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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비만 오크-499화 (498/800)

499회

123일차 부스스.

남자는 따사로운 햇살과 함께 눈을 떴다. 언제나와 같은 태양은 그의 전신을 따스하게 감싸며 새로운 아침을 알렸다.

"......드디어."

남자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건장한 장년의 얼굴임에도, 다부진 근육질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치 곧 죽을 노인마냥 몸을 움직였다.

"드디어 염원이 이루어지는 건가."

남자는 흔들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몇 걸음 걷는 것 조차 힘겹게 걸어온 그는 벽을 향해 손을 들어올렸다.

"오라, 아리에스여."

우우웅.

벽에 걸린 검 하나가 우는 것 처럼 떨렸다. 남자가 검을 향해 손을 뻗자, 검이 남자의 허벅지에 살포시 놓였다.

"괘념치 말거라. 10살에 네 주인이 된 이후로 오랫동안 바라온 시간이다. 오히려 지금이라도 이루어지는 것을 감사히 여겨야지."

스륵.

햇빛에 비친 검신을 쓰다듬는 남자의 손등은 왠지 모르게 불투명했다.

"솔직히 말해보라고? 음...예상 못했다. 솔직히 말하면 에일라가 낳을 자식의 자식 세대에서나 도달할 줄 알았어. 에일라는...내 딸이지만 천재는 아니거든."

검은 조용히 남자의 말을 들었다. 마치 이 순간이 아니면 남자의 말을 들을 수 없다는 것 마냥, 그저 조용히 듣기만했다.

"나는 죄인이다.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딸아이와 기사단을 던전에 집어넣은 죄인이지. 그러니 지금 벌을 받는 것이다. 변경백으로서 쌓아온 공로조차도 자식을 버린 원죄는 이겨낼 수 없지."

성검의 용사로서 '아리에스 기사단이 던전에서 몰살당할 것'을 알면서도 모른척 보내야 했다. 기사단을 이끄는 대장이 유일한 딸임에도 죽도록 내버려둬야했다.

"에일라 아리에스의 죽음으로 인류는 구원받으리라. ...여신께서 너를 통해 내게 알려주신 신탁이지. 네가 미안해 할 필요는 없다. 에일라는 살아있으니까. 에일라가 죽었다면 내 본능이 진작 말했을 것이다. 자식을 낳으라고. 가문의 피를 이으라고."

스르륵.

햇빛이 유리창 안으로 비쳐 남자의 발치를 밝혔다. 남자의 발은 서서히 안개처럼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원, 녀석. 얼마나 아이를 낳아대려고 하는 건지 전혀 걱정이 되지 않아. 남편이라는 놈을 아주 허리 작살내려고 하는 게 아닌 지 몰라. 흐흐."

우우웅.

"...그래. 시간이 되었다. 아버지의, 할머님의, 조상 대대로 이어져 온 사명을 완수해야 할 시간이 되었지."

스륵. 남자는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길게 뻗은 검은 남자의 심장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힘이 에일라에게 부디 가치가 있기를."

푸욱. 남자는 스스로 검을 제 가슴에 찔러넣었다. 붉은 피가 남자의 옷위로 번지기 시작했고, 남자의 입꼬리에서 핏줄기가 흘러나왔다.

"...쿨럭."

남자의 몸에서 새어나온 마나가 검신을 타고 성검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성검은 제 몸을 밖으로 빼내려고 했으나, 남자는 검을 꽉 잡고 버텼다.

"이제...이 축복같은 저주가 에일라의 대에서 막을 내릴 것이다."

사아아.

남자의 몸에서 흘러나온 마나는 고운 입자가 되어 흩어졌다. 재처럼 사그라든 마나가 흔들의자에 박힌 성검에 천천히 흡수되기 시작했다.

"아아...그래도 죽는 건 아쉽군. 그래, 마지막으로...."

쩌적, 쩌적.

"에일라가 결혼하는 걸...보고 싶었...."

남자는 미라처럼 몸이 말라갔다. 생기가, 영혼이 빠져나간 듯 했다. 붉은 피가 셔츠 전체를 적실 정도로 퍼지고 난 뒤, 남자의 심장은 뛰지 않았다.

번쩍.

성검에서 빛이 나자마자, 흔들의자 앞에 은발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양털을 전신에 두른 나신의 여인은 흔들의자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수많은 아리에스 가문의 백작들을 모셨지만, 당신만큼 가장 딸을 사랑하는 남자는 처음이었습니다. 모시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변경백."

은발의 여인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유리창을 활짝 열었다. 햇빛에 비친 그녀의 눈동자는 검처럼 날카로웟다.

"저 두무지 또한, 이제 무기로서 본연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될 것 같습니다."

여인의 몸도 남자, 변경백처럼 빛의 입자로 퍼지기 시작했다. 여인이 서있던 자리에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검 한 자루가 빛나기 시작했다.

사락.

눈 깜짝할 새, 검은 공간을 찢고 사라졌다.

"변경백 님, 큰일입니다. 제파르 던전의 군대가 또다시 방벽을 넘어오려고...변경백 님?"

아리에스 변경백이 시체로 발견된 건 그로부터 두 시간 뒤의 일이었다.

* * *

★★★★★은 감히 말하건대 그 종족 안에서 0.1% 안에 들어갈 강자로 성장할 가능성을 가진 존재일 것이다.

90레벨은 감히 말하건대 전 세계 모든 종족을 통틀어 0.1% 안에 들어가는 강자일 것이다.

그들은 모두 100레벨까지 성장이 가능하며, 100레벨까지 성장하는 것이 천재에게 주어진 한계일 것이다.

그리고 천재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유일한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 ★★★★★★가 되는 것일 터. 지금까지 내가 봐온 초월자들처럼, 6성은 단순히 어떤 경지에 이르게 되는 걸 넘어서 신적인 존재가 되는 게 틀림없다.

그리고 신적인 존재가 기존의 허물을 벗고 탈피하기 직전이 가장 위험하다. 특히 솔로몬의 시스템을 이용한 한계돌파, 초월은 더더욱 그러하다.

<알림> 던전 내에 포털이 열렸습니다!

"이 개새끼들, 냄새라도 맡은 건가?"

에일라의 코쿤 앞에서 완전무장을 하고 기다리던 나는 올 게 왔다는 생각과 왜 하필 지금 왔냐는 생각이 교차했다.

"어떤 개같은 새끼가 지금 이 타이밍에 눈치없이 쟁탈전을 걸고 지랄이야, 지랄이."

"아스타로트의 이름을 취하고 제법 시간이 지나기는 했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차라리 에일라 코쿤 들어가기 전이면 조금 미루면 되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그레모리 던전이나 조금 더 안전한 곳에 에일라를 이동배치하여 코쿤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6성이라는 것에 몰두하여, 에일라에게 지금까지 신경쓰지 못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에일라의 처녀를 한 번 더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다소 급하게 에일라에게 환생결정을 사용했다.

"젠장. 진짜 어디서 공격한 거지?"

"지금 분석중입니다. 곧 알게 될 것 같습니다."

"후우. 메어리가 마침 던전을 공사중이었으니 망정이지."

포털은 당연히 소환시설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지하 2층의 끝자락에 열렸다. 침입자는 메어리가 손수 설치한 함정을 뚫고 절벽을 올라와야했다. 입구를 넘어올 수 있다면.

"잘 싸우는군."

나는 시스템과 샤이탄의 힘을 이용해 지하 2층에 배치된 부하들의 시야를 통해 적의 상황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파지직!

적들은 포털을 넘어오자마자 신성력에 몸이 불타 쓰러졌다.

하나가 죽고 나면 바로 포털의 앞에 분홍색 꽃잎이 피어올랐고, 뒤이어 넘어온 이가 꽃잎에 몸이 닿아 불타올랐다.

"역시 성검의 용사."

버지니움 실드 덕분에 적은 넘어오자마자 바로 신성력을 뒤집어쓰고 소멸했다. 적은 버림패로 정찰대를 보내는 것 마냥 계속 같은 병사들을 보내고 있었다.

"병사들 꼴아박는 거 보니까 수인족이 메인인 것 같은데? 워울프에다가 그리폰의 날개를 달다니."

"...35위, <마르코시아스>가 가장 그와 비슷한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몸집이 5m는 넘는 날개달린 늑대입니다. 지금 넘어오는 놈들은...마르코시아스의 새끼들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역시 샤이탄. 모르는 게 없구나."

"자주 소환이 이루어진 마물이라 잘 압니다. 이름은 히포그울프. 히포그리프와 워울프의 혼종입니다."

샤이탄의 설명에 나는 적도 제법 상당히 뛰어난 놈이라는 걸 직감했다.

"새끼, 저거 뽑으려고 더럽게 마물들 합성했겠어."

"흑마의 체구, 그리폰의 날개, 그리고 워울프로서의 정체성까지 삼박자가 어우러진 종족입니다. 참고로 히포그리프가 베이스가 된 마물답게...큽니다."

"우리 로보 애들이랑 섞으면 요정 애들 자지러지겠군. 오, 또 넘어온다."

캬아아앙.

메어리가 버지니움 실드를 설치하는 것이 조금 늦었다. 덕분에 나는 아가리를 벌리며 등장한 늑대마의 레벨을 대략적으로 알 수 있었다.

<히포그울프>. Lv.71. ★★★★.

"4성 마물이라.... 가만히 냅두기에는 상당히 골치아픈 놈이군."

걱정되는 건 당연했다. 행여나 한 마리라도 빠져나와 에일라에게 방해가 된다면, 나는 쟁탈전을 건 적을 일말의 자비도 없이 무참히 죽여버릴 생각도 하고 있었다.

와장창, 쨍그랑!

버지니움 실드들이 유리창 깨지듯 망가지기 시작했다. 그 좁은 포털을 어떻게 넘어왔는지, 몹집이 3m 가까이 커보이는 거대 마물이 우리를 향해 손톱을 날카롭게 세웠다.

"근데 우리한테는 안 되지."

지하 2층에는 우리 군단의 최정예병들이 메어리와 함께 진을 치고 있었다.

사수좌전선에서 활약한 이들을 비롯하여, 오크 병사들을 중심으로 지하 1층에서 지원을 나온 엘프들도 함께 수비진을 펼쳤다.

- 키에엥!

버지니움 실드를 몸으로 깨뜨려 우리 던전에 발을 디딘 순간, 곧장 엘프들의 화살이 마물을 벌집으로 만들었다. 심지어 공격도 적의 눈에 보이지 않게 우리는 참호 안에서 사격이 이루어졌다.

"이 정도면 어지간해선 뚫리지 않겠지. 그래, 우리가 아스타로트 따먹고 29위 되었는데 35위에게 발리면 개쪽이지."

"방심은 금물입니다. 상위 던전에서 하극상을 일으키라고 종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걱정마라. 그 때는 또 그에 맞게 싸우면 돼."

드워프들의 합류에 따라 우리 군단의 무기는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되었다.

"우리는 더더욱 강해졌다."

8할은 사수좌 전선에서 노획한 물건을 그냥 주워다 쓰고 있지만, 2할은 로도페리와 드워프들이 만들어낸 개인별 장비를 지급받았다. 드워프제 무기와 방어구는 대략 평균적으로 5레벨 정도는 비벼볼 수 있게 만들었다.

"이것 저것 빼지 않고 전력을 쏟으면 최소 25위권 안은 비벼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겠느냐."

"예. 그보다 더 윗 단계도 노려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거듭된 내 자신감의 표현에 샤이탄은 활짝 웃었다. 덕분에 나는 샤이탄을 통해 안정감을 얻을 수 있었다.

"에일라 코쿤 때문에 상당히 신경이 날카로웠는데...샤이탄 네 덕분에 조금 진정할 수 있었다. 옆에 있어줘서 고맙구나."

"아닙니다. 저 혼자만의 공은 아니지요. 메어리도, 라임도, 륜도, 루나도. 그 외에 각자 자기 던전에서 언제든 본진으로 지원을 나올 수 있도록 대기하고 있는 모두의 덕분입니다."

"...그래, 모두의 덕분이지."

"초조해하지 마십시오. 여차하면 시간을 당기는 비법도 있지 않습니까? 후후, 갑자기 뭔가 하늘에서 떡하니 적이 튀어나오지 않는 이상-"

<알림> 던전 내에 침입자 발생.

"......."

운명의 장난일까, 아니면 나의 최초 6성 부하를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누군가의 농간일까. 시스템에 떠오른 알림에 나는 잠시 눈앞이 캄캄해졌다.

"...후우."

가볍게 심호흡을 하여 정신을 가다듬었다. 바닥에 놓아둔 나의 전용 도끼, <페-도>를 움켜쥐고 몸을 일으켰다. 로도페리의 이름을 본딴 도끼는 우리 군단에서 성검 다음으로 가장 뛰어난 무기였다.

"적의 위치는?"

"주, 주인님? 설마 직접...?"

"위치는?"

"......어떻게 이곳으로 온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위치."

"라스촌 입구입니다. 적은...정면에서 들어왔습니다."

나는 곧장 몸을 돌렸다. 어떻게 라스베가스와 라스피카의 넓은 포위망을 뚫고 던전으로 직통으로 달려왔느냐 하는 문제는 전혀 중요치 않았다.

<알림> 침입자 발생!

# 예상전력 : Lv97, ★★★★★☆.

"...씨발, 레비즈 애미가 왔나?"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꽂힌 것 마냥 심장이 저릿저릿하다. 하지만 나는 페-도를 들고 통로를 향해 몸을 돌렸다.

"메어리를 올려라. 루나를 불러. 루시펠과 아스모딘도 긴급 대기시켜라. 여차하면...레비즈 포를 쏠 수 있도록 준비도 해두고."

"알겠습니다."

"내가 직접 마중을 나가도록 하겠다."

적은 이미 던전에 들어왔다. 무슨 방법을 쓰고 있는 건지는 몰라도, 천장에 CCTV 처럼 배치해놓은 슬라임들을 정확히 제거하며 중앙 통로를 향해 직진으로 걸어오고 있다.

"누군지는 몰라도 화끈한 새끼로군."

나는 페-도를 들고 마중을 나갔다. 적이 어떤 존재이든 나는 내 여자를, 내 던전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했다.

저벅, 저벅.

통로를 달려, 사거리 앞에 두 발을 디디고 섰다. 통로 반대편에서 낯선 남자가 신성력 가득한 성검을 든 채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흐, 허허허."

낯이 익다. 절로 헛웃음이 나온다. 시스템이 적의 정체를 알려주기도 전에 이미 나는 본능적으로 놈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두근, 두근.

동시에 심장이 떨리기 시작했다. 죽음의 공포가 아닌, 환희와 희열의 떨림이 내 전신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만들기 시작했다.

"어떻게 여기에 찾아왔는지는 모르지만,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일단 말하도록 하지."

상대도 나를 눈치챘는지 통로 맞은 편에서 나오자마자 걸음을 멈췄다. 로브 아래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리는 것이 한 눈에 보였다.

"파후우----! <라스푸틴>-------!!"

사자후를 내질렀다. 페-도 색스를 놈에게 겨누며, 자지에 흐르는 문신의 힘조차 모두 팔에 집중했다.

"그 상대는--?!!"

"......큭."

놈은 입꼬리를 비틀며 기괴하게 웃더니.

"트랄--<타우러스>----!!"

어디서 주워왔는지도 모를 성검을 들고,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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