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3회
108일차
피비린내나는 광장.
약 100여명의 나크타에 의해 살해당한 가운데, 피에 절은 성기사들은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나크타에게 검을 겨눴다.
"모, 모두 조심해! 아직 놈은 죽지 않았어!"
끄어어.
나크타는 앞으로 고꾸라지며 쓰러졌다. 경련하듯 몸을 떨고 있고, 이미 진작에 쓰러졌지만 성기사들은 나크타를 포위한 채 가만히 있었다. 마치 안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올 것을 대비하는 양.
"주, 죽은 거 아니야?"
"그럴 리가!"
그리고 아니나다를까.
"나, 나온다!!"
푸슈우웃.
나크타의 등에 있는 혹이 좌우로 갈라졌다. 고깃덩어리로 뭉쳐진 안에서 몸이 3m가 넘는 기형적인 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악마다!!"
끄, 끄어어.
괴인의 등장에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다. 그로테스크한 외형도 물론이거니와, 그의 얼굴은 후작가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집사장...!!"
후작가의 살림을 책임지는 남자. 남작에 준하는 직위를 가지고 있던 그는 몸을 길게 늘어뜨린듯한 괴물이 되어 있었다. 전신의 피부에서 피를 뚝뚝 흘리는 괴물은 나크타의 혹에서 빠져나왔다.
끄, 끄어, 끄어어.
괴인은 후작가의 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기사들은 일제히 괴인을 향해 몸을 던졌다.
"우, 우와아악!!"
성기사들은 검에 신성력을 불어넣으며 괴물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괴물이 어떤 강력한 존재이든, 괴물을 죽이겠다는 의지가 담긴 검은 괴물의 전신을 난자했다.
끄어어....
괴물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각다귀처럼 길어진 팔을 앞으로 내뻗은 괴물은 그대로 움직임이 멈췄다.
"해, 해치웠나?"
광장의 주민들은 겁에 질린 채 성기사단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했다. 성기사들은 오히려 겁에 질린 것 마냥, 괴인을 향해 신성력의 검을 휘둘러 토막을 냈다.
서걱, 서걱!
마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부활이라도 할 것 마냥.
서걱, 서걱, 서걱!!
광장 한가운데에서 벌어진 토막극에 후작령 주민들이 공포에 빠진 가운데, 후작가의 성에서 남색 사제복의 남자가 힘겹게 걸어왔다.
"아아, 늦어버렸습니까...."
퀘르벨스 추기경은 괴인의 지척까지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혹시나 괴물이 몸을 움직이지 않을까 사람들은 걱정했지만, 추기경은 성호를 그으며 묵묵히 기도할 뿐이었다.
"흑마법에 희생된 이에게 부디 애도를...."
추기경이 묵념하자, 성기사 중 한 명이 괴인의 심장부를 검으로 찔렀다. 괴인의 몸에서 은색 빛이 뿜어져나옴과 동시에, 괴인의 몸은 발가벗겨진 노인의 몸으로 변했다.
전신이 난도질 된 그는 분명 후작가의 집사장이었다.
"이, 이건 대체...?"
"후작령의 주민 여러분. 부디 진정하고 들어주십시오."
몸을 일으킨 퀘르벨스는 사람들을 향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후작은...흑마법사들의 사주를 받아 마왕군에 후작령을 바치려고 한 이단입니다...!!"
말도 안되는 말이 여신교단의 추기경으로부터 퍼져나오기 시작했다.
* * *
영상의 내용이 다소 충격적인 것은 사실이나, 나는 바이스라는 자의 속내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새끼들 머저리인가?"
여기에 머저리가 있다. 그게 내 결론이다.
"이게 제대로 된 협상인가? 자기들 뼈를 주고 살을 취하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저희한테만 득이 되는 것 같습니다만...."
샤이탄의 말대로 거래는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이득이었다. 마녀 레비즈의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우리는 휴전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상대가 후작가에서 여신교단으로 바뀐 것 뿐.
후작가와 전면전을 치르기는 조금 난감하기야 하겠지만, 싸우면 압도적으로 패배할까봐 무서워서 비밀 협정을 맺고자 한 것이 아니다.
협정을 파기하고 우리가 쳐들어간다고 한들, 그 누가 우리에게 욕을 할 수 있겠는가.
애초에 우리는 마왕군이다. 마왕군에서 인간식 협정을 파기하고 일방적으로 깨버린다고 한들, 그로 인한 타격이 얼마나 클까?
마족이 마족했을 뿐.
다만 마족인 우리와 달리, 인간들은 그 경우가 다르다. 특히 여신교단은 더더욱 다를 것이다.
"이 놈들은 자기네 이미지 관리를 전혀 안 하는 건가?"
여신교단은 분명 전세계의 유일종교이며, 신성력이라는 여신의 존재에 따라 그 권위가 아직까지 건재하다. 그런데 이딴 걸 증거라고 들고온다? 자신들의 얼굴에 똥칠을 해도 모자랄 것을?
"이거 함정일 가능성은 없냐? 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거 고도의 설계가 들어간 함정 같은데."
"누르면 자기들이 터지는 폭탄을 줬는데 함정이라고? 세상 그런 천치가 어디있어? 차라리 추기경이 여신교단을 폭파시키려고 개짓거리 하는 게 더 설득력 있겠다."
"아, 아니면 악마의 꼬임에 넘어간 거예요! 추기경이야말로 마왕군의 끄나풀인 거죠! 저희가 모르는."
"알겠습니다. 저건 저희를 능멸하기 위해 조작된 영상일 겁니다. 저희의 판단을 망가뜨리려는 술책입니다."
나와 샤이탄, 그리고 우리 군단의 브레인들이 모두 모였지만 쉽사리 결론은 나지 않았다. 사실 결론은 대충 하나로 귀결되었지만, 그 누구도 그게 진실이라고 믿지 않았다.
"이 새끼들 빡대가리거나."
"여신교단을 스스로 파멸시키려고하거나."
"...성녀를 축출하려고 하거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경우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온 결론은 하나.
"이거 우리가 딜해도 전혀 손해가 아닌데?"
여신교단 내부의 알력다툼이 있다고 한들, 추기경이라는 자가 성녀의 실체를 이런 식으로 마왕군에게 던진 건 성녀의 정체를 만천하에 까발리겠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인 듯 했다.
"우리를 통해서 성녀가 동성애자라는 걸 퍼뜨리려고 하는 걸까?"
"그럼 여신교단의 권위는 크게 실추될 겁니다."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성녀를 축출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없죠?"
도저히 모르겠다. 상식과 지성으로 판단하기에는 퀘르벨스 추기경의 의도가 무엇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참새가 봉황의 뜻을 모르듯, 봉황도 참새의 정신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격이나 다름없다.
"이 놈들은 진짜 이걸로 우리가 거래를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럴...가능성이 높습니다."
모든 편견을 지우고 눈앞의 상황만 보기로 했다. 찝찝한 것들이 아직 밑에 흥건하게 깔려있으나, 오물 속에서 건져낸 한 가지 진실 만큼은 명백했다.
"여신교단에서 스타킹을 유통하기를 바라고 있다...? 나 진짜 이해가 안 되는데. 스타킹이 성녀를 잘라낼 만큼 위대한 물건인가?"
스타킹은 스타킹일 뿐이다. 아니면 스타킹 이상의 무언가를 우리에게서 바라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퀘르벨스라는 자와 직접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군."
"주인님, 그건 조금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위험하기야하겠지만 너희는 지금 이 상황을 그냥 넘어갈 수 있느냐? 그냥 쿨거래 하고 끝내기에는 너무 찝찝하지 않느냐?"
누가 참새이고 누가 봉황인지 알아내기 위해서는 이 판을 만든 추기경 본인과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야 나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그럼 주인님께서는 거래를 거부하시는 겁니까?"
"응? 그건 아니지. 거래는 받아들인다. 아예 저 놈에게 샘플로 배낭까지 하나 쥐여주도록 하지. 스타킹 한 열 개만 찔러서 보내자꾸나. 거래를 트겠다는 메세지로 충분할 것이다."
"......주인님? 이해하기 어렵다면서요."
"찝찝한 거지, 거래를 못할 정도는 아니잖냐."
우리는 마왕군. 휴전과 상거래라는 목적만 달성할 수 있다면, 상대가 후작가든 여신교단이든 크게 상관 없었다.
"나는 저 놈들의 생각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와 싸우지 않기를 바란다면...그저 그걸 이용할 뿐."
상대의 손에 놀아나는 거라면 언젠가 손바닥을 통째로 으깨버리면 그만. 나는 결정을 내렸다.
"일단 로도페리부터 따먹고 생각하자."
후작가+여신교단을 상대로 하는 전선은 휴전 상태로 둔 채, 우리는 사수좌 전선에 군단의 전력을 쏟아내기로 결정했다.
* * *
<약 반나절 뒤. 레굴루스 성 후작 집무실.>
"고생하셨습니다, 예하."
"형제님도 고생하셨습니다. 제가 괜히 사지로 보낸 게 아닐까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모릅니다."
퀘르벨스 추기경과 바이스 엑슈얼 부기사단장은 차를 들이키며 평화를 즐겼다. 대낮에 성의 광장에서 100여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그들은 너무나도 태평했다.
- 이단을 축출하라!
- 마녀는 어디에 있느냐!!
- 마왕군의 끄나풀이다!
바깥에는 횃불을 건 대중들이 돌아다니는 것과 별개로, 그런 상황을 만든 둘은 너무나도 태평했다. 퀘르벨스 추기경은 차를 홀짝이며 테이블 위에 올려진 스타킹을 쓰다듬었다.
"역시 마족이라도 말이 통하는 군요."
"말은 통합니다만...예하. 괜히 잘못하다가 성녀가 날뛰기라도 한다면....."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성녀에 대한 문제는 전부 제가 다 준비해뒀으니."
퀘르벨스는 낮게 웃으며 양피지를 꺼냈다.
"지금까지 성녀가 부정한 짓을 저지른 모든 증거들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면...아마 성녀의 이미지는 크게 실추될 것입니다."
"가장 큰 충격을 줄 증거를 마왕군에 주지 않았습니까?"
"그렇죠. 후후, 그게 유일한 증거이기도 하죠."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도저히 추기경 예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바이스로서는 추기경의 웃음에서 속내를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
"성녀님이 추기경 예하의 정적이라고 한들, 이렇게까지 여신교단 전체의 이미지를 먹칠하면서까지 해야합니까?"
"정적이라는 표현은 다소 어울리지 않겠지만...그저 지금은 이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군요. 이 모든 것은 여신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퀘르벨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여신에게 가장 먼저 충성을 바치고 그 다음으로 퀘르벨스에게 충성을 바치는 바이스는 복잡한 생각을 하기를 포기했다.
"저는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추기경 예하께서는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지요."
"후후, 형제님. 제 판단이 정확한 게 아닙니다. 저는 그저 여신의 뜻을 그대로 따를 뿐입니다. 여신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행동할 뿐입니다."
부욱. 퀘르벨스는 상자에서 스타킹을 꺼냈다. 검은색 스타킹의 밴드 부분에는 고급스러운 금색의 수가 놓여있었다.
"이것이 마왕군...분노의 군단에서 만든 스타킹. 과연 수도에서 유통되는 것은 싸구려라고 치부해도 될 정도로 고급스럽군요."
"예. 이것이 후작을 통해 중앙에 유입되었다면...아마 큰 혼란이 빚어졌을 겁니다."
"전쟁 중에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일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지요. 이 일에 대해서는 여신교단에서 오는 이단 심문관들이 처리할 것입니다. 성기사단은 지금처럼 후작령 안의 상황을 예의주시해주세요."
이단심문관. 듣기만해도 짜릿한 말에 바이스는 침이 꿀꺽 넘어갔다.
"본보기로 누구를 매달 생각이십니까?"
"흠, 글쎄요...."
퀘르벨스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지아비가 밖에 있는 틈을 타 시아버지를 범하여 죽인 여자라면 어떻습니까?"
"......하, 하하."
바이스는 멎쩍게 웃었다. 퀘르벨스는 차를 홀짝이며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후작은 참 운이 좋은 남자로군요. 이단으로서 화형당해 죽기 전에...며느리의 손에 의해 곱게 죽다니."
고트다이할 레오.
그는 현재 싸늘한 주검이 되었으나, 성기사단에 의해 죽음이 은폐되었다. 성기사단을 제외하고 딱 한 명 후작의 죽음을 알고 있지만, 그녀는 그걸 밖에 알릴 수조차 없었다.
"남자로서는 부러운 죽음이로군요."
후작을 죽인 범인은 다름 아닌 그녀, 엘레트라이므로. 추기경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차를 홀짝였다.
"어찌됐든...이 모든 것은 여신의 뜻대로."
추기경의 눈은 착 가라앉아있었다.
* * *
후작령을 상대로 하는 전선이 안정되었다고 판단한 나는즉시 사수좌 전선의 병력을 대인전 편성으로 재편했다.
분노의 군단 상징과도 같은 엘프, 안드라스를 제외한 전병력을 오만의 군단에 밀어넣었다. 엘프와 안드라스는 라스베가스와 본진을 지키게 되었고, 오크를 위시한 전 병력이 알로켄 던전으로 파견되었다.
"정찰은 끝났습니다. 적의 수는 대략 천. 모험가 삼백에 약간의 드워프, 그리고 백작가의 병력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질은?"
"...병사들은 그대로이며 모험가들의 평균 전력이 대략 3.5성급입니다."
"좋군."
적의 전력이 높다는 말은 우리 군단의 경험치로 환산될 가능성이 더 높다는 얘기. 처절한 전투를 통해 우리는 더욱 성장할 것이다.
"여차하면 그레모리 던전에서 전투가 이루어지는 것까지 각오해야겠군."
전투는 분명 길어질 것이다. 수성은 이제 충분히 할만큼 했고, 이제는 사수좌 전선을 무너뜨릴 차례다.
"사지타리우스 백작가를 완전히 초토화시키고, 로도페리를 내 침대에 눕힐 것이다."
"섬멸입니까?"
"그래. 학살이다. 한 놈도 살라지 않을 것이야."
여자도 죽이고 남자도 죽여라. 분노의 군단이라면 여자도 겁탈하고 남자도 겁탈하겠지만, 오만의 군단은 조금 성격이 달랐다.
"백작가의 성을 점령한다고 한들 남작령처럼 엉덩이를 깔고 앉을 생각도 없다. 백작령에 살아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게 말끔히 지워버려라."
"알겠습니다. 그럼 반격의 날은...?"
"닷새 뒤."
나는 소환시설의 위에 올라 시스템창을 열었다.
"내가 진화하고 난 다음, 내가 군기를 들고 선봉에 설 것이다."
<진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