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5회
123일차
용사들의 대화는 끝났다.
트랄부터 시작하여 메어리에 이르기까지, 용사들은 ‘어떤 합의’를 본 것 같았다.
“또 나한테 말할 수 없는 용사들만의 대화지?”
“네. 죄송해요, 매 번. 근데 이것 만큼은 어쩔 수 없어요.”
“이해한다. 메어리 너나 트랄이나 나한테 이야기 할 수 있는 거라면 분명 진작에 얘기했겠지.”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모종의 이유로도 말할 수 없기에 말하지 않는 것이지, 나를 엿먹이기 위해 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번엔 또 무슨 이야기를 한 거예요?”
“안 알려줌!”
“성녀는 몰라도 되는 일이야.”
“굳이 알 필요가 없다.”
다행이라면 성녀에게는 용사들이 일부러 약올리듯 알려주지 않는다는 점. 나는 괜히 성녀를 상대로 한 점 따낸 것 같은 기분에 어깨가 으쓱거렸다.
“알려드릴 수 있는 건 말씀드릴게요. 제가 성검의 위치를 알려줬어요.”
“으잉?”
“성검 레오의 주인이 성검 비르고의 주인이 어디에 있는지 위치를 알고 있듯이, 성검 비르고의 주인도 성검 리브라의 주인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어요.”
“그걸 왜 얘기 안했…. 크흠, 그것도 지금까지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을테지? 이해한다, 메어리. 오해하지마라, 나는 화를 낸 게 아니야.”
화를 낸 것이 아니라 어이가 없었을 뿐이다. 설령 화를 냈다고 한들 그건 메어리에게 화를 낸 게 아니라 성검에 이런 장치를 해둔 누군가에게 화를 낸 것이다.
“괜찮아요. 이건 새발의 피에 불과하니까.”
“...나 왠지 지금 살짝 분노가 치밀어오르려 하고 있어.”
“이해해다오, 형제여. 형제도 성검의 주인이 된다면 분명 우리를 이해할 것이다. 메어리의 잘못이 아니다.”
“그래. 안다. 이제는 진정 좀 했으니까 이야기 계속 해봐.”
어떤 정보를 알려주든 나는 진정하기로 했다. 어떤 놀라운 사실을 말하든 놀라지 않기로 했다.
“성검 리브라의 소재를 알았으니 이제 우리는 떠날 걸세.”
“미친 소리. 뒤지고 싶냐?”
나도 모르게 쌍욕이 튀어나왔다. 트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몇 개월 만에 만났는데 그냥 가겠다고? 지금 장난하냐?”
“장난이 아닐세, 형제여. 나도 형제와 모닥불을 피워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지금은 그게 불가능하네.”
“왜?!”
“상황이 지금 좋지 않게 되었어요. 아빠, 아리에스 변경백이 지키고 있는 대방벽에 대해 아세요?”
알다마다. 내가 포르네우스 던전에서 에일라를 포로로 잡아 떡치면서 얻은 정보 중에는 백작령에 관한 정보도 있었다. 포르네우스는 귀담아 듣지 않았지만, 나는 그 정보를 아직 잊지 않았다.
“성검의 용사인 아리에스 가문이 수 백년 동안 지켜온 난공불락의 성벽이 아닌가?”
“그 성벽이 지금 무너지기 직전이에요.”
“아리에스의 별이 졌다네, 형제여. 변경백이 죽었다는 것이지.”
움찔. 나는 절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그게 무슨 말인가? 성검의 용사가 죽어? 왜?”
“모르겠네. 자세한 건 우리도 파악해봐야 알겠지만, 우리는 동시에 성검 아리에스의 소실을 느꼈네.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기 보다는...아마도 ‘계승’이 이루어진 듯 한데.”
“아빠, 아리에스는 1인 전승이에요. 가문의 핏줄 누군가가 성검을 이어받으면 그 전대의 사용자는 수명이 다하게 되죠. ...아시겠죠?”
“.......”
짐작가는 바가 있다. 아니, 짐작이 가다 못해 나는 심증만으로도 확신할 수 있다. 트랄의 언질과 메어리의 암시로 나는 그만 한 가지 가능성을 생각하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장인어른.’
언젠가 백작령에 가게 된다면 최고급 와인을 가져가 무덤에 뿌리리라.
변경백의 소실에는 분명 내가 뭔가를 저지른 게 틀림없다. 나와 에일라가 한 어떤 행위가 아리에스 변경백의 소실로 이어진 게 틀림없다. 알았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봤을 것이다.
“...그런데 변경백의 죽음이랑 너희들이 당장 떠나야 하는 상관관계가 뭐지?”
“변경백의 죽음을 알아챈 건 우리 뿐만이 아니라는 거지.”
“백작령은 마왕군과 인류 연합 사이의 또다른 전선이에요. 인류연합을 기준으로 이곳을 후방이라고 한다면, 백작령은 편대에 있어서 좌익에 해당하는 위치죠. 방벽 너머에 있는 마족들이 금방 눈치챌, 아니 이미 눈치를 챘을 거예요.”
멀리 있는 성검의 용사들조차 변경백의 소실을 느꼈는데, 당장 백작가와 전투 중인 인근 마왕군은 오죽할까.
“파국이군. 그거랑 너희들이 지금 떠나야 하는 걸 생각해보면….”
“인류연합과 마왕군의 전쟁이 더 격화된다는 거지. 최전선이 더 넓어지는 것과 동시에, 마왕군이 더 득세하게 될 것이다. 그럼 우리가 움직일 운신의 폭도 좁아져. 성검을 모두 각성시키기 전에 마왕군과의 전쟁에 뛰어들어야 할 수도 있다.”
“트랄, 너는 마왕군과 척을 지려고 하는 건 아니지?”
“형제여. 나는 형제의 편이다. 하지만 다른 용사들은 사정이 다르다. 사실 지금 이렇게 여기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조금….”
“......젠장, 그 놈의 시간.”
트랄에게 나의 원대한 계획을 말해주고 싶건만.
트랄에게 나의 여자들을 소개해주고 싶건만.
트랄이 가는 길 편히 갈 수 있도록 입을 옷과 먹을 것들을 넉넉하게 싸주고 싶건만.
무엇보다도 포-스가 넘치는 성녀를 조심하라고 일러주고 싶건만, 트랄은 당장 던전을 떠나고 싶어했다.
“...솔직히 조금 야속하군. 만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떠나가려 한다니 말이야.”
“형제여, 나도 안타깝다. 마음같아서는 이 성검을 당장에라도 집어던지고 형제와 다시 함께하고 싶으나, 내게는 사명이 하나 있다네. 그리고 그 사명은 궁극적으로 형제를 돕기 위한 것이지.”
“내 옆에서 도와주면 안 되냐?”
“예전처럼 지내기에는 이미 나도 형제도 많이 변해버렸어. 형제도 느끼고 있지 않나? 나도 마음같아선 형제를 직접 데려가고 싶다는 것을.”
“......그래.”
트랄은 성검의 용사다. 세계 곳곳을 방랑하며 무언가 사명을 이루어야만 한다.
하지만 나는 던전의 주인이다. 던전이라는 곳에 정착하여, 보금자리를 확장시키고 가꾸어나가야 하는 존재다.
라스푸틴의 이름을, 아스타로트로서의 명예를, 던전 주인으로서 모든 것을 내던지고 트랄과 함께 한다?
‘그건 안 되지.’
떠나야만 하는 자. 그리고 제자리에 멈춰있어야만 하는 자. 트랄과 나 사이에는 이미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지점이 생겨버렸다. 그리고 그건 서로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이었다.
“......그래. 살아있다는 걸 안 것 만으로도 나는 세상에 대한 분노를 조금 삭힐 수 있었다. 살아있어줘서 고맙다, 트랄.”
“형제가 이야기하지 않았나. 포르네우스 발밑에서 굴러도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그리고 영원히 헤어지는 것도 아니야. 일이 끝나면 다시 만날 수 있다네.”
트랄은 두 팔을 벌리며 내 던전을 가리켰다.
“형제여, 설마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던전이 점령당하거나 하지는 않겠지? 내가 아는 형제의 던전은 이곳 뿐이라네.”
“모르지. 지금 나보다 더 높은 윗대가리들 던전 다 빼앗아서 여기서 이사를 갈 지. 흐흐, 만약 그렇게 되면 이 녀석을 찾아와라.”
나는 메어리의 어깨를 붙잡았다.
“성검 레오의 주인이 메어리의 위치를 알 것 아닌가?”
“그래. 그리 하도록 하지. 형제는...자, 여기. 이걸 받으시게.”
트랄은 허공에 손을 집어넣어 내게 소의 뿔처럼 생긴 물건을 건넸다.
"아공간?"
"숙련된 용사들의 기본이지. 자, 받게."
"......더럽게 크네."
양손으로 잡아도 다 못잡을 정도로 두껍다. 4성 미노타우르스들의 뿔보다 더 단단하고 날카로운 듯한 뿔에 나는 위화감을 느꼈다.
“이거 드래곤뿔인가?”
“성검을 지키고 있던 황소 골렘의 뿔일세. 나와 비슷한 수준의 전투력이었으니...던전 식으로 치면 ★★★★★짜리 소재인 셈이지."
“어우야.”
세상 사람들에게 외치고 싶다. 트랄은 이런 존재다. 5성급 존재의 소재를 아무 망설임없이 주는 대인배다.
“트랄, 잠깐 손을 내게 뻗어봐라.”
“손을?”
“그래.”
나는 트랄이 내민 손등 위에 내 손등을 마주대었다. 트랄과 내 손등이 부딪히자, 내 몸의 문신이 반짝이기 시작하며 트랄에게로 오라가 깃들기 시작했다.
“승리를. 명예를. 그 어떤 죽음과 역경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그리고 살아서 내게로 돌아올 그 날 까지 죽거나 다치지 말고 그 사명을 반드시 이루기를. 나의 간절한 기도는 붉은 오라가 되어 트랄의 손등에 새겨졌다. 트랄의 손등에는 각각 기하학적인 무늬가 붉은 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멋지구나, 형제여.”
“...원작자는 따로 있지만.”
솔로몬의 일곱 인장 중 세 개를 섞어 트랄에게 가호를 집어넣었다.
“마족에게 있어서 최고의 버프지. 효과는 직접 느껴봐라.”
분노, 오만, 그리고 색욕. 마지막은 조금 찝찝하기는 하지만, 트랄과 트랄 주변에서 트랄을 노리고 있는 두 용사를 위한 서비스같은 느낌으로 나는 세 가지 인장의 축복을 걸었다.
이름은 거창하지만 실제 효과는 내가 사용하는 문신의 버프와 크게 다를 게 없다. 성검의 버프보다 효과가 약할 지도 모른다.
“오크가 오크에게 걸어준 기원이다. 그 어떤 기도도 이보다 더 강하지 않을 것이다.”
“형제여, 그대의 뜻은 충분히 느꼈네. 너무나도 값진 것을 받아 괜히 쑥쓰럽군.”
“아무렴 나만할까? 나는 네가 죽었다고만 생각했었다. 다시 이렇게 살아서 이야기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지. 꿈에서도...아니, 아니다.”
잡담은 끝났다. 나는 트랄이 정한 마지노선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앞으로 고작 1분.
“...트랄, 성녀를 조심해라. 저 년은 너를 약으로 재워서 밤에 몰래 덮칠 년이야. 항상 제미니나 칸세르, 또는 레오 든 어떤 여자든 같은 침대에서 자면서 강간 당하지 않도록 조심해라. 너는 강하지만 너무 둔하고 순진해. 성녀가 끼부리고 있으면 그냥 무시하고 씹어버려라. 알겠지?”
“내가 어린 아이도 아니건만, 형제는 여전히 걱정이 많군.”
“아무렴 근손실 난다고 딸도 안 치던 녀석인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할 수 있겠냐. 너같은 놈이 미인계에 그렇게 당하기 쉽다더라. 조심해, 알겠냐?”
“흐흐, 물론이지. 알고 있잖나. 나는 나보다 강한 여자 이외에는 관심이 없다고.”
“그래, 그렇지. 그래야 트랄이지.”
시간이 되었다. 트랄은 내게 손을 건넸고, 나는 트랄과 손을 맞잡았다.
“매정한 새끼. 진짜 가냐.”
“남아있으면 형제가 온갖 방법으로 나를 던전에 남기려고 할 것 아닌가.”
“그래, 이 썩을 놈아.”
관우에게 적토마를 준 조조의 심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아, 이것이 회자정리인 것인가.”
만났지만 금세 헤어지게 되었다. 난 싱숭생숭한 마음에 좀처럼 손을 놓을 수 없었다.
“트랄. 내가 계속 미련이 남을까봐 지금 손을 놓는다. 지금이 아니면...좀 추하게 붙잡으려고 할 것 같거든.”
“전장을 향해 떠나려는 전사의 옷깃을 잡는 것 만큼 멋없는 것이 없지. 형제여, 그대는 내가 아는 오크 중 최고로 멋진 전사다.”
“씨발, 괜히 돌려 말하기는.”
“진심이다, 형제여.”
트랄과 손을 놓은 나는 트랄과 주먹을 맞부딪혔다. 이것이 사실상 나와 트랄의 마지막 인사였다.
“배웅 안한다, 새끼야. 한 시간만 더 늦게 나간다고 했으면 내가 맨발로 던전 입구까지 배웅했을 거다.”
“지금의 한 시간을 당겨, 추후 이곳으로 돌아오는 시간을 사흘 당겨보도록 하지. 형제여, 떠나기 전에 부탁 하나만 하고 가도 되겠는가?”
트랄이 용사들의 옆에 섰다. 성녀를 비롯한 이들은 다시 던전의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내가 이 던전에 돌아오는 날, 나의 방을 안내해줬으면 하는 군.”
“...흐흐흐. 던전의 한 층을 통째로 넘겨주마. 네 아내들이 마음껏 누릴 수 있도록 말이야.”
아예 트랄을 위해서 던전을 하나 내어줄 수도 있다.
"언제든지 돌아와라."
나는 트랄을 배웅했다. 몇달 만에 만난 형제는 아무런 이유도 남겨주지 않은 채, 다시 떠나버렸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르다.
"나는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마."
거자필반.
살아만 있다면, 지금은 헤어지더라도 언젠가 다시 꼭 만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