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비만 오크-467화 (466/800)

467회

107일차

새삼스럽지만 오크에게는 머리카락이 있다.

없어야 하는게 아닐까 싶지만, 이 세계의 오크들은 머리카락이 분명히 달려있다.

심지어 나의 전우이자 형제였던 트랄의 경우 나보다 풍성하여 머리칼을 아래로 땋아 수염처럼 꾸밀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머리카락이 전부 불타버렸다.

최상급 마석을 얻기 위해 불을 질렀던 러스트릴리스의 속을 헤집으며, 내 전신의 피부는 붉게 익은 것으로 모자라 털까지 활활 타버렸다.

나는 최상급 마석을 손에 넣었지만, 대머리가 되었다. 의식을 되찾자마자 나는 내 자지 다음으로 머리를 확인했고, 머리가 불탄 것에 애써 웃었다.

- 크하하, 이건 명예의 상징인가?

나는 여기서 세 가지를 믿었다.

하나는 오크 특유의 재생력.

피부가 따끔거리는 화상을 입었어도 오크의 재생력은 익어버린 피부를 말끔하게 재생시켰다. 화상자국이 조금 남기는 했지만, 그건 최상급 마석을 얻었다는 훈장이나 마찬가지였다.

또 하나는 신수가 말했던 탈모약.

인간들을 상대로 판매하려고 했던 약품으로, 여신조차 구원해주지 못한 탈모에 대하여 내가 탈모약을 바탕으로 인류를 구원하려고 했다.

그런데 오크의 재생력으로 머리는 자라지 않았다.

그런데 신수가 자신조차 머리를 복구하는 건 불가능이라고 한다.

모근이 불타버렸기 때문. 나는 신수가 말했던 '여성으로 치면 폐경'이라는 말이 가슴을 찔렀다.

"아니, 왜! 오크 피부가 얼마나 두꺼운데 모근이 불타는 게 말이나 된답니까?!"

"머리카락은 밖으로 나와있잖나."

"그럼 왜 모근까지 불이 붙어서 싹다 죽어버린단 말입니까?!"

"자네가 싸웠던 존재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냥 불속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식물견이라고 불리는 그 놈에게는 진한 독이 있었던 것 같더군. 그 독이 불타는 속에서 움직였으니 모근이 다 타버리는 거지."

"으어어어!!"

나는 좌절했다. 최상급 마석을 얻은 걸로 만족하기에는 너무나도 슬픔이 컸다.

"으, 으어, 허어엉!"

"우, 우나? 지금 진짜로 우나?"

서러워서 눈물이 나왔다. 포르네우스에게 죽기 직전에도 나오지 않았던 눈물이 흘러나왔다.

"주, 주인님...!"

"내가, 내가 탈모라니! 내가 대머리라니!"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 울어야 한다고 한다면, 나는 그 처음을 내가 대머리가 되었다는 것에 써야만 했다. 너무나도 억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스모딘이 그냥 나한테 모든 걸 오픈했으면! 아스타로트가 부하들을 하나로 합성하지 않았으면! 으아아악!! 왜 나한테 이런 일이 발생하는 거냐고!"

살아 생전 누구 대머리라고 놀린 적 없는데 내가 대머리로 놀림을 받고 있다. 나는 머리를 쥐어 뜯었, 없었다.

"크흑, 흐흑, 흐흐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원형 탈모까지는 어떻게 그냥 넘어갈 수 있지만, 머리가 완전히 벗겨진 빡빡이는 참을 수 없었다.

"신수시여. 뭔가 방도가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렇죠? 제발 그렇다고 해주십쇼."

"......방도가 하나 있기는 한데."

신수는 턱을 긁적이며 소환 시설을 가리켰다.

"다시 태어나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아, 아으, 아아아악!!!"

...마지막 가능성.

진화, 환생.

5성으로 진화할 수 있는 레벨에 도달한 내가 탈모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다시 태어나는 것 뿐이다.

* * *

잠시 뒤.

방향을 잃은 분노를 아스타로트 였던 다크엘프에게 무자비하게 쏟아내고 난 뒤, 나는 신수를 배웅하고 본진으로 돌아와 차분히 마음을 다잡았다.

"진화하고도 대머리면 다시 태어나야겠다."

"주인님, 제가 자궁 빌려드릴까요?"

"그거 좋은 생각이로구나. 자궁을 코쿤삼아서 잠깐 들어갔다가 나오는 건 환생으로 치려나?"

"주인님, 정신차리시길 바랍니다."

샤이탄이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나는 정신이 금방 또렷해졌다.

"내가 방금 무슨 소리를 했지?"

"륜에게 괜히 휘둘리지 마십시오. 륜도 주인님을 상대로 그런 장난을 치는 거 아닙니다."

"죄송해요. 주인님이 이 정도로 혼란스러우신 줄 몰랐어요."

"무슨 소리냐. 나는 지극히 정상이다."

나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아직 내게 마지막 기회가 하나 남아있는 이상, 나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진화하면 분명 머리카락 다시 자라난다니까?"

"그 진화가 지금 막혀서 문제잖아요."

"...그렇지."

우리 본진의 소환시설에는 코쿤에 들어간 요정들이 숨을 죽인 채 다시 태어나고 있는 중이다. 코쿤 속의 요정들의 귀는 조금씩 뾰족해지고 있었고, 그들은 인간에서 엘프로 다시 태어나고 있는 중이다.

그 덕분에 나는 진화를 하고 싶어도 진화를 할 수 없다. 물론 진화가 가능한 건 아니지만.

"아직 조건을 못 채웠어...!"

나는 '나'의 진화 조건을 두루 살폈다. 내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세 가지 길.

1. 대족장.

2. 던전로드.

3. 대전사.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기억을 더듬어, 내가 진화할 수 있는 조건을 떠올렸다.

" <진화> [파후우 쿰처쿠]를 진화시킵니다.

[대족장]

1) 레벨을 끝까지 올린다. ( 90 / 90 )

2) 서로 각기 다른 존재에게 파종을 하여 번식에 성공한다. ( 192 / 12 )

3) 부하, 마물 등을 3개체 이상 환생시킨다. ( 2 / 3 )"

먼저 대족장.

진화 조건 2번에 해당하는 건 군단 전체가 아니라 나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다. 파종은 셀 수 없이 많이했어도, 그걸 번식까지 성공한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런데 왜 192명에게나 씨를 뿌려 자식을 본 걸까. 나는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나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지...?"

나는 바알의 버려진 던전의 주인이 된 이후부터 내가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파종하여 번식에 성공한 역사를 더듬었다.

1. 에일라를 상대로 파종했다. 에일라는 환생했다.

2. 포로 마법사 인간을 상대로 파종하여 메어리를 낳았다.

3. 라임을 상대로 파종하여 라인을 낳았다.

4. 지금은 안드라스인 하피를 상대로 파종하여 하르퓨이어를 낳았다.

5. 릴리를 상대로 파종하여 아서를 비롯한 오크들을 낳았다.

6. 루나를 상대로 파종했다. 루나는 환생했다. 이 뒤로 나는 특별히 내 자식을 늘지지 않았다.

7. 루시펠을 상대로 파종하여 마석을 낳았다.

8. 레비즈를 상대로 파종하여 드라고니안 알을 낳았다.

"주인님, 저 빠졌어요!"

"너는 아직 낳으려면 한참 남았잖냐."

륜을 상대로 파종하기는 했지만, 아직 열매가 익어 알로써 태어나는 건 나중의 일.

그 외에도 듀라한 키메리에스, 유니콘 암두시아스, 텐타클 드라실 플라우로스, 하르파스 등 숱한 이들에게도 씨를 뿌렸다.

'저 수치가 나올 만 했네.'

굳이 부화는 안 해서 그렇지, 던전 주인이 되어 파종 자체가 불가능한 이들을 제외하면 나는 제법 많은 곳에 씨를 뿌리고 다녔다. 알을 낳고 부화를 안 시켜서 그렇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나의 자식은 엄청 많았다.

'최상급 마석 먹고 열병 앓았던 때 한 번씩 다 사정했지.'

당시 정사와 라스의 방에 있던 여자들 대부분이 다들 한 번은 나의 씨를 품었다. 새삼 부끄러워 말은 못했지만, 그들이 낳은 알들은 모두 따로 보관되어있다.

"문제는 환생인데."

합성과는 다르다. 저기서 말하는 환생이라 함은 아주 낮은 확률을 뚫고 다시 태어나는 경우를 말한다.

4성이었던 에일라가 5성의 공주기사로 다시 태어났던 것처럼.

루나가 나의 첫 아이를 낳는 줄 알았더니 엘프 여왕으로 다시 태어났던 것처럼.

나의 씨로 순수하게 다시 태어나는 이가 아직 한 명 부족했다.

"아무나 잡고 환생시킬까?"

"가능해요?"

"안 될 건 없지."

다크엘프들에게 좆질하여 환생을 노리면 안 될 것도 없다. 190명도 넘게 씨를 뿌려 2명이 환생했다면, 이제 100명에게 더 씨를 뿌리면 1명 정도는 더 환생할 수 있다.

'여차하면 그걸 쓰면 그만이고.'

<환생결정>. 100% 확률로 환생시키는 물건이 있다. 특별퀘스트나 군단 간 쟁탈전 승리의 보상 등으로 얻었던 물건이 딱 하나 남아있다.

'얘전에 이거 써가지고 륜 강제로 진화시켜서 처녀 먹을 거라고 막 난리 피웠던 것 같은데.'

언제 어디서 얻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하게 오래전의 일이지만, 물건의 값어치를 알고 나서 선뜻 사용하지 못했던 물건이다.

"쯧. 값어치 있는 물건이 있는 것 만으로도 고민이 되는 구만."

"그럼 대족장으로 진화하실 건가요?"

"일단 다른 것도 살펴보고."

나는 다른 조건을 살폈다.

" <진화> [파후우 쿰처쿠]를 진화시킵니다.

[던전 로드]

1) 레벨을 끝까지 올린다. ( 90 / 90 )

2) ★★★★★ 부하, 마물을 5개체 이상 확보한다. ( O / O )

3) 던전의 등급을 A까지 올린다. ( C / A )"

"★★★★★은 차고 넘치지."

던전주인으로 빠져나간 이들을 제외하고도 륜, 에일라, 루나, 안드라스, 갤러해드, 그리고 그에이까지 넉넉하게 조건을 만족할 수 있다.

"문제는 등급인데...."

"저희 이제 A급까지 금방 올라갈 수 있지 않아요?"

"B는 가능합니다. 하지만 A는 막힙니다."

샤이탄은 시스템을 두드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인님께서도 아시다시피 던전의 등급은 소환 시설의 등급과 비례합니다. C급에서 B급으로 진화하려면, 소환 시설에 상급 마석을 2개 투입해야합니다."

"음...혹시 A급으로 올라갈 때도 마찬가지냐?"

"네. 상급 마석이 아닌, 최상급 마석이 필요합니다. 2개."

"......."

모근을 태우며 얻은 최상급 마석 하나에 더불어 하나가 더 있어야 모근이 부활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통탄할만한 일인가.

"주인님, 그래도 괜찮아요! 아직 하나가 남았잖아요!"

"아, 그건 가망이 없다."

" <진화> [파후우 쿰처쿠 척]을 진화시킵니다.

[대전사]

1) 레벨을 끝까지 올린다. ( 90 / 90 )

2) 자신보다 레벨이 높은 적을 1:1로 5개체 이상 쓰러뜨린다 ( X / O )

3) ★★★★★의 적을 3개체 이상 쓰러뜨린다. ( O / O )"

"이렇게 두고 보니까 더럽게 졸렬해보이는군."

할파스. 레비즈. 러스트릴리스.

나는 5성급의 강자들을 차례차례 쓰러뜨렸지만, 유감스럽게도 1:1이라는 조건은 만족하지 못했다.

싸움은 항상 1:1이 아니라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

할파스와 싸울 때는 신성력을 사용하는 부하들의 도움을, 레비즈와 싸울 때는 루나의 도움을, 그리고 러스트릴리스를 상대할 때는 우리 군단 전체의 도움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아직 나보다 강한 자를 쓰러뜨리지는 못했다.

자지로 이긴 경우라면 진작 조건을 만족시켰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대전사는 트랄처럼 진짜로 적을 무력으로 쓰러뜨리는 이들을 언급하는 듯 했다.

"이제와서 1:1로 막싸움 하기에는 부담스러운데...."

"예. 위험합니다. 90레벨 이상의 강자가 그냥 주인님께 패배할 이유도 없을 겁니다."

"끙, 아쉽군."

대전사의 길이 막힌 이상, 내게는 둘 중 하나의 길이 남았다.

둘 다 던전 주인으로서의 길은 마찬가지기는 하지만, 한 쪽은 파종에 중점을 두고 있고 다른 쪽은 던전 시설에 중점을 두고 있다.

"주인님이라면 전자에 더 어울리실 것 같은데요?"

"주인님. 이제는 던전 시설에 더 투자를 하시는 건 어떠신지?"

"음...."

인적자원에 투자를 하느냐, 물적자원에 투자를 하느냐. 대족장과 던전 로드의 구분은 정확히 그 차이였다.

하지만.

'이런 길이 전부란 말인가?'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4성이 처음 되었을 때 제시된 길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진화를 위해 지금까지 달려온 것이 아니다.

'정말로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 이걸로 한정되어 있다는 말인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시스템에 대해 왈가왈부 할 생각은 없지만, 정녕 이것이 나의 앞길이라면 조금 실망할 수밖에 없다.

대족장? 나는 부족 사회를 이끄는 자가 아니다.

던전 로드? 던전은 나의 기반 시설일 뿐 평생 던전에서 갇혀 살 생각은 없다.

나의 꿈은-

"흠, 뭘 망설이는 걸까?"

"......?"

"머리카락 때문에 진화하는 거라고 한다면, 그냥 아무나 환생시키고 대족장으로 진화하면 되는 거 아닐까?"

"......어?"

세상이 멈췄다. 회색으로 물든 세계 속에서, 나는 샤이탄의 눈동자가 검게 물든 것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에스투?"

"후훗."

샤이탄이 쓰러지기 무섭게, 샤이탄의 뒤로 검은 안개가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승리를 축하해, 분노의 군단장."

"갑자기 무슨 일로-"

"뭐긴 뭐겠어."

샤이탄과 똑같은, 서큐버스의 흔적만 없는 에스투는 검은 뿔테 안경을 치켜올리며 씩 웃었다.

"승전 축하 기념 선물을 주러온 김에 어떤 선택을 내리나 궁금해서."

에스투의 양손에는 영롱하게 반짝이는 보석이 각각 들려있었다.

"<색욕의 군단을 상대로 승리한 거 축하해. 그런 의미에서 둘 중에 하나를 보상으로 고르면 돼.>"

에스투는 시스템으로 말했다. 나는 눈앞에 아른거리는 두 개의 보석에 기가 막혔다.

"실시간 구경하다가 이제는 훈수하러 오신 겁니까?"

"후후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