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2회
123일차
잠시 뒤.
나와 트랄의 중재 하에 성검의 용사 둘과 성녀와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분노의 군단 군단장, 라스푸틴이라고 한다."
"우리는 제미니야!"
"둘이서 하나인 용사지."
먼저 첫번째, 제미니.
"자세한 건 비밀이야!"
"아무리 타우러스 형제라도, 신뢰할 수 없는 마족이니까!"
키가 30cm 정도 되어보이는 작은 요정 둘은 쌍둥이자리 이름의 성검을 가진 용사답게, 겉모습이 완전히 똑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한 쪽의 체모는 금발이고, 다른 쪽의 체모는 은발이라는 것.
"제미니. 나의 형제라는 것으로 충분히 신뢰할 수 없나?"
"없어! 우리는 사람을 직접 겪어보고 판단하니까!"
"조금 요정의 냄새가 나기는 하지만...히히힛!"
두 요정은 서로를 바라보며 베시시 웃었다. 아마도 내게서 나는 나무의 요정, 아스모딘의 냄새를 맡고 웃는 게 분명했다.
"됐다. 나도 일부러 성검의 용사와 친해질 생각은 없다. 다만 적이 될 생각도 없지."
"우리도 마찬가지야!"
"우리는 그냥 우리 뜻대로 움직이는 거니까~"
두 요정은 상당히 마이페이스로 보였다. 중간 중간 은근한 눈빛을 트랄에게 보내는 걸로 보아, 요정들이 무슨 감정을 품고 있는 지 한 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음...다 들어가려나?"
"형제여,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아니, 형수님들 사이에서 애가 나오려면 어떻게 하려나 싶어서 말이야."
""꺄-""
요정들은 장난스레 웃으며 트랄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이 순진한 오크 전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우리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성검의 용사 제미니여. 내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겠나?"
"타우러스, 네 형제 꽤나 말이 통하는 오크구나!"
"깔깔깔! 눈치도 빨라!"
나는 제미니즈와 암묵적 협약을 맺었다. 그리고 트랄의 옆에 서 팔짱을 낀 갑각 갑옷의 전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쪽은 누구지?"
"나는 나보다 약한 자에게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목소리에 강인한 힘이 느껴진다. 갑옷 아래의 얼굴을 굳이 살펴보지 않아도 분명 강한 여자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나는 직감했다. 저 인간은 여자 트랄이라고.
"트랄, 네가 보기에 내가 강하냐 아니면 쟤가 강하냐?"
"......6:4?"
"흥. 타우러스의 형제라고 하더니 역시 약한-"
"칸세르, 네가 4다."
여전사의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트랄의 인증을 받은 나는 괜히 어깨가 으쓱거렸다.
"트랄이 내가 더 강하다고 인증했다. 설마 트랄의 의견을 무시할 생각이냐? 트랄인데? 너 트랄이랑 한 판 붙어봤지? 응? 개발리고 '너를 이길 때까지 몇 번이고 도전하겠다!'하면서 옆에 따라다니는 거지? 다 안다."
"이, 이...!!"
투구 옆에 살짝 드러난 피부가 갑옷의 색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정곡을 찌르는 내 말에 칸세르라는 여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확실히 그녀는 내게 패배했다, 형제여. 하지만 그녀가 형제를 이길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네가 보기에도 6할 정도는 우세하다는 거지? 그러면 됐다. 나는 지는 싸움은 결코 하지 않는 거 알잖아?"
이기는 싸움만 하기에 승률은 100%. 고로 내가 칸세르와 싸우더라도 이길 확률 또한 십할이다. 십할.
"...타우러스의 얼굴을 봐서 이번은 참도록 하지. 오크."
"우리 트랄이 좀 많이 잘생겼지? 던전 있었을 때도 마족 여자애들이 나한테 트랄이랑 좀 자리 마련해달라고 얼마나 얘기하던지...."
그리고 너는 알아서 자리를 빠져달라고 하더라. 갑자기 슬픈 기억이 떠올라 조금 우울해졌다.
"...아무튼 칸세르여, 나도 트랄의 얼굴을 봐서 이번은 참도록 하겠다. 만약 나와 싸우고 싶거든 혼자서 던전을 찾아와라. 내가 직접 무기를 들고 기다리겠다."
"흥. 건방진 녀석 같으니라고...."
스륵. 트랄이 슬쩍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나는 그의 신호에 맞춰 짧은 신호를 보냈다.
- 혼자서 들어오면 여럿이서 덮칠 생각이로군.
- 기다린다고 했지 1:1로 싸운다는 말은 안 했다?
눈빛과 가벼운 신호만 주고받아도 서로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3년 동안 먹고 자고 싸우며 한 시도 떨어지지 않았으니 이 정도는 아주 쉽게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그리고 이쪽은."
"아."
트랄이 이제서야 기억났다는 듯 손으로 흑발의 여인을 가리켰다. 사제복을 입은 여인은 다른 용사들과 달리 명백한 적의를 내게 드러내며 이 자리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불편할 수밖에 없지.'
트랄 조차도 중재를 설 수 없는 문제가 나와 여인 사이에 하나 있었다. 나는 트랄에게 손을 들어 양해를 구한 다음, 내가 직접 먼저 화두를 던졌다.
"네가 성녀인가?"
"그래."
"말이 짧군."
제미니나 칸세르와는 달리, 나를 향한 분노와 적의, 그리고 살의가 깃들어있는 목소리였다.
"마녀 레비즈 안과 동성연애를 즐기는 그 성녀가 맞느냐? 내가 알기로는 교단에 성녀는 한 명 뿐인 걸로 아는데."
"...이상한 소리 하지마. ...요."
성녀는 움찔거리며 다른 용사들의 눈치를 봤다. 나도 다른 용사들의 눈치를 봤다.
"히익."
"......어머나."
"흥."
"......."
제미니즈는 놀라고, 칸세르는 무덤덤하고, 트랄은 눈을 감았다. 확실히 성녀가 눈치를 볼만한 상황이다. 그리고 나는 이런 상황에서 어디를 공략해야 할 지 확실히 알고 있다.
"저런. 같은 성별끼리 연애라.... 뭐 사랑하는 상대가 누구든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지만, 여신교단에서는 그걸 금기로 정해놓지 않았나, 칸세르?"
"나한테 왜 그런 걸 물어?"
"그대는 인간이니까."
성녀에게 물어보면 묵비권을 행사할 게 분명할 터. 성녀가 동성연애의 금기를 저질렀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는 다른 인간의 입이 필요했다.
"......확실히 여신교단에서는 동성연애를 금기로 정했지. 하지만 나랑은 관계 없는 얘기야."
"확인 고맙군, 칸세르. 이 빚은 좋은 장비로 화답하도록 하지."
나는 내 뒤에 세워둔 도끼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여자 트랄답게 내 사소한 제스쳐만으로도 내 말뜻을 이해하고 씩 웃었다.
"기대하지."
"기대해도 좋다."
드워프제 무구를 생각했겠지만 어림도 없지. 붉은 갑주 안에 받쳐입을 이너아머로는 흰색 타이즈와 스타킹이 최고다. 트랄에게 경유해서 전달하면 분명 입고 다닐 것이다.
"그래서 성녀여, 내가 마녀 레비즈를 풀어주기라도 바라는 건가?"
"...그래요."
"...잠깐만. 마녀...? 레비즈라면 그 레비즈 안을 말하는 것인가?"
"성기사단장!"
"실종된 사람!"
용사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성녀의 호흡이 순간 흔들렸다. 나는 트랄에게 눈짓을 보냈다.
"뭐야. 모르는 건가? 성기사단장 레비즈 안은 이곳 인근에 있는 엘프의 숲에서 엘프들을-"
"추잡한 얘기를 하러 온 것은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건, 마녀 레비즈를 양도받기 위함입니다."
성녀는 내 말을 끊으며 딱딱한 어조로 '마녀'를 언급했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표정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손절했구나.'
성녀가 트랄에게 보내는 은근한 눈빛과 시선을 통해, 나는 성녀가 레비즈 안으로부터 트랄에게로 갈아탄 것을 직감했다.
'어디서 중딩때부터 술담배했을 날라리같은 싸가지 년이 트랄을 넘봐?'
추기경을 통해 파악한 그녀의 실체도 실체지만, 나를 향한 적의를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트랄."
"왜 그러는가, 형제여."
"성녀를 보니 꼭 그게 느껴지는군. 포-스가 말이야."
"......."
살면서 누군가를 증오하는 건 그에 대한 강력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지만, 누군가를 싫어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유가 딱히 필요없다. 그저 단순한 이유만으로 사람이 싫어지기에는 충분하다.
'성녀에게서 포르네우스가 느껴진다.'
포르네우스를 대할 때의 좆같음이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성녀와 같은 장소에서 이야기를 나눌 바에는 차라리 포르네우스의 남편으로 살았던 꿈속에 갇히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였다.
"음...과연. 그렇군."
트랄은 뭔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쓰게 웃었다.
"전생에 악연이라도 있었던 것 아닌가?"
"전생? 말도 안 되는 소리."
"...이상한 소리는 그만해요, 트랄. 그쪽도 자꾸 말을 돌리지 말고. 레비즈 안, 돌려주시길."
"돌려줘야 할 이유가 없는데?"
진짜로 돌려줘야 할 이유가 없다. 아무리 트랄이 부탁한다고 해도 레비즈만큼은 결코 안 된다.
"우리 군단은 엘프들과 동맹을 맺었다. 엘프의 여왕이 나의 반려기도 하지. 그런 엘프들을 레비즈 안이 네 명이나 강간하여 다크엘프로 만들었다. 내가 어찌 레비즈를 풀어줄 수 있단 말이지?"
모든 잘못은 레비즈에게 있다. 성녀는 진실을 알지 못한다.
"거짓말이네."
"거짓말이야."
"......흥, 성검의 용사를 상대로 거짓말을 할 생각을 하다니. 착각도 유분수지."
"......형제여."
성검의 용사들이 하나같이 나에 대해 불신을 드러냈다. 트랄마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안쓰러움이 묻어나 나는 괜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뭐지? 성검의 용사에게는 진실을 판별하는 능력이라도 있는 건가?'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엘프 여왕이 당신의 반려라고요? 그걸 믿을 바에는 추기경이 실은 착한 사람이라고 믿겠어요."
"아, 그쪽이냐. 어이가 없군. 트랄, 네가 보기에도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나?"
"형제여. 나는 형제를 전적으로 신뢰하네. '그 날' 있었던 일은 분명 충격적이기는 했지만, 나는 형제가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하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엘프 여왕은 조금...."
"그래. 이미지적으로 그렇긴 하지. 그럼 어떻게 증명을 할까? 내가 이 자리에서 엘프 여왕을 불러서 섹스라도 해야 증명을 할 수 있을까?"
용사들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졌다. 트랄조차 표정이 굳어버렸다. 성녀는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나는 엘프 여왕과 사랑하는 사이니라. 이 말에 한치의 거짓이 있다면, 나는 감히 말하건대 여신의 천벌을 받아 이 자리에서 불타 죽을 것이다. 여신이시여, 증명해주소서! 나 라스푸틴의 진실된 사랑을!!"
나는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여신이시여!"
"맙소사...."
"마족이 여신께 기도를...."
"형제여,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제가 보증할게요."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연분홍빛의 아름다운 세검을 든 분홍색의 여인, 나의 딸 메어리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비르고?"
"성검 비르고의 용사. 이름은 비밀. 이 자리에서는 비르고라고 불러주세요."
메어리는 나를 지키듯 내 옆에 서서 검을 내밀었다. 성검의 사용자끼리 뭔가 통하는 것이 있는지, 트랄을 비롯한 용사 넷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르고가 맞군."
"설마 던전 안에 있을 줄이야."
"...형제여."
트랄은 메어리를 한참동안 쳐다보다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응원하마. 형제의 딸은 곧 나의 딸이다. 언젠가 내 힘이 필요한 날이 있거든 내게 도움을 언제든지 요청하거라."
"그럼 저희 아빠 어떻게 하는 것도 될까요?"
"그건 안 되지."
"너희들 당사자를 앞에 두고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
분명 처음보는 사이일진데 메어리와 트랄은 나와 서로를 번갈아보며 키득거렸다. 나를 두고 안좋은 일을 꾸미고 있는게 분명했다.
스륵, 스륵. 트랄이 수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 어차피 인간박이도 했는데 따-
"야, 닥쳐. 그 이상은 '여기'서 말하지 마."
"...알았네, 형제여."
"아니, 또 말을 돌렸...하아. 이봐요!!"
화제에서 벗어난 성녀가 다시 대화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가운데로 끼어들었다. 나를 올려다보는 째진 눈빛은 당장이라도 능욕해버리고 싶을 정도로 건방졌다.
"레비즈를 봐야겠어요, 당장!"
"어째서?"
"여신께서 제게 신탁을 내리셨기 때문입니다!"
성녀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리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신성력에 나는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위잉.
"어디서 우리 아빠한테 위협이야, 미친 년이."
내 앞을 가로막듯 선 메어리가 성녀의 목을 향해 성검을 겨눴다. 공격의 의도가 없어서 그런지, 뒤의 용사들은 굳은 표정으로 가만히 서있었다.
"신탁? 뭐라고 했길래 엘프들을 보빔강간한 마녀를 만나겠다는 거야? 사랑하는 사이여서? 웃기지도 않네."
"......거짓으로 점철된 악의의 아래, 용의 피가 사방으로 피분수칠 지어니. 피를 마신 자들은 용이 되어 세계를 능멸할 것이며, 나의 뜻을 따르는 용은 다시는 날지 못하게 되었노라."
근엄한 목소리로 말하는 성녀의 눈동자는 은빛으로 물들어있었다. 너무나도 경건한 목소리에 나는 침이 꿀꺽 넘어갔다.
"만약 그쪽이 레비즈를 보여주기만 한다면, 저는 순순히 레비즈가 마녀임을 인정하고 성녀의 이름으로 교단에서 제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보여주기만 한다면?"
"네. 보여주기만 한다면."
성녀는 마치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것 마냥 확신에 찬 눈동자로 나를 노려봤다.
"성기사단장 레비즈 안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제 눈으로 똑똑히 봐야겠습니다."
"......그, 너희는 성검 비르고의 용사를 찾아온 게 아니었나?"
"마침 그곳이 이 던전이네요. 네, 레비즈 안을 구금하고 있는 그 던전. 왜 못 보여주시죠? 그냥 몸 상태만 확인하고 가려고 하는 건데."
"......."
성녀는 입꼬리를 비틀며 손으로 제 목을 겨눈 비르고를 옆으로 밀었다.
"설마...레비즈를 강간해서 임신이라도 시켰나요? 인간을 상대로 오크가? 에이, 설마?"
"형제여...."
트랄의 뜨뜻미지근한 눈빛에 나는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대답할 수 있으랴. 성녀만큼 짜증나게 굴어서 임신을 너머 사지를 없애 알낳는 기계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