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6회
143일차 <새벽 5시, 협곡 앞>.
"이런 말도 안 되는...."
레굴루스 성 정찰부대의 부대장, 카라로 보고한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협곡이 요새가 되었다고...?"
분명 석 달 전 자신이 지나갔을 때는 평범하게 깎아지른 절벽이었는데, 지금은 겉면이 반듯하게 정돈되어 있는 완벽한 요새, 관문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반듯하게 수직으로 정리된 외벽.
그 위에 부착된 나무 판자.
그리고 판자들 사이사이, 네모난 구멍에서 활을 겨누고 있는 녹색의 존재들.
완벽하게 요새의 틀을 갖추고 있는 협곡은 이미 마족들이 만들어낸 토성이었다. 시간을 조금만 더 주게 된다면 지금보다 더 성가시게 될 게 분명해보였다.
"엘프가 성벽에서 활을 쏜다고...? 미친 거 아니야?"
궁술이라는 것에 있어서 최고봉은 누구일까. 백이면 백 모두가 엘프를 꼽을 것이다. 그런 엘프들이 성벽에 자리를 잡고 활을 겨누고 있다?
난공불락.
어지간한 피해를 감수하지 않고서야 도저히 뚫어낼 수 없을 것이다. 뚫어낸다고 가정해도 정면으로 통하는 길이 문제.
"도대체 저 판자는 또 뭐야?!"
분명 겉면의 재질은 나무가 확실해보이는데 종이처럼 반듯하다. 협곡의 사이에 있던 대로에는 나무 판자의 울타리가 마치 성문처럼 단단하게 구축되어있었다.
"아버지, 저거 혹시...."
"그래. 놈들은 협곡을 요새로 만들어버렸다. 젠장, 어떻게 했는지 도통 모르겠군."
카라로는 아들인 보르모 보고한과 적진의 동태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과연 마왕군은 어떻게 요새로 개조했을까. 도대체 언제부터 마왕군은 협곡을 요새로 개조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꺄아아악---!!"
순간, 하늘 위에서 여자의 비명 소리가 울려퍼졌다. 정찰부대에 여자가 없는 이상, 저 찢어지는 비명이 하늘에서 울려퍼지는 경우는 단 하나 뿐이었다.
"젠장, 하피다! 도망쳐!"
"꺄아아악!!"
하늘에는 몸집이 3m가 넘는 거대한 하피들이 강철같은 날개를 펄럭이며 정찰부대를 쫓았다. 급히 기수를 돌린 정찰부대는 말을 다그쳤고, 말 또한 상위 포식자인 하피들의 발톱을 피해 전력으로 달렸다.
"성까지 달려야 해!"
하피들에 대응할 방법은 없다. 따라서 정찰부대가 살아남으려면 성까지 도망쳐야만 했다. 카라로는 매섭게 자신들을 쫓아오는 하피들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저 괴물 놈들이...응?"
순간, 하피의 등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음탕하게 드러낸 가슴이 출렁거리는 등 뒤, 녹색 머리칼이 찰랑거리는 엘프가 정찰부대를 향해 활을 겨누고 있었다.
"미, 미친?!"
엘프가 하피를 타고 하늘에서 사격을 한다?
"모두 달려!!"
카라로가 말의 허리를 발로 걷어차 달리기를 재촉했지만, 이미 엘프들의 행동이 더 빨랐다.
퍼버벅.
"히히힝!!"
하늘에서 쏘아진 바람화살은 말들의 허벅지를 꿰뚫었다. 말들은 달리다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고, 안장에 올라있던 정찰부대는 하나같이 앞으로 고꾸라져 낙마했다.
"크, 허헉, 허억...!"
"어머나, 남의 집을 훔쳐봐놓고 그냥 도망치려고?"
하늘에서 맑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낙마한 정찰부대들을 에워싸듯 낙하한 하피들의 위에서 녹색의 엘프들이 활을 겨눈 채 정찰부대를 위협했다.
"누가 대장이야?"
"나, 나다!"
"음...저거, 저거, 저거. 묶어."
"""라스!"""
녹색의 엘프들은 대장격으로 보이는 자의 지시에 따라 정찰부대원들을 제압해 구속했다. 순식간에 손이 허리 뒤에 묶이고, 입에 마스크와도 같은 구속구가 묶인 정찰부대원 중에는 카라로의 아들인 보르모도 있었다.
"네, 네 이놈들!!"
"잘 들어. 이게 네가 보고할 거야."
엘프는 카라로에게 양피지 하나를 건넸다. 카라로는 엘프의 가슴에 얼굴이 파묻혀 괴로워하는 아들을 보며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
"우리를 능멸하는 것이냐!"
"어. 죽이지 않는 걸 감사히 여기도록. 이것대로 보고하지 않으면 인질은 모두 죽을 거야."
카라로는 자신의 앞에 놓인 양피지 내용에 이를 갈았다. 그곳에는 명백히 협곡의 정보를 은폐하려는, 인간들에게 방심을 유도하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마왕군이 협곡에 배치한 수비병은 대략 100명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개소리 집어치워! 당장 내가 본 것만 하더라도...!!"
"건방지네. 엘프는 귀가 좋아. 그래서 너희들이 나눈 이야기도 다 들었지. 어디보자...저게 당신 아들이었나?"
"으으읍!!"
보르모를 붙잡은 엘프 하나가 보르모의 몸을 돌려 바지를 강제로 벗겼다. 색수병의 발병으로 남 부끄럽지 않게 성장한 자지는 엘프의 손에 붙잡혀 화가 끝까지 나있었다.
"인간들은 이게 약점이지? 당신, 손자 보고 싶지 않으면 얼마든지 얘기해. 당신 아들 뿐만 아니라, 인질은 모두 죽을 테니까."
"으읍!!"
엘프들의 품에 붙잡힌 정찰부대원들은 자지가 붙잡힌 괴로움에 몸서리를 쳤다. 엘프들은, 마왕군은 카라로에게 이지선다의 선택지를 강요했다.
"인류를 배신하고 동료와 아들을 구할래, 아니면 인류를 위해 동료와 아들을 희생할래?"
"크윽, 으으윽...!"
"참고로 우리 인내심은 길지 않아. 시작해."
탁탁탁탁. 엘프들이 빠르게 손을 앞뒤로 흔들기 시작했다. 졸지에 동료들의 앞에서 엘프에게 대딸을 받게된 인질들은 머리끝까지 얼굴이 붉어졌다.
"한 번 쌀 때마다 한 명씩 죽일 거야."
"크, 크흡, 흐으윽?!"
보르모의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엘프의 손톱은 보르모의 귀두를 긁으며 괴롭히고 있었다. 숨이 넘어갈 것만 같은 아들의 모습에, 카라로는 검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뜻대로 하겠소! 그러니 부하들은 놓아주시오!"
"그건 네가 보고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린 거 아니겠어?"
엘프들은 인질을 붙잡고 하피의 등 위에 올랐다. 하피들은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고, 엘프 대장은 손가락 키스를 날리며 하피의 발목을 붙잡았다.
"기대해도 되지? 안그러면 부하랑 아들이 죽어버릴 거야. 후후. 우리는 너희를 못 본 거다? 선택해. 여기서 다같이 죽을래, 아니면 너희라도 살아서 돌아갈래?"
"......."
"물어보나 마나지? 후후, 그럼 안녕~"
정찰부대를 공습한 마족들은 다시 협곡으로 사라졌다. 순식간에 동료의 절반을 잃은 정찰부대장은 주먹으로 땅을 내리치며 울분을 토해냈다.
"으아아아!!"
마족들이 남긴 양피지에는 피가 섞인 발자국만 가득했으나, 내용만큼은 정찰부대에 확실하게 전해졌다.
- 마왕군은 협곡에 초소를 세우고 있으며, 그리 병력이 많아보이지 않는다.
결국, 카라로는 부하와 아들의 목숨을 위해 자신이 본 것을 은폐하고 말았다.
* * *
색수병의 대유행은 가라앉았다.
하지만 성 내의 문제가 하나 둘 종식되기 시작하니, 지금까지 외면하고 있던 문제들이 하나 둘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광기에 물들어 서로를 겁간한 탓에 신뢰가 깨진 사람들.
타인을 범한 자와 타인에게 범해진 자, 그리고 범해졌지만 또 발병하여 타인을 범한 자로 세 부류로 나뉘게 되었다.
인간들이 퍼뜨린 것으로 추정되는 색수병으로 인해, 인간들을 범하기 위해 마왕군은 대규모 군대를 일으켰다. 그들은 협곡 너머에 진을 치고, 또다시 인간 마을을 습격하기 위해 껄떡거리고 있다고 전해졌다.
그리고 마물들에게 범해지고, 인간들에게 범해진 이들은 상처입은 몸과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 성 밖에 난민이 되어 옹기종기 모였다. 마물박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성내에 들어가는 건 불가능했고, 그렇다고 어딘가로 완전히 떠나자니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점입가경으로, 그들을 관리해야 할 이므신할 레오 후작 대리는 쓰러졌다. 성검의 용사조차도 인간에 대한 악의로 똘똘 뭉친 사건 사고의 연발에 그만 정신을 놓아버리고 기절해버렸다.
그에 따라, 결국 후작령을 관리할 사람은 단 한 명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모두의 존경을 받았지만, 이제는 그 누구의 존경도 받지 못하게 된 남자.
고트다이할 레오.
흑마법에 심취해 성 아래에 마물을 기른 의혹을 받았고, 색수병으로 인해 미쳐서 며느리를 겁간하였고, 결국 며느리를 사망에 이르게 만든 노인.
"마왕군 개새끼."
지쳐가던 노인이 마지막으로 눈에 불꽃을 활활 태우며 내건 기치는, 후작성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을 마왕군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 * *
<아침, 모험가 길드>.
"......."
모험가 길드의 지부장은 접수대에 앉아 머리를 쥐어뜯으고 있었다. 모든 걸 잊어버리고 싶어도 자신이 했던 일들, 그리고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부메랑처럼 돌아온 일들이 기억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아침이에요."
지부장의 앞에는 소시지와 달걀 프라이, 그리고 약간의 채소와 우유가 놓여있었다. 사랑하는 아내는 자신을 위해 손수 음식을 만들어왔지만, 지부장의 머릿속에는 음란마귀가 다시 속삭이기 시작했다.
"...왜 하필 소시지지?"
"왜, 왜요...?"
"왜 하필이면 그 많고 많은 고기 중에서, 하필이면 소시지를 구워왔냐고!"
"도대체 무슨 소리를...!"
여인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지부장을 바라보다가, 곧 경멸의 눈빛으로 바꿨다.
"미친. 설마 그 소시지보고 남근이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병에 걸려서 다른 남자들 자지 잡고 날뛰니까, 그게 생각이라도 났어요?"
"야!"
"자기도 다른 여자들 다 범하고 다녔으면서, 왜 나한테만 지랄이야! 심지어 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결혼 전부터! 길드의 접수원들 임신시키고 다른 도시로 쫓아낸 거, 내가 모를 것 같아요?!"
"뭣...."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떠났다. 지부장은 또다시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개를 떨궜다.
짤랑, 짤랑.
문이 열리자,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나타났다. 눈이 퀭한 마법사는 좀비처럼 걸어오며 지부장의 앞에 섰다.
"거 참 안 됐소."
"닥치고, 왜 왔냐."
"모험가가 일을 하러 왔지. 어제는 없던 날이 아니오. 그러면 오늘도 예전처럼 지내야지. 차원의 틈에 다녀오겠소."
"거긴 왜?"
마법사는 볼을 긁적거리며 로브를 여몄다.
"꿈을 꿨소. 그곳에서 다시 태어나는 꿈을. 어쩌면 이게 여신의 계시일 지도 모르지."
"허,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지금 후작성의 상황은 말이 된다고 생각하오? 나는 다녀오겠소."
마법사는 몸을 돌렸다.
"다음에 볼 때는 다른 모습으로 볼 수 있도록 하지."
마법사는 텔레포트 마법과 함께 사라졌다.
* * *
<늦은 오후, 협곡 분노의 군단 전진기지.>
[흐어어! 환생, 환생섹스으으!!]
차원의 틈에 들어온 마법사는 마침 튀어나왔던 마르코시아스 던전의 키메라를 상대하고 큰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그는 우리 군단의 환생 시스템에 의해, 드라고니안이 되어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혼자서 던전을 공략하러 오다니, 과감하군."
[덕분에 저희는 아주 쉽게 환생시킬 수 있었죠.]
수정구 너머, 샤이탄은 성적 타락 환생을 하고 있는 마법사를 가리키며 모험가의 증거인 길드 등록증을 흔들었다. 테두리에 새겨진 은테는 마법사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명백히 말하고 있었다.
"샤이탄, 놈을 환생시키고 난 뒤에는 자유롭게 풀어줘라."
[예?]
"레이플과 달리 놈은 원래 남자였지. 놈이 드라고니안으로 다시 태어나 모험가 길드로 돌아가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으냐?"
[...후후, 주인님. 미끼를 던지시려고 하는 겁니까?]
"그래. 놈을 통해 좋은 홍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던전을 공략하는데 실패했지만, 드라고니안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던전의 부하'로 환생한 것이 아닌 척 거짓말을 하면, 놈은 자연스레 모험가 길드로 돌아가 자랑질을 할 것이다.
"차원의 틈에서 죽으면 다시 부활할 수 있다. 심지어 이전보다 더욱 강해진 상태로 강해질 수 있다. 그럼 자연히 음식에 파리 꼬이듯 다시 태어나고 싶어하는 이들이 하나 둘 오기 시작하는 거지."
인간을 그만두고 다시 새롭게 태어나고 싶어하는 자들이 차원의 틈을 찾으러 올 것이다. 정보를 가지고 있는 모험가 길드에서부터 비밀리에 환생하는 방법이 퍼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 남자는 전부 드라고니안, 여자는 전부 그린 엘프로 다시 환생하게 하는 겁니까? 그건 너무 아까운데요.]
"원래 처음 판촉할 때는 손해 좀 보더라도 많이 파는 게 장땡이다."
사람들을 혹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
드라고니안이라는 미끼상품을 매개로 사람들을 일단 끌어모은 뒤, 실제로 환생은 다른 걸로 해버리면 그만이다. 이미 던전의 부하가 되겠다는 계약서에 사인을 했는데 어찌하겠는가.
"정력 실한 놈들, 알 잘 낳게 생긴 녀석만 빼놓고 전부 보내버려."
그렇게, 우리는 모험가들을 우리 군단의 하수인으로 부릴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일주일 뒤.
요새의 구축.
모험가들의 확보.
영지민들의 납치.
일주일이라는 시간 사이에 우리는 제법 많은 전력을 가다듬을 수 있게 되었고, 드디어 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