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비만 오크-575화 (574/800)

휙. 575회

150일차인간은 겉과 속이 다르다.

표리부동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며, 인간은 누구나 속내를 숨기고 살아간다. 겉으로는 착한 모습을 보이는 이가 있더라도, 남들 몰래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살아가는 범죄자일 수도 있다.

이므신할 레오.

나는 그녀에 대하여 막연히 알고 있었다.

인류연합의 최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인류를 위해 싸워온 영웅적인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그에 맞추어 우리 군단 중 ‘오만’스럽게 대해 줄 예정이었다.

하지만 우리 군단의 서큐버스, 햣샨을 통해 알게된 그녀의 실체는 어이가 없다못해 실소가 터져나올 정도였다.

“VR 포르노에 중독된 음란마귀라니. 환멸했다.”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나와 샤이탄이 만들어낸 딥 페이크는 알게 모르게 큰 성과를 거두고 있었고, 이므신할은 딥 페이크의 성녀 포르노에 중독된 변태가 되었다.

이해는 한다. 기껏해야 춘화나 보고 자랐을 후작가의 영애가 용사가 되어 전선에 바로 뛰어들었으니, VR 가상현실 실제 체험 포르노를 쉽게 견딜 수 있을 리가 없는 건 당연했다.

“그렇다고 혼자서 독점하는 건 안 되지. 암, 그렇고 말고.”

이므신할은 서큐버스 햣샨을 신성력으로 구속하여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었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꿈을 꿀 기회를 제공해야할 서큐버스를 몰래 가두어 자기 혼자 즐기는 전용 포르노 플레이어로 만들어버렸다.

“햣샨의 복수.”

악덕 영주로 인한 피해는 영지민이 받게 될 것이다. 우리 전차부대가 도착한 성벽의 앞에는 드넓은 밀밭이 자리잡고 있었다.

“불을 놓아라.”

화륵. 드라이어드 나무 뿌리에 붙은 불꽃이 밀밭에 떨어졌다. 아무리 드넓은 밀밭이라고 한들, 동시에 이백이나 되는 불씨가 피어오르면 화마는 겉잡을 수 없이 확산될 것이다.

“일단 먹을 것부터 끊어버리는 것이다.”

토벌대를 말려죽이기 위한 첫번째 작전.

“햣샨의 복수.”

그건 바로 적의 식량을 불태워 없애버리는 것이다.

“가자. 성밖의 밀밭을 모조리 불태워버리자.”

활활 타오르는 밀밭을 가로질러, 우리는 불씨를 놓고 도망쳤다.

***

레굴루스 성에는 행정을 위해 남은 최소한의 병력밖에 없었다. 여차하면 모험가들을 동원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모험가들도 토벌대에 참가하지 않는 만큼 최소한은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화르르륵.

하지만 무차별적으로 치솟아오르는 화마에는 아무리 모험가들이 날고 긴다고 한들 소용이 없었다.

“정령사! 물의 정령사를 데려와!!”

“지하수를 끌어오지는 못해?!”

“그걸 어느 세월에 끌고 오고 있어?! 으아악! 밀밭이 탄다!!”

타닥, 타닥.

야심한 밤이 환히 빛날 정도로 화마는 거대했다. 행여나 산으로 번지기라도 한다면 산맥까지 나아갈 기세로 불이 피어올랐고, 레굴루스 성 안의 사람들은 황급히 달려나와 불을 끄려고 했다.

“언제 여기에….”

피골이 상접한 늙은 후작, 고트다이할 레오는 성벽 너머에서 활활 타오르는 밀밭을 보며 무릎을 꿇을 뻔 했다.

다가오는 겨울을 잘 견뎌내려면 막대한 양의 밀을 창고에 쌓아두어야 하건만, 밀알은 불길에 구워지고 탄화되어 쓰레기가 되었다.

“아아….”

고트다이할은 머리를 쥐어 뜯으며 좌절했다. 자연적인 불꽃은 아니었다. 분명 인위적인 방화였다.

“후작 각하, 정찰대의 보고입니다. 오크들이 전차를 타고 불을 지르고 도망쳤다고 합니다.”

“그게 말이나 되는가! 오크가 왜 거기서 나와?!”

오크들이 한 무리 전차를 몰고와서 밀밭에 불을 질렀다는 말이 있기는 했으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라 고트다이할은 과감히 배제하고 말았다.

“적에게는 분명 오크가 있다. 하지만 오크들은 모두 요새 쪽으로 도망쳤다고 했어! 오크는 이곳에 있을 리가 없다! 오크 중 일부가 남아서 불씨를 놓았단 말이냐?”

“그,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오크들이 전차를 어떻게 몰 것이며, 어떻게 밖으로 빠져나왔다는말이냐? 이므신할이 보낸 보고에는 적 병력들이 모두 요새에 틀어박혔다고 하는데. 만약 그 정도 대규모 병력이 움직이는 걸 알았으면 이므신할도 금방 눈치챘을 것이다.”

“그걸 저한테 말씀하셔도….”

혼자 성질을 부리는 고트다이할에 기사는 몹시 난감한 듯 고개를 떨구었다.

“저는 작년까지 수습이었던 자인지라, 아직까지 식견이 많이 부족합니다. 송구합니다, 각하.”

가문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정예 기사단이 모두 안다이할과 함께 증발해버리는 바람에, 후작성의 기사들은 그다지 질이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끄으응. 아닐세, 됐어.”

고트다이할은 더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기사의 눈빛에는 ‘네가 뭔데’하는 표정이 서려있었고, 고트다이할과 관련된 루머를 대부분 알고 있는 눈치였다.

흑마법에 심취하여 젊음과 영생을 추구하려고 했다는 건 기본이고, 심지어는 아들의 여자를 취했다는 것 또한. 거짓과 진실이 섞인 루머는 이미 루머가 아니었고, 고트다이할의 명예는 나날이 떨어져만 가고 있었다.

“지하수로의 수문을 개방하도록.”

“예? 그러면 당장 사용할 물이….”

“당장 먹을 밀알이 불타고 있는데 그게 지금 대수인가!”

불길을 따라 움직인 고트다이할의 시선 끝에는 작은 판자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 성 밖에 살던 영지민들이 마족들을 피해 외성 밖에 판자를 깔고 누운 이들이었다.

“불을 꺼! 당장!”

고트다이할의 엄포와 함께 지하수로의 수문이 열렸고, 밀밭의 경계를 따라 흐르는 지하수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 * *

불길은 성공적으로 퍼졌다. 나는 오크들을 전차와 함께 인근 숲속에 숨겨둔 뒤, 나만 따로 빠져나와 라임과 접선하여 라임이 파놓은 땅굴로 몸을 숨겼다.

"역시 기사들이 말한대로구나. 영지민들을 가족처럼 아끼는 성군이라더니, 성밖의 영지민들이 불탈까봐 수문을 개방하다니."

기사들을 통해 얻어낸 고트다이할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나는 그의 행동패턴을 예상하고 그에 맞춰 움직이고 있었다. 밀밭을 따라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을 향해 불길을 놓으면 그걸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지하수를 쓰는 한이 있더라도 불을 끌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라임. 슬라미아들은?"

"수문이 열리기 직전까지 안에서 점액을 뿌렸음. 곧 여기로 합류하기로 했음."

"잘했다."

점액 섞인 물은 불길과 닿아 금방 불을 꺼뜨릴 것이다. 동시에 불길은 자신을 꺼뜨리려는 물을 증발시키며 하얀 연기를 뿜어낼 것이다.

'미약이 희석된 물이 불에 끓어 증발한다. 자연히 공기중으로 미약이 퍼지고, 또다시 색수병이 퍼지는 셈.'

수로에 있는 물을 사용하지 않고 버티기만 했다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가 없었다. 난민들이 모두 타죽는 일이 발생하기야 하겠지만, 그건 방화를 일으킨 우리 잘못이 아니라 막을 수단이 있었음에도 막지 않은 고트다이할의 잘못.

"흐흥, 미약을 누가 어떻게 퍼뜨리나 했더니, 정말 온갖 방법으로 퍼뜨리는 구나? 근데 고작 이걸로 되겠어? 부족할 것 같은데? 성 안까지 불을 질러야 하는 거 아니야?"

...모처럼 라임과 둘 만의 시간을 가지려고 했건만,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들러리가 자꾸 시비를 건다. 그냥 옆에서 워킹 섹스를 구경하고 있어도 모자랄 판에, 마족 여인은 우리가 인간들을 상대로 조금 '과하게' 봐주고 있다며 조잘거렸다.

"어디서 비포장도로 굴러다니다가 길가에 던져진 호박처럼 생긴 년이 자꾸 훈수질이야."

"호박...?!"

나는 다음 작전을 위해 움직이려다, 라임을 졸졸 따라다니며 우리를 구경하고 있는 마족 여인을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여인의 몸은 도끼날에 반으로 갈라졌으나, 내 손맛은 여인의 몸통이 아닌 허공을 갈랐다고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 주종이 하나같이 싸가지가 없지? 야, 너희 나 자꾸 무시할래?"

여인은 안개가 되어 흩어졌다 다시 실체를 갖추기를 반복했다. 얼굴 주변이 반짝인다 싶더니, 곧 제법 정상위로 마주했을 때 눈 정도는 마주칠 수 있는 얼굴로 바뀌었다. 나는 그녀에게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뒤로 공격을 포기했다.

"입으로 빨아줄 거 아니면 입 닥치고 있어라."

"빨아주면 말해도 돼?"

"아니. 빨기만 하고 말하면 안 되지."

"......그럼 안 닥치지!"

이 년은 도대체 뭐지. 새롭게 나타난 또라이에 나는 괜히 정체가 궁금해졌다. 라임에게 물어도 라임도 모르는 눈치라, 나는 그냥 지나가던 미친 마족으로 여기기로 했다.

'좀 가지고 놀아볼까?'

어떻게든 훈수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여자에게 우리 분노의 군단이 어떻게 적을 농락하고 박살내는지 보여줄 절호의 기회다. 나는 라임과 슬라미아들이 이끄는 대로 미리 파여있는 땅굴을 통해, 어느 작은 창고로 빠져나왔다.

"야, 호박. 여기가 어디일 것 같냐?"

"창고아냐? 흐흥, 식량창고를 어떻게 하려고?"

우리가 도착한 곳은 후작령에서 식량을 쌓아둔 저장고로, 거친 포대자루 안에 곱게 갈린 밀알이 한 가득 들어있었다. 그런 포대가 눈으로만 봐도 족히 수 백개는 넘었다.

"잘 찾아냈다, 라임아. 상으로 딱 다섯 포대만 먹어라."

"역시 주인. 우리 애들은?"

"두 포대씩만."

라임의 뒤를 따라 들어온 슬라미아들은 소리 없는 환호성을 지르며 밀자루를 손톱으로 콕콕 찔렀다. 입구가 찢어지자마자 밀가루가 스르르 아래로 흘러내렸고, 슬라미아들은 손가락으로 밀가루를 찍어먹으며 맛을 감별했다.

"이거 엄청 오래된 것 같은데...."

"으, 눅눅해."

"여기야! 이쪽에 있는 건 최근 것 같아."

슬라미아들은 밀가루를 포대 째로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나는 슬라미아들이 밀가루를 흡입하는 사이, 단검을 꺼내들어 포대마다 각각 찔러 입구를 찢었다.

"뭐하는 거야? 지금 뭐하는 거야?"

"옆에서 구경만 할 거면 안 알려주고, 옆에서 도우면 알려주도록 하지."

나는 여인에게 단검을 던졌다. 검으로 긋는 것보다 힘으로 찢는 것이 더 빨라, 나는 보이는 족족 포대를 전부 찢어버렸다.

"...잠깐만. 여기 있는 걸 전부 다 찢어버리려고?"

"그래. 최대한 많이 찢는 게 중요하다. 말할 시간에 한 포대라도 더 잘라."

"귀찮게 뭘? 흠, 내가 이거 도와주면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지 않을래?"

"제발 자지를 보지에 꽂아달라고 애원하는 거라면 들어주지."

여인은 순간 나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가, 라임을 눈으로 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부탁은 안 해. 귀찮은 노동은 질색이야."

짝!

여인이 손뼉을 치기 무섭게, 포대자루의 입구가 전부 찢어졌다. 나는 제일 윗층에 쌓여있는 자루부터 아래까지 모래처럼 사르르 흘러내리는 밀가루를 보며, 여인에게 엄지를 척 들어올렸다.

"그래, 뭘 원하지?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정도라면 들어주마."

"뭐야, 왜 이렇게 사람이 휙휙 바뀌어? 이중인격이야?"

"이 정도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자라면 훈수충이 아니라 조력자지."

여인의 도움 덕분에 나는 무려 한 시간 가량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한 시간이면 라임과 떡을 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라임아. 지금 당장 슬라미아들을 동원하여 창틈을 막아라."

"끙, 좀 더 쉴 수 있었는데...."

"돌아가서 하루 쉬자꾸나. 그동안 네가 먹어치운 간식들도 좀 나눠먹고."

"하루동안 나만 먹는 거임? 알았음."

라임은 슬라미아들을 대동하여 창고 전반을 누비기 시작했다. 바닥에 가득한 밀가루는 몸으로 먹어치우며, 끈적한 점액을 몸에서 녹여 유리창의 빈틈을 꼭꼭 틀어막았다.

"콜록, 이게 뭐하는 거야?"

"일단 내려가 있어라. 금방 작업이 끝나니."

"창문을 막으려는 것 같은데, 이런 노동은-"

"의미있다. 창문을 막는 소재가 의미가 있다. 네가 그 마법으로 시야를 차단하거나 하는 건 저어언혀 의미가 없다."

슬라임의 점액으로 공간을 막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어느새 천장의 틈까지 꼼꼼히 막고 온 슬라임들은 들어왔던 구멍으로 하나 둘 숨어들었다.

"엇차."

나는 라임을 안고 아래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특별점액구슬을 창고에 놓은 뒤 구멍을 닫았다.

"얘기 안 해줄 거야? 그게 내 부탁인데."

"일단 반경에서 벗어난 다음에 얘기하지. 최소한 이곳의 성벽까지는-"

위이잉.

여인이 손가락을 튕기자마자, 내 시야가 순식간에 변했다. 주변에는 온통 검은색 뿐이었고, 나는 하늘을 두둥실 날며 수증기로 가득 차오르는 레굴루스 성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 오우. 나를 허공에 들어올린 여자는 네가 처음이다."

"헛소리 하지 말고 빨리 말해. 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

"예술."

나는 타이밍을 센 뒤, 박수를 쳤다.

"따라해라. 라스."

"라스?"

순간.

우리가 빠져나온 창고에서 막대한 양의 빛무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보아라, 나의 뜨겁고 우람한 불기둥을."

우리가 공작을 시도한 식량창고를 중심으로, 우리가 떠있는 곳까지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아올랐다.

"빈집털이 게릴라와 불장난의 끝은 역시 대폭발이지."

건물과 식량이 쾅쾅 터짐과 동시에, 한 가지가 더 폭발할 것이다.

"지하수에 섞인 미약. 그리고 창고 벽면에 발라놓은 슬라임 점액."

바야흐로, 미약 대폭발.

"밀과 보지가 불타네, 밀과 보지가 불타네."

후작령이 좆된다는 건 누구든지 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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