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7회
122일
"흠흠흠. 혼란하다, 혼란해."
"당신께서 이 혼란을 바란 건 아니십니까?"
"글쎄. 애초에 서로 꼬일 대로 꼬인 녀석들이 한 자리에 모였으니 이럴 법도 하지. 꼭 내 탓은 아니야?"
"하지만 당신께서 만든 판인 건 틀림없습니다."
"아니지, 아니야.. 지들 좆대로 생각하고 지들 좆대로 움직이니까 상황이 정말 좆같이 되었을 뿐이야. 내 말이 틀려?"
"...당신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그래도 덕분에 재미있네. 어떻게 될 지 진짜 모르겠어. 나 진짜 이런 상황 처음이거든?"
"당신께서 기뻐하신다면 저도 행복합니다."
"그래? 응? 아...얘 또 나한테 기도하네."
"'그' 말씀이십니까?"
"얘는 나 믿지도 않으면서 왜 나한테 기도 올리고 지랄이람."
"모두가 당신을 칭송하기 때문입니다."
"에이, 귀찮게. 얘, 리엘. 지난 번처럼 네가 대충 한 마디 던져줘. 나는 그냥 누워서 구경이나 할란다."
"당신께서 바라신다면."
"...들으라, 나의 아이야."
* * *
"저희끼리라도 가죠."
성녀는 트랄의 손목을 붙잡고 잡아끌었다. 하지만 트랄은 꿈쩍도 하지 않고 제자리에 버텼다.
"강압적이야!"
"제멋대로야!"
트랄의 어깨에 앉은 두 요정은 재잘거리며 성녀의 행동을 힐난했다. 트랄이 만약 힘이 약했다면 분명 성녀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을 것이다.
"이므신할이 이 상황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리면 안 되겠는가?"
"예. 여기는 이므신할에게 맡기고 먼저 가자는 거예요. 안 될 게 뭐 있어요? 적재적소에 적절한 병력을 투입하는 것이 전투의 기본이라던 그 잘나신 형제의 말씀은 잊으셨나요?"
"끙...."
트랄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형제 운운하는 성녀의 말에 트랄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확실히 형제라면...."
"이므신할이 성검 비르고가 있는 장소를 알고 있는 거지, 꼭 이므신할 '레오'가 비르고에게 갈 필요는 없는 거잖아요? 후작성은 이므신할에게 맡기고 저희는 지금 당장 비르고를 찾으러 가자는 거예요."
"장소를 알았다고 한들 그곳에 있다는 보장은...."
"비르고 영지에 성검 비르고가 있는 게 당연한 거 아녜요?"
트랄은 또 말문이 막혔다. 성검의 용사가 있는 곳은 각양각색이었지만, 성검을 처음 움켜쥔 장소는 그 이름에 맞는 지역이었다.
"왜 그렇게 급하게 움직이려고 하는 거지?"
"여기서 밍기적 거릴 이유도 없죠."
"...성녀가 이곳을 갑자기 떠난다면 사람들이 혼란스럽지 않겠나?"
"몰래 나가면 돼요. 애초에 성녀가 이곳에 들어온 것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성녀는 몹시 초조해보였다. 마족들의 땅이 된 비르고 영지에 무작정 들어가자고 하는 것 만으로도 성녀가 상당히 조바심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해가 안 되는군. 왜 그렇게까지 급하게 움직이려고 하는 거지?"
"...계시가 있었어요. 레비즈 안. 사흘 내로 성검 비르고의 주인을 찾지 못하면 레비즈가 죽을 거래요."
"그런 계시가 있었다고?"
"제게 직접 전해진 거예요."
트랄을 바라보는 성녀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둘은 서로를 노려보며 한 치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래, 그대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결국 고집을 꺾은 건 트랄이었다. 아무리 트랄이 강하다고 한들, 성녀가 한 번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쉽게 꺾기는 어려웠다.
"알았네. 출발하도록 하지. 그대들도 도와다오."
"음...저건 싫지만."
"당신이 도와달라고 하면!"
"......예전부터 느낀 건데요."
성녀는 그녀답지 않게 대놓고 인상을 썼다.
"저 마음에 안 들어요?"
"응!"
"진짜 싫어!"
"......."
쌍둥이 성검 제미니의 주인들이 대놓고 성녀를 향해 혀를 내밀었다. 성녀가 인상을 팍 쓰자 둘은 트랄의 뒤로 몸을 숨겼다.
"...하아. 제가 뭘 잘못했길래."
"글쎄. 전생에 악연이라도 있던 게 아니겠는가?"
"전생이요? 전생은 무슨. 됐어요. 비가 개면 출발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둬요."
성녀는 트랄의 손목을 놓고 몸을 돌렸다. 밖은 여전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는 가운데, 성녀는 검지와 중지로 입술을 쓸며 벽에 몸을 기댔다.
"......하아."
성녀의 눈에는 레비즈를 향한 근심과 걱정이 서려있었다.
그리고 성녀의 근심과 걱정과는 별개로.
끼이익.
"...저 년 지금 뭐하는 거야?"
봉쇄된 문 너머로, 이므신할이 성문을 열고 직접 밖으로 뛰쳐나갔다.
* * *
"정지. 멈춰라."
이므신할은 날카로운 검을 바닥에 꽂고 무리의 앞을 막아섰다. 짐마차를 끌고 온 이들의 행색은 아주 멀리서 온 상단처럼 보였다.
"어디서 온 자들이지?"
"...저희는 사지타리우스 백작령에 적을 두고 있는 아틀라스 상단이라고 합니다."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금발의 여인이 이므신할에게 꾸벅 허리를 숙였다. 여인의 명찰에는 '릴리'라는 이름이 박혀있었다.
"아틀라스? 처음 듣는 곳인데?"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상회입니다. 사실...이번이 첫 상행이죠. 책임자 되십니까?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이번 상행의 책임을 맡은 릴리라고 합니다."
"이므신할 레오 후작 대리."
"......?"
릴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므신할이라는 이름은 분명-"
"뭐야, 사지타리우스까지 내 위명이 자자하나? 하긴, 내가 좀 대단한 짓을 저지르고 사라지기는 했지."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후작 각하."
릴리는 다시 한 번 더 허리를 숙였다. 아래로 90도 내려간 그녀의 허리는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괜찮다. 나는 후작이 아니야. 잠깐 상황이 안 좋아서 대리로 하고 있지.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지금 성 안에는 못 들어간다."
"예?"
"못 들어간다고 하면 못 들어가는 줄 알아. 그럼 이만."
"자, 잠시만요!"
릴리는 급히 이므신할에게 달려갔다.
"이번 상행에 저희 상단의 운명이 걸려있습니다! 저희가 뭔가 잘못했습니까?"
"성 내부에 전염병이 발생했다. 신성력으로도 해결이 안 돼. 따라서 외부인을 들일 수 없는 상황이다. 됐지?"
"아...."
너무나도 짧은 설명이었지만 릴리는 금방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전염병인데 신성력으로 치유가 되지 않는다? 걸리면 100% 병이난다는 말이나 다름 없었다.
"정 물건을 팔고 싶으면 여기서 팔아. ...아니지, 그러면 사람들이 여기까지 와야하니까.... 쳇. 물건 보기나 보자. 뭘 가지고 온 거야?"
"이, 이겁니다."
릴리는 급히 수레에 차곡차곡 쌓인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하얀 순백의 천으로 된 물건에 이므신할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이건...?"
"옷입니다. 저희 아틀라스 상회는 의류를 전문으로 취급하며...."
"그냥 옷이 아니네? 내의...?"
"아, 그건."
릴리는 상자 안에 든 옷을 꺼내 펼쳤다. 면처럼 보이는 재질은 면보다도 더 보드라워보였다.
"아아, 이것은 '메어리야스'라고 하는 것입니다."
"메어리야스...? 뭔가 아닌 것 같은데...?"
"디자이너가 직접 붙인 이름입니다. 저희 상회에 전속으로 근무하는 디자이너분이 직접 붙인 이름이죠. 그 외에도...."
릴리는 수레에 쌓인 여러 의복을 소개했다. 대부분 사람들이 일상 생활에서 안에 받쳐 입을 수 있는 옷들이었다.
"음...."
이므신할은 잠시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고뇌에 잠겼다. 그녀의 눈길은 수레 구석에 쌓여있는 종이상자에 꽂혔다.
"이건?"
"...남들 보는 앞에서 꺼내기는 조금 그렇습니다만."
"괜찮아. 뭔데?"
"...이겁니다, 이거."
릴리는 얼굴을 붉히며 제 고간을 가리켰다. 이므신할은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상자의 내용물을 꺼냈다.
"와...예쁜데?"
이므신할의 손에는 순백의 삼각형 천이 들렸다. 상당히 정교한 수가 놓인 천은 분명 여성용 속옷이었다.
"이거 얼마나 있지?"
"수레마다 각각 있습니다."
"음...가격은 대략 어느정도 팔려고 하는지? 수레 한 대를 판다고 하면."
"...한 대당 천 골드 이상은 받아야합니다."
"그래? 어...잠깐만."
이므신할은 허공에 손을 집어넣었다. 아공간을 완벽하게 다루는 이므신할의 마법 실력에 릴리는 몸이 굳을 정도였다.
"이거로 계산 가능해?"
"...마석?"
"어. 상급마석이야."
이므신할의 손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상급 마석이 놓여있었다. 척보기에도 상당한 마나를 품은듯한 마석은 한 두개가 아니었다.
"이런거 나한테 엄청 많은데 어때? 이거랑 수레 전부 거래를 하자."
"...마석으로 대금을 치르실 생각이십니까?"
"안 될 것도 없지."
이므신할은 굳게 닫힌 문을 뒤로 곁눈질했다. 마치 자신과 거래를 하지 않으면 더이상 기회는 없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알겠습니다. 마석과 교환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고작 마석 하나로 수레 하나를-"
"당연히 아니지. 내가 이래봬도 마석 거래 시세를 빠삭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짤랑짤랑. 이므신할은 거대한 가죽 주머니 안에 마석을 집어넣고 릴리에게 건넸다.
얼핏 봐도 수 십개는 되어보이는 양은 릴리가 생각하기에 충분한, 아니 오히려 더 웃돈을 함께 준 수준의 양이었다.
"상급 마석 108개. 깔끔하게 100개 맞추려고 했는데 8개는 수레당 2개씩 덤으로 준 거야. 우리 후작성 상황에 옷이 엄청나게 많이 필요하거든."
"설마 수의로 사용하시려는 건...?"
"아, 아냐. 죽는 사람은 없어. 오해하지마."
릴리의 추궁에 이므신할은 손을 흔들며 말을 막았다.
"잘 사용할게. 주민들 지금 속옷 빨래하느라 한창 바쁘게 몽둥이질 하고 있거든."
"도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까?"
이들을 구금하지 않는 이상 후작성의 상황은 주변에 퍼지게 될 것이다. 이므신할은 볼을 긁적이며 릴리의 질문에 답했다.
"......시도 때도 없이 섹스를 외치고 다니는 저주에 걸린 사람들?"
틀린 말은 아니었다.
* * *
"전염병이 터졌을 때 가장 많이 소비되는 것이 무엇인 지 아느냐?"
"포션입니까?"
"...천이다. 피를 닦든 고름을 짜내든 아니면 무슨 조치를 취하든, 천이 가장 많이 사용되지."
거즈나 붕대같은 외상 치료 도구들이 발달되어있지는 않지만, 그 역할을 하는 물건들은 많다.
아무리 신성력이 모든 병을 해결해준다고 한들, 신성력의 치료를 받기 위해 돈을 내야한다면 민간에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리고 뷰릇뷰릇 싸지르는 걸 정리하는 것도 천이 필요하지."
땀과 분비물로 젖어들어가는 침대 시트도 갈아야 할 것이며, 냄새가 밴 의복도 환복해야 할 것이다. 특히 아래는 몇 시간에 한 벌 꼴로 갈아입어야 할 정도로 젖을 것이다.
"속옷을 안 사고는 못 배길 거다. 흐흐흐."
"만약 전염병으로 인해 성 출입을 금지하면 어쩌죠?"
"...그럴 때는 밖에서 죽치고 있으라고 했다. 물건을 못 팔면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식새끼들 먹일 밥도 못 산다고 눈물을 흘리라고 했지."
우리는 옷을 팔고 막대한 이윤을 챙길 것이다. 추기경이 이끄는 성기사단은 적절히 옷들을 배분하며 전염병을 널리 널리 확산시킬 것이다.
"에일라야, 나는 거기에 한 가지 더 작전을 짜뒀다. 무엇이겠느냐?"
"옷에 바르신 거 아닙니까?"
"정답이다!"
에일라의 말대로 나는 옷에, 정확히는 팬티의 국부에 발정마액을 발랐다. 그냥 보거나 입을 때는 모르겠지만, 입고 난 이후부터 몸이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할 것이다.
"의류에 의한 추가 감염. 이것이 내가 준비한 세 가지였지. 흐흐흐. 릴리가 상단 대표 역할을 해줘서 천만다행이었지, 아니었으면 두 개 가지고 계속 작전을 똑같이 굴려야했어."
릴리는 충분히 '사지타리우스 백작령에 적을 둔 아틀라스 상회의 상단 대표'를 연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니무에가 그린엘프가 된 이상, 우리 군단에서 릴리만큼 인간으로서 활약할만한 인재가 많지 않았다.
"새삼스럽지만 우리 군단은 인간이 거의 없군."
"인간들도 다른 존재로 합성하시잖아요."
"그래. 인간을 그만두게 하고 있지."
나는 에일라를 끌어안았다.
"너는 어떻게 하고 싶으냐?"
"...왜 제 허락을 구하려고 하십니까?"
에일라는 나를 끌어안으며 나를 토닥였다.
"후작성은 기다리기만 하면 우리의 손에 떨어질 것이다. 그 동안 시간은 많이 남아있지. 에일라."
"...네."
나는 그녀의 앞에 그녀를 위해 준비한 물건을 꺼내들었다.
<환생결정>.
"이건 너를 위한 것이다. 생각해보니...네 첫 처녀를 아주 못되처먹은 방법으로 가져가버렸지."
"......5성의 처녀를 그냥 번쩍 들었다가 아래로 찍어버리셨죠."
"그래. 나에게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를 주겠느냐? 네가 바란다면 너를 당장 그린엘프로-"
"주인님."
에일라가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막았다.
"저 말고 다른 인간 여자를 취하시려고 하시는 겁니까?"
"...흐흐, 아니지. 알았다. 던전으로 가자."
나는 에일라를 번쩍 안아들고 포털을 넘었다. 에일라는 내 목에 팔을 걸며 싱긋 웃었다.
"우리 군단 최초의 6성이 태어나게 되겠군."
에일라 아리에스, ★★★★★.
<라스푸틴 x 에일라 아리에스> 던전 주인과 공주기사의 결합
# 예상결과 : 에일라 아리에스
에일라 아리에스(★★★★★★, 0.56%).
# 환생결정 보정 예상결과
에일라 아리에스(★★★★★★, 100%).
"다시 나한테 처녀 바칠 준비 됐어?"
"물론입니다. 주인님. 제게 다시 한 번 당신께 처녀를 바칠 영광을...♥"
나는 나의 동정을 앗아간 이 사랑스러운 공주 기사를 인류 최강으로 만들 것이다.
"출발하죠."
"그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