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0회
127일차
터벅, 터벅.
미르망은 신성력을 해제했다. 타고있던 백마와 들고있던 무기는 빛무리가 되어 흩어졌고, 그녀의 손등에 별자리 모양으로 들어갔다.
"......."
미르망은 무너진 요새를 거닐며 사방을 살폈다. 망가진 요새 울타리, 부러진 깃대, 그리고 바닥에 찢겨져 걸레짝이 된 사지타리우스 백작가의 군기.
"아아...."
그리고 미르망은 보고말았다. 요새 한 켠에 놓인 엄청난 양의 구덩이를. 그곳에는 아무렇게나 던져진 시체들이 빼곡히 자리잡고 있었다.
"여신이시여."
까마귀조차도 거닐지 않는 시체밭의 시신들은 모조리 목이 잘려있었다. 마치 죽은 이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만들어 놓은 것처럼, 깔끔하게 잘려나간 머리 없이 몸통만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듀라한...!"
미르망은 금방 적의 의도를 눈치챘다. 남편이 편지를 보내올 때만 하더라도 걱정하던, '듀라한들이 유니콘을 타고 남자들을 납치해간다'는 말에 걱정이 되어 몇 번이나 잠을 뒤척였는지 모른다.
"아, 아아아...!"
미르망은 생각했다. 이들은 모두 마왕군에 의해 듀라한이 될 뻔 했구나. 그리고 자신이 미약한 힘으로나마 이들을 구원했다는 것에 안도했다.
"부디 그곳에서는 안식을...어?"
시체밭에서 이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미르망은 바로 아래로 달려가 시체들을 옆으로 치웠다.
"힉?!"
대량으로 묻다가 실수라도 한 걸까? 머리달린 시체가 몇 구 보이기 시작했다. 미르망은 몇몇 낯이 익은 이들을 보며 오한이 들었다.
"어, 어째서...?"
미르망은 이해할 수 없었다. 죽은 이들은 하나같이 웃는 얼굴로 죽어있었다. 아니, 웃는 얼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웃고 있었다.
마치, 쾌락의 절정에 가버린 듯한-
"실성...?"
미르망은 머릿속에 떠오른 추잡한 가능성을 지워버렸다. 하지만 자신의 남편이 그렇게 죽었다는 걸 생각하니, 그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여기에 있는 시체들은 모두 복상사로 살해당한 건가? 그래서 일부러 얼굴 표정을 숨기게 하기 위해 목을 자른 건가? 하나같이 죄다 침을 질질 흘리며 '부히이이잇!'하는 짐승같은 쾌락의 신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모습에 미르망은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올렸다.
"여신이시여...."
이들이 어떻게 죽었는 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 고통 속에서 죽었으리라. 미르망은 영지를 위해, 백작가를 위해 일해준 사람들을 위해 신성력을 일으켰다.
"......."
삽. 은빛으로 반짝이는 삽을 들어올린 미르망은 요새의 안에 구멍을 파기 시작했다. 연약하고 갸냘픈 손목으로, 옷에 흙먼지가 묻는 것 조차 신경쓰지 않고 수많은 구멍을 파기 시작했다. 직사각형처럼 생긴 구멍은 마치 흙으로 된 관이라도 되는 것만 같았다.
"......."
미르망은 시체밭의 시체를 한 구 씩 꺼내 몸통을 집어넣었다. 양손에 V자를 하며 죽은 이들의 팔을 가지런히 모아, 가슴깨에 올려 기도를 올리는 자세로 다시 흙속에 묻었다.
"죄송해요...여러분. 여러분 대신에."
미르망은 삽으로 시신 위에 흙을 덮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복수할...게요...!"
* * *
새로운 존재가 성검의 용사가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성검의 용사가 먼저 그인지 그녀인지부터 확인했다.
“뭐?! 성검의 용사가 과부에 미망인이라고?! 심지어 청초 거유의 긴생머리?! 심지어 신성력으로 만들어낸 백마를 타고 있다는 말이더냐?!”
“왜 그렇게 신났어? 혹시 꼴렸어?”
“크으으...그냥 미망인이라면 내버려두려고 했는데 과부용사라니. 괘씸해서 용서할 수 없다. 지아비를 찾아오겠다는 데 내가 기대를 저버릴 수 없지.”
“지아비 성에다가 갔다 버렸잖아. 근데 무슨 지아비같은 소리야?”
“용사들 지아비는 이걸로 정해져있거든.”
“개소리죠?”
그레모리는 내 자지를 향해 침을 뱉었다. 나는 그 건방진 행동에 그레모리의 머리를 잡고 아래로 내려, 자신이 뱉은 침을 다시 가져가게 만들었다.
“우웁, 야! 상대는 복수귀라고! 지금 아무 말도 들어오지 않는 상태란 말이야!”
“뒤에 백작령의 병사들이 따라붙더냐?”
“...그건 아닌데?”
“그럼 혼자서 폭주하는 경우로군. 그럼 우리 승리다.”
성검의 용사는 용사와 주변을 받쳐주는 이들이 있을 때 비로소 강한 법이다. 아무리 성검의 용사라고 한들, 신성력을 사용하는 정도로는 우리를 이길 수 없다.
“잠깐만. 사수좌가 몇 번째 별자리였지?”
“무슨 소리야?”
“잠깐만 기다려보거라...음….”
아홉번째. 천칭자리-리브라와 게자리-칸세르의 다음이 사수자리-사지타리우스다.
그러므로 미르망 인 사지타리우스는 트랄, 성녀와 조우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까딱 잘못하다가는 성녀와 편을 먹을 가능성이 높다.
마족에 대한 복수.
나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성녀라면 분명 미르망을 살살 꼬드겨 우리를 엿먹이기 위한 암살자로 기를게 뻔했다.
‘아니면 제 2의 레비즈로 만들거나.’
새로운 성기사단의 얼굴 마담으로 성검의 용사를 들인다. 그 얼마나 효과적인 선전 도구겠는가. 그리고 밤마다 침대로 불러 미르망을 위로하리라.
“그레모리야. 이 세계의 출산율 문제가 너무나도 심각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무슨 개소리야. 우리 군단에서만 낳는 알의 개수가 하루에 50개는 넘는데.”
“가임기의 여성 둘이 서로 부비적거리기만 한다면 아이가 나온다더냐?”
“미친 소리 할 거면 그 년한테나 해. 서로서로 자기 할 말 하고 아주 좋겠네.”
나는 그레모리의 입보지에 박아 다시 그녀를 입닥치게 만들었다. 아무리 불가피한 상황이었다고 한들, 기껏 점령한 엡실론 요새를 빼앗긴 패전의 책임은 져야했다.
“미르망을 성녀에게 보빔당하게 내버려 둘 수 없지. 트랄에게는 내어줄 수 있다만, 미안하지만 내가 알게 된 이상 양보 못한다.”
기회가 왔을 때 챙기지 않으면 머저리일뿐.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분명 알로켄 던전으로 올텐데.”
“던전으로 오면 던전에서 맞이해야지. 걱정마라. 알로켄 던전에서 맞이해서 알로켄 던전에서 끝장을 내어놓을 것이니.”
그레모리 던전으로 넘어올 필요도 없다. 성검의 용사들 평균 전력을 알게 된 이상, 트랄 급의 존재가 아니라면 용사라도 나를 이길 수는 없다.
더군다나 이제 갓 성검의 주인이 된 존재. 전투 경험도 그다지 없어보이는 과부용사가 나를, 우리를 이길 리는 없다. 승리는 따놓은 당상일 뿐이다.
“그런데 그레모리야. 혹시 어떻게 미르망이 성검을 각성했는지는 아느냐?”
“메어리한테 물어보면 되는 거 아니야?”
“메어리 지금 마르코시아스 던전에 불꽃놀이 하느라 바쁘다. 그리고 성검 각성 조건은 다른 이들에게 비밀이다. 남들에게 누설할 수 있을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야.”
성검 비르고는 나와 메어리 부녀를 상대로 계약을 맺으며, 내게 ‘순결한 처녀’만이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숨겨달라고 간청했다.
아무리 비르고라고 한들, 자신이 아닌 다른 성검의 각성 조건을 말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유사 이래 다섯 번 나올까 말까한 성검, 사지타리우스라면 더더욱.
“성검의 각성 조건은 복수인 건가.”
“쳇, 용사 새끼들 마음에 안 들어. 결국에 백작이 뒤진 것도 우리 군단의 던전을 공격했으니까 그런 거 아니야?”
“그렇지. 안 그랬으면 우리 군단에 용맹한 트롤 전사들이 들어왔을 수도 있으니.”
미노타우르스들 처럼 전투력이 출중하고 자지도 튼실하면 나는 얼마든지 군단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사지타리우스 백작가와 로도페리가 그들을 덮치는 바람에 트롤은 영원히 우리 군단과 이별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레모리야, 그것은 바로 ‘복수의 연쇄작용’이라고 하는 것이다. 은원은 계속 이어지는 법이며, 복수는 새로운 복수를 낳는 법이지.”
“그래서 어쩔 거야. 놈 하고 싶은 대로 그냥 내버려 둘 거야?”
“아니. 이 기회에 미르망을 상대로 한 가지 실험을 해보도록 하지.”
샤이탄과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며 새로운 실험을 하나 해보기로 했다. 그를 위해서는 우선 문제의 용사, <미르망 인 사지타리우스>를 붙잡을 필요가 있었다.
“나는 실험의 준비를 하겠다. 그레모리, 너희는 그 년을 붙잡아 내게 데려와다오.”
“제정신이야? 우리 신성력에 노출되면 가버린다니까? 너 혹시 마석 낭비하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지?”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얘기했잖냐. 나는 실험의 준비를 하는 동안, ‘너희’는 용사를 사로잡으라고.”
말의 뉘앙스는 엄연히 달랐다. 그레모리는 자신의 사단을 내가 말하는 줄 알았으나, 실상은 단 한 명의 존재를 가리키고 있었다.
“용사는 때려잡을 것이다. 너희는 기절한 용사를 잡아오면 돼.”
나 이외에 우리 군단에서 일인군단 소리를 들을만한 존재. 에일라가 라스베가스 시장의 자리에서 잠시 벗어나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동안, 라스베가스를 지키기로 한 우리 군단 최강의 존재.
“우리에게는 루나가 있다.”
***
<그 시각, 분노의 군단.>
분노의 군단에서 군단장의 여인들은 대놓고 섹스를 하며 알몸을 보이지만, 그 어떤 존재도 그들을 만질 수 없다.
라스푸틴의 여인을 건드리는 자, 라스푸틴의 엄벌을 받으리라.
군단 대부분의 존재들은 한 때 아더나 그에이가 그랬던 것처럼 라스푸틴이 잠시나마 은총을 내려주기를 속으로는 바라고 있으나, 이제는 어느 순간부터 포기하고 제 분수에 맞는 상대와 한 침대에서 뒹굴었다.
"...완성했습니다."
하지만 여기, 유일하게 군단장의 여인들을 만지는 것이 허락된 존재가 있다. 군단장의 몽둥이가 들어갈 가장 은밀한 곳은 당연히 안 되지만, 그외에 허리나 허벅지, 심지어 가슴조차도 만질 수 있는 유일한 존재.
"루나 여왕님, 끝났습니다."
코스트 움 프레.
이제는 <코스프레>라고 불리우는 늙은 남자는 군단 내에서 몇 안 되는, 언터쳐블과도 같은 존재다. 엘프들에게 입히는 스타킹을 만든 것으로 <스타킹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그는 라스푸틴의 여인의 허락하에, 육체게 손을 댈 수 있는 유일한 남성이었다.
"흠...기다려봐. 이거 어때?"
"아름다우십니다, 여왕님."
"그럼 이건?"
"그 또한 아름다우십니다, 여왕님."
"...그냥 아름답다고 하지말고 구체적으로 평가를 내려보는 건?"
"저는 만드는 자. 평가에 대한 권한은 제게 없습니다. 평가를 내려주시는 분은 그 분이지, 제가 감히 함부로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코스프레는 남자이기 전에 한 명의 디자이너였다.
그저 한낱 방적공이었던 그가 라스푸틴의 아래에서 디자이너로서 숨겨진 재능을 마음껏 뽐내게 되었고, 그는 라스푸틴의 여인들 앞에서는 남자이기 이전에 장인이었다.
"하지만 제 스스로 자평하자면...흐흐흐. 분명 군단장님께서는 꼴리실 겁니다."
정정. 디자이너이자 변태였다. 변태라는 이름의 신사이자, 특이한 패티시를 가지고 있어 라스푸틴과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직접 만질 수 있었다.
"흐흐흐. 기대가 되는 군요. 여왕님께서 그 옷을 입고 군단장님 아래에 개처럼 박히게 되는 모습이...! 아아, 그 생각만 하며 한 땀 한 땀 잠도 자지 않고 만들었지요!"
"새삼스럽지만 너도 참 만만찮은 변태구나?"
"변태라고 하셔도 좋습니다! 전 세계의 여인들에게 스타킹을 입히는 그 날 까지, 저는 죽을 수 없습니다. 크흐흐."
"...그래, 그래. 덕분에 나도 여왕답게 나설 수 있게 되었어. 고마워. 엘프젖이라도 조금 짜줄까?"
"?"
코스프레는 정색한 얼굴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루나의 가슴을 빤히 쳐다보는 그의 얼굴에는 경멸과 역겨움이 묻어나있었다.
"제가 왜 그딴 걸 마십니까?"
"야! 내 거 말고 다른 애들 거!"
"그러니까 그걸 왜 마십니까?"
"이게 진짜?!"
루나는 얼굴을 붉히며 화를 냈다.
"엘프젖이 얼마나 좋은 지 모르지?! 그 자식 내 젖통 아래에 얼굴 깔면 한 시간은 쯉쯉거리면서 헤어나오질 못한다고!"
"그런 건 필요없습니다. 요즘 그린엘프들이 와줘서 필요없습니다?"
"...흐흐흥, 그린엘프들이랑 퓻퓻하는구나? 그, 민트초코맛이라는 걸 좋아하는 거지?"
"예? 모델로 서주는 덕분에 제작하기 편하다는 말이었습니다만."
루나는 입을 떡 벌리며 경악했다.
"너...혹시 고자니?"
"흠, 아직 이 나이지만 잘 섭니다. 여왕님께서는 뭔가 큰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군요."
코스프레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비릿하게 웃었다.
"저는 제 옷을 입은 여자들이 상황에 맞게 박히는 걸 보고 싶을 뿐입니다."
"......."
종족을 넘어, 상식이 통하지 않는 상대에 루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코스프레는 테이블에 놓인 컵 안에 든 따뜻한 차를 후룩 들이키며 옅게 웃었다.
"후후후...."
"......."
코스프레의 컵에는 녹색의 액체가 찰랑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