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비만 오크-503화 (502/800)

503회

123일차

좆됐다.

그냥 좆 된 수준이 아니라, 아주 개같이 좆됐다.

'트랄은 괜찮아.'

트랄은 던전에서의 생활이 오래 되었기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사지를 잘라 고문하는 것 정도는 포르네우스 던전에서도 깜찍한 축에 속하는 편이었기에, 트랄까지는 괜찮다.

'하지만 다른 용사들은?'

같은 성별끼리만 느끼는 감수성 같은 것이 있다.

종족을 불문하고 아래 급소를 얻어맞는 장면을 보면 자신도 고통을 느끼는 것 마냥 환상통을 느끼듯, 사지가 없어진 레비즈와 다른 용사들은 같은 여성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묶여있다.

'우리 던전 안에서도 레비즈를 보고 조금 꺼리는 애들도 있어.'

그런데 던전의 일원도 아닌 자들이 사지가 잘려 알 낳는 기계가 된 레비즈를 보면 과연 어떤 생각을 할까.

'나를 죽이려고 드는 건 괜찮다. 하지만 트랄에게 피해가 가서는 안 돼.'

그림이 그려진다. 성녀의 앞에 자랑스럽게 레비즈를 내놓는 순간, 성녀가 나를 공격하려고 들 것이다.

'나는 메어리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트랄은?'

트랄이 성녀를 막아설 것이며, 두 용사는 트랄을 제압하려고 들 것이다. 내가 두 용사와 성녀를 동시에 상대하는 한이 있더라도, 트랄에게는 피해가 가서는 안 된다.

"뭘 생각하는 거죠? 말 해요! 지금 무슨 생각을 했죠?!"

"서, 성녀 님을 생각했...아니, 잠깐만. 우리 근데 어디서 만나지 않았나?"

자꾸 가까이에서 얼굴을 보니 뭔가 익숙하다. 기억이 날랑말랑하여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게 된다. 분명 어디선가 마주친 얼굴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고 그래요. 빨리 레비즈를 보여주세요. 여신께서 돌려 말하신 신탁을 한 번 직설적으로 읊어볼까요? 레비즈가 지금 오크에게 강간당해서 알을 낳고 있다고 하셨다고요. 심지어 사지가 잘린 상태로!"

"와, 그건 심하다!"

"진짜면 엄청 실망."

"여자의 적이로군."

용사들은 바로 나에게 실망감과 적의를 드러냈다. 이 분위기를 반전시키려면 뭔가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 걱정마십시오, 주인님.

"...응?"

- 저희의 힘으로 해결 가능합니다. 잠깐만 시간을 끌어주십시오.

"......좋다. 보여주기만 하면 되는 건가?"

나는 의연한 자세를 취했다. 시간을 끌라고 했으니 내게 주어진 임무는 증원이 올 때 까지 버티는 것.

"하지만 지금은 안 된다. 레비즈가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우리는 지금 전쟁 중이기 때문이다."

"인류연합과의 전쟁이라면-"

"아니. 우리는 다른 마족들과 지금 전투 중이다."

변명거리가 생겼다. 내 말에 트랄은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지금 투쟁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래. 쟁탈전. 던전 주인끼리 서로의 등수를 걸고 싸우는 섬멸전이지. 나는 지금 다른 마족들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이다. 언제 적이 넘어올 지 모르는 상황이지."

"잠깐 확인하는 거잖아요!"

그 말이 맞다. 지금의 전황은 대치상황일 뿐이고, 당장 내가 내려가야 할 정도로 급하지도 않다. 하지만 성녀에게 레비즈를 보여줄 수 없다.

"그 잠깐 사이에 적이 우리 던전의 중심부까지 침투하면? 솔직히 지금 여기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도 초조하다. 우리 부하들이 죽으면 네가 책임 질 건가?"

"어차피 던전 안의 마족들은 죽어봐야 부활하잖아요!"

"허어."

상당히 아니꼽다. 레비즈랑 보빔을 하며 성격까지 비벼댄 건지, 성녀의 성격은 막말로 싹퉁바가지가 없었다. 포르네우스가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딱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었다.

"그건 상당히 불쾌한 발언이군. 사과를 요구하마! 마족도 생명이다! 죽었다가 부활할 수 있다고 한들, 그렇다고 죽음의 고통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미안해요. 사과하죠. 됐죠? 그럼 이제 레비즈를 보러가죠."

"트랄, 이 성녀라는 자...."

"......."

트랄은 양손으로 30을 만들었다. 트랄조차도 성녀에게서 포-스가 느껴지는 것에 진절머리가 나는 듯 했다.

"왜요? 당신...뭐 제가 잘못했어요?"

"성녀여. 형제는 지금 사랑하는 이들이 전장에서 적과 싸우고 있는 중이다. 심지어 성검의 용사들을, 성녀를 앞에 두고 있지. 당장 목숨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잊지 말라."

"...미안해요.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 참을게요."

"허어."

마음에 든 대상에 대해서 여우처럼 꼬리를 마는 것 조차도 포-스와 비슷했다. 트랄에게 내가 성검의 용사들로-메어리 제외-한 명씩 하렘을 차려주는 한이 있더라도, 이 년을 결코 내 제수로 받아들일 수 없다.

"성녀, 그대는 정말 나를 화나게 만드는 군."

트랄에게서 성녀를 떨어뜨릴 수만 있다면 쌍둥이 페어리와 강한 여성 전사 셋 정도는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다.

"죽일까요, 아빠?"

"참아라, 비르고."

나는 나와 함께 화를 내는 메어리를 진정시켰다.

"대화는 이성이 통하는 존재와 하는 것이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불가능한 이유를 말한다고 해도, 성녀처럼 막무가내로 나오는 자에 대해서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하긴. 남의 집에 멋대로 쳐들어와서 포로를 내어놓으라는 자들과는 이야기할 필요는 없죠. 포로를 어떻게 하든 저희 마음 아니겠어요?"

"그렇지. ...응?"

"말을 못하게 혀를 자르든, 머리칼을 전부 태워버리든, 움직이지 못하게 힘줄을 끊든, 사지를 전부 잘라버리든, 아니면 엘프들이 당한 것처럼 똑같이 윤간해버리든 상관없죠. 아, 혼자서 넷을 강간했으니까 네 명이 한 명을 강간해도 되는 건가?"

"메ㅇ...비르고?"

너무나도 과격한 메어리의 말에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괜히 역효과가 나는게 아닐까 싶었지만, 메어리는 가슴을 내게 붙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자신을 믿으라는 것 처럼. 나는 내 팔을 가슴으로 움켜쥔 메어리의 행동에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메어리가 허투루 성녀를 도발하는 것은 아닐 터.

"용사 언니들께는 죄송해요. 저도 성검의 용사로서 응당 여러분과 함께 해야하지만...저는 성검의 용사이기 전에 아빠의 딸이에요. 아빠편이죠."

"""......."""

쌍둥이 요정과 여전사는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도대체 성검의 용사들끼리 무슨 텔레파시를 주고 받는 건지 궁금했지만, 성녀도 알아듣지 못하는 듯한 모습에 나는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효도라면 어쩔 수 없지!"

"와, 와.... 살다살다 이런 것도 보내.... 히히히."

"크흠. 힘든 싸움을 하려는 군. 응원하마, 비르고."

"고마워요, 다들."

메어리는 순식간에 성검의 용사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뭐, 뭐예요, 다들. 지금은 제 편을 들어줘야 하는 거 아녜요?!"

"그치만~ 마녀 얘기가 진짜면 레비즈가 잘못한 거 아니야?"

"그러게. 성녀 너도 제명한다고 그랬잖어~"

"그래. 설마 성검의 용사가 성기사단장의 사지를 자르고 강간하여 아이를 낳게 하는 자의 편을 들겠는가, 성녀여? 아무리 아버지라고 한들 말이야."

...사지 뜯긴 레비즈가 보이는 순간 저들은 적으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지만, 일단 성녀가 이 상황에서 고립되었다는 것 만으로도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 갑니다, 주인님.

"그래, 레비즈를 보고 싶다고 했지? 지금 당장 보여주마."

고오오.

포털이 열렸다. 그리고 검은 정장의 서큐버스, 샤이탄이 포털 너머로 나타나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분노의 군단 소속, 서큐버스 마담. 샤이탄이라고 합니다. 미력한 몸이나마 주인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샤이탄, 레비즈는?"

"여기 이렇게 직접 데려왔습니다."

고오오.

포털의 너머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질질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우야."

포털에서 기둥에 묶인 레비즈가 루시펠과 아스모딘의 인도하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레비즈의 모습에 침이 꼴깍 넘어갔다.

"읍, 읍읍읍!"

검은 가죽 구속구에 전신이 구속된 레비즈는 움직이지 못하도록 기둥에 꽁꽁 묶여있었다. 눈가리개가 씌워진 것도 모자라 입에 채워진 재갈은 누가봐도 중죄인을 구속한 모습이었다.

"...휴."

그리고 레비즈의 사지는 멀쩡히 달려있었다. 팔은 가슴 앞에 X자로 교차되어있고, 다리는 11자로 기둥에 꽁꽁 묶여있었다. 나는 레비즈를 가리키며 성녀의 앞을 막아섰다.

"이제 됐냐?"

"...저게 레비즈라는 증거는?"

"척 보면 모르나? 아니지, 믿고 싶지 않은 건가? 흐흐. 저걸 보고도 레비즈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루시펠이 레비즈의 머리칼을 좌우로 훑었다. 그녀의 머리에 난 날카로운 뿔이 온전한 모습 그대로 드러났다. 뾰족한 뿔 끝은 무언가를 찌르지 못하도록 슬라임 점액이 찰흙처럼 뭉쳐져있었다.

"보시다시피 하프 드래곤, 레비즈 안이다. 레비즈가 저지른 짓은 참담하기 짝이 없으나, 우리는 레비즈를 신사적으로 대하려고 했지. 무수히 많은 희생이 나왔으나, 우리는 레비즈를 구속하는데 성공했다."

허공에 흩날려진 내 수 억 마리 정자들의 희생으로 레비즈를 물리칠 수 있었다.

"지금도 그 사투를 생각하면 영혼이 아찔해지는구나. 하늘로 날아오른 레비즈를 잡기 위해 그녀의 등에 올라타서 검을 찔렀던 순간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강해졌군, 형제. 성기사단의 단장을, 반인반룡을 이기다니 말이야."

"...혼자서 싸운 것도 아니다. 엘프 여왕의 도움을 받았지."

"겸손하기는. 언젠가 꼭 그 싸움을 이야기해주게. 고요한 숲속에서 모닥불 하나를 피워두고 말이야."

"아아, 황천의 코카트리스 숯불구이를 먹게 해주마."

트랄과 한창 이야기를 하는 도중, 성녀가 다시 트랄의 앞을 막아섰다.

"자꾸 나랑 이야기하다가 다른 사람이랑 이야기하면서 화제를 돌리려고 하지 마요!"

"삶의 여유가 없군."

"아까는 적이 있기 때문에 잠깐 확인할 여유도 없다더니. 거짓말이었나요?"

"아까는 아까고 지금은 지금이지. 방금 전은 전투 중이었지만, 전투가 끝났으니 여유가 생겼다. 상황이 변했으니 이렇게 레비즈를 데려올 수 있는 것 아닌가?"

그것도 모르냐 빡대가리야. 뒷말을 입속에서 삼킨 나는 성녀를 마음껏 조롱했다.

'어차피 빡대가리인거, 자지밖에 모르는 멍청이로 만들어버리고 싶네.'

입술을 깨물며 노려보는 모습이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트랄만 허락해준다면 정말 침대에 묶어놓고 날밤을 까며 범하고 싶을 정도로, 사람의 정복욕을 자극하는 까탈스러운 매력이 있었다.

"주인님?"

샤이탄이 내 허리를 뒤에서 꼬리로 쿡쿡 찔렀다.

"...크흠. 아무튼 이걸로 확인은 끝났지? 이 이상은 안 된다. 마법결계 속에 넣어두지 않으면 또다시 탈출하려고 할 것이야."

"......역시 양도받아야겠어요. 마녀 레비즈는 교단 차원에서 정식으로 화형하도록 하겠습니다. 돌려주세요."

"보여주는 것 만으로도 만족하라. 샤이탄, 다시 원래자리에 집어넣어."

샤이탄은 레비즈를 묶어둔 기둥을 들고 다시 포털 너머로 사라졌다. 나는 포털 앞을 가로막아섰다.

"포로로서 교환하기 위해 레비즈를 살려둔 것이 아니다. 아직 강간당한 다크엘프들의 울분이 가라앉지 않았기에 살려둔 것이다. 마왕군이 언제 포로를 교환한 적이 있었느냐?"

없다. 나 말고 다른 이들이 암암리에 그런 짓을 벌였을 지는 몰라도, 공식적으로는 포로 교환은 이루어진 적이 없다.

"성녀여, 만약 레비즈를 반환받고 싶거든 길은 하나뿐이다."

"뭐죠?"

"다크엘프를 엘프로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을 가져와라. 그를 통해 레비즈에 의해 타락하게 된 다크엘프들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는 방법을 가져와라. 그러면 순순히 레비즈를 풀어주도록 하지."

"......."

성녀는 주먹을 잠시 부들부들거렸다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두고봐요. 금방 방법을 찾아낼테니까."

"흥, 얼마든지."

방법을 모른다면 방법을 아는 이를 찾아갈 터. 하지만 과연 그가 성녀에게 알려줄까?

"그럼 이제 여기 온 목적은-"

"아빠, 저 잠깐 저들이랑 이야기를 나눠도 될까요?"

메어리가 트랄을 비롯한 용사들을 가리켰다.

"여기에 온 이유도 저를 찾아온 거니까, 제가 잘 설명해서 보낼게요. 왜 저를 찾아온 건지도 알고 있거든요."

메어리는 눈으로 슬쩍 자신의 검을 가리켰다. 나는 한쪽 무릎을 살짝 굽혀, 메어리와 시선을 맞췄다.

"트랄, 타우러스는 나의 형제와도 같은 자다."

"형제요? 음~형제라기보다는...흠흠, 알았어요. 일단은 삼촌이라고 부르면 되겠네요. 지금은. 후후."

"......."

트랄이 형제가 아니면 도대체 뭔데. 나는 메어리의 음흉한 눈빛에 괜히 뒷골이 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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