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9회
138일차
<자정, 후작 집무실.>
"......알겠네. 자네 상단의 방문을 허락하지."
자다 일어난 듯 퀭한 눈동자의 이므신할은 집무실에서 직접 사람들을 하나 둘 맞이하며 성에 방문한 이들에 대해 일일이 방문 허가증을 내렸다.
"피곤하군.... 다음."
"일부러 이 늦은 밤에 저를 왜 부르시나 했더니 이런 일이었군요."
이므신할의 옆에 앉혀진 추기경은 자신의 등 뒤에 시립한 두 명의 기사를 보며 쓰게 웃었다. 자신의 수족이나 마찬가지인 성기사단은 색수병 환자들에게 붙여놓거나 죄다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어놓고, 가문의 심복인 기사들을 동원해 자신을 감시하는 이므신할의 행동에 추기경은 초조함을 간신히 숨겼다.
"외지에서 오는 이들에 대한 확인이라. 알겠습니다. 굳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지만...."
"그게 무슨 말이지? 외부에서 만약 색수병을 퍼뜨리려는 자가 들어온다면 난리가 날 게 분명한데. 혹시 추기경은 색수병이 퍼지기를 바라는 건가?"
"설마요.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다만 성문에서 기사들이 걸러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이렇게 각하께서 일일이 확인하시는 건...."
"안 되지, 그건 안 될 말이다. 내가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안 돼."
이므신할은 출입구의 문 위에 꽂아놓은 성검을 가리켰다. 성검은 문으로 드나드는 이를 감시하는 일종의 경보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색수병을 퍼뜨리려는 자, 분명 마기를 몸에 머금고 있을 것이다."
"실례합니다."
끼이익. 문이 열리며, 새로운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제복을 입은 남자의 모습에 추기경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형제님?"
"아...이 하찮은 자를 기억하고 계시다니, 영광입니다. 추기경 예하."
"아는 사람인가?"
"예. 그, 어음, 그러니까, 예전에 리브라 영지 인근 시장에서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분명...."
추기경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남자는 정중한 태도로 허리를 숙였다.
"정식으로 제 소개를 다시 하겠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각하. 저는 대륙 곳곳을 누비며 신성력을 각성한 이들을 찾아 여신의 품에 귀의하게 하는 자. 순회사제단의 까르치아라고 합니다."
"......."
어째서일까. 이므신할은 까르치아라는 사제가 추기경의 말을 끊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추기경의 행동이 다소 이상해보였다. 마치 추기경 본인도 잭의 방문을 몰랐다는 것처럼.
"수, 순회사제단?"
"예. 저와 뜻을 함께한 이들 몇몇을 비롯해, 신성력을 각성한 이들과 함께 왕국 곳곳을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여신님의 뜻을 전파하며, 가장 낮은 곳에서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고 있지요."
"그렇군. 그래서 이곳에 온 목적은 뭐지?"
이므신할의 날카로운 질문에, 까르치아는 낮게 웃으며 성호를 그렸다.
"널리 세상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라. 스라룰탈 님께서 말씀하시길, 여신님의 사랑은 성당 안에서만 맴도는 것이 아니라 세상 곳곳에 널리 퍼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상한 이름은 누구지? 처음 듣는 이름인데. 성서에 있나?"
"제 아버님입니다. 지금은 여신님의 품에 귀의하셨습니다."
"미안하네. ...내가 지금 피곤하여 제정신이 아니야."
"괜찮습니다. 여신님께서는 모든 것을 포용하여 주시니까요."
까르치아의 인자한 미소는 이므신할로부터 추기경으로 넘어갔다. 추기경은 한동안 까르치아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여신님께서는 모든 것을 품어주시지요. 각하, 순회사제단의 입성을 허가하여 주십시오."
"끄응.... 일단 여기에 서명을 하지."
이므신할은 이름칸이 비어있는 출입증 두 장 건넸다. 출입한 이들의 신분을 확실하게 기록하겠다는 집념이 엿보였다.
스륵, 스륵.
까르치아는 빠르게 글씨를 휘갈겼다. 사제답지 않은 손글씨에 이므신할의 눈썹이 뒤틀렸다.
"자네, 이름을 뭐라고 쓴 건가?"
"까르치아 래피드 잭. 저를 아는 이들은 저를 <속사의 잭>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전에는 사냥꾼이었지만, 여신의 뜻을 이 마음속에 품을 수 있는 영광을 받았습니다. 까르치아는 성수로 세례명입니다."
"허어?"
이므신할의 눈이 성검을 향했다.
"언제부터 사제가 되었지? 고작 사냥꾼이 사제가 될 수 있다는 건가?"
"후후. 많은 오해를 받죠. 하지만 후작 각하. 제가 사냥이나 하며 살생을 일삼던 하찮은 자였으나...."
사라락.
까르치아 래피드 잭이 손을 앞으로 뻗자, 그의 손에서 은은한 신성력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저의 주인님께서는 저같은 보잘 것 없는 자 또한 보듬어주셨습니다."
까르치아의 손에는 성검에서 흐르는 것과 똑같은 신성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 *
아무리 전염병이 도는 도시라고 한들, 외부에서 오는 모든 인원을 차단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색수병이라는 전염병을 어느정도 제압했다고 판단한 이므신할 후작 대리는 성문을 열어젖혔다.
다만.
성문은 아주 극소수만 열렸고, 당연히 기사단이 배치되었다. 성기사단과 기사단이 함께 경비들과 서서 출입을 통제하는 바람에, 성 내의 주민들은 외출도 쉽게 하지 못했다.
"저거 봐, 밖에서 온 사람들이야."
주민들은 오랜만에 들어온 외부의 공기에 신선함을 느꼈다. 동시에 과연 저들도 색수병에 걸릴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도시에 들어온 이들은 크게 세 부류.
"모험가 길드는 어디있습니까?"
남작령에 나타난 던전을 토벌하거나 남작령을 점령한 마족들을 사냥해 한탕 크게 벌어먹으려고 하는 모험가들.
"이보세요! 거기 밀치지 마! 물건은 많다고, 젠장! 도둑이야!!"
정기적으로 후작성에 방문해 물건을 판매하려고 했지만, 성의 봉쇄로 인해 밖에서 무작정 기다리다가 이제서야 본격적으로 가게에 물건을 공급한 상인들.
"라스를 아십니까."
그리고 정체불명의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한, 외부에서 온 순회사제들. 모험가와 상인은 딱히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광장에 모인 한 무리의 순회사제들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상당했다.
"어우야...저기 저 통 보이냐?"
"저기있는 큰 빨간 통 말이지? 굉장하군."
"남자들 생각보다 반반하지 않아? 뭘 먹고 다니길래 저렇게 몸이 좋지?"
"...히익. 로브 아래에 저거, 뭐가 튀어나온 거야...?"
모두가 순회사제들의 설파는 듣지 않고 로브 속 가려진 몸을 상상하거나 평가하기 일쑤였다. 레굴루스 성에서 사실상 사제들과 성기사들은 '성욕을 대신 해소해주는 이들'로 굳어버렸기에, 주민들은 그러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외부에서 온 사제들에 대한 일말의 기대감을 감출 수 없었다.
"대사제님께서 지시하실 거야. 색수병에 걸린 환자들을 돌봐달라고!"
"그래! 그게 여신님의 뜻을 따르는 이들이 해야할 일이라고!"
사람들의 뒤틀린 기대가 광장을 덮는 가운데, 사제들은 경건한 자세로 광장에서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올렸다. 기도문을 읊는 사제들은 진실로 여신을 따르며 여신의 뜻을 전파하는 성스러움이 느껴져, 음심으로 가득차있던 광장의 주민들은 잠시 스스로 반성하고 참회하는 시간을 가졌다.
"여신이시여."
"""여신이시여."""
모두가 여신을 향해 기도를 올린 순간.
휘이이잉-
광장에 바람이 불었다. 그러자 순회사제단의 로브 옆이 살랑거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불어난 바람에 의해, 로브 아래 치마가 순간 위까지 올라갔다.
"......꺄악?!"
여사제들이 비명을 지르며 옆을 눌렀다. 하지만 이미 광장의 많은 이들은 보고말았다.
"여신이시여...."
여사제의 로브 아래, 조금 조잡해보이기는 하지만 흉내라도 낸 것만 같은 낡은 스타킹이 가터벨트에 묶여있는 것을.
"자, 잠시 소란이 있었습니다. 모두 마지막으로 뜻을 모읍시다. 여신이시여."
부디 사제들이 색수병에 걸린 환자들을 위로해주고, 그 환자가 자신이 되기를.
꿀꺽.
광장에는 침넘어가는 소리만 가득 울려퍼졌다.
* * *
순회사제단.
기네비어가 그랬던 것처럼, 특정 목적을 가지고 도시를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발 닿는 곳에 교리를 전파하고 다니는 사제들을 일컫는다. 기네비어의 경우에는 마침 남작령에 교리를 전파하기 위해 도착했다가 우리 군단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사제인 척 사기치기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레모리."
"여신 교단의 교리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있어야 하지 않을까?"
"정답이다."
뭐든지 사칭을 하려면 상대방에게 전문가의 카리스마를 보여야 한다. 사제를 사칭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교리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하며, 수 백 페이지가 넘어가는 여신교단의 성서를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빠삭하게 익히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질문은 정답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야. 복수 정답이지. 또 다른 방법이 뭐가 있겠느냐?"
"사제의 증거라...당연히 신성력 아니야?"
"그것 또한 정답이다."
설령 교리를 모른다고 한들, 몸 안에 신성력이 있다면 그는 여신 교단의 사제가 틀림없다. 지구의 중세 시대 교회라면 교회에서 교리를 공부한 신학도들이 사제가 되겠지만, 이 판타지 세계에서는 다른 방법도 있다.
신성력의 각성.
농가에서 밭을 일구던 농민에게서 신성력이 발현될 경우, 그 즉시 그는 사제가 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여신 교단은 신성력을 각성한 자들을 최대한 많이 교단의 사제로 포섭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덕분에 이 작전이 가능했던 거지. 교리를 몰라도 신성력을 사용할 수만 있다면, 그들은 '수습 사제'로서 여신 교단의 일원임을 자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교리를 이미 알고 있는 사제들과 신성력을 깨우친 수습 사제들의 조합으로, 우리는 그들을 마치 전쟁 도중에 곳곳에서 사제에 적성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모아 대사제급의 세례를 받으러 다닌 것처럼 하는 논리를 만들어냈다.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지. 설령 의심을 하더라도 신성력을 보이면 의심은 거두어들이기 마련. 신성력이라는 확실한 증명 수단이 있는데 누가 의심을 할 수 있을까?"
퍼트릴 라임을 비롯한 순회사제단은 호위 기사인 라임을 제외하고 모두가 신성력을 보유하고 있다. 원래부터 보유하고 있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 우리 군단에 의해 신성력이 '주입된' 이들이었다.
"신성력이라는 것 또한 하나의 힘에 불과하다. 이미 그건 성검의 타락을 통해 입증된 것이야. 단지 신성력이 여신의 힘이기에 신성한 것일 뿐, 여신은 딱히 신성력에 대해 부정하고 모욕한다고 인간에게 신벌을 내리지 않지."
"그래. 만약 그랬으면 당장 너부터 신성력에 불타죽었어야 했을 걸?"
"흐흐. 아니지. 지금까지 여신의 뜻을 기만한 자, 선녀부터 불타죽어야지. 그 년이 제일 여신의 뜻을 곡해하는데."
선녀. 대놓고 성녀라고 부르지 않기 위해 사람들이 꿈속에 나타나는 탕녀를 두고 부르는 말이었다. 돌아온 서큐버스들을 통해 알게된 단어는 우리 군단에서 누군가를 지칭하는 코드 네임이 되었다.
"아무튼 신성력은 인간이 다룰 수 있는 힘이다. 여신 교단은 신성력을 마나처럼 다루려는 자들을 모조리 이단으로 몰아 불태워 죽였지. 금기와 권위의 힘으로, 신성력은 말 그대로 신성한 힘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걸 마왕군인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게 밝혀진다면, 아마 여신 교단은 우리를 완전히 박살내려고 들 걸? 추기경이 어떤 생각을 하는 지는 모르지만, 그걸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 때를 위해 천사들이 있는 것이다. 흐흐흐. 놈들에게 마왕군 또한 신성력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면, 세상의 패러다임은 크게 바뀔 것이다."
더이상 신성력이 인간들의, 여신 교단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군단에서 하는 것처럼, 마나 포션을 만들어 타인에게 마나를 부여할 수 있는 것처럼 신성력 또한 타인에게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을.
"그레모리. 이게 무엇 같으냐?"
나는 백작령에서 노획한 최고급 향수병을 들어올렸다. 오만의 군단이 버려진 사지타리우스 백작령에서 노획한 물품 중 하나로, 원래 주인은 미르망이었다.
"이 안에 든 액체가 무엇처럼 보이지?"
안에은 붉고 희뿌연 액체가 작게 찰랑거리고 있었다. 뚜껑을 막아뒀으니 자연히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유리 용기 너머로 느껴지는 미약한 기운에 그레모리는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궁금하기는 한데 되게 기분이 이상하네. 그게 성수(性水)야?"
"그래. 마시는 자에게 안에 들어있는 신성력 만큼의 힘이 깃들게 하는 성스러운 물이지."
어떻게 하면 신성력을 우리 군단에서 잘 활용할 수 있을까하는 연구의 결과였다.
"참고로 남성용이랑 여성용이랑 따로 구분되어 있단다. 흐흐, 굳이 따지자면 성유와 성액이라고 할까?"
"...나, 뭔지 알 것 같아. 어떻게 만드는 지 안 알려줄 거라면서 꽁꽁 숨기더니, 이름을 그렇게 지으면 무슨 의미가 있어?"
"오호? 그렇다면 맞춰봐라. 이 포션들의 재료를."
그레모리는 여성용 성수를 들어올리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오크 성기사 갤러해드의 정액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그게 들어있는 게 틀림없어."
"정답이다, 그레모리."
여성에게 사용하는 성수에는 그레모리의 말대로, 갤러해드의 성수가 담겨있었다. 그가 성검을 통해 뽑아낸 성스러운 액체에는 한 여인의 피가 조금 섞여있었다.
"오크 성기사 갤러해드의 정액, 용사 미르망 인 사지타리우스의 피, 그리고 증류수. 들어있는 건 그게 다다."
미르망의 피, 정확히는 미르망의 피에 섞인 성검의 신성력이 매개였다. 덕분에 미르망은 흡혈귀 하나 없는 던전에서 피를 뽑아내느라 다소 고생을 하고 있지만, 그만큼 나의 사랑과 활력을 불어넣어주니 쌤쌤이었다.
"그리고 이건 남성을 위한 것이지. 아아, 이름하야 성유(性乳)라고 하는 것이다."
"...더럽게 많네. 이건 미르망한테서 짜낸 거야? 이상한데. 성마법으로 젖을 짜냈으면 신성력이 담기지 않을 텐데?"
"아, 그거 미르망 젖 아니다."
마족의 알을 잉태하고도 신성력이 담긴 젖을 뿜어낼 수 있는 자에게서 미친듯이 뽑아냈을 뿐이다.
"그럼 누구한테서 뽑아낸 거야?"
"레비즈."
소젖도 있고, 양젖도 있고, 그린엘프 젖도 있다면, 하프 드래곤 젖 또한 있지 않겠는가.
"유두에서 신성력으로 개틀링도 쏘고 그러는데, 젖을 설마 짜내지도 못하겠어? 흐흐."
단지 유감이라면, 산란 5분 직전에만 젖을 짜낼 수 있다는 것.
"아주 골수까지 쪽쪽 빨아마셔주지. 흐흐흐."
오크 성기사.
성검의 용사.
하프 홀리 드래곤.
"레비즈여. 그걸 알고 있는가? 네 용젖 덕분에, 한 명의 조루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우리는 그들 덕분에, 아무 힘도 없는 일반인을 사제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