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비만 오크-489화 (488/800)

489회

113일 추기경의 충격적인 말도 잠시.

추기경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든, 중요한 건 그가 우리 군단의 재산을 늘려줄 좋은 거래처라는 것이다.

"미리 가져온 대로 지불하도록 하겠습니다. 대금은 마석으로 지불하도록 하겠습니다."

"여신교단에서 마석을?"

"이교도를 상대로 모은 마석이 꽤 됩니다. 후후."

스타킹 개당 중급 마석 3개. 처음 우리가 산정했던 것 이상의 엄청난 가격이었지만, 수도에서는 거의 상급 마석에 준할 정도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수도까지 가서 물건을 팔 수도 없으니.'

대항해시대 시절 후추가 인도에서는 상대적으로 값이 덜한 편이어도 유럽에서는 금보다 더 가치가 있던 물건이듯, 지금은 이렇게라도 거래를 하는게 가장 이득이었다.

'후작보다 더 비싸게 매입해주는 것도 있고.'

솔직히 말해서 후작이 건네주기로 한 생필품은 크게 의미가 없었다. 이제 우리 군단에 대장장이들이 합류한 만큼, 기존에 없던 물건들은 만들어내면 그만이니까.

"아참. 군단장님께 특별히 선물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선물?"

추기경은 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내게 건넸다. 노란 봉투 안에는 제법 두툼한 종이가 들어있는 듯 했다.

"나를 돈으로 살 셈인가?"

"돈이 아닙니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돈보다도 더 가치있는 물건이지요."

"...흠?"

궁금증에 나는 봉투를 열었다. 그리고 안에 있는 흰 종이를 펼쳤다.

"이, 이것은?!"

"여신교단의 사제복을 만드는 도안입니다. 평사제부터 고위사제까지 모든 도안을 모아왔습니다."

"......내가 그대를 오해했군. 이름만 듣고 상당히 위험한 존재인 줄 알았어."

상당히 위험한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추기경은 인류에게 있어서 위험한 존재였다.

'정말로 여신의 뜻을 따르고 있는 걸까?'

아무리 여신이 나를 암암리에 도와주는 것 같다고 한들, 여신교단의 추기경이 스스로 교단을 무너뜨릴 각오를 하면서 나를 도울 이유는 없을 것이다.

여신의 뜻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

'그래도 이용할 수 있는 건 이용해야지.'

나는 봉투안에 도안을 넣었다. 이것은 이제 코스프레의 손에 들어가 새로운 의복으로 만들어질 것이다.

"한 가지 물어보도록 하지."

"말씀하시지요."

"수녀복 옆에 옆트임을 넣어서 맨다리를 드러내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불가합니다."

추기경은 단호한 목소리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연히 내 심사가 뒤틀렸다.

"꼴알못이군."

"그렇지 않습니다. 그로 인한 파급효과가 두려울 뿐입니다."

"파급효과?"

"그런 위험한 것을 도입했다가 행여나라도 여사제들 다리 보려고 교단에 오는 이들이 있으면 교단이 부흥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여신의 뜻을 따르는 자. 결코 그럴 수는 없지요."

"......."

꼴알못이 아니었다. 오히려 꼴림의 미학을 알고 있기에, 추기경은 옆트임을 도입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럼 우리는 옆을 터야겠군. 스타킹이 보이게 해야하니 말이야."

"색은 흑백의 대비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얀 사제복 안에는 검은 팬스가를, 검은 사제복 안에는 흰 팬스가를."

"여신께서 그대를 인도하시는 게 맞는 것 같군."

"후후. 세상 그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여신께서 교단의 몰락을 바라고 계신다는 걸. 아아, 여신의 뜻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이가 마족이라니. 모두가 알게 되면 통탄하게 되겠지요."

추기경의 말은 상당히 흥미로웠지만 그는 그 이상 말하지는 않았다. 마치 이 이상은 스스로 알아내라고 하는 듯 한 눈빛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있나? 스타킹을 더 만들어달라고 하면 더 만들지."

"위험합니다만, 꼭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있습니다."

추기경이 목소리를 낮췄다.

"이 일은 이곳에 있는 이들 이상으로 더 퍼져나가선 안 됩니다. 부디 여신님께 맹세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마족인데?"

"여신께서 굽어살펴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음...좋다. 마왕님과 여신께 맹세하도록 하지. 아, 물론 우리 참모진까지는 이야기 할 수밖에 없다. 그건 이해해라."

"그 정도야. ...흠흠."

그는 이전까지의 이야기가 모두 지금을 위한 사전작업이라는 듯, 아주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성녀를 겁탈하여 주십시오."

"최고의 의뢰로군. 그 의뢰, 수락하지!"

"이왕이라면 임신까지 완벽하게 부탁드립니다."

"내 오늘부터 그대를 형제라고 불러도 되겠는가?"

추기경은 옅게 미소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사랑을 널리 펼쳐라. 여신의 뜻을 따르는 이를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나는 추기경과 계약을 맺었다.

* * *

잠시 뒤.

추기경과 그를 따라온 바이스 부기사단장에게 대량의 스타킹을 건넨 우리는 추기경이 한 발언들을 곰곰이 곱씹었다.

"둘 중 하나로군요. 여신이 진정으로 자신을 따르는 교단을 몰락시키기를 바라거나."

"아니면 퀘르벨스 추기경이 자기 좋을대로 여신의 뜻을 운운하며 교단을 파멸시키기를 바라거나."

"어느쪽이든 우리에게 있어서는 좋다는 거지."

퀘르벨스가 작정하고 교단을 무너뜨리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분명 우리 마왕군과 손을 잡는 건 좋은 작전이기는 하다.

"스타킹은 그냥 연막에 지나지 않았던가?"

"겸사겸사 아니겠습니까? 스타킹 하나에 금보다 더 가치가 있다면 교단에서도 막대한 이득을 취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교단을 망하게 하려고 한다는 거랑 배치가 되지 않아?"

"금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교단의 이미지를 만드는 걸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금기를 저지른 이들에게 면죄부를 팔아서 죄를 사하도록 하고 있으니까요."

"과연.... 앞에서는 고결하고 검소한 척 하면서 뒤에서는 부정부패가 만연한 교단의 이미지를 쌓아올리는 건가."

스스로 부정부패한 교단의 이미지를 만들어 불만을 고조시키고, 결과적으로 교단을 망하게 한다.

"솔직히 잘 이해는 안 가는군. 여신의 말이라고 한들 그것이 진실인 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하나는 확실히 알겠다."

"놈은 성녀를 제거하고 싶어합니다."

"그래. 그런 의뢰라면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지."

성녀를 먹는다.

성녀를 임신시킨다.

그걸 영사석이든 뭐든 어떤 방법으로든 세간에 퍼뜨리면 나머지는 추기경이 다 알아서 할 것이다.

"잘하면 레비즈도 완전히 망가뜨릴 수 있겠어."

자신이 유일하게 믿고 따르는 성녀가 내 앞에서 암컷이 되어 내 자지에 깔리게 되면 레비즈는 어떤 얼굴을 하게 될까. 생각만해도 짜릿해서 지려버릴 것 같다.

"어이쿠, 미안하다. 쌀 뻔 했어."

나는 로도페리를 토닥였다.

"그래서 지금 성녀는 어디에서 뭘 하고 있지?"

"포로들의 말에 의하면...."

* * *

<인류연합 최전선.>

마왕군과 전투가 한창인 인류의 최전선에는 모처럼 활기가 가득했다. 지속된 마족과의 전투로 한창 힘겨운 가운데, 아주 특별한 손님이 방문했기 때문이다.

"인류 최전선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성녀님. 그리고 성검의 용사님들."

"만나서 반가워요. 오늘도 인류를 위해 힘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르바로사 공."

흑발의 성녀와 백발의 노장이 서로 마주 인사했다.

"한창 어수선한 시기에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성기사단의 건은…."

"결코 그럴 리가 없습니다. 레비즈에 대해서 잘 아시잖아요?"

"물론입니다. 마물들을 상대로 그리 열심히 싸웠던 그녀가 엘프들을 대상으로 그리 참담한 짓을 저지를 리가 없지요. 저는 성녀님을 믿습니다."

레비즈가 마녀 의혹을 받기 이전부터 성기사단이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동안, 성녀는 이미 몇 번이고 총사령관 바르바로사와 친분을 주고받았다.

"교단을 믿어주셔서 고마워요. 진심으로."

최전선의 이들 대부분 성기사단과 함께 싸운 이들인 만큼, 레비즈와 성기사단의 타락을 일절 믿지 않았다.

"인류의 일원으로서 해야할 일을 할 뿐입니다. 뒤에 계시는 분들은…?"

"아, 소개가 늦었네요."

성녀는 자신의 뒤에 서있는 남녀들을 가리켰다.

검은 로브를 입은 녹색 피부의 거한, 거한의 어깨에 벌레의 날개를 펄럭이며 앉아있는 요정족, 그리고 전신을 가리고 있는 붉고 각진 갑옷의 전사.

"<타우러스>, <제미니>, <칸세르>. 네 분 모두 성검의 용사에요."

"네 분…?"

"우리는 둘이서 하나야!"

"언니랑 저랑 같이 성검의 용사에요!"

인형처럼 작은 소녀들은 동시에 손을 들어올리며 헤실거렸다. 키가 고작 30cm도 되지 않는 두 소녀는 페어리족으로 보였다.

"이봐. 언제까지 여기서 이러고 있을 거지?"

"잠시만요, 칸세르 님. 인사 끝나면 바로 갈 거예요."

붉고 각진 투구를 쓴 장신의 여인은 초조한 듯 발을 동동 굴렀다. 유일하게 여유가 넘치는 녹색 피부의 남자는 양 어깨에 올린 두 페어리와 손장난을 치며 느긋하게 기다렸다.

"모처럼 온 김에 마왕군의 병사들을 조금 정리하고 갔으면 좋겠는데."

"오오! 역시 숲의 현자. 부디 꼭 성검의 힘을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여신교단의 본산에서 직접 여신의 인정을 받은 성검의 용사. 성검 <타우러스>의 사용자는 자신의 녹색 피부를 전혀 숨기지 않았다. 그 덕분에 총사령관은 그가 근육질의 엘프라고 생각했지, 오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타우러스 님. 지금 저희가 그럴 시간은...."

"모처럼 이곳까지 왔는데 들리기만 하고 떠나는 것은 예의가 아닌 듯 하오. 힘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는 그만큼 책임이 있는 법. 마침 저기서 우리의 방문을 마중나왔군."

뿌우우우----

높다란 성벽 위에서 나팔이 크게 울려퍼졌다. 타우러스는 자신의 성검을 들어올리며 성벽 위로 천천히 올라갔다.

"성녀님. 방문 목적이라고 하심은...?"

"그게 실은...."

성녀는 잠시 눈을 질끈 감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성검 <레오>의 사용자를 찾으러 왔습니다."

"네? 그런 자가 여기에 있을 리가-"

"있습니다. 있기에 이곳에 온 것입니다."

* * *

성벽 위.

하늘 위에 몸집이 10m는 훌쩍 넘는 거대한 드래곤이 날뛰기 시작했다. 성녀와 용사들의 방문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드래곤은 포효를 내지르며 성벽 위의 병사들을 공격했다.

"흐음."

타우러스, 트랄은 성검을 휘둘러 드래곤의 발톱을 튕겨냈다. 검면으로 발톱을 때릴 때마다 그의 검에서 은빛의 신성력이 폭발했다.

"꺄하하!"

"언니, 집중해!"

두 요정은 자신의 손에 들린 사람 손가락만한 검을 드래곤의 목에 찔러넣었다. 쌍둥이 성검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둘이 동시에 드래곤의 목을 찌르자 드래곤의 몸이 재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걸로 우리도 드래곤 슬레이어인가?"

"전사여. 저들은 드래곤이 아니다. 드래곤이 되다만 와이번이지."

콰--앙!

붉은 갑주의 여인, 칸세르는 자신의 성검을 하늘로 겨눴다. 다른 검들과 달리 상당히 특이한 형태의 성검은 석궁처럼 검날에서 신성력을 모아 하늘로 탄환을 발사했다.

퍼버벅.

하늘을 수놓은 와이번 무리가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성검의 용사들은 자신들의 방문에 맞춰 뛰쳐나온 마족들을 일거에 쓸어버렸다.

"괜찮소?"

트랄은 성벽 한 켠에 엎어진 여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전신에 상처를 입은 흑발 여인은 창백한 얼굴로 트랄이 내민 손을 붙잡았다.

"...안 도와줘도 살 수 있었어."

"와, 이번에도 여자다!"

"성검의 용사는 여자만 되는 게 규칙인가?"

"아직 본인이라고 확실하지도 않건만...쯧."

흑발 여인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성검의 용사들이 언젠가 나를 찾아오리라고 생각은 했지만...설마 여기까지 찾아올 줄이야."

"고생했소. '신탁'대로 움직일 것이오. 그녀가 올라오기 전에-"

"타우러스 님!"

성벽의 계단을 통해 성녀가 황급히 달려왔다. 네 용사는 잠시 혀를 찼다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성녀를 맞이했다.

"와이번은 모두 정리하였소."

"다치지는 않으셨죠? 다행입니다. 아, 저 분이...?"

"아, 아니. 자네는...?"

총사령관 바르바로사는 여인을 보자마자 입이 쩍 벌어졌다. 여느 길가에 굴러다니는 용병같은 복장의 여인은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므신할 아가씨...?"

"...지금까지 제 편의를 봐줘서 고마웠습니다, 바르바로사 총사령관. 그리고...제 진짜 정체를 숨겨서 죄송했습니다."

"아, 아니. 그러면...."

철컹.

여인, 이므신할 레오는 자신이 들고있던 대검을 성벽에 후려쳤다. 그러자 검이 산산조각남과 동시에, 검 내부에 숨겨져있던 장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검 <레오>의 사용자, 이므신할. 신탁에 따라 타우러스의 인도에 따라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목적지는?"

"......."

트랄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의 안에서 속삭이는 작은 목소리를 그대로 밖으로 꺼냈다.

"비르고."

"슬슬 올 것 같아."

"응. 맞아. 나도 이제 준비해야지."

"그래, 걱정하지 마. 아빠한테 해가 되는 거였으면 여신 말 듣지도 않았어."

"응. 마음의 준비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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