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4회
123일차 샤이탄이 시간을 벌어달라고 한 순간, 나는 어떻게든 된다는 것만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 효과는 아주 제대로 먹혀들었다.
샤이탄이 끌고 온 레비즈는 구속복에 갇혀있었지만 사지가 멀쩡히 달려있었고, 나는 성녀를 계속 정신없게 만들어 위기를 모면했다.
‘의심하겠지만 별 수 있나.’
성녀는 레비즈를 ‘보겠다’고 했다. 그래서 보여줬다. 보여주기만 했다. 그녀가 레비즈라는 증거를 하프드래곤의 흔적으로 보였다.
‘근데 어떻게 사지를 붙였지?’
레비즈의 팔다리는 따로 보관을 한 것이 아니다.
슬라미아들의 포상이 되었고, 남은 부분은 라임이 말끔하게 먹어치웠다. 그래서 레비즈의 사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코스프레로부터 얻은 구속복을 제가 챙겼습니다.
아직까지 나는 성녀와 대치중이다. 그래서 시스템을 통해 샤이탄의 전언을 들었다.
-아스모딘이 나무 뿌리를 이용해 골격을 만들고, 루시펠이 촉수 자지를 휘감아 인체처럼 꾸몄습니다. 점액을 채운 타이즈를 입혀 형체를 갖췄습니다.
샤이탄이 말한 진실은 나로서는 끔찍하면서도 다행히다 싶었다. 내 예상대로 레비즈의 사지는 급조해낸 것이었다.
-눈속임은 한 번으로 끝날 겁니다. 나머지는 주인님께 맡기겠습니다.
“...크흠.”
메어리가 트랄을 비롯한 용사 일행을 데리고 던전 밖으로 나가버렸다. 결국 나는 성녀와 단 둘이 남아 대치하게 되었다.
“.......”
성녀는 팔짱을 낀 채 나를 하염없이 째려보기만했다.
자꾸 내 뒤의 포털을 흘깃거리는 것으로 보아, 분명 레비즈를 한 번 더 확인해보고 싶어하는 듯 했다. 어쩌면 직접 만져보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뭘 그렇게 뚫어져라 보는 거지? 하긴, 내 얼굴이 조금 잘 생겨야 말이지.”
“미친 새끼.”
“어이쿠, 트랄이 사라지자마자 바로 본색을 드러내는 것인가? 성녀라고 하더니 쌍년이 따로 없군.”
“빡빡이 돼지 새끼가 어디서 지랄이야?”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다. 성녀의 인성은 좋다고는 말할 수 없는, 아니 솔직히 말해서 인성이 박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포르네우스 같은 년.”
“뭐래, 대머리 새끼가.”
“...대머리 아니다.”
아직 원래 모습대로 자라나려면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풍성해질 미래가 확정되어 있는 남자로서, 나는 성녀가 대머리라고 날조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 레비즈를 그럴싸하게 꾸몄다고는 해도, 내게는 통하지 않아.”
“허어, 너도 보았을 텐데. 레비즈의 사지가 멀쩡히 붙어있는 것을.”
“사지가 멀쩡해도 오크에게 강간당했을 지 누가 알아? 레비즈는 처녀야. 처녀막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야겠어.”
“말 같지도 않을 소리를 하고 있군.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을 모르느냐? 레비즈가 엘프들을 강간했으니, 우리가 그 년을 강간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성녀는 잠시 말문이 막힌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나의 혀는 멈추지 않는다.
“타인의 의사도 묻지 않고 자신의 성욕만을 추구하며 강제로 성을 취하는 것에 대해서는 페어리도 분노할 것이다. 죄를 지은 이를 강한 힘으로 억누르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강한 여전사도 인정할 것이다. 마녀는 넘겨주지 않는다.”
“대머리 새끼가 말은 번지르르하게 잘 하네.”
“......다시 한 번 더 말하지만, 나는 대머리가 아니다. 지능이 딸리느냐?”
“그쪽은 머리카락이 딸려서 어떡해? 그 좆같은 면상 가릴려면 트랄처럼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녀야 할텐데.”
“트랄을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마라. 네깟 년이 감히 부를 이름이 아니다.”
“머리가 없으면 예의라도 있어야지 예의도 없네. 역시 트랄이 특별한 거야. 오크들은 죄다 머리 벗겨지고 배 나온 돼지 새끼들인가?”
“...아무래도 오크들에게 집단 윤간을 당해봐야 정신을 차릴 년이군.”
나는 시스템을 통해 샤이탄에게 오더를 넣었다. 당장 레비즈의 꿈속으로 들어가 머리 벗겨지고 배 나온 돼지 오크들에게 집단 윤간을 당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성녀여. 내가 신사답게 행동할 때 예의를 갖춰라. 너는 마왕군의 일곱 군단 중 하나, 분노의 군단장을 눈앞에 두고 있노라.”
“나는 여신의 대리인이야. 어디서 성녀를 그딴 눈깔로 쳐다봐? 전신에 흉측하게 문신이나 칠하고 다니고. 머리에는 왜 문신 안 깔았나? 그걸로 가리면 될텐데.”
“아가리 놀리는 솜씨가 아주 일품이군. 레비즈 보지 빨아주는 솜씨만큼이나 일품이야.”
“.......”
성녀는 침묵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행여나 들었을까봐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개같은 소리 하지마.”
“개같은 소리가 아니라 네가 개처럼 보지 빨아댔다는 소리지.”
“닥쳐, 대머리. 털이나 심어서 와.”
“아래쪽에 정글이 펼쳐진 것으로도 모자라 동굴입구까지 덤불로 덮여있을 년이 말이 많구나. 평소에 관리도 안 해서 분명 열대우림이 펼쳐진 게 틀림없어.”
성녀는 눈을 희번득 떴다. 나 또한 허리를 곧게 펴며 고개를 살짝 치켜들었다.
“뭐? 아니라고? 증거 보여보던가.”
“이 새끼 완전 개변태 아니야…?!”
“나는 내가 변태라는 것에 한치의 부끄러움도 없다! 흐하하!”
“그런 새끼가 지 머리 벗겨진 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내놓고 다니다니. 네가 낳을 자식들도 분명 머리 벗겨진 놈들일 게 분명해.”
죽일까. 용사들이 없는 사이에 성녀를 덮쳐, 레비즈의 옆에 살포시 놓는 방법도 있다.
‘근데 아무 정보도 안 뜨니까 그게 문제야.’
이름도 보이지 않는다. 등급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레벨 조차 ??로 표시될 뿐, 성녀가 얼마나 강한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세 자리 아닌 거 봐서는 일단 99레벨 이하라는 건데.’
괜히 나보다 강한 존재라고 한다면 괜히 내가 피해를 보게 된다. 성녀에게서 딱히 강함은 느껴지지 않지만, 트랄이 성녀와 나를 단 둘만 남겨두고 떠났다는 것에 나는 쉽게 성녀를 건드리지 못했다.
트랄이 내가 성녀를 해코지하지 않을 거라 믿고 있을 거라는 것.
트랄이 내가 성녀를 해코지하지 ‘못 할’ 거라고 믿고 있을 거라는 것.
트랄은 나를 믿음과 동시에 성녀 또한 믿고 있는 듯 했다. 나와 싸웠을 때 나에게 쉽게 깔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그녀에 대한 적의를 잠시 억눌렀다.
“...성녀여. 네 년은 트랄 덕분에 산 줄 알아라.”
“너야말로 트랄 때문에 산 줄 알아.”
트랄만 아니면 바로 조져버릴텐데.
물리적으로 조질 방법이 없으니, 계속 입을 놀려야 했다. 키보드 워리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싸움은 꼭 피와 살이 낭자하는 전쟁만 있는 게 아니다.
“너 같은 년이 트랄을 마음에 품다니. 여신께서 통탄할 노릇이로다."
"대머리 주제에 여신님을 들먹이지마. 남이사 누굴 마음에 품든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네가 트랄의 뭐라도 돼?"
"형제!"
이것만큼은 당당히 얘기할 수 있다.
내가 오크로 태어나서 오크인 걸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타이틀, 트랄의 형제라는 것이다.
"같은 던전에서 자란 친우임과 동시에 함께 동고동락하며 수많은 전장을 넘어온 전우다. 네 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오랜 세월을 함께 해왔지."
"흥, 고작 함께한 시간 정도로 자랑하는 거야? 그딴 시간보다 얼마나 더 찐하게 지냈는 지가 중요하다고."
"트랄 손도 못 잡아봤을 년이. 그런다고 네가 트랄 좆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이, 이 새끼 미친 거 아니야?!"
성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러는 너야말로 트랄 거 잡을 수 있어?!"
"미쳤냐? 형제끼리 그러는 거 아니다. 트랄이 여자라면 모를까."
트랄이 여자 오크가 되면 분명 랜슬롯 이상의 미인이 될 게 분명하다.
"내가 이 세계에 태어나서 두 번째로 아쉬운 것이 있다면, 트랄이 왜 여자가 아니냐는 것이다!"
남자 트랄을 상대로 좆을 잡을 수는 없을지라도, 여자 트랄이라면 분명 내 동정은 진작 포르네우스 던전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너, 너 그거 트랄 앞에서도 얘기할 수 있어?!"
"물론! 당당히 얘기할 수 있다. 트랄이니까! 만약 트랄이 여자가 되어 섹스를 해야만 남자로 돌아올 수 있는 저주에 걸린다면, 나는 얼마든지 자지를 세워 꼽을 각오가 되어있노라!!"
아무리 성녀라고 한들 나의 진심에는 이길 수 없다.
"그런데 트랄 얼굴에 반한 골빈 년에게 트랄을 내어줄 수는 없지."
"흥. 네가 아무리 그딴 말을 지껄여봐야 소용없어."
성녀는 용사들이 떠난 곳을 슬쩍 눈으로 살폈다. 얼마나 대화가 길게 이어지고 있는 지는 모르지만, 아직 그들이 돌아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여신께서 말씀하셨지."
성녀가 천장을 향해 검지를 치켜들었다.
"트랄을 따먹으라고."
"뭐...라고…?"
"성검의 용사이자 강인한 전사의 씨를 배에 품으라고. 그리고 나의 뱃속에서 자란 자식이 세계를 구하고 이 땅에 자리잡은 모든 마족을 쓰러뜨릴 용사, <대영웅>이 될 거라고 하셨어."
"이...미친…?"
잠시 뇌가 정지했다.
"여신께서 오크의 아이를 가지라고 신탁을 내리셨단 말이냐! 그럴 리가-"
있다. 그래서 더 소름이 돋았다.
"아니지! 여, 여신 교단은 이종간이 금지되어 있는 곳이다! 그런데 여신의 뜻을 따르는 성녀가 교리를 어기고 금기를 범하다니!"
"그건 여신의 진실된 말씀조차 제대로 듣지 못하는 자들이 멋대로 왜곡하고 곡해한 거야! 자기들 좋을대로 교리를 세운 거지! 그걸 어기는 자들을 이단이라고 몰아세워서 죽이고!"
성녀는 두 손을 가슴 앞에 가지런히 모았다.
신성력을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지만, 그녀의 몸에는 성스러운 아우라와 기품이 흘러넘쳤다.
"처음에는 나도 의문을 품었지. 나는 인간인데 오크에게 안기라니. 하지만 틀렸어! 나의 믿음을 여신께서는 시험하신 거야. 사랑하지 않는 자들끼리 어찌 서로 살을 섞으라고 하실 수 있겠어!"
"크윽!"
반박할 수 없다. 사랑이 없는 섹스는 라스가 아니다. 나의 정체성이자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이론을 성녀가 읊고 있으니, 나는 그 어떤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아아, 그래! 여신께서는 알고 계셨던 거야! 내가 트랄에게 사랑이 빠질 거라는 것을!"
"이런...개…."
"사랑하는 남자의 씨를 가지고 싶다. 사랑에 빠진 여자로서 당연한 거 아니겠어?"
"......그것이 정녕 여신의 뜻이란 말인가?"
내가 아는 여신이라면 충분히 그런 신탁을 내릴 것 같아서, 나는 여신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말...저 년이 내 제수가 되어야 한다고?”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여신을 버리고 마왕을 지지할 것이다. 아니, 마왕조차 넘어서서 내가 여신을 따먹을 것이다.
“그럴 바에는….”
***
<그 시각, 던전 바깥 라스촌.>
“알겠어요. 당신에게 내려진 신탁이 그런 거라면, 제가 반대할 이유는 없죠.”
“비르고는 말이 통해서 좋아!”
“다행이야...레오 처럼 막무가내같은 녀석이 아니라서.”
두 페어리는 비르고, 메어리가 신탁에 따르기로 한 것에 안심했다. 특히 은발의 페어리는 더 깊게 안도했다.
“비르고까지 적으로 돌아서면 어쩌나싶었어.”
“흥, 적이 되면 싸워서 이길 뿐이다. 애초에 거짓된 자를 따르는 자들이 아닌가?”
“칸세르여, 그들은 거짓된 자를 따르는 것이 아니야. 성검의 용사에게 그 누가 감히 명령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여신의 ‘부탁’을 듣는 입장이지, 무조건 명령을 따르는 자들이 아니란 걸 잊지 말게.”
“흥….”
칸세르를 호되게 나무란 트랄은 메어리와 시선을 맞췄다.
“그대는 부디 형제의 옆에서 형제를 지켜주시게.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그대는 개인적인 욕망을 잠시 억누르고 형제를 지켜줘야 할 것이야. 믿어도 되겠는가?”
“당연하죠. 사랑하는 아빠를 제가 안 지키면 누가 지키겠어요?”
“사랑하는, 히히힛!”
“처녀성의 성검이…. 하아.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용사들은 이야기를 끝냈다. 서로에 대한 안부를 나눔과 동시에, 이제는 헤어질 때가 되었다. 메어리는 성검을 치켜들어 아주 작은 버지니움 실드를 하나 만들어냈다.
“이걸 따라가세요. 버지니움 실드가 가리키는 곳에 다음 성검, <리브라>가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리브라? 바로 옆 영지 아냐. 절벽이랑 산맥 쭉 넘어가야 하는 곳.”
“붙어있지만 사실상 엄청 먼 곳이에요. 공간이동 포털을 이용하면 몇 달은 걸리게 되겠죠. ...조금 아쉽네요. 삼촌과 다시 헤어져야 한다니.”
“형제도 이해할 걸세. 내가 이렇게 성검의 용사로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모든 것은 형제를 위한 것이니.”
트랄은 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붉은색과 녹색의 실이 함께 어우러진 장식을 메어리의 목에 조심스레 걸었다.
“나 대신 그대가 형제를 지켜다오. 설령 죽는 한이 있다고 한들...그를 지켜야 할 것이야.”
“걱정마요. 저 아빠만 안 죽으면 부활 가능하니까. 후후후.”
“그래. ...인류와 마족, 그리고 세계를 지키고 이어나갈 <대영웅>을 위하여.”
트랄이 두 손을 모았다. 메어리 또한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세계를 멸망에 빠뜨릴 <대마왕>의 탄생을 막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