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2회
108일차
그린엘프의 맛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
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소환 시설의 빈 자리는 응당 있어야 할 주인의 등장을 반기고 있었다.
"아아, 드디어 진화하는 구나."
5성까지 올라가기 위해 얼마나 개고생을 했던가. 포르네우스의 아래에서 3년을 구르며 70레벨 언저리까지 올렸고, 내가 만든 던전에서 100일 조금 넘는 시간동안 간신히 20레벨을 올렸다.
효율로 따지고 보면 이 100여일간의 경험치가 더 높기는 했지만, 그동안 나는 숱한 사선을 넘나들며 죽음과 맞서 싸웠다. 이제 비로소, '아스타로트'라는 이름답게 새로이 태어날 때.
<진화> 파후우 아스타로트 쿰처쿠 척을 진화시킵니다.
# 조건 : 레벨을 끝까지 올린다 ( 90 / 90 )
# 예상결과 : ????
# 진화 예정 시간 : 5일.
무려 5일. 던전 안에서 무려 5일을 코쿤 속에서 지내야 한다. 그 말인 즉슨 5일 동안 먹지도 싸지도 못하고 코쿤 속에서 조용히 눈을 감은 채 기다리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
"샤이탄, 혹시 꿈으로 접속이 가능하냐?"
"불가능할 겁니다. 주인님의 몸과 접촉을 해야하는데, 코쿤 때문에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그건 좀 아쉽군."
꿈속에서 샤이탄과 만날 수 있다면 닷새간 광란의 파티가 가능할텐데. 샤이탄과 머리를 맞대어 작전도 짜고 머리가 아파지면 배를 맞대어 휴식을 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진화는 그만큼 신성한 것이고, 던전 시스템에 있어 파종 다음으로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니까.
"앗, 파후우의 상태가!!"
나는 소환시설의 위에 올라섰다. 남은 것은 시스템의 버튼을 누르는 것 뿐.
하지만.
나는 이 세계가 나를 상대로 달콤한 꿈에 부풀게 내버려 둘 리가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더 상기해야만 했다.
"진화-"
"군단장님, 큰일났습니다!"
"야, 지금 좆됐어!"
......라스베가스에서 온 에일라와 사수좌 전선에서 온 그레모리의 분신이 동시에 포털을 통해 본진에 방문했다.
"후작가에서 성기사단이 반란을!"
"백작가에서 섬멸전을 하려고 하는 것 같아!"
...우리 군단 전체에 있어서 악재라고 할 수 있는 소식과 함께.
* * *
<사수좌 전선, 토벌대 진지.>
"모여든 사람들의 수를 봐봐. 더럽게 편안하지 않아?"
"그만큼 돈이 깨졌습니다만."
로도페리는 망루 위에서 진지에 모여든 대규모 토벌대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름 좀 날리기 시작하는 어중이떠중이부터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일류 모험가에 이르기까지, 사수좌 전선에 모인 모험가의 수는 무려 삼백에 이르렀다.
"야. 너 되게 좀생이다? 어차피 네 돈 깨진 것도 아니잖아."
"더 좋은 값에 처분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만든 장비 내가 급매하겠다는데 어쩌라고? 너한테 도움이 안 되는 것도 아니고."
로도페리는 매일같이 장비를 찍어냈다. 기존에 있던 장비들을 모두 처분하여 원자재를 긁어모았고, 잠도 자지 않고 망치를 두드려 무기와 갑옷을 찍어냈다.
그리고 그걸 비교적 저렴한 값에 대량으로 판매하여 막대한 자금을 긁어모았다. 그 자금은 사지타리우스 백작에 의해 대규모 토벌대 소집을 위한 자금이 되었고, 무려 삼백에 이르는 모험가들이 알로켄 던전의 토벌을 위해 모여든 것이다.
"던전 하나 토벌하겠다고 이런 대규모 병력을...하아."
"삼백명이 무슨 대규모야?"
"하나같이 B, A급 용병들 아닙니까. 이 정도 규모면 30위권 던전, 아니 그 이상도 노려볼만한 전력입니다."
"확실히 알로켄 던전을 상대로 하기에는 과잉전력이기는 하지. 하지만!"
로도페리는 자신의 도끼를 높이 들어올렸다. 검은 광택이 빛나는 흑요석으로 제련된 양날 도끼는 로도페리의 몸보다도 거대했다.
"이건 자존심 문제야! 알로켄 년을 쳐죽이기 위해서라면 내 전재산을 털어넣어도 안타깝지 않다고!"
"예, 예. 드워프 종족 전체의 자존심 문제겠지요."
사수좌 전선에서 죽은 드워프의 수가 무려 다섯.
그들 모두가 드워프 중에서도 숙련공이라고 불리우는 '장인'들인 이상, 드워프 국왕도 로도페리의 폭주 아닌 폭주를 말릴 방도가 없었다.
"귀쟁이 년들이 마족놈들한테 다리 벌렸잖아.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드워프들은 마왕군과의 모든 거래를 끊었다.
전쟁상인으로 인류연합과 마왕군 양쪽에 무기와 방어구를 팔아넘기며 제법 쏠쏠한 재미를 봤지만, 엘프들이 마왕군의 편에 편승하며 드워프들은 인류연합의 편을 들게 되었다.
드워프제 무기에 대한 수요는 당연히 마왕군보다 인류연합 쪽이 더 많았다. 몸 자체가 무기인 마족과 달리, 연약한 몸을 무장해야 할 인간들 쪽으로 무게가 쏠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엘프들이 마왕군의 편에 선 것이 이렇게 작용할 줄은."
"흐흐흐, 너는 좋잖아? 드워프들이 이렇게 나서서 던전도 토벌해주고."
드워프들이 인류 연합에 참가하겠다는 선봉에 로도페리가 섰다. 마침 좋은 명분도 있고, 무엇보다도 로도페리 본인이 가장 적극적으로 던전 토벌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
"공주님. 알로켄 던전 토벌하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응? 그야 당연하지. 집에 돌아가서 발뻗고 잘 거야. 그래. 싹다 때려죽이고 집에 가서 잘 거라고...흐흐흐."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은 로도페리의 눈동자에는 광기가 엿보였다.
* * *
후작가의 상황에 대해서는 공중정찰로밖에 할 수 없었지만, 나는 의외의 정보를 알아냈다.
"조 카멜. 그레모리의 부하였던 낙타 괴물이 후작가의 성 아래에서 뛰쳐나왔습니다. 모습은...저희가 아는 것과 달리 무척 흉측하다고 했습니다."
라스베가스에서 주기적으로 공중 정찰을 나선 안드라스는 그림을 통해 조 카멜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했다. 낙타의 형태를 갖추고는 있으나 그 크기가 무척이나 컸고, 역병이라도 끼얹은 것 마냥 전신에 암세포 같은 덩어리가 끔찍하게 묻어있었다.
"걔가 왜 거기서 나와?"
조 카멜은 나나 그레모리로서는 불편한 존재다. 그레모리가 타천사 발라크의 몸으로 갈아타면서 버린 성적 취향이자 흑역사 중 하나였다.
그런 조 카멜이 갑자기 하나 나타났다. 그리고 그 조 카멜은 그레모리의 부하 중 한 명이 확실했다.
"...인연소환 리스트에 하나 나타났어."
실종된 조 카멜. 처음 그레모리가 분신을 통해 내게 인사하러 왔을 때 타고 왔던 그 놈.
그레모리의 부하 리스트에는 여전히 살아있다고 되어있지만 돌아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아 나나 그레모리나 그냥 잊어버렸던 그 놈.
그 낙타 마수가 다른 곳도 아닌 후작가의 지하에서 튀어나왔다? 성기사 여럿을 피떡으로 만들고나서야 제압당해 죽었다?
"어, 음...나로서는 잘 죽었다고 해야하나?"
그레모리는 멎쩍게 웃었다.
"어차피 우리 군단에서 더이상 써먹을 애들 아니잖아? 지난번에 고기방패로 소환했던 애들 전부 죽어버렸고."
"흠...."
어떻게 죽었는 지는 묻지 않기로 했다. 그레모리의 성향을 생각하면 사인이 대충 예상이 가지만, 이곳은 그걸 따지는 자리가 아니다.
"전혀 모르겠군. 낙타괴물이 왜 그런 곳에서 나타난 건지."
"후작가에서 연구하던 게 아닐까요?"
"정 궁금하시면 부활시키는 방법도 있습니다만."
"마석 아깝다."
성기사단을 씹어먹은 괴물답게 무려 4성의 괴물이었다. 부활하기 위해서는 상급 마석이 일곱 개나 필요했고, 나는 조 카멜을 부활시키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런 놈 부활시킬 바에는 차라리 하르파스 복하사 시키고 다시 부활시키는 게 낫지. ...아, 던전 주인이라 안 되나? 아무튼."
"지당하신 말씀이야. 자지야, 과거는 모두 잊어버리자고. 응?"
그레모리는 살가운 눈빛으로 나를 쏘아봤다. 나는 그레모리의 이마를 가볍게 튕겼다.
"몸은 갈아타도 영혼과 경험은 남아있지. 걱정마라. 나는 네가 수간충 스캇러였던 것 조차도 사랑하고 있으니. 네가 여전히 수간을 바란다면, 내가 짐승이 되어서라도 너를 범해주마. 나는 네 과거조차 포용할 수 있다."
"......되게 감동적인 말인데 되게 변태같은 건 뭐지?"
"아아, 그것이야말로 '라스'이기 때문이다."
우스갯소리는 여기까지. 불안감을 내비치는 그레모리를 진정시킨 나는 다시 후작가의 상황을 살폈다.
"그래서 지금 인간 기사단이랑 성기사단이 대치 상황에 놓인 건가?"
"그렇습니다. 아스타로트 던전을 토벌한 기사단은 현재 라스마켓 근처 산속에 숨어 진지를 구축했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시장 거래는 물건너갔군."
"...그것이."
에일라는 진심으로 황당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스스로를 바이스 섹슈얼 성기사단의 부단장이라고 하는 자가, 라스마켓으로 찾아왔습니다. 저희와 '거래'를 하고 싶다면서."
"뭐...라고...?"
* * *
잠시 뒤, 라스마켓에 구금중인 바이스 섹슈얼의 앞에 니프엘라가 마주섰다.
"만나뵙게되어 영광입니다, 니프엘라 2장로 님. 저는 성기사단의 부단장, 바이스 섹슈얼이라고 합니다."
"......."
니프엘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하복부에 손을 올린 채 내가 전할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 표정은 굳힌 채, 하지만 의아함을 유지하며.
나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샤이탄의 배에 손을 올린 채, 성마법을 통해 그녀에게 내 의지를 전했다.
"성기사단에서 무슨 낯짝으로 이곳을 찾아온 거죠?"
"그리 노여워마십시오. 마녀 레비즈의 건에 대해서는 저희도 몹시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심심한 사과를 표합니다."
"......."
성기사단의 부단장이 직접 '마녀'라고 말했다? 나는 금방 부단장의 뜻을 깨달았다.
'손절당했구나, 레비즈.'
교단은 결국 레비즈를 잘라내는 걸 택했다.
이걸로 레비즈는 엘프들을 보빔강간하여 다크엘프로 만들어 엘프들이 마왕군에 합류하게 된 계기를 만든, 진정한 인류의 대역 죄인이 되었다.
"여신교단은 결코 엘프분들과 척을 지고 싶지 않습니다. 만약 허락하신다면, 추기경께서 직접 오셔서 무릎을 꿇고 사과하실 겁니다."
"추기경이?"
일국의 국왕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의 권력자라고 하더라. 그런 존재가 엘프의 앞에서 무릎을 꿇겠다고 하는 건 나로서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엘프를 마왕군에서 빼내려고 하는 개수작인가?'
고작 사과 하나로 퉁치려고 한다면 유감. 나는 니프엘라에게 지시를 내렸다.
"당신들의 진의를 밝히세요. 저희는 이미 마왕군의 일원이 된 자. 이것은 여신교단과 엘프들의 대화가 아니라, 여신교단과 마왕군의 대화입니다."
"...그렇군요."
바이스의 표정이 썩었다. 하지만 그는 곧 표정을 바꾸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곳에 있는 마왕군...분노의 군단이라고 했던가요? 분노의 군단과 '비밀협정'을 맺고자 합니다."
"비밀협정?"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
바이스는 갑옷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꼬깃꼬깃 뭉쳐놓은 검은 천조각이 풀렸다. 바이스의 손에는 찢어진 스타킹이 들려있었다.
"분노의 군단에서 취급하는 이 스타킹. 후작가가 아닌 저희가 취급하고자 합니다만...."
"하."
니프엘라와 내가 동시에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우리는 여신교단의 실체를 어느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인류연합과 마왕군이 전면전으로 싸우고 있는 와중에, 뒤에서는 이런 식으로 거래를 하시겠다?"
"전쟁이 중앙전선에서 늘어나는 것은 저희로서도 사양하고 싶은 바. 후작가에 대해서는 저희가 잘 '관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스타킹을 통해 벌어들이는 일부 금전적 이득도 저희는 양도할 의향이 있습니다."
"도대체 왜 여신교단에서 이런 짓을...?"
"그 답은 간단합니다. 추기경께서 말씀하시기를...."
바이스 섹슈얼은 목소리를 깔며 성호를 그었다.
"꿈에서 여신께서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스타킹을 널리 퍼뜨려라."
나도 모르게 콜을 외칠 뻔 했다. 하지만 니프엘라를 통해 간접적으로 의사가 전달되기에, 니프엘라는 그저 묵묵히 내 지시를 기다릴 뿐 특별히 의사를 내비치지 않았다.
"이것은 여신교단이 인류를 배신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저희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어리석은 짓을 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간단히 생각하시면 됩니다."
"간단히?"
"...아무도 모르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래요. 마녀 레비즈가 실은 엘프들을 강간하지 않았던 것을 모두가 모르는 것 처럼 말이죠."
"......마녀 레비즈는 엘프들을 타락시킨-"
"그럴 리가요. 저는 레비즈의 취향을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바이스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보빌 때 당하는 쪽이지, 남들을 보비는 쪽이 아닙니다. 엘프가 상대였다고 한다면, 엘프를 협박해서 자신을 보벼서 강간해라고 했을 여자죠."
"......증거는?"
"증거요? 하하, 여기까지 말씀드리면 곤란하기는 한데...뭐 상관없죠. 그것이 '진실'이니까요."
바이스는 니프엘라에게 주먹만한 작은 수정구를 하나 건넸다. 수정구 안에는 바이스가 우리의 마녀 레비즈 설을 완벽하게 박살낼 진실이 담긴 증거가 담겨있었다.
- 하앙, 하아앙! 성녀님! 더 세게! 더 세게 박아주세요!!
- 입 닥쳐, 레비즈. 돼지가 언제부터 사람의 말을 하기 시작했지?
- 부, 부히잉♥
우리는 성기사단에 약점 아닌 약점을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