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비만 오크-501화 (500/800)

501회

123일차 "내가 이 던전을 처음으로 얻고 난 뒤, 나보다 더 레벨이 높은 적을 마주한 적이 있지."

나는 페-도를 삽처럼 들어 무너진 흙더미를 향해 찔렀다.

"당연히 정면에서 힘싸움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싸움은 결과적으로 이기는 놈이 장땡.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힘, 던전 주인으로서의 힘을 활용하기로 했다."

그 예시가 바로 이곳이다.

무너지는 환풍구.

유사시 통로를 막기 위한 격벽 기믹은 라임에 의해 공사가 가라로 이루어진 곳은 한 둘이 아니었고, 사소한 충격으로 여차하면 무너질 수 있게 처음부터 만들어졌다.

"도끼는 확실히 천장에 닿을 정도로 크지. 그럼 천장을 공격 했을 때 적에게 데미지를 입힐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면 되지 않겠나."

즉, 나와 트랄의 싸움의 여파 만으로 쉽게 무너질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

"아아, 이것이 지형지물을 활용한다는 것이다."

나는 전투 중간중간 천장을 수도 없이 건드렸고, 트랄을 천장이 무너지는 포인트로 밀어넣었다.

"확실히 너는 강하다. 지금의 나는 너를 이길 수 없지. 내가 강해진 만큼, 너 또한 강해졌으니까."

나는 트랄보다 전투 경험이 적고 근력이 부족하고 상성에서 밀리게 되었지만, 이 던전의 주인으로서 구조를 활용해 트랄을 함정에 빠뜨렸다.

"그래도 예전처럼 마냥 당하고만 있지는 않는다 이거다. 흐흐."

"역시 형제다."

콰득. 흙더미 속에서 검 하나가 튀어나왔다. 흙먼지를 뒤집어 쓴 성검은 손잡이 부근이 피로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나의 피였다.

"여기서 공격을 당했으면 나는 꼼짝도 못하고 얻어맞아야했을 터."

"그래. 적을 가둬두고 패는 건 전술의 기본이지."

서걱, 서걱. 흙더미에서 빠져나온 성검이 빙글빙글 돌며 공간을 넓혔다. 안에서 익숙한 근육질의 손이 튀어나왔다.

"그대로 있어봐라."

나는 성검의 칼날을 움켜쥐었다. 여전히 신성력은 은은하게 빛나고 있지만, 주인이 적의를 거둔 이상 그저 한낱 무기일 뿐이다.

"준비됐나?"

나는 흙이 가득 묻은 손을 붙잡았다.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힘에 나는 괜히 멎쩍은 미소가 나왔다.

"짜식. 말로는 의연한 척하면서 힘주는 거 봐라?"

"짐승마냥 함정에 빠졌는데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이상하지."

"...그래. 자, 하나, 둘."

셋. 나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힘차게 손을 잡아당겼다. 흙더미가 사방으로 흩어지며, 안에서 흙먼지를 뒤집어 쓴 트랄이 몸을 일으켰다. 트랄의 이마에 살짝 찢어진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함정은 한 번 걸리고 다시는 안 걸리는 게 기본인 거 알지? 다음에 이런 함정 있으면 무조건 피해라."

"형제는 아직도 나를 가르치려고 하는군."

"새꺄, 너 나 아니었으면 태어나자마자 한 달만에 트롤 놈들한테 뒤졌어."

"언젯적 이야기를 하는 건가. 크흠."

트랄은 흙더미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왔다. 새삼스럽지만 오크라기보다는 그린 엘프의 남성형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모습이 엘프스러웠다.

"야. 내가 묻고 싶은 것도 많고...이야기하고 싶은 것도 정말 많지만, 일단 지금 상황이 조금 난감하다."

"뭔가?"

"내 던전에 침입자가 있어. 너 말고, 다른 놈들."

움찔. 트랄은 인상을 찡그렸다. 나와 트랄이 사거리에서 싸우는 동안 침입자들은 다른 곳에서 우리 군단의 병사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어디보자...하나, 둘, 셋, 넷...? 하나는 뭔가 이상한데?"

"나의 동료들이다, 형제여. 다른 길로 돌아간 모양이군."

"내가 길을 돌아가게 만들었다."

사거리에서 마주친 침입자가 트랄이라는 것을 알자마자 전투를 시작한 것과 별개로, 우리 던전에는 정면에서 적이 침투했을 때 대응해야할 메뉴얼이 있다.

군단장이 나서야할 적이 있을 경우, 던전 통로를 무너뜨려 시간을 번다.

"대부분의 인간은 통로가 막혔을 때, 다른 길이 있으면 새로운 길을 찾으려고 하거든."

내 던전의 입구는 일직선으로 달려오면 곧장 소환시설까지 닿을 수 있지만, 약간의 조치 만으로도 미로가 되는 곳이다. 그걸 멋지게 수행한 이는 당연히 천장 통로를 공사한 장본인, 슬라브돌.

"소개하지. 나의 첫 부하, 라임이다."

천장에서 라임이 내려와 내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내 상처와 트랄을 노려보는 라임의 눈빛에 트랄은 두 손을 들어올리며 라임의 시선을 피했다.

"안에 다른 부하들도 엄청 많기는 하지만...지금 당장은 네 동료들을 구하러 가도록 하지."

"구해?"

"라임이 좀 수작을 부렸거든."

막다른 길로 몰아 통로를 무너뜨렸다. 나와 트랄이 사거리에서 싸우는 동안, 라임은 침입자들을 교묘히 유도해 나와 트랄의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지금쯤 통로에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일단 다시 통로를 허물테니까 네가-"

"괜찮다. 그 정도는 각자 빠져나올 수 있는 자들이니."

"무슨 근거로...헐."

워낙 정신없이 싸우느라 시스템의 알림을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트랄의 뒤를 이어 따라들어온 이들의 '레벨'은 하나같이 괴물들이었다.

Lv.88, ★★★★★.

Lv.86, ★★★★☆.

Lv.91, ★★★★★☆.

그리고 ??.

"이것들 뭐냐?"

"누가 그러더군. 용사 일행에서 꼭 용사가 한 명이 될 필요가 있냐고."

콰---앙!!

모퉁이에서 은빛의 포격이 통로 전체를 꿰뚫었다. 마치 화력이 최대치로 늘어난 물풍선이 터진 것 마냥 통로를 채운 신성력의 폭발에 나는 손발이 저리기 시작했다.

"야, 너, 설마...?"

"제미니, 칸세르, 그리고 성녀. 나는 일단 성검의 사용자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 중이다."

트랄의 파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호화로운 파티였다. 별의 갯수가 최소 네 개에, 최저 레벨이 무려 86이라는 어마무시한 수치의 파티에 나는 그만 쌀 것 같았다.

"지렸다...."

지하 2층에서 올라오려는 35위 따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들만 있으면 20위권은 커녕 10위권도 도모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전력의 파티였다.

"타우러스-----!!"

두 명의 페어리가 던전 복도를 날아온다. 갑각류의 형상을 한 붉은 갑옷의 기사가 검을 들고 달려온다. 그 뒤에 사제복을 입은 흑발의 여인이 신성력을 뿌리며 달려오고 있다.

"야. 남의 집에 지금 신성력 테러해도 되는 거냐?"

"미안하네."

트랄은 내 앞을 막아서며 성검을 여인들에게 겨눴다.

"멈추게. 이 자는 나의 형제일세."

트랄의 말 한 마디에 여인들은 발걸음을 멈췄다. 트랄은 검을 거두고 던전 밖을 가리켰다.

"형제여, 잠시 이야기를 하지."

"오냐."

서로 어떻게 지냈는가,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었다.

* * *

<그 시각, 레굴루스 성 후작 집무실.>

"응, 흐긋, 하아. ...후우, 후우."

"괜찮습니까? 안색이 상당히 좋지 않습니다."

"신경...꺼."

추기경은 이므신할과 함께 있는 자리가 영 불편했다. 얼굴이 붉어진 이므신할은 계속 거친 호흡을 몰아쉬며 괴로워했다.

"이므신할 님, 혹시...?"

"그럴 리 없잖아. 나는 성검의 용사야. 내가 왜 그런 병에 걸리겠어?"

"그렇죠? 하, 하하...."

추기경의 날카로운 눈에 이므신할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시선을 계속 마주하고 있으면 모든 것이 탄로날 것만 같았다.

"이므신할 님, 성검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따로 보관중이야. 왜?"

"아뇨.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차고 다니시던 성검을 어디에 두셨나해서."

"...가장 안전한 곳에 은밀하게 보관중이니까 더이상은 묻지 말지?"

이므신할은 추기경의 추궁을 원천차단했다. 그리고 테이블 사이에 놓은 성기사단의 보고가 적힌 양피지를 들어올렸다.

"서서히 증상이 가라앉은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어. 그리고 이들은 모두 같은 후유증이 나타났지. 뭘 것 같아?"

"그걸 제 입으로 말하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럼 내가 말하지. 남자는 좆이 커졌고, 여자는 가슴이 커졌어. 아니지, 골반도 좀 커졌네."

적나라한 이므신할의 표정에 추기경은 차를 홀짝였다. 섹무새 증후군에 걸렸던 이들은 하나같이 성기능이 향상되거나 체형이 어느정도 '아름답게' 보정되었다.

"어떻게 생각해, 추기경 예하께서는?"

"글쎄요. 저주가 아니겠습니까?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성욕에 미친 짐승으로 타락시키는 아주 악랄한 저주지요."

"하지만 그 효과는 엄청나. 그건 성기사단도 직접 눈으로 봤을테니까 더 잘 알 거 아냐? 사람들의 성욕을 직접 억눌러주고 다녔으니까."

"...덕분에 치료를 거부하는 이들도 늘어났지요."

차라리 생면부지의 이와 섹스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성기사단의, 교단의 치료는 받지 않겠다. 교단에서 뻗는 증상 완화의 손길을 격렬히 거부하는 이들이 수두룩 쏟아졌다.

"교단으로서는 통탄하겠는 걸. 신성력에 오래 영향을 받은 이들일수록 성기능 향상의 효과가 줄어들었으니."

"......교묘히 만들어진 저주일 뿐입니다."

여신교단에 의해 신성력의 치료를 받으면 2cm 늘어날 게 1cm만 늘어난다더라. 성기능이 좋아지는 효과가 반감된다더라.

- 나는 집 전체에 정액을 뿌리는 한이 있더라도 2, 아니 3cm 자라게 할 것이다!!

자연히 교단의 위세가 한 풀 꺾일 수밖에 없었다. 주민들의 욕망은 너무나도 거대하여, 성기사단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서 꺾일 열의가 아니었다.

"이건 교단을 음해하려는 누군가의 술책이 분명합니다. 여신을 모독하는 행위지요. 여신이시여, 이 못난 자가 당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대신하여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추기경은 잠시 두 손을 모으며 고개를 숙였다. 깍지낀 손을 이마까지 올려 기도를 올리는 모습은 마치 죄인이 고해성사를 하는 것만 같았다.

"...흠?"

착각일까. 이므신할은 꼭 추기경이 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동시에 이므신할 본인도 잠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응, 그읏...."

두근, 두근.

성검의 신성력을 줄이니 아랫배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마음같아서는 어디 방에 틀어박혀 증상이 회복될 때까지 나오지 않고 싶었다. 이므신할은 슬쩍 아래로 시선을 떨구었다.

"........"

깎아지른 절벽. 그녀는 성검의 용사이기 이전에, 한 명의 여인이었다. 무엇보다도 생리통의 통증이 줄어든다더라 하는 속설이 그녀의 귀를 솔깃하게 했다.

"...추기경. 교단에서는 어떨 지 모르지만, 후작 대리로서는 차라리 전원이 한 번 발병했다가 낫는 게 더 좋다고 생각이 들어."

"예?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랬다가는, 그랬다가는...!"

"여신교단에 대한 믿음이 줄어들겠지.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는 건 어때? 이대로 계속 저들의 증상을 신성력으로 억누르려고 한들...사람들이 오히려 적의를 가지게 될 것 아니야?"

"끙...!"

추기경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잘난 추기경에게 한 방 먹였다는 생각에 이므신할은 괜히 안도감이 들었다.

"아, 안 되는데...!"

그런데 왜 자꾸만 추기경은 기뻐하는 것처럼 보일까.

"...추기경. 결단을 내려주시지."

이므신할은 교단의 위세가 꺾이는 것에 추기경이 결코 기뻐할 리가 없다는 상식적인 판단 하에, 그를 다독이고 설득해야만 했다.

"지금 당장 성기사단에 의한 치료 행위를 중단해야해. 안 그러면 교회가 불타고 말 거야."

"고작 자지랑 가슴둘레 몇 cm 때문에...?!"

추기경은 좀처럼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이므신할은 추기경이 충분히 심사숙고 한 뒤에 결단을 내릴 때까지 천천히 기다렸다.

하지만.

"예하! 큰일났습니다!"

집무실 문을 부술 기세로 달려온 부기사단장, 바이스 엑슈얼이 가져온 소식은 이므신할과 추기경의 표정을 바로 굳게 만들었다.

아리에스 변경백, 피살.

흉수는 알 수 없으며, 성검 아리에스는 소실.

"방벽이...위험하다고?"

* * *

<아리에스 영지 대성벽 너머. 검은 황야.>

"아아, 아쉽도다. 성검의 용사도 결국 인간이라 어쩔 수 없는 건가."

간드러진 콧수염을 쓰다듬는 마인, 제파르는 소란스러운 성벽 위의 모습을 보며 자조했다.

"변경백은 내가 죽이고 싶었거늘."

"맨날 무서워했으면서 무슨."

"공포의 대상이었기에 더욱 죽이고 싶었던 것이라네, 공주님."

제파르가 눈을 찡긋거렸다. 제파르의 옆에는 아래는 거미의 몸통에 상반신은 백발의 미인이 제파르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쏘아봤다.

"그래서 오늘은 구경 나오고 끝?"

"아니지.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쳐서야 되겠는가? 마침 '저 쪽'도 슬슬 오고 있군."

제파르는 황야 맞은편에서 날아오는 검은 로브의 무리를 향해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어서 오시게, 밤의 군주시여!"

"...지금 저혈압이니까 소리 줄여."

로브 안에서 중성적인 고운 미성이 울렸다. 거미 마족은 로브의 마족을 향해 다리 한 쪽을 들어올리며 빈정거렸다.

"꼴에 던전 주인 한 번 해보겠다고 설치기는."

"뭐래.... 마왕 딸년 주제에."

"응, 니 애비 내 애비."

"...짜증나."

로브의 여인은 후드를 슬쩍 뒤로 넘겼다. 마침 구름이 햇빛을 가려 여인의 위에 그늘이 졌다.

"적이 정비하기 전에 빨리 처리하자고. 어때, 폭식의 군단장 님."

"얼마든지 환영하는 바이오, 탐욕의 군단장."

제파르-<폭식의 군단장>이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러자 검은 황야의 땅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물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럼 시작은 본인이 하도록 하겠소."

그 수가 얼핏 보기에도 무려 1만. 하나하나 다리가 최소 6개씩 붙어있는 마물들이 황야에 바글바글 거렸다.

"군단이여."

제파르는 거미 여인의 몸통 위에 올라 지팡이를 성벽을 향해 겨눴다.

"적을 먹어치워라."

구구구구구구구구!!

1만에 육박하는 곤충 마물들이 순백의 성벽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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