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5회
122일
쏴아아.
비가 내린다. 그리 무거운 비는 아니지만, 깃털이 빗방울에 젖을 때마다 하피들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야했다.
"후우, 후우."
하피 부대를 이끄는 하르퓨이어는 거친 호흡을 가다듬으며 날개를 열심히 퍼덕였다. 그들이 날개를 최대한 많이 펄럭거려야만이 후작성 점령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아흣, 흐으읏...!"
하르퓨이어는 아랫배가 쑤시는 감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자궁이 내려앉으며 남자를 강력히 원하고 있었다. 그건 하르퓨이어 뿐만 아니라 모든 하피들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들은 군단장의 특명을 완수하기 위해 발정을 참고 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하르퓨이어가 가슴골 사이에 집어넣었던 유리병을 하나 뽑아들었다.
"한 번 더 살포 개시!"
하피들은 서로의 날개에 유리병 안에 든 민트초코색 발정마액을 뿌렸다. 깃털에 묻은 발정마액은 날갯짓고하 함께 빗방울 속에 튀어 사라졌다.
퍼드득, 퍼드득.
"동쪽으로 날게요! 모두 따라와주세요!"
하르퓨이어가 선두에서 하피들을 인도했다. 하얀 날개에서 떨어지는 발정마액은 빗방울과 함께 지상에 떨어졌다.
투두둑.
민트초코액이 비처럼 후작성 전체를 덮었다.
"하으읏! 대장님, 이이상은 무리에요! 아, 알이 나올 것 같아요!"
"뭐?! 알 낳을 것 같은 사람들은 참가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 그게...!! 진짜 알이 나올 것 같다는 게 아니라, 알 낳는 수준으로 발정하게 될 것만 같은...히이익!!"
"칫, 알았어요! 모두 후퇴! 잠시 진정한 뒤에 다시 날아오르도록 하겠습니다!"
하피들은 후작성의 상공을 떠났다.
날씨도 상당히 우중충하고 워낙 높은 곳에서 날개를 펄럭였기에 후작성의 사람들은 그 누구도 하피들의 공작을 눈치채지 못했다.
따라서.
"이 양반아, 빗물 받아서 어디다가 쓰게?"
"이게 다 여신께서 주시는 은총이야. 고기 먹고 이걸로 입 헹구면 캬아. ......비가 좀 이상한데?"
"그러길래 왜 빗물가지고 입 헹구고 그래?"
"아니, 그런 게 아니섹스!!"
섹무새 증후군의 집단 감염이 시작되었다.
* * *
<레굴루스 성 방문객용 별실.>
"와...재앙이다."
성녀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민트초코 향의 비에 코를 막았다. 향이 옅기는 하지만 성녀는 분명히 그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세상에는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법이지."
"트랄."
끼이익. 성녀에게 배정된 방으로 들어온 트랄은 왠 남자 한 명의 멱살을 붙잡고 있었다. 사제복을 입은 남자는 눈에 핏발이 서있었다.
"성녀님이랑 섹스!!"
"걸린 듯 하군."
"바이러스 보균자를 여기에 데려오면 어떻게 해요?"
"신성력을 가진 자들은 쉽게 걸리지 않는다. 신성력 자체가 몸을 보호하는 듯 해."
트랄은 사제의 뒷덜미를 수도로 내리쳐 기절시켰다. 바닥에 쓰러지며 의식을 잃은 와중에도, 섹무새 증후군으로 인한 증상은 나타났다.
뷰릇, 뷰릇.
딱딱하게 솟아오른 사제복의 앞이 젖어들어가기 시작했다. 성녀는 방 안에서 퍼지는 밤꽃냄새에 인상을 찡그렸다.
"빨리 밖으로 빼내주세요."
"치료는 하지 않는 건가?"
"해봤어요. 이미 발정난 사람들은 해결할 방법이 없어요."
저주도 아니니 해주할 방법도 없다.
세뇌도 아니니 정신의 주박을 깨뜨릴 방법도 없다.
애초에 신성력은 그 모든 사이한 흑마법을 단번에 없앨 수 있다. 신성력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그냥 끝이나 마찬가지다.
"지금은 강간 당하지 않게 조심하는 수밖에 없어요."
"성녀님이 할 말은 아닌 듯 하네만."
"그게 현실인 걸요. 아니면 본인도 함께 발정나서 같이 짐승처럼 교미하는 방법 뿐인 걸요."
"그러니까 그게 성녀님이 할 말은 아닌 듯 하다고 말하는 걸세. 자네는 인류의 구원자 아닌가?"
"......마족을 물리치고 여신의 뜻을 전파하는 구원자지, 성욕에 미친 사람들에 대해서는 제가 해결할 방법이 없어요. 기도밖에."
성녀는 두 손을 모아 창밖을 향해 기도했다. 트랄은 기절한 남자를 문 밖으로 던지고 방문을 걸어잠궜다.
"뭐하는 거죠? 여기 제 방인데요."
"내 방이기도 하지."
"...레오 이 인간이. 따져야겠어요. 지금 뭐하는 중이에요?"
"후작 대리."
이므신할 '레오'.
성검 레오의 주인인 그녀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후작성에 복귀했다. 그리고 성기사단의 협조를 받아 성욕에 미쳐 날뛰는 사람들을 제압하여 감옥에 집어넣고 다녔다.
"추기경이 성기사단으로 분명 개수작을 부렸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성기사단의 협조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인 거지."
"음...고양이 손이라도 빌리자는 건가요."
후작가의 기사단이 없는 이상, 후작성 전체를 관리하려면 성기사단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했다.
이므신할은 복잡한 얼굴로 사방을 뛰어다니며 성검의 신성력을 뿌려 섹무새 증후군을 진정시키느라 전전긍긍했다.
"성녀여.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
"뭐예요?"
"퀘르벨스 추기경은 정말로 악인인가?"
트랄의 질문에 성녀는 고개를 들어올리며 시선을 맞췄다. 표정없는 성녀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무슨 대답을 듣고 싶으신 거죠?"
"나의 직감과 그대가 알고 있는 바가 맞는가 확인하려는 것이다."
"당신의 직감이 엇나가다니 별일이네요. 아니면 추기경이 당신의 직감을 속일 만큼 대단한 사람이라는 거죠. 퀘르벨스 추기경은 들었다시피 이단심문관이에요. 금기를 범한 이를 잔혹하게 화형시키는 극악무도한 자죠."
성녀는 퀘르벨스가 지금까지 해온 이단 사냥의 경우를 몇 가지 설명했다. 트랄이 듣기에도 상당히 끔찍한 고문이었고, 포르네우스 던전에서도 평균 이상에 준하는 수준이었다.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글쎄요. 대표적으로는...음...남자들의 경우 서큐버스랑 통정했다거나?"
움찔. 트랄의 표정이 기묘하게 비틀렸다.
"혹시 인간 여인의 경우, 오크와 하는 것도 금기에 들어가는가?"
"왜요? 하고 싶으세요?"
성녀는 입꼬리를 비틀며 피식 웃었다. 상체를 가볍게 앞으로 숙이며, 하얀 가슴골을 스리슬쩍 드러냈다.
"드디어...하실 생각이 드셨나?"
"성녀가 금기를 범해도 되는 건가?"
"여신께서 인정하신 경우라면 문제없지 않을까요? 뭐...솔직히 말해서 저도 당신이 싫지는 않고."
"흥미없다."
트랄은 성녀로부터 한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성녀도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며 거리를 좁혔다.
"만약에 여신께서 저보고 당신과 섹스하라고 계시를 내렸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건 네게 내려진 계시지, 여신께서 나보고 한 말이 아니지 않나."
"...와, 이건 좀 충격인데. 혹시 형제가 이름이에요? 생이별한 아내?"
"형제는 형제일 뿐이다. ......형제가 여자로 태어났다면 확실히 그럴 존재가 되겠지만...크흠! 아무튼 나는 너와 할 의무도 생각도 없다."
트랄은 단호히 선을 그었다. 이이상 다가오면 성검을 휘두르겠다는 눈빛에 성녀는 두 손을 들며 물러섰다.
"알았어요, 알았어. 칫, 쌍둥이 요정이랑 다른 여자인간들 상대로는 어떻게 하나 봅시다."
"이참에 말하지만 나를 범할 수 있는 건 나보다 강한 여자 뿐이다."
"흐~응. 그러시구나~"
성녀는 입꼬리를 비틀며 창으로 몸을 돌렸다.
"뭐...그건 나중의 재미로 하고. 그래서 이번에는 어디에 있어요, 성검의 용사. <비르고>죠?"
"그래. 비르고까지 찾는 게 나의 임무다."
"그 뒤는요?"
"그 뒤는-"
덜커덩. 복도 쪽 창문이 열리며 두 요정이 안으로 들어왔다. 트랄의 양 어깨에 앉은 두 요정은 급히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비르고>의 흔적을 찾았어!"
"던전 안에 있는 것 같아!"
"던전?"
"그래! 여기서 조금 멀리 떨어져있는 던전이야!"
* * *
<아스타로트 던전.>
"하피들이 발정났어? ...그건 생각 못했군. 미약을 퍼뜨리다가 미약에 중독되다니."
하피들이 공중에서 살포한 발정마액은 그린엘프들을 매개체로 하여 빚어낸 것이었다.
다른 세 종류의 발정마액과 달리 민트초코향 발정마액은 쉽고 빠르고 대량으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효과는 인장을 통해 만들어낸 마액보다는 덜했지만, 양으로 커버할 수 있었다.
"추기경도 안에서 뿌렸겠지?"
"성기사단에서 움직이면서 작업을 할 겁니다. 우물에 내용물을 떨어뜨린다거나...교회에 나눠주는 성수에 몰래 섞는다거나."
한정된 양을 가지고 있는 추기경과 달리, 우리는 대량의 발정마액을 후작성 전체에 뿌렸다. 비가 내리는 틈을 타서 뿌렸기에 들킬 염려도 없었다.
"빗방울에 희석된 것만 맞아도 바로 자지가 설텐데...흐흐흐."
"효과가 많이 강하기는 하죠. 주인님께서 명명하신...민초향이 효과가 가장 떨어지는 발정마액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그러게. 이제부터 시작인데 고작 이걸로 놀라면 안 될텐데. 흐흐흐, 1페이즈는 하피들이 열었지. 이제 2페이즈는 슬라임들의 차례다."
미약테러에 있어서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슬라미아 공병대는 이미 작전에 들어갔다.
"강물에 미약을 풀어버린다? 사람들이 사는 주변에 미약을 풀어버린다? 그건 이제 시시하지. 후작성을 상대로 하는 만큼, 더 업그레이드 된 방법으로 공략할 필요가 있다 이거야. 레인 오브 민트초코 처럼 말이지."
"준비는 끝났습니다. 실행만 하면 됩니다."
"그래. 그럼 곧장 시작하지."
전염병 확산은 이제 막 2단계에 접어들 뿐이었다.
* * *
"어머나...부끄러워라."
쟈르질 바그에트로는 현관문을 꽁꽁 걸어잠근 채 자신의 집 2층의 창문 너머를 확인했다.
여보, 나 오늘 씻고 올게.
뭐? 씻는 다니? 왜?!
쿵떡쿵떡!
맞은 편 앞집에서 들려오는 떡방아 찧는 소리에 쟈르질은 공포에 질렸다.
"쟤도 걸렸구나...섹무새 증후군."
불과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남편이 제 구실을 못하니 뭐니 하며 흉을 보던 아낙이 남편을 덮쳐 위에서 올라타고 있다.
"저러면 남편한테도 옮을텐데."
아마 저 부부는 하루종일 집에서 안 나오지 않을까. 쟈르질은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주저앉았다.
"...하아, 나는 걸리지 말아야지."
부부나 연인이 있는 이들은 큰 문제가 없다. 걸려도 찐하게 사랑을 하루 나누고 나면 몸이 달라져 있으니까.
하지만 쟈르질 처럼 혼자 사는 여인에게는 섹무새 증후군은 공포나 마찬가지였다. 성행위에 대해 일절 모르는 숫처녀도 암캐로 만들어버리는 저주에 쟈르질은 직장도 나가지 않고 문을 꽁꽁 걸어잠궜다.
"교회가 제일 먼저 터졌으니...쯧쯧."
무슨 병이 생기면 모두 교회로 간다. 하지만 그 습관과 상식 때문에 많은 이들이 교회에서 전염되었다.
최초에 걸린 이들은 증상이 가라앉았다고 하지만 계속 교회의 지하에 격리중이다. 그리고 그들의 옆에는 최초 발병자로부터 옮은 가족들과 사제들이 격리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신성력이 아무 쓸모가 없네...."
과연 정말로 흑마법에 의한 일일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사라진 전대 레오 후작, 이므신할이 성검과 함께 귀환했다고 한다. 과연 그녀가 이 혼란을 잠재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일단 혼자서 조심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절그럭!
움찔. 밖에서 무언가 소리가 들렸다. 쟈르질은 조심스레 아래로 내려가 문을 열었다.
"......!"
은화가 조금 들어있는 주머니가 바닥에 떨어져있다. 누군가가 흘리고 간 듯 사방에 흩어져있었다.
"......흠, 흠흠."
쟈르질은 주변을 급히 살펴 몰래 밖으로 빠져나왔다. 비를 맞지 않게 로브로 머리를 덮은 뒤, 은화 주머니를 챙겨 바로 집안으로 들어와 문을 잠궜다.
"어머나...세상에. 이게 몇 실버야?"
반짝이는 은화에 쟈르질은 눈이 반짝거렸다. 가짜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누가 흘리고 갔는 지는 몰라도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애초에 흘리고 간 사람이 나쁜 거지. 아아, 여신님. 감사합니다."
주머니 안에는 2주일간 일을 하지 않아도 간신히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의 은화가 들어있었다. 쟈르질은 손으로 하나 둘 은화를 세고는 주머니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려고 했다. 주머니는 흑색의 비단같은 재질이었다.
"어머, 근데 이거 재질 되게 좋...."
움찔.
아랫배가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쟈르질은 손이 벌벌 떨리고 다리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어...어?"
설마 잠깐 나간 것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고? 쟈르질은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 아으...안 되는데...?!"
쟈르질의 손이 서서히 아래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아무 남자에게나 다리를 벌릴 수는 없었다.
"이, 이러면...!"
순간. 쟈르질의 눈에 테이블 위에 올려진 딱딱한 바게트빵이 들어왔다. 그 옆에는 내용물을 전부 토해낸 검은 은화주머니가 남아있었다.
"......흐으윽!"
쟈르질은 물건을 급히 챙겨, 2층의 침대로 달렸다. 너무나 급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그녀는 자신이 은화 주머니를 주웠던 흙바닥이 꿈틀거리는 걸 눈으로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