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9회
150일차
마르바스와의 거래는 성사되었다.
그녀는 나의 옆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내가 이므신할을 생포하고 후작성을 공략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기로 했다.
"내가 아무리 전쟁 중이라도 섹스를 안 하는 건 아닌데, 옆에서 구경꾼 하나가 있으니까 더 하기 편해지기도 하고 어려워지기도 했단 말이지."
성문에서 싸우고 있다고 한들 정기적으로 나의 씨를 넣어야 하는 곳이 있다.
지금은 비록 플라우로스에게 맡겨놓았다고는 하지만, 인장을 상대로 한 일일마석가챠나 드라고니안 알까기 등 나의 씨가 필요한 곳이 분명히 있었다.
'조교실 봐도 아주 그냥 식겁을 하겠네.'
마왕의 두 딸이 촉수 자지에 파묻혀 즐겁게 생활한다거나, 성기사단의 단장이 사지가 잘린 채 알공장이 되었다거나, 플라우로스 던전이라는 '허브'에 연결된 하위 던전만 10개에 이른다거나.
"...이 변태새끼 왜 이렇게 유능하지?"
어쩔 수 없이 보여주는 것도, 일부러 숨겼지만 들킨 것도, 간신히 숨기는 데 성공한 것도 있기는 했지만, 우리 군단이 쌓아온 것을 본 마르바스는 혼잣말로 자꾸 감탄사를 내뱉었다.
"들으라고 하는 거지? 고맙군."
"칭찬 아니야."
"늬예, 늬예. 유능의 끝을 보여주도록 하마."
일부러 라임을 안고 던전을 빠져나와 반나절을 달렸다. 다행히 요새 포트라스는 크게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주인님! 아, 라임도!"
륜은 라스마켓의 불탄 광장까지 나와 우리를 맞이했다. 옆에 영체가 되어 두둥실 떠다니는 마르바스를 향해 활을 겨눴지만, 곧 그녀의 쇄골에 박힌 나의 인장을 보고 활을 거두었다.
"새로운 첩이에요?"
"그렇게 될 예정이기는 한데, 아직은 너무 강해서 먹지 못하고 있다. 숙성 중이야."
음문의 역할은 내가 마킹을 해둔 여자이니 손대지 말라는 의미가 강했다.
'이 녀석들 은근히 질투심 있단 말이야.'
특히 아닌 척 하면서도 은근히 새롭게 내가 먹는 여자들을 견제하는 앙큼한 짓을 하는 녀석들에게, 말로 하지 않아도 의미를 전달하기 위함이 크다.
"걱정마라. 있는 거면 간식이고, 없는 거면 상태 따라서 생각 좀 해볼테니까."
"촉이 오는데요. 분명 주인님 침대에 없는 종족이에요. 그리고 주인님은 분명 항상 그랬던 것처럼 씨를 뿌리고 주인님의 여자로 만드시겠죠! 처음에는 부끄러워하면서도 나중에는 주인님 자지에 앙탈부리면서 안에 사정해달라고 조를 거예요! 와, 축하드려요!"
이것은 악담인가, 예언인가. 어째 내가 돌아볼 때마다 마르바스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허탈해했다. 이제는 그냥 보는 표정보다 허탈과 황당이 더 잦았다.
"고맙다, 륜아. 내게 확신을 줘서. 그런 미래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지. 그래서 무슨 종족일 것 같으냐?"
"음...암캐?"
륜이 욕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냥 본인의 느낌을 말한 것이니, 암캐라는 이미지와 어울리는 종족일 가능성이 높다.
'서큐버스면 좀 많이 아쉬운데.'
서큐버스 라인은 샤이탄이 좆을 꼭 잡고 있으므로, 그 어떤 서큐버스도 내 침대에 들어올 수 없다. 샤이탄의 부하관리는 철저했고, 애초에 나도 샤이탄보다 맛없는 서큐버스를 먹고 싶지는 않았다.
"진짜 암캐인지 아닌지는 이므신할을 생포하면 알려준다고 하더군."
"역시 주인님의 씨를 노리고 온 자객이군요!"
"...틀린 말은 아닌데, 나도 저거 씨를 챙겨가기로 했으니까 딱히 문제는 없어."
산란동맹은 유지되어야 한다. 나는 륜과 라임을 데리고 우리가 또다른 '수작'을 부려놓을 곳으로 이동했다.
"오크들은?"
"전차에 인간 서너명씩 납치해서 데려왔어요."
"좋다. 남자는 구울로 만들어서 성벽 위에 세우고, 여자는 목장으로 보내자."
결코 남녀를 차별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 군단에서 알을 낳던 목장의 주민들도 모두 총동원 된 전투이기에, 지금 당장 알을 낳을 수 있는 이들이 얼마 없었다.
"륜아, 약탈경제의 기본은 부족해진 자원을 상대로부터 충원한다는 생각으로 하는 것이다."
"실패하면요?"
"실패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 군단장이 해야할 일이지."
적의 보급선을 일부 태워버린 것은 분명 효과적인 전술이지만, 그렇다고 우리 보급선이 안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앞으로 일주일 치. 인간들에게 알 낳게 하면 열흘 정도는 버틸 수 있다.'
정말 창고를 탈탈 털어서 전력으로 모두 바꿔버렸기에, 생각보다 우리 군단에 비축된 식량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인간들을 납치하여 우리의 자원으로 재활용했다.
"콜 투 암즈. 단기 결전이 끝나지 않는다면 병력들이 다시 일하러 돌아가야해. 안 그러면 자원 수급이 말려."
일꾼을 동원하지만 건곤일척의 승패를 겨루는 치즈러시와는 다르다.
산란꾼 안드라스들이 용의 알과 하나가 되어 흑익룡이 된 것처럼, 하피들도 다른 곳에서 다음 작전을 위해 대기중이다.
그들이 빨리 작전을 수행하여 던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루에 슬라임 젤리 하나만 먹으며 곡기를 끊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빨리 전쟁을 마무리지어야 해. 아니, 최소한 저 토벌대를 전부 박살내야지."
"저희 준비는 끝났어요. 이제 적이 공격만 하면...."
둥, 둥둥.
호랑이도 제말하면 오기 마련. 내가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성벽 너머에 인간들의 북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수비병은 그대로 그린엘프, 흑익룡, 미노타우르스들이 맡는다. 기병들에게는 달릴 준비를 하라 이르도록."
"네!"
"라임아. 너는 다시 레굴루스 성으로 귀환을 하되, 적에게 큰 혼란을 주고 가도록 해다오."
"어떻게?"
"그건...."
나는 마르바스를 눈으로 한 번 흘긴 뒤, 다섯 손가락을 붙이며 꼼지락거렸다.
"13단 합체."
"......!!"
만약 인간들이 혹시나 우리가 하는 작전을 두고 지랄을 한다면, 그건 모두 나에게 샌드웜이라는 아이디어를 준 마르바스 탓이다.
"인간들을 충격과 공포에 빠뜨리거라."
"존잼."
라임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 * *
<잠시 뒤, 토벌대 진지>.
"궁병대의 재편성이 완료되었습니다. 방패병을 앞에 세우고, 그 뒤에서 화살을 쏘도록 배치했습니다."
"나뭇잎을 잘게 찢어 스타킹 천에 감싼 다음, 물에 적셔서 귀에 꽂았습니다. 아껴서 자르니, 스타킹 하나에 50명은 거뜬히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미노타우르스들이 던지는 돌덩이는 마법사들이 요격하기로 했습니다."
"구울들은...사제들의 발정이 진정되고 난 다음에야 대처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므신할의 천막에 모인 부관들은 마왕군과의 전쟁에서 대처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그린엘프의 화살에 대한 대처, 흑익룡들의 음파 공격에 대한 대처, 미노타우르스들의 바윗덩어리에 대한 대처는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사제들의 뱃속에 들어간 음충은 아직 해결하지 못했나?"
"예. ...그, 심지어 변을 보지도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음충에 당하지 않은 사제의 말로는 뱃속에서 신성력을 갉아먹는다고 합니다. 아무래도...마왕군이 여신교단을 위해 만들어낸 비밀병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신성력이 전혀 통하지 않는 마수, 음충의 등장. 아마 이 일이 세간에 널리 퍼지게 되면 인류연합은 크게 불리하게 될 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아리에스 백작령의 대성벽이 무너질 뻔 했는데, 여기서도 지금 미치고 팔짝 뛰겠는데...."
"그, 후작님. 그 말은 사실입니까? 성검의 용사들이 대성벽을 넘어오는 마왕군을 일거에 소탕했다는 것."
"......그 자들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무려 2만에 이르는 마왕군을 용사 '다섯'이서 무찌르는데 성공했다. 물론 대성벽을 지키는 베테랑 전사들의 도움도 있었다고는 하지만, 2만을 무사히 막아낸 건 분명 엄청난 전공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그러면...."
"야. 너 지금 나랑 그 놈들 비교하는 거야?"
이므신할은 위엄조차 잊어버리고 짜증을 부렸다. 같은 성검의 용사인데 왜 너는 그것밖에 못하냐는 뉘앙스의 말에, 이므신할은 자신도 모르게 성검을 잡을 뻔 했다.
"요, 용서해주십시오!"
"...크흠. 나도 충분히 힘을 낼 수 있다. 하지만 보았지 않느냐. 성벽을 오르기 위해 만든 <사자의 길>을 마왕군이 오히려 달려오는 것을."
성검의 용사가 마왕군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는 건 분명히 신성력의 영향력이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상대는 신성력을 극복한 듯한 마물들이 넘쳐흘렀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던전이 있지. 그리고 던전마다 고유의 특징이 있다. 저들은 분명 신성력을 상대하는데 최적화 된 놈들이 틀림없어."
"그럼...."
"결코 내가 못나서 놈들을 제대로 상대하지 못하는 게 아니다. 알았나?"
이므신할의 엄포에 부관들은 고개를 숙였다. 저마다 생각은 다른 듯 했지만, 이므신할은 그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성기사단은?"
"그게, '똥꼬에 신성한 힘을 주면 대처 가능하다!'라면서.... 근성이 없니 마니...."
"......."
이므신할은 무안함에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음충을 대처했던 방법이 갑자기 생각나 오한이 들었다. 그래도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나름 똑같은 방법으로 대처하는 성기사단에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그럼 이제 식량에 대한 대처를...."
구구구.
갑자기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진이 일어났나 싶었지만, 이미 토벌대는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싶으면 '마왕군이 저지른 짓'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마법사들에게 확인해보라고 해! 적의 개수작일 수 있다!"
"확인해보겠습니다! ......각하, 땅, 땅 밑에!!"
구구구구구.
마법사들이 살핀 땅밑에는 거대한 샌드웜으로 추정되는 괴수가 마을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 * *
"인간들에게 가장 두려운 적이 무엇일 것 같으냐. 자연재해를 일으키는 마물들이며, 지진을 일으키는 샌드웜도 상당히 두려운 존재지."
우리 군단에는 샌드웜이라는 마수가 없다. 일반소환을 통해 병력의 종류를 늘렸다면 모를까, 이미 나는 파종과 산란으로 충분히 많은 종류의 종족을 확보했다.
아무리 샌드웜이 대전쟁에 도움이 된다고 한들, 굳이 샌드웜을 소환할 필요는 없다. 하물며 샌드웜의 기능을 대신할 수 있는, 오히려 더 잘 할 수 있는 이들이 있다면.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샌드웜이, 샌드웜인 척 합체한 라임이 레굴루스 성을 향해 땅을 파고 이동했다. 옆에는 슬라미아들이 12중날 드릴처럼 교차로 돌아가며 땅굴을 파며 나아가고 있었다.
"몸을 들썩거리며 이동하니까 지진도 일어나고, 바로 발밑을 지나가니 인간들도 겁날 수밖에."
하지만 그건 오해다.
"지나갑니다."
13단합체 라임 드릴은 포트라스 방향에서 토벌대가 있는 곳까지 요란스럽게 길을 뚫은 다음, 다시 레굴루스 성까지 조용히 아래로 파고들었다.
"사용하지도 않을 땅굴 때문에 대가리 좀 썩혀봐라, 요 놈들."
진짜는 따로 있으니까.
* * *
<그 시각, 차원의 틈>.
위이잉.
모험가 길드 레오 지부의 접수원 중 한 명, 마리아 버지니를은 누구도 모르게 차원의 틈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십시오, 모험가님."
'역시!'
마리아는 소문대로 자신을 맞이하는 핑크머리 용사에 침을 꼴깍 삼켰다. 듣던대로 압도적인 중량감 차이에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자신은 그걸 극복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여신의 은총을 사러 왔어요?"
"흠, 알겠습니다. 마석은 가지고 오셨나요?"
"네!"
마리아는 중급마석과 상급마석이 섞인 주머니를 잽싸게 건넸다. 용사는 주머니를 받아 옆에 있던 오크에게 건넨 뒤, 마리아를 안으로 인도했다.
"소, 소문대로 정말 희한한 곳이네요. 용사와 오크가 같이 있다니."
"여신께서 보듬어주시는 곳이니까요. 일단 앉으시죠."
용사는 마리아를 나무로 된 테이블에 앉혔다. 테이블 위에는 생전 처음보는 다과와 함께, 향긋한 향이 나는 우유가 담겨있었다.
"드시면서 이야기하시죠."
용사는 딱딱한 바게트빵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양손으로 막대를 잡듯 움켜쥔 뒤, 빵의 윗부분을 크게 베어물었다.
"와...."
마리아는 빵안에서 흘러넘치는 하얗고 꾸덕꾸덕한 크림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자신이 먹은 빵은 톱밥을 씹는 것처럼 텁텁했는데, 용사가 먹는 빵은 조금만 먹어도 금방 배부를 것만 같았다.
"그, 그거 뭐예요?"
"이 빵 말씀이십니까?"
용사는 입술 한 가득 묻은 하얗고 꾸덕꾸덕한 크림을 검지로 닦아낸 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빨아먹었다. 요 며칠 색수병의 발정견들로부터 몸을 피해 숨어다니던 마리아로서는 입에 침이 절로 넘어갔다.
"하, 한 입 먹어봐도 되요?"
"이건 제가 먹던 거라. ...새 걸로 하나 드시죠."
용사는 20cm를 훌쩍 뛰어넘는-마치 무언가가 연상되는 건 마리아의 착각일 것이다-빵을 건네며 옅게 웃었다. 마리아는 한참동안 빵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이것도 살 수 있나요?"
"......물론이죠. 이곳은 차원의 틈. 무엇이든 살 수 있습니다."
"그럼 이거, 살게요. 이거 이름이 뭐예요?"
용사는 입술에 묻은 크림을 혀로 핥은 뒤, 싱긋 미소지었다.
"렘브라스. 먹으면 10달 동안 배가 부른 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