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3회
143일차
<10분 전, 인류연합 대 마왕군 최전선.>
"메테오!"
마법사의 외침과 함께 하늘에서 거대한 유성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전사들과 기사들은 하나 둘 전방에서 물러나기 시작했고, 메테오가 떨어지는 방향에 있는 거구의 갑옷 기사는 천천히 검을 늘어뜨렸다.
"느리구나, 떨어지는 것조차."
서걱.
기사는 유성우를 향해 검을 한 번 그었다. 그러자 땅으로 떨어지던 메테오들은 두 개로, 네 개로, 그리고 셀 수 없을만큼 많은 조각들로 쪼개졌다.
"네 놈들은 아직 준비가 안 되어있다."
콰득. 기사가 하늘을 향해 뻗은 손을 움켜쥐자, 유성우가 떨어지는 곳에 거대한 불꽃의 폭발이 일어났다. 운석만큼 커다란 덩어리들은 순식간에 모래먼지가 되어 바람에 흩날렸고, 기사는 검을 정면으로 겨눴다.
"다음."
"으, 으아아! 물러서!!"
"젠장, 일단 피해!"
전사들은 황급히 몸을 돌려 전장에서 이탈했다. 마법사가 전력을 쏟아내 날린 궁극의 파괴마법, 메테오조차 시간 벌이 용도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한 것에 전의가 그만 꺾여버렸다.
"음."
기사는 조용히 검을 내려놓았다. 흉흉한 갑옷 뒤로 펄럭이는 검은 망토에는 수많은 인간들의 피가 진득하게 묻어있었다.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군단장 님."
은발의 드라고니안 여인이 기사의 옆으로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기사를 대하는 여인의 태도는 지극정성이었고, 기사는 여인이 내민 손 위에 검을 놓았다.
"초월에도 이르지 못한 승냥이 떼일 뿐이다."
"100레벨 5성 전사들을 상대로 그런 말을 하시는 건 군단장님 뿐이실 겁니다."
"글쎄. 나 말고도 그런 자들이 많다. ...쉬고 싶구나, 던전으로 돌아가자."
드라고니안 여인이 손뼉을 치자, 둘의 아래에서 마법진이 반짝이며 공간이 바뀌었다. 1초의 지연도 없이 시전된 공간이동 마법으로, 기사는 본인의 던전으로 돌아와 옥좌에 앉았다.
"해제."
푸쉬이이----
기사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기술'을 해제한 기사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옥좌에는 마네킹과도 같은 모습의 청년 슬라임이 옥좌에 축 늘어졌다.
"쯧쯧, 이 늙은 이를 움직이게 하다니."
"군단장 님, 조금 더 편안하게 계셔도 좋습니다."
"......지금?"
"예. 뭣하면 여기 앉으시지요?"
드라고니안 여인은 자신의 허벅지를 팡팡 두드렸다. 슬라임 청년은 볼을 긁적거리다가 옥좌를 비켰다. 여인은 익숙한 자세로, 군단장만이 앉을 수 있는 옥좌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퐁!
또다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자, 슬라임 인간은 완벽한 작은 슬라임이 되어 여인의 허벅지 위에 퍼질러졌다. 물을 잔뜩 머금고 익은 계란찜처럼 말랑거리는 겉면에 여인은 검지를 쿡쿡 찌르며 장난을 쳤다.
"후훗, 이걸 누가 알고 있을까요? 마왕 님의 오른 팔이 실은 이런 작은 마물이라는 걸."
"작은 마물이 아니다. '신'이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자존심을 내세우는 슬라임에 여인은 낮게 웃으며 슬라임을 주물럭거렸다. 명백히 여인의 손길에는 장난기가 서려 있었지만, 슬라임은 그걸 마사지 받는 것처럼 느긋하게 즐기기만 했다.
"너는 기본적으로 이 몸에 대해서 존경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네가 믿음직스럽지 못했기에 그 분께서 너를 내게 맡기신 것 아니냐."
"어머, 제 2의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있답니다? 저 시집가기 전에 보호해주시는 거잖아요."
"그러면 빨리 좀 시집가라. 남의 집에 자꾸 얹혀살 생각하지 말고."
"후후, 제가 왜요? 마왕군 제 1의 던전, 폭식의 군단장 <바알제붑>의 던전 옥좌에 눌러앉을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된다고. 제가 모시는 영광을 받을 수 있는 던전 주인은 오직 한 분 뿐이랍니다."
여인은 엄지로 바알의 등을 꾹 눌렀다. 시원한 마사지에 바알은 결국 반론을 포기하고 말았다.
"무서운 녀석 같으니."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아, 군단장 님. 연락왔는데요?"
옥좌의 팔걸이에 걸쳐진 수정구가 빛나기 시작했다. 숫자 '5'가 적혀진 수정구가 빛나며, 안에서 누군가의 얼굴이 나타났다.
[오빠, 오랜만이야. 응, 상처는 어때? 잘 지내지?]
"물론."
여인은 바알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수정구의 너머에 환상 마법으로 거대한 블랙 드래곤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연락을 취한 상대 여인도 그게 허상인 걸 알면서도 딱히 지적을 하지는 않았다.
[요즘 조카딸이랑 노느라 푹 빠지신 것 같은데? 후후, 안부 전해줘.]
"얼마든지. 그런데 휴가 중 아니었나? 12가문의 씨를 채취해서 호문클루스 인공용사를 만든다더니. "
[그건 걱정마셔. 연구용으로 아주 가문의 뿌리를 거덜냈으니까. 그보다 오빠, 내가...오빠 딸....]
움찔.
바알은 수정구를 통해 전해지는 연락에 전신이 굳었다. 순식간에 돌처럼 딱딱해진 그의 몸은 금방이라도 인간들을 격퇴했던 갑옷의 기사로 변할 것만 같았다.
"연결해다오."
"네."
여인은 바알의 분신을 수정구 너머로 보냈다. 수정구를 통해 영체가 되어 나타난 바알은 침대 위에 앉은 여인, 엘렉트라와 직접 눈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오빠 온 사이에 도망쳤어."
"......."
"뭐, 뭐야. 농담하는 거 아니거든? 지금 이것들 안 보여?"
엘렉트라는 자신의 테이블 위에 올려진 유리병을 흔들며 뚜껑을 열었다.
"이 안에 들어있는 거 슬라임 미약 맞지? 최소 4성 끝자락 급으로 만든 미약이라고. 그걸 오빠 피가 흐르는 것 같은 애가 뿌리고 다니고 있다니까?"
"......일구팔사."
"응?"
"나의 1984번째 자식 슬라임이었다.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죽었군."
엘렉트라는 슬며시 뚜껑을 닫았다. 바알은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주변을 훑었다.
"그런데 이상한 걸. 일구팔사는 '그 때' 잃었던 내 자식인데. 그게 왜 갑자기 이곳에서 나타난 거지?"
"모, 몰라! 나도 어떻게 알아! 그걸 알아볼려고 오빠한테 지금 질문한 거 아냐!"
엘렉트라는 오히려 역정을 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 바알은 혼령인 채로 유리병을 집어들었다.
"...혹시 거긴가. 그런데 여기는 왜이렇게 대기중에 미약 농도가 높아?"
"흐흐흥, 여기서 얼마나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는 지 모르지?"
엘렉트라는 신이 나서 후작령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들기 시작했다. 바알은 엘렉트라와 마주앉아 한참을 듣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슨 일인지 대충 알겠군. 흠, 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알게 되었노라. 나는 이만 돌아간다."
"그치? 히힛, 이제 나도 적당히 즐기다가-"
사아아. 바알의 몸이 순간 검은 빛으로 반짝였다. 어둠보다도 짙은 검은빛에 엘렉트라는 본능적으로 겁을 먹었다. 바알에게서 뿜어져나오는 저 빛은-
"폭식의 군단장, 바알제붑이 명한다. 던전을 조사하라."
"......네?"
굳이 '군단'을 언급하며 명령을 내린 바알의 태도가 순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갑작스레 던전을 조사하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이 근방에 나타난 던전을 조사해라. 그러면 내가 왜 조사를 하게 했는지 알 것이다."
"마냥 조사를 하라고 해도, 뭘 조사하라는 거야?"
"던전 주인."
바알은 수정구 속으로 몸이 천천히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던전 주인의 등위가 어디인지 조사하라. 그리고 판명이 되면 내게 알리고, 네가 옆에서 잘 관찰해봐라. 옆에서 조용히 도와주는 것이다."
바알의 말에 엘렉트라는 한동안 입을 쩍 벌렸다가,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능글맞게 물었다.
"흐흥, 뭣 때문에 엉덩이 무거운 양반이 여기까지 행차까지 하시고 관심을 가지셨을까. 혹시 옛날에 여기다가 애라도 낳고 잃어버리셨나?"
"그냥 나의 아이라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지. 내가 씨를 뿌린 슬라임의 수만 족히 4천만이 넘는다. 하지만 네가 봤다고 하는 그 슬라임에게서 내 피가 흐르고 있다면, 가능성은 하나 뿐이다. 더군다나 이 근방이라면...더더욱."
바알은 엘렉트라의 귀에 아주 작게 속삭였다.
"그 분이 직접 낳으셨던 아이니라."
"......어우야. 못 들은 걸로 하면 안 돼?"
"명령이다, 마르바스여."
바알은 지시와 함께 수정구 속으로 사라졌다.
"자기 말만 하고 혼자서 전쟁 일으키고. 아주 제멋대로인 신이라니까."
바알이 사라지고 난 뒤, 엘렉트라는 잠시 볼을 긁적이다가 마력을 일으켰다.
"<빙의해제>!"
경박한 행동도 잠시. 엘렉트라의 입에서 검붉은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엘렉트라의 몸에서 빠져나온 안개는 금방 여인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흠흠, 나름 정들었는데. 아쉽네. 덕분에 잘 놀았어, 엘렉트라."
사자 갈기처럼 치렁치렁한 머리칼의 마인, 마르바스는 시체처럼 창백해져가는 엘렉트라의 머리를 살포시 쓸어넘겼다.
"언니는 지금부터 다른 몸으로 갈아타려고 하거든. 그러니까...."
사락, 사락. 마르바스는 엘렉트라의 두 손을 모아 여신에게 기도하는 것처럼 만들었다. 그리고 기도하는 손의 안쪽에 단검의 손잡이를 집어넣어, 엘렉트라의 하복부를 푹 찔렀다.
"잘 썼어, 덕분에 레오 가문의 씨도 얻었고, 제법 즐기기도 했고."
스스스.
붉은 핏물이 하얀 시트에 퍼지기 시작했다. 마르바스는 테이블에서 양피지를 꺼내, 정성스레 펜을 거칠게 휘갈겼다.
- 미안해요, 안다이할. 더이상은 무리에요.
"이야, 유서 깔끔하다!"
증오와 좌절만이 가득한 양피지를 바닥에 구겨 버린 채, 마르바스는 마법과 함께 사라졌다.
* * *
잠시 뒤.
원래 던전으로 돌아온 바알은 슬라임의 몸을 바꾸어, 흑발의 건장한 인간 청년이 되었다.
"자리를."
"예."
짝.
바알이 박수를 치자, 바알이 앉은 옥좌로 향하는 통로를 두고 열 두 개의 마법진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2번부터 13번까지 숫자가 박힌 마법진에는 저마다 각양각색의 마족들이 소환되어 나타났다.
"폭식의 군단장, 바알제붑이 명하노라."
바알이 전방으로 손을 뻗으며 우렁찬 목소리로 선언했다.
"인류연합과의 전면전을 이제 끝낼 때가 되었으니, 모든 던전의 마족들은 전 병력을 이끌고 던전 밖으로 뛰쳐나가라."
"""오오오오!!"""
던전 주인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단지 명령 하나를 내리기 위해 소집한 격이었으나, 던전 주인들은 환희에 찬 얼굴로 자신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바알이여."
'2'라고 적힌 마법진 위에 서있던 노인, 아가레스는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바알은 아가레스에게 주먹을 뻗어 엄지를 아래로 내렸다.
"군단장의 명령이다. 순순히 신의 명령을 들어라."
"고작 슬라임 신 주제에...!"
"슬라임의 신이 아니다, '신'인 슬라임이지."
바알의 손이 아가레스를 향해 그물처럼 퍼졌다. 아가레스는 점액의 구물이 자신을 잡기 직전 빛이 되어 사라졌고, 던전에는 결국 다시 바알과 여인만이 남게 되었다.
"저도 이건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다녀오시더니 갑자기 대전쟁을 치르시겠다? 왜요?"
"원래 신의 뜻은 가늠하기 어려운 법이다. 원래부터 인류 연합과의 전쟁에 있어서 슬슬 공세를 취할 생각이었어. 그분께서 내게 내려주신 특명도 2위 아가레스를 복속시키는 것으로 끝났으니까."
"폭식의 군단으로서, 2위부터 13위까지 12명의 던전 주인을 군단의 아래에 들이라고 하셨죠."
"그래. 그리고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갈 때다."
바알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뚜벅뚜벅 걸어간 앞에는, 검은 어둠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어서오십시오, 나의 주인이시여."
"어머나, 우리끼리 섭섭하게 그런 말 하기야?"
어둠의 안개 속에서 나타난 자를 본 은빛 여인은 황급히 바알의 옆에 부복했다. 정장의 여인은 바알의 몸을 일으켜, 시선을 들어올리며 물었다.
"알아채버렸네?"
"알고 계셨습니까? '저희'의 첫 던전, 누군가가 다시 연 것을. 육육육이 후작 성에서 인간 기사를 먹고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응. 알지. 예전부터 주목하고 있었어. 그러니까 너보고 명령을 내린 거잖아. 인류연합을 상대로 전면전을 펼치라고."
"고작 왕국의 일개 후작가와 전쟁을 치르는 이들을 돕기 위해서, 말이죠."
검은 정장의 여인, 에스투는 옅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변수를 더럽게 싫어하는 애들이거든. 인류랑 마왕군이랑 전면전으로 붙으면, 분명 걔들도 후작령 상대로 1:1로 붙을 수 있겠지? 후후, 슬슬 군단도 세 곳으로 크게 정리되고 있으니까 이럴 때가 되기는 됐어."
"세 곳...?"
"응. 네 666번째 딸의 주인이 바로 또다른 군단장이란다. 어머나, 장인어른이랑 사위가 같은 직급이네? 이거 서열 정리 하지 않으면 안 되겠는 걸?"
에스투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왜 제가 장인어른입니까. 장인은 당신 아니십니까."
"어머, 얘봐라. 잊었니? 너...."
에스투는 바알의 몸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이 세계에 떨어진 나를 강간해서 슬라임 알깐 건 어디 사는 ★등급 슬라임이셨더라?"
"크, 크허억...!"
신조차, 마왕을 이길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