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5회
142일차
토벌대를 구성하는 인원 수는 대부분 후작령의 영지민들이 차지가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 중 일부는 모험가나 용병들이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이 토벌대에 참가한 이유는 하나. 성검의 용사가 이끄는 토벌대라면 분명 높은 확률로 원정에 성공할테고, 그에 따라 작은 부스러기라도 안전하게 주워먹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로우 리스크 로우 리턴.
하지만 모험가라는 족속이 어떤 족속인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크게 한탕 해먹으려는, 위험하더라도 보상이 어마무시하기를 바라는 속물이다. 세상 살이가 편하기만 한다면 로우 리스크 하이 리턴을 원하는 이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리스크는 크지만 하이 리턴이 될 지도 모르는 포털이 발견되었다.
모험가 길드에 들어온 신원미상의 제보자는 처음부터 정체를 숨기고 모험가 길드에 '제보'를 했기에, 사람들은 길드의 문을 두드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보시오! 던전이 발견되었다는 것이 사실이오?!"
"위치 알려줘! 던전 등급은 어느 정도냐?! 중급이냐?!"
"진짜 던전이면 토벌대 들어가서 명령 받으며 지낼 필요도 없지!"
모험가들은 어딘가에 속박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따라서 모험가들은 토벌대에 소속되기보다 자신이 믿는 동료들과 함께 던전을 공략하기를 바란다.
"파이는 나눌수록 불행해지니까요."
일확천금을 노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자연히, 토벌대에 들어간 모험가들은 길드와 정규 토벌대 사이에서 갈등하며 간을 보기 시작했다. 하나 둘 토벌대에서 빠져나가기를 바랐으나, 당연하게도 이므신할 후작은 그걸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장 이 주 안으로 출격할 계획이었는데, 지금 토벌대에서 빠지면 어쩌자는 거지?"
"아니, 후작님. 던전 가만히 내버려둘 겁니까? 비르고 남작령도 던전에서 튀어나온 마물 놈들이 남작령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잖아요?"
"만약에 원정 나간 사이에 던전에서 대량의 마물이 쏟아지면, 저희는 성에서 죽으란 말씀이십니까?"
"그럴 바에는 차라리 던전을 토벌하고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비르고 원정에 변수가 생김에 따라, 원정대의 일정에 큰 차질이 발생할 수 있다. 이므신할은 결국 모험가 길드에 대대적으로 던전 토벌을 의뢰했다.
- 토벌대의 전력은 빼지 못하니, 그대들이 최대한 던전을 빨리 공략하도록 하라.
후작은 길드에 의뢰를 했다. 따라서 모험가 길드에서는 자신들만 아는 위치 정보를 바탕으로 소수 정예를 편성하여 던전을 공략할 수 있게 되었다.
바야흐로, 신원 미상의 던전 공략이 시작된 것이다.
* * *
<아침, 모험가 길드 내부 회의실.>
"너 진짜 갈 거야?"
"그럼요, 길드장님. 저 예전에는 한껏 날리던 여자였어요."
"아니까 그러는 거지. 너 가면 접수는 누가해?"
"어차피 지금 접수 받을 상황도 아니잖아요? 길드앞에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뤄서 후작가에서 기사단으로 쫓아낼 정도인데. 가만히 서서 앵무새처럼 모르쇠 할 바에는 몸 쓰는 게 훨씬 낫죠."
모험가 길드의 접수원이었던 여인, 레이플 켜르케델은 주먹을 낡은 은패를 손에 쥐고 흔들며 자랑했다. 새로이 발견된 던전은 이미 은퇴한 모험가도 다시 검을 들게 만들 정도로 인기가 자자했다.
"에휴, 나는 모른다. 너 괜히 그러다가 큰 코 다치는 수가 있어?"
"뭐래요. 언제는 결혼 못한다고 저주하더니, 남자 꿰기 전에 한탕 더 벌려고 하는 거 아녜요?"
"혹시 모르잖냐. 남작령에서 들려오는 흉흉한 소문도 있고...."
"아, 오크들에게 붙잡히면 강간당한다? 풋, 걱정마요. 제가 어디 강간당할 것 같아요?"
레이플은 자신의 실력을 믿었다. 은퇴한 것도 부상을 입거나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한 것이 아니라, 결혼적령기가 되어 접수원 일을 하며 적당한 남자를 꿰기 위한 전직이었다. 모험가처럼 불안정한 직업을 가진 아내를 맞이할 남자는 크게 많지 않았으니까.
"귀족가의 며느리가 되기 전에, 지참금 챙기려면 던전 하나 정도는 털어야죠."
"야, 그러다가 72위 던전이면 어쩌려고 그래."
"혹시 알아요? 40위권 던전 정도는 되서, 진짜 한 번 크게 땡기고 화려하게 은퇴할 수 있을지."
"...나는 진짜 모르겠다. 내가 길드 지부장이기는 하지만, 내 감이 말하고 있어. 저기는 진짜 사지라는 걸."
길드 지부장은 검지로 관자놀이를 콕콕 건드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은 최대한 몸을 사리는 게 제일 좋단 말이지. 야, 그냥 이번은 안 가면 안 되냐?"
"뭐래. 아, 어머나! 지부장님 저한테 관심있어요?"
"미친 년아, 나 신혼이야! 어디서 큰일 날 소릴! 너만큼 일 잘하는 접수원 없어서 그래!"
"후후, 접수원 아가씨로 저만큼 미모가 뛰어난 여자가 없죠. 걱정마세요. 저는 절대로 범해지거나 하는 일이 없을 테니까."
레이플은 자신감 넘치는 미소로 회의실 문을 열었다. 이미 안에는 레이플과 함께 던전 탐험을 나설 남검사, 여사제, 여도적, 그리고 남마법사가 던전으로 향할 채비를 마쳐놓은 상태였다.
"이 모험이 끝나면, 다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거예요."
길드 지부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배웅했다.
레이플과 은패 모험가들은 던전 바로 앞으로 순간이동 마법을 사용했다.
* * *
<그 시각, 레굴루스 성 후작 집무실>.
던전이 발생한 것과는 별개로, 후작성의 상황은 그다지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후작 각하, 보고입니다. 색수병 환자가 어제로 30명이 더 늘었습니다."
"...나도 안다. 순회사제단에게 도움을 요청하도록."
색수병은 알게 모르게 나날이 퍼지고 있고, 서큐버스들의 대량 탈옥으로 성녀의 꿈을 꾸는 민간인들은 하나 둘 늘어만 가고 있었다.
"후작 각하, 안색이 좋아보이지 않습니다. 밤잠을 설치셨습니까?"
"...아아, 어제 꿈자리가 조금 사나워서."
더군다나 하필이면 꿈의 내용도 날이 가면 갈수록 음란하고 음탕하고 외설적으로 수위가 점점 올라가기 시작했다.
"정말 개꿈이었어."
이므신할은 꿈속에서 자신이 왜 오크의 자지 앞에 무릎을 꿇고 엉덩이에 개 꼬리를 집어넣어 자지를 애타게 원해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오크가 자신의 위에 올라타 박은 자지가 정말 환상 그 자체가 아니었다면, 이므신할은 바로 일어나 햣샨에게 개밥을 먹였을 지도 몰랐다.
"자네도 조금 피곤해보이는군, 경."
"예. ...어제 여성 환자의 옆에서 간호를 하느라 조금."
"이해하네."
색수병 환자들은 하나같이 신성력을 통한 증상 완화를 거부했다. 결국 옆에서 간호하는 이들의 피로감은 나날이 늘어만갔으나, 색수병 환자들은 사제나 기사들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다.
"던전이 정리되어 색수병이 잦아들었으면 좋겠군."
"각하, 정말 던전이 토벌되면 색수병이 사라질까요?"
"사라져야지. 사라지지 않으면, 그 설이 진짜가 되어버리는데."
후작의 입에서 나온 위험천만한 말에 기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각하, 위험합니다."
"뭘. 아직까지 그 누구도 원인을 밝히지 못하는데, 신성력으로도 해결할 수 없어. 더군다나 발병자에게는 축복이라고 볼 수 밖에 없는 현상이 나타나지. 이게 '여신의 은총'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
이므신할은 담담한 얼굴로
"그런데 경. 아버님은 아직도 의식을 되찾지 못하셨는가?"
"예. 엘렉트라 님께서 계속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고 계십니다."
"...누가보면 엘렉트라가 안다이할이 아니라 아버님과 결혼한 줄 알겠어."
"각하, 그, 그게...."
기사는 대답을 머뭇거렸다.
"엘렉트라 님은...."
끼이익.
문이 열렸다. 살포시 열린 문 사이로 갓 구운 쿠키 냄새가 향긋하게 집무실을 가득 채웠다.
"안녕하세요?"
얼굴에 미소를 활짝 띈 엘렉트라는 집무실 테이블에 쿠키를 올렸다. 이므신할은 자연스레 쿠키를 집어 와그작 씹었다.
"고마워, 엘렉트라."
"아니에요. 레오 가문의 일원으로서 꼭 해야하는 일인 걸요."
엘렉트라는 한 손을 볼에 짚으며 베시시 웃었다. 그녀의 피부는 푸석푸석한 이므신할의 피부와 달리 맨들맨들하고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이므신할은 자신은 이제 돌아갈 수 없는 귀부인의 모습을 한 엘렉트라를 보며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부럽네. 역시 관리를 해서 그런가?"
"후후, 좋은 걸 먹어서 그래요."
엘렉트라는 슬며시 미소지으며 기사를 돌아봤다.
"네. 좋은 거."
기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
잠시 뒤.
레이플과 일행은 마법진의 앞에 섰다. 인적이 드문 곳에 생겨난 토굴은 분명 자연적으로 형성된 토굴이 아닌 인위적으로 생성된 토굴이었고, 토굴의 끝에는 정보대로 보라색 마법진이 반짝이고 있었다.
"던전 출입구랑 조금 다른데?"
마법사는 마법진의 형태를 종이에 그리며 의아해했다. 다른 모험가들도 자신의 경험 속에 기억하고 있던 마법진과 사뭇 다른 것에 의아함을 느꼈다.
"뭐 어때? 전이문이라는 건 똑같잖아?"
위이잉.
레이플은 전이문 너머로 작은 돌멩이 하나를 던졌다. 돌멩이는 마법진을 통과해 사라졌고, 레이플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검을 앞으로 겨눴다.
"가자. 한 번 크게 해먹어보자."
"""오우!"""
모험가들은 진형을 갖추고 전이문 앞으로 걸어갔다. 몸에 마력의 보호막을 두른 레이플이 선두에 서서 가장 먼저 마법진으로 몸을 날렸다.
"......응?"
공간이동 마법진 너머는 아무것도 없었다. 직사각형으로 잘 닦여있는 통로가 있을 뿐, 별다른 특별한 느낌은 없었다. 그래서 레이플은 직감했다.
"던전이네."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벽 뿐이다. 빛 한 점 없는 공간에서 주변 통로가 훤히 보이는 건 마왕의 던전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기이한 현상 중 하나였다.
"대박이야. 이렇게 길이 잘 닦여있는 던전이면 최소 50위권 안은 될 것 같은데?"
"방심하지마. 언제 어디서 함정이 튀어나올 지 몰라."
일행은 무기를 들고 조심히 앞으로 나아갔다. 직선 통로는 별다른 함정 없이 5분간 계속 이어졌고, 거북이 기어가듯 천천히 걷던 일행의 발걸음도 점점 대담해졌다.
"뭐지...?"
"조용. 저기 뭔가 있다."
일행은 통로 너머에서 들려오는 부산한 소리에 무기를 들어올렸다. 통로 저 멀리서, 또각또각 거리는 구두굽 소리가 통로에 울려퍼졌다.
탁, 타닥.
천장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천장 안에 불투명한 직사각형의 판에서 사방을 밝히는 은빛이 은은하게 흘러내렸고, 일행은 자신들의 앞에 나타난 핑크빛 머리칼의 여인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인간...?"
"어서오십시오, 차원의 틈에. 이곳은 던전을 공략하는 모험가들을 위해 여신께서 만드신 지원의 길, <라스마켓>이라고 합니다."
"뭐...?"
"저는 이 라스마켓의 대표, 메어리라고 합니다. 어서오십시오, 손님 여러분."
미인의 정중함에 레이플을 비롯한 모험가들은 긴장이 누그러들었다. 특히 레이플은 접수원인 자신보다 더욱 세련되면서도 정숙해보이는 옷차림에 혀를 내둘렀다.
"처음 오시는 분들을 위해 말씀드리자면, 이 길의 끝에는 '던전'으로 향하는 포털이 열려있습니다."
"뭐라고...?"
"그리고 여신께서는 던전에서 모험가들이 죽는 것을 안타까워 하시어, 이렇게 마왕군의 눈이 닿지 않는 차원의 틈에 아공간을 만드셨습니다."
"......??"
메어리라는 이의 말은 들으면 들을수록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메어리의 등 뒤, 모험가들의 눈을 휘둥그레 만드는 가판대가 즐비하게 늘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던전을 들어가면 배가 많이 고플 거예요. 식량이 모자라지는 않나요?"
"어이, 여분의 무기가 필요하지 않나?"
"속옷은 여벌로 챙겨왔나요? 던전 안에서 제대로 갈아입지도 못할텐데, 찝찝하지 않을까요?"
엘프가 말린 육포와 수통을 팔고 있다. 여자 드워프가 무기를 과시하고 있다. 여자 드라이어드가 목각인형에 옷을 입혀 의복을 팔고 있다.
"이곳은 차원 상점. 없는 것 빼고는 모두 있습니다."
"아, 아니. 잠시만. 도대체 이게 무슨...?"
"혹시, 마석을 가지고 계십니까?"
메어리는 녹색 머리칼의 엘프로부터 무언가를 건네받았다. 인간의 다리에 씌워진 물건은 모험가들이 그리도 눈에 불을 켜고 찾던 고가의 물건-스타킹이었다.
"하급 마석 1개에 스타킹 하나. 죄송하지만 마석이 없으면 거래를 할 수 없습니다."
"수도에서 스타킹 하나의 가치가 분명 못해도 중급 마석 수 개 정도 아니었나...?"
"아, 그렇습니까? 그건 그 분들이 저희에게서 사가서 재판매를 하신 거군요. 저희는 '정가'에 판매합니다. 더 좋은 품질의 스타킹은 그만큼 비쌉니다. 중급 마석 1개를 내셔야하죠."
"설마...."
"예. 이곳의 모든 물건은 마석으로 구매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메어리는 통로 반대편에 반짝이는 포털을 가리켰다.
"모든 준비가 끝나면, 던전으로 가시길."
"자, 잠깐만! 우리는 지금 마석이 없어!"
"후후, 걱정마십시오."
메어리는 포털을 가리켰다.
"시체를 가져오면 저희가 그에 상응하는 가치로 값을 치뤄드리겠습니다."
레이플과 일행의 눈에 불이 붙었다.
그래서 그들은 알지 못했다.
"차원의 틈...풉."
자신들이 넘어온 마법진 뒤, 양 옆으로 조그만 틈새와 미로를 통과하면 바로 <아스타로트>던전의 지하 2층을 빠져나가는 곳이 있다는 것을.
"자, 모험가님들. 어서 포털을 넘어가서 사악한 마물들을 무찔러주세요. 무운을 빕니다."
모험가들은 힘차게 앞으로 달려나갔다.
포털 너머, 마르코시아스 던전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