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비만 오크-565화 (564/800)

"갈 땐 가더라도 한 발 싸고 가야지."565회

143일차

언제나 집을 비우고 떠나는 것은 사람이 불안해지기 십상이다.

하물며 이번처럼 다른 던전과 쟁탈전이 걸린 상황에서, 마르코시아스라는 제법 위험한 적을 후방에 둔 채 병력의 9할 이상을 끌고 나가는 원정은 처음이다. 나는 그래서 먼저 우리 부대를 진군시킨 뒤, 후방에 남은 이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내 너희들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마."

알을 낳다가 온 하피부터 시작하여 아직은 전력 열외로 빠진 드라이어드까지, 우리 군단의 보급과 자급자족을 위해 애써주는 생산직들을 위해 유리잔을 들었다. 안에는 갓 짜낸 따끈따끈한 초코우유가 담겨있었다.

"우리는 꼭 승리할 것이다. 후작성을 점령하여, 그곳에 있는 모든 이들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 군단 모두가 풍족하게 살 수 있을 것이며, 자는 시간 빼고 매일같이 알을 낳는 일도 없을 것이다."

후작성에 쌓여있는 막대한 금은보화, 식량, 온갖 재화를 약탈하여 우리의 것으로 만들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더이상 공장을 24시간 가동하지 않아도 된다.

"라스토피아의 주민들이여, 들으라. 너희는 싸우지 않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뒤에서 우리를 든든히 받쳐주기에, 우리는 안심하고 싸울 수 있는 것이다. 너희들은 약해서 후방으로 배치된 것이 아니다. 너희들은 강하기에 후방에 있는 것이다."

나를 바라보는 1~2성 부하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단상에 놓인 흰 알을 집어들었다.

"전사들이 하루에 네 개씩 알을 낳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나? 하루에 20시간을 다리를 벌린 채 자지를 받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하루에 5명의 하피에게 4번씩 사정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아니다! 그렇기에 너희들은 강한 것이다."

아무리 쾌감이 보정된다고 한들, 매일같이 알을 낳는 건 분명 고역이 틀림없다. 알만 낳는 것도 아니고, 하피의 날개나 안드라스의 깃털, 드라이어드의 나무뿌리처럼 신체 일부 또한 매일매일 일부 뽑아내야 했다.

"너희들이 강하게 우리를 뒤에서 받쳐주기에, 너희가 전사들이 되돌아올 집을 지키고 있기에, 전사들이 안심하고 싸우러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적을 죽이고 피칠갑을 두르고 녹초가 되었어도, 집에 돌아오면 우리를 안아줄 따스한 품이 있기에 우리는 나가서 싸울 수 있다."

저벅, 저벅.

"모두 잔을 들어라. 지금 우리가 마시는 건 이별주가 아니다."

나는 앞으로 나아가 유리잔을 들어올렸다. 동굴 안에 모인 모두가 각자 잔을 들어올렸다.

"우리의 승리를 기념하는 축하주니라."

질 리가 없으니, 일찍 샴페인을 터뜨려도 아무 문제가 없다. 설레발이라는 걱정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설레발이 아니게 만들면 그만이다.

"라스토피아를 위하여."

"""라스!!"""

모두가 축배를 들었다. 그리고 모두가 미리 준비한 슬라임 젤리를 들어올렸다.

"마시고, 즐겨라. 너희가 군단을 위해 해야할 일을 하며, 우리가 가져올 후작가의 인간 자지들을 기대하고 있거라."

콰득.

모두가 미약 젤리를 씹고, 모두가 서로를 탐하기 시작했다. 남녀가 합을 맞춘 자들도 있고, 여자들끼리 즐기다가 남자를 부르는 이들도 있고, 내키지 않는 지 혼자서 조용히 처리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 누구도, 싫다고 하는 이를 강제로 하게 하는 이는 없었다. 나는 체계 잡힌 혼란의 축제에 잔을 높이 들었다.

"여신, 마왕, 그리고 군단을 위하여."

이들이 낳는 자손들이 곧 세계를 이끌어나갈 초석이며 평화로운 미래의 자산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내 앞에 앉은, 후방의 수비를 위해 남은 나의 가족들도 이들을 잘 이끌어 줄 것이다.

"너희들에게 큰 짐을 맡긴 것 같아서 미안하구나."

"아녜요, 아빠. 집을 저희한테 맡기신 거잖아요. 그만큼 저희를 믿는다는 거 아녜요? 후후."

"그래. 무기랑 방어구는 매일같이 만들어서 보내줄테니까, 아낌없이 사용해."

"마르코시아스 던전은 저희가 틀어막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안심하시고 다녀오시길."

성검의 용사, 메어리 비르고.

드워프 공주, 로도페리 필리아.

쿠키엘프 수비대의 대장, 다크엘프 솔라.

"모든 던전은 제가 잘 지키고 있겠습니다."

꾸르르륵.

모든 던전을 지킬 시스템 관리자 샤이탄, 그리고 던전 주인이 자리를 비운 하위 던전에 촉수를 뻗어 던전을 지켜줄 플라우로스.

"장기 출장 좀 다녀오마. 집을 잘 부탁한다."

후방의 안정을 위해, 나는 이 다섯에게 우리 군단의 모든 던전을 맡겼다.

* * *

<자정 직전, 레굴루스 성 후작 침실.>

"......."

"어, 저기, 그러니까...."

햣샨은 자신의 허벅지에 누워버린 이므신할을 두고 어쩔 줄 몰라했다. 매번 꿈의 내용에 따라 칭찬을 받기도 하고 괴롭힘을 받기도 하고 고문을 받기도 하며 증오심은 쌓여만 갔지만, 막상 강해보이던 성검의 용사가 무너지고 있는 모습을 보니 조금은 안쓰러웠다.

"때려치울까."

"예?"

"그냥 후작령이고 나발이고 튈까? 어차피 나 성검의 용사인데. 여기서 이러는 것보다 마족들 잡으러 던전에 직접 달려가는 게 더 인류에게 이득이 되는 게 아닐까?"

"그, 그거야 제가 뭐라고 하기에는...."

햣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므신할은 자신에게 대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답을 정해놓고 신세한탄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그건 아니라며 오히려 신성력으로 몸을 지져버릴 게 분명했다.

"추기경이 일단 아버지의 흑마법 의혹은 오해였다고 선언하기도 했고. 사람들은 다들 모르지만, 일단 그래도 아버지가 앞에 나서서 행정을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나 영주 일 하기 싫어서 떠난 사람이라고. 이런데 재능을 낭비할 수는 없지 않겠어?"

그에 따라, 대화은 이므신할의 독백 비슷하게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그냥 영지를 운영하는 거라면 또 몰라. 뭐야, 이게. 주민들이건 사제건 기사건 너나 할 것 없이 다 덜렁거리고 싸지르고 앙앙거리고 있는데, 내가 여길 뭐 어떻게 운영하라는 거야. 당장 순찰대로 돌아다니는 경비병들도 발정나서 여자들 덮치고 다니는데."

사실상, 영지는 마비가 되었다. 이므신할이 할 수 있는 건 색수병이 자연스레 잦아들도록 시간이 지나기를 바라는 것 밖에는 없었다.

"...그래도 이제 슬슬 괜찮아지기 시작했어."

이므신할은 열린 창문 밖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후작성 곳곳에 가득했던 신음과 비명은 점점 잦아들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하나 둘 이성을 되찾아 상황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늘어난 자지와 풍만해진 가슴에 부끄러워하며, 더럽혀진 옷가지를 바닥에 내팽겨치고 급히 집으로 들어가는 이들이 늘어가고 있었다. 후작성에는 아주 천천히, 고요함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 제가 여쭤볼 건 아닌데요...."

"뭔데?"

"마물들에게 범해진 사람들은...?"

"......아, 그 사람들. 그래, 그 사람들도 후작'령'의 영지민들이지."

성 밖의 주민들에 대해, 이므신할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물들에게 범해진 건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고, 괜히 성 안에 들였다가는 큰 혼란이 빚어질 게 분명했다. 혼란에 혼란이 섞인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지만, 그래도 여기서 더 꼬이는 건 바라지 않았다.

"어차피 마물에게 범해졌는데, 색수병으로 서로 한 번 찐하게 한다고 크게 달라지는 게 있을까?"

"네?"

"농담이야, 농담. ...그냥 해본 소리라고. 왜 눈을 그렇게 떠?"

이므신할은 햣샨의 목을 두 손으로 졸랐다. 그녀의 손에서 퍼져나온 신성력에 햣샨은 켁켁거리며 숨을 헐떡였다.

"내가, 내가 지금 얼마나 개고생을 하고 있는데! 너희 마족 놈들 때문에!!"

"크, 커흐, 흐어어...."

햣샨은 신성력에 몸이 타들어가며 싱긋 웃었다. 이제서야 죽을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햣샨은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흥, 어디서 죽기를 바라?"

"아...!"

이므신할은 햣샨이 죽기 직전, 딱 죽음의 문턱을 넘기 직전에 신성력을 거두어들였다. 몇 번이고 똑같은 고문이 매일같이 이어졌지만, 햣샨은 오늘만큼은 죽나 하는 기대가 곤두박질쳐서 뼛속깊이 좌절하고 말았다.

"으, 흐흑, 흐흐윽...."

"입 닥쳐. ...사람 오네, 젠장."

이므신할은 햣샨에게 입마개를 씌우고 침대 안에 집어넣었다. 햣샨은 들썩거리는 것 조차 할 수 없이 신성력이 흐르는 관에 수납되어야만 했다.

"아, 아가씨! 큰일입니다!"

문이 열리며 벌컥 들어온 여인은 하녀장으로, 후작성에서 제법 일을 오랫동안 했던 베테랑이었다. 그런 그녀가 이므신할을 후작 대리라고 높여 부를 생각도 못한 것에 이므신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엘렉트라 아가씨께서...!"

"......."

스릉.

이므신할은 성검을 뽑아들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에서 뿜어져 나온 신성력은 하릴없이 흔들리며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으, 으으, 으으으...!"

"후작님, 비상입니다!"

이번에는 가문의 기사 한 명이 달려와 급히 무릎을 꿇었다. 눈물을 흘리는 하녀장을 보고 의아해하는 모습에, 이므신할은 고개를 격하게 가로저었다.

"제발 엘렉트라 때문에 왔다고 해줘!"

"예? 아, 아닙니다. 모험가 길드에서 전해진 급보입니다! 인류 연합 최전선, 마왕군이 전군을 이끌고 남하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최전선의 연합에서, 그러니까, 성검 사용자인 이므신할 레오 님의 지원을 바란다고...!"

"......끄, 으으, 으으으...!! 꺄아아악!!"

이므신할은 비명을 지르며 성검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스트레스가 폭발해 눈이 돌아간 이므신할은 자신의 침대를 향해 검을 휘두르려다가 우뚝 멈췄다.

"...후우, 후우, 후우. 그래, 젠장...할 수 밖에 없잖아. 그치...?"

"이므신할 후작 대리님, 큰일났습니다!!"

이번에는 사제 한 명이 달려와 이므신할의 앞에 엎드렸다. 바지조차도 제대로 입지 않아 사제복 아래에 자신의 물건이 서있는 흔적이 역력했지만, 그는 그것조차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라그비아 대사제님께서 신성력으로 확인하셨습니다! 남작령의 마물들이 협곡을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수가...대략 2천!"

콰득!

이므신할의 성검이 침대를 일격에 베어버렸다.

* * *

<그 시각, 레오 후작령 - 비르고 남작령 경계. 협곡.>

"여기는 지나갈 때마다 가슴이 아플 것 같군."

나는 라스마켓의 불탄 터를 손으로 쓸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예전에 잃어버린 것 처럼 속이 쓰라렸다.

"과거는 과거, 미래는 미래. 라스마켓 Mk.2는 불탈까봐 던전 안에 설치했지만, 언젠가 만들 라스마켓 Mk.3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곳이 될 것이다."

상행위를 위해 새로이 도시를 만들 것이다. 라스마켓처럼 불탈 일도 없도록, 많은 사람들이 왕래를 하며 다양한 물건을 팔 수 있는 도시를 만들 것이다.

"마침 저어어어기 딱 좋은 도시가 있군."

"주인님, 보이세요?"

"아니, 그냥 해본 소리다."

후작성의 중심지, 레굴루스. 저곳을 점령하면 왕도로 동하는 길이 열림과 동시에, 이 근방의 모든 곳으로 통하는 거점이 마련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도시 전체를 재개발 해버리면 되겠어. 흐흐, 륜아. 네게 저 도시를 새로이 맡긴다면, 너는 어떤 식으로 만들고 싶으냐?"

"음...광장 한 가운데에 주인님 거 세우는 거 어때요?"

"크하하! 그래, 그래. 좋은 생각이다. 광장 이름은 <붉은 광장>이라고 하도록 하지."

나는 손등을 두드려 전신의 붉은 오라를 흩뿌렸다. 곧 문신은 내 주변에 자리잡은 오크들의 북소리와 함께, 야밤의 협곡 전체에 울려퍼졌다.

"군단이여, 들으라! 우리는 후작성을 점령하기 위해 집을 잠시 나왔다! 하지만 집 밖에서도 먹고 자고 몸을 눕힐 곳이 필요한 법!"

카가가가각.

이번에 새롭게 소환한 슬라임 드래곤들이 협곡을 깍듯하게 깎기 시작했다. 라임이 없어서 그다지 세련된 공사는 아니었지만, 그냥 '일렬로' 계속 깎기만 하면 되는 거라 슬라임 드래곤들에게 일일이 명령을 내릴 필요는 없었다.

"그러니 이곳에 새로운 거점을 만들겠다."

구구구.

협곡의 외벽이 반듯하게 깎여나가기 시작했다. 보기 좋게 깎여나가는 협곡은 우리가 굳이 손 댈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성벽'의 모습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륜이여, 공격과 수비를 택하라고 한다면 너는 어디가 좋으냐?"

"공격이요!"

"왜지?"

"그게 더 재미있으니까요!"

"그렇다. 마냥 수비만 하는 건 스트레스만 받고 질리지. 그렇다고 그냥 공성을 하러 가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인간들이 쌓아놓은 성을 공성하는 것 만큼 멍청한 짓이 없지."

전략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가져오는 것은 전쟁의 기본. 나는 협곡을 깎아 우리 군단에서 사용할 임시 거점이자 요새, 관문으로 만들고자 했다.

"불에 타지 않는 천혜의 요새. 이곳에서 공성전을 벌이면 우리 군단은 아무런 피해가 없지. 흐흐."

공격은 최선의 방어.

하지만 수성의 이점은 버릴 수 없다.

"적을 이곳으로 끌어낸 다음 평원에서 쌈싸먹어버리는 것이다. 흐흐."

후작령 전체를 도모하기 위한 거점은 바로 이곳, 두 영지를 잇는 유일한 길이 될 것이다.

"그러면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살살 약을 올려볼까. 공병부대를 제외한 전 군단에 명한다. 지금부터 후작령을 마음껏 약탈하고 돌아와라."

후작성 빼고.

"아아, 이것은 약탈경제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이고 물건이고 성 안에 있는 것 빼고 모조리 빼앗기기 싫으면, 성에서 나와서 원정을 나와야 할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