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5회
129일차 추기경이 전한 정보는 분명 값어치가 있었다.
후작령이 물리적으로 전투를 일으킬 '적'이 되어버린 이상, 우리는 그에 맞게 또다른 대처를 해야했다.
"우선 가장 먼저 경계해야 할 적이 있다면, 누굴까?"
"거리상으로는 마르코시아스입니다. 후작령과의 전투가 전면전이라고 한다면, 마르코시아스는 우리 군단의 후방을 노리고 있는 셈이죠."
"륜이랑 메어리, 그리코 쿠키엘프들이 틀어막고 있으면 안전하겠어."
"대신 그들을 뺄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죠."
전장을 여러곳으로 넓힌 것의 단점이지만, 그만큼 장점이 있으니까 나는 기꺼이 감수할 수 있었다. 륜이 빠지는 건 조금 뼈아프지만, 어차피 인간들을 상대로 메어리를 꺼내기에는 다소 곤란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럼 이제 적을 살펴보도록 하지. 공중 정찰부대가 확인한 바는?"
"안드라스와 하르퓨이어의 보고입니다. 일반 농민처럼 보이는 이들부터 모험가, 군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직종의 이들이 성 밖에 모여 군사훈련을 받기 위해 모였다고 해요."
"씁.... 속성으로라도 병사 훈련을 거친 뒤에 쳐들어오겠다는 건가."
한 달.
추기경이 말한 한 달은 갓 입대한 훈련병을 이등병 수준으로 끌어올리는데까지 걸리는 시간일 것이다. 그마저도 모험가나 퇴역 군인이 있다면, 그건 그냥 베테랑과 신병이 고루 섞인 정예 군단이었다.
"최악이로군."
이므신할은 그냥 무작정 쳐들어오려고 하지도 않았다. 남작령을 탈환만 하고 끝내려는 생각인지, 아니면 우리를 철저하게 짓밟으려는 생각인지는 몰라도 병사들을 훈련시켜서 우리와 싸우려하고 있었다.
"그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생각하도록 하지. 우선 거리상으로 가까운 적부터 처리하자꾸나."
"예, '안다이할 후작과 기사단' 말씀이시군요."
아스타로트 던전의 1층을 털어먹은 기사단.
추기경의 도움으로 그들에게 누명을 씌워 후작성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들었으나, 추기경의 공작이 더이상 통하지 않게 되면 안다이할은 다시 성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아스타로트 던전을 털어먹은 놈들이 다시 아스타로트 던전을 털어먹지 말라는 법은 없지."
그들이 공략한 아스타로트는 나와는 다른 존재이나, 까딱 잘못하다가는 같은 운명에 놓일 수 있다.
"성기사단과 후작가의 기사단이 함께 편을 먹는 건 막아야한다. 그것만큼은 안 돼."
일반병 5천과 200 여명에 이르는 초 거대 기사단. 전면전을 치르기에는 너무나도 부담이 크다. 이기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승리할 확률이 5할보다 낮은 게 엄연한 사실이다.
"반반이라도 가려고 하면 기사단이 합류하는 것을 막아야 해."
"하지만 주인님, 그들은 꽁꽁 숨어버렸지 않습니까? 아직까지 저희조차 찾지 못한 걸 봐선 어디 독하게 숨어버린 게 틀림없습니다."
"끙. 미치겠군. 혹시 아스타로트 던전이라도 들어가버린게 아닐까?"
나 스스로도 어이가 없는 실없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로, 안다이할과 기사단은 완벽하게 숨어버렸다. 하피를 이용한 공중정찰과 죽음의 기사들을 동원한 정찰까지 감행했음에도, 기사단은 보이지 않았다.
"뭔가 특별한 방법을 써서 꾀어내지 않는 이상, 그들을 찾기란 사실상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는데 이제와서 남작령 전체를 뒤지는 것도 말이 안 되지."
엘프의 숲만 하더라도 엄청 넓은데, 남작령 전체를 뺑이쳐서 숨어있는 적을 찾는 건 불가능이다. 그러므로 샤이탄의 말대로 우리는 적이 스스로 나오도록 끌어내야했다.
"놈들을 끌어낼 수 있을만한 적당한 무언가.... 샤이탄, 혹시 생각나는 거 있나?"
"미인계는 어떻습니까? 알몸 그린엘프들을 돌아다니게 하면, 굶주린 기사들이 그들을 덮치지 않을까요?"
"꽤나 솔깃발깃한 제안이지만 놈들은 기사들이다. 색수병에 걸리게라도 하지 않는 이상, 그 정도는 참아낼 수 있을 거다."
"그래도 오랫동안 성에 굶주려있는 이상, 한 발 빼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텐데요? 자기들 안에 있는 여기사가 있어서 떡이라도 쳐준다면 모를까."
"...글쎄."
굶주려있다라. 굶주려있다....
"샤이탄, 좋은 생각이 났다."
"명령하시지요."
"흐흐, 그래. 우리가 할 것은...."
나는 샤이탄에게 바로 지시를 내렸다.
"빤스런이다."
우리는 라스마켓에 자리잡은 부대를 철수시켰다.
* * *
그 시각.
레오 후작령과 비르고 남작령 사이, 숲속에는 작은 토굴이 하나 만들어졌다. 사람 30명 정도가 간신히 들어가 생활할 수 있는 토굴은 숲 위를 날아다니는 조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작은 숙영지였다.
"......하아."
토굴 안에 몸을 피신한 이들은 후작가의 기사단으로, 아직까지도 성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안다이할과 부하들이었다. 그들은 이미 씻는 것 조차 포기했다 싶을 정도로, 점점 자연인의 몰골이 되어 토굴 안에 숨어있었다.
"각하, 드디어 희소식입니다."
깡마른 시체처럼 변해버린 노기사, 안서니우스는 큼지막한 보자기를 나무 판자 위에 올렸다. 안다이할과 기사들은 보자기에서 풍겨지는 향긋한 냄새에 곧장 판자 근처로 모였다.
"라스마켓의 놈들이 철수했습니다. 밤 사이, 그들의 식량창고를 털어오는데 성공했습니다."
"...크흡."
안다이할은 눈물을 삼키며 보자기를 펼쳤다. 나무뿌리를 씹어삼킨지도 어언 사흘째. 식량이 다 떨어진 기사들은 보자기 속에 담긴 음식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게 얼마만에 맛보는 빵이란 말인가...."
치즈도 없고, 고기도 없다. 오직 표면이 딱딱한 빵밖에 없었다. 후작성 외성의 빈민들조차 먹지 않을 딱딱한 빵이었으나, 사람 다운 식사를 해본 적이 언제쯤인가 싶은 기사단에게는 산해진미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음식이었다.
"마족 놈들, 미개해서 빵조차도 제대로 굽지 못하다니...."
"오크들이 엘프들에게 종종 먹이던 것을 봤습니다. 엘프에게 강제로 먹이는 사료같은 것이 분명합니다."
"망할 오크 놈들. ...응?"
사락. 안다이할은 빵을 손가락으로 집었다. 딱딱했던 표면과 달리, 빵은 너무나도 쉽게 뜯어졌다. 안다이할은 자신이 뜯어낸 부위를 다시 놓고 손가락을 혀로 핥았다.
"각하?!"
"다, 달아?!"
흙이 묻어있었지만 안다이할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마치 바닥에 떨어진 꿀을 발견한 개미처럼, 안다이할은 빵을 집었던 자신의 손가락을 빨며 눈을 빛냈다.
"빵이 딱딱한 것이 아니다...! 겉에 시럽이 발려진 것이야...?!"
"예?! 그, 그럼...?!"
후작성에서도 좀처럼 맛보기 힘든 농후한 단맛에 기사들은 하나 둘 빵을 집어들었다. 정말로 다행히 한 사람당 하나씩 돌아가고도 두 세개가 남을 양이라, 저마다 각자 하나씩 챙길 수 있었다.
할짝, 할짝.
남녀할 것 없이, 기사들은 빵의 겉을 혀로 핥았다. 발려져있는 굳은 시럽을 그냥 씹어 삼키기에는 너무 안타까웠다.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조차도 핥아먹을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그들은 굶주려있었다.
"겨, 경. 안에...?!"
안다이할은 겉을 뜯어낸 빵의 안쪽에 입을 쩍 벌렸다. 기사들은 안다이할의 빵 속을 보며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이것은...크림?"
빵의 안에는 크림이 한가득 담겨있었다. 케이크의 생크림을 통째로 빵 안에 집어넣은 것만 같은 모습에 안다이할과 기사들은 잠시 침묵했다.
"우리는 며칠을 나무뿌리 씹어먹었는데...."
기사 하나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허탈해했다. 평소라면 안서니우스가 엄하게 문책을 했을 테지만, 안서니우스에 안다이할을 비롯한 동굴 안의 모두가 허탈해하느라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지들은 맨날 엘프들이랑 떡치고...."
"엘프들 가슴을 머리에 이고 침대에서 누워 자고...."
"밥 먹고 떡치고...."
기사들은 지금까지 봐왔던 라스마켓의 생활상에 컬쳐쇼크를 느꼈다.
오크 하나가 엘프 둘을 노예처럼 부리며 섹스를 하는 것도 참을 수 있었다. 아무리 상대가 엘프라고 한들, 이종간 자체를 꺼리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추운 숲속의 토굴에서 다 낡은 로브 하나와 나뭇잎 침대에 의지하여 잠을 자면서도, 세 남녀가 동시에 뒹굴어도 꺼지지 않는 푹신한 침대와 풍만한 녹색머리 거유 엘프들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잠을 자는 마족들의 모습도 참을 수 있었다.
이 고난이 끝나 집으로 돌아가면 얼마든지 편안하게 쉴 수 있다는 생각만 하며 고통을 견뎌냈다.
행여나 들킬까봐 땀에 절은 옷을 제대로 갈아입지도 못하고, 강물에 씻는 것도 제대로 못 해 며칠을 꾀죄죄한 모습으로 지내면서도, 멋드러진 검고 흰 옷을 입는 것으로도 모자라 떡을 칠 때마다 스타킹을 찢어버리며 정액을 흩뿌리는 마족들의 모습도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마족들은 맨날 이런 걸 쳐먹고 있었단 말인가?"
"심지어 버리고 간 거...?"
"...수도에서 사면 어지간한 식사 한 끼 정도는 나올 것 같은 가격인데?"
싸고, 자고, 입는 것 모두를 견딜 수 있지만, 먹는 것 만큼은 견딜 수 없었다. 자신들과 너무나도 비교되는 마족들의 먹는 것에 기사들은 '박탈감'을 느끼고 있었다. 마족들이 버리고 간 음식은 기사들조차 자주 먹어보지 못한 빵이었다.
"......빵 안쪽이 눅눅해졌구나. 필히 며칠은 지났겠지."
아무리 안에 꾸덕꾸덕한 크림이 있다고 해도, 만들어진 지 제법 시간이 지났다는 건 모두가 눈으로 알 수 있었다.
으적.
안다이할이 먼저 빵을 씹었다. 기사들 또한 모두가 빵을 씹었다.
"우웁."
크림을 씹은 기사들의 표정이 굳었다. 크림은 분명 달콤하고 맛있었지만, 크림이 혀에 녹아내린 순간 입안에서 미묘하게 퍼지는 상쾌하면서도 이상한, 형언할 수 없는 향에 기사들은 저마다 다른 반응을 보였다.
"이건.... 꽤 괜찮은 향이군."
"엘프들이 쓰는 허브인가...? 난 조금 그런데."
"지금 우리가 그런 걸 가릴 처지인가. 어서 배를 채워라."
안다이할은 입안 가득 크림을 머금고 기사들을 다그쳤다. 귀족의 품위조차 잊고 양 볼을 가득 부풀리며 빵과 크림을 씹어삼키는 안다이할의 눈시울은 붉어져있었다.
"모두 지금까지 고생했다. 마왕군의 놈들이 라스마켓에서 철수했다는 건, 필히 성과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
콰득. 안다이할은 빵을 으적으적 씹으며 이를 갈았다.
"개구멍으로 성에 몰래 잠입하겠다. 추기경과 성기사단 몰래, 누님과 접선하여 진실을 알리도록 하지."
안다이할의 뒤. 그의 웃옷 위에 흙과 피로 적어놓은 곳에는 라스마켓을 드나드는 어떤 이들의 인상착의가 적혀있었다. 그리고 옷 위에 놓인 작은 수정구에는 라스마켓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로브의 남자가 있었다.
"추기경, 그리고 성기사단이 마왕군의 편에 붙었다는 걸."
기사단은 성기사단의 기사 하나가 마왕군의 영지에 드나드는 증거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 * *
"다른 건 몰라도 배고픈 건 못 참지. 흐흐, 인간 놈들. 지들이 먹는 게 뭔지도 모르고 먹어치우고 있을 거다."
"하암, 쯉."
"비켜, 아스모딘. 이제 내 차례야."
"싸우지 마세요. 주인님의 앞입니다."
아스모딘과 루시펠, 샤이탄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자지 하나를 두고 사이좋게 혀로 봉사를 했다. 세 이복자매가 동시에 내 자지를 무는 광경은 몇 번을 봐도 감격이었다.
"아스모딘, 일어나라."
"네? 왜, 왜 그러세요...?"
"꿀 좀 빨게."
나는 아스모딘의 몸을 강제로 일으켜, 그녀의 몸을 거꾸로 뒤집었다. 졸지에 내 앞에서 물구나무를 서게 된 아스모딘은 내 배를 쿠션삼아 자지의 윗부분을 혀로 핥았다.
"아아, 달다."
나는 아스모딘의 밀액을 혀로 삼키며 갈증을 해소했다. 시럽처럼 달콤한 드라이어드의 꿀은 륜만큼은 아니어도 한 번 맛보면 헤어나오기 힘든 달콤한 맛이었다.
"인간 놈들, 자기들이 얼마나 포상을 받는 지도 모를 것이다. 흐흐."
"하아, 저희한테야 포상이지만...."
"진실을 알면 주인님 죽이러 올 지도 모릅니다?"
"크흐흐. 죽이러 오면 얼마든지 받아줘야지. 지금이 제일 약해져있는 타이밍인데."
라스마켓의 병력을 일시적으로 후퇴시키자마 기다렸다는 듯 라스마켓의 물건들을 약탈해갔다. 극소수의 인원이 챙겨간 물건들은 대부분 음식과 생필품이었다.
"지금 놈들은 마족의 물건을 써야할 정도로 보급 상황이 좋지 않다는 말이지. 추기경의 공작이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 놈들은 분명 성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전에 조져야 해."
"위치는 특정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병력을 대규모로 움직이는 순간, 다시 도망칠 겁니다."
"흐흐, 그러니 완전히 무력화시켜야지. 아니면 내분을 일으키거나."
어느쪽이든 방법은 하나로 귀결된다. 그리고 그 방법은 우리 군단이 눈감고도 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이면서도 숙련도가 높은 방법이다.
"역병을 준비해라."
뷰르릇.
마왕의 딸 셋의 얼굴에 뿌려진 밤꽃냄새가 사방으로 울려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