요새에 만들어둔 나의 임시 거처에는 마르바스라는 손님도 영체가 되어 조용히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이므신할을 생포하겠노라 호언장담을 한 내가 그녀를 죽여버린다면, 마르바스는 분명 나를 허풍선이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쉬고 좀 있다가...."
까아악---!! 까아악---!!
하늘에서 흑익룡 우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세웠다.
"쉴 틈도 없군."
적습 경보. 흑익룡들의 까마귀 소리에 우리는 다시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었다.
"가자. 똑같이 상대해주지."
그들이 처음에 성벽을 넘으려 개수작을 벌였던 것을 대비하여, 우리는 모두 위치로 달렸다.
* * *
<정오, 요새 포트라스>.
"장관은 장관이로군."
새벽에 야습을 받아서 그런지, 토벌대는 독이 바짝 올라있었다. 오크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살기가 번들거렸고, 엘프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음란함이 잔뜩 묻어있었다.
"저 녀석들, 분명 요새를 점령하고 나면 그 자리에서 엘프들을 겁간할 것 같구나."
"아무리 그래도 인간들이 그럴까요?"
"인간은 자신에게 해를 끼친 대상은 무조건 적이라고 생각하지. 이미 엘프들은 저들에게 마족이 되었다. 따먹어도 되는 마족 같은 걸로 생각하고 있을 게 분명해."
쿵!
요새가 울릴 정도로 거대한 진동이 울렸다. 인간들은 우리 그린엘프 궁수들의 사격 범위에서 멀찍이 떨어진 위치에 방패를 세웠다.
"포격전을 할 생각인가?"
"그러기에는 마법사들에게 의존해야만 하는데...."
"그래. 그건-"
고오오!
토벌대의 머리 위에 거대한 마법진이 펼쳐졌다. 아니나다를까 마법사들이 하나로 힘을 모아 마법을 날리려고 준비하고 있었고, 우리는 곧장 그에 대처하기 위해 원거리 공격을 퍼부었다.
"전군, 발사!"
흑익룡의 브레스가, 그린엘프의 활이, 미노타우르스의 돌구슬이 날아들며 인간들을 저격했다. 거리상 제법 떨어져있는 바람에 원거리 공격은 닿기도 전에 인간들의 활에 요격되기 일쑤였고, 구울 시체가 담긴 돌덩이는 사제들이 꺼내든 거대한 망치에 허공에서 박살이 났다.
"역시 마냥 멍청하지는 않단 말이야."
"주인님, 와요!"
화르륵. 전방에서 거대한 불덩어리가 하늘을 뒤덮었다. 족히 지름이 50m는 훌쩍 넘을 것만 같은 거대한 불덩어리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불안정해보였다. 문제는 이쪽에서 저걸 견제할 수단이 크게 없다는 것.
"터뜨릴게요!"
륜은 활 시위를 당겨 화염구를 저격했다. 이곳에 있는 엘프 중 가장 강한 엘프라고 할 수 있는 륜의 사격은 다른 견제구를 피해 무사히 불덩어리에 당도했다.
화르륵.
하지만 아무리 잡몹이라고 해도 모이면 무섭다고, 륜의 바람화살은 불덩어리의 안에 쏙 들어가며 사그라들었다. 륜의 마력만큼 겉이 깎인 듯 했으나, 완전히 화염구를 터뜨리는 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다른 방법이 필요할 것 같구나."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화염구가 성벽에 맞고 터진다. 그걸 대비하기 위해, 나는 로브 안에서 검은 머리통 하나를 꺼내들었다.
"하르파스, 마음의 준비는?"
"와, 완벽...!"
내 로브 안에 입혀진 하르파스는 나의 자지에 들어올려진 채 입을 떡하니 벌렸다. 인간들의 눈에는 닿지 않지만 혹시나 몰라 로브 아래에서 나의 정력을 하르파스에게 넘겨주며, 나는 하르파스의 입을 강제로 벌려 화염구를 향해 조준했다.
"드라고니안으로 다시 태어난 값을 해야지. 자, 한 발 싸주마. 나의 정액을 모두 탐하여, 마나로 승화시켜라."
"흐끅, 흐으윽!!"
뷰르르릇. 나는 하르파스의 질내에 정액을 밀어넣었다. 인간들의 앞에서, 로브 아래에 몸을 숨긴 채 질내사정을 당한 하르파스는 몸을 부르르 떨며 거친 숨결을 토해냈다.
"주인, 나 슬슬...!"
"지금이다, 하르파스 브레스!"
나는 로브 안의 하르파스를 강하게 끌어안고 아래로 잡아당겼다. 이미 아래로 살짝 내려온듯한 하르파스의 자궁이 내 자지에 의해 꿰뚫려 정액이 안으로 쑥 빨려들어갔고, 하르파스는 절정의 쾌락에 다시 한 번 입을 벌렸다.
"하아아아아앙!!"
격한 신음과 함께 하르파스의 입에서 마법진이 튀어나갔다. 나는 절정에 벌벌 떠는 하르파스를 꽉 붙잡고 하르파스의 입 방향을 정확히 겨눴다.
"자! 궁-극의 힘을 보여줘라!"
쿠와아아아아-------!!
하르파스의 입에서 뿜어져나온 폭포수같은 브레스가 화염구의 중심을 꿰뚫었다.
* * *
쏴아아아.
뜨거운 비가 내린다. 마법사들이 만들어낸 초거대 파이어볼은 적 대장의 마법에 요격되었다.
"전사가 아니라 마법사...? 도끼는 장식이었던가?"
이므신할은 피부에 닿는 축축한 습기를 장갑으로 닦아냈다. 마법사들이 준비한 일격이 무위로 돌아간 건 아쉽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느쪽이든 필살기 하나는 빼냈으니, 우리가 이득이다. 그렇지 않나?"
"그렇습니다."
크르르.
이므신할은 고삐를 움켜쥔 채 검을 앞으로 겨눴다. 그녀의 뒤에 늘어진 성기사단은 이므신할과 함께 달릴 준비를 마쳤다.
"바이스 부단장, 그대들의 단장에 대한 복수를 위해 힘써주시게."
"......예, 물론입니다."
바이스 엑슈얼은 이므신할이 타고 있는 짐승에 침이 꿀꺽 넘어갔다. 은빛의 갑옷을 두른 사족 보행 짐승은 던전에서 나오는 키메라와 흡사 모양이 비슷했다.
"레오, 이번에야말로 그녀의 정신을 일깨우는 거다. 알겠지?"
크르르.
이므신할은 은빛 사자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고삐를 움켜쥐었다.
"달려라, 용사들이여!"
캬오오오-----!!
협곡에 백수의 왕이 내지른 포효가 울리며, 은빛의 길이 열렸다.
"성벽을 '위로' 넘어, 요새를 포위하라!!"
이전에는 협곡의 관문 위에 걸쳐졌던 은빛의 길이, 협곡의 위로 뻗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