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스타로트였던 것에서, 아스타로트를 취했다. 464회
107일차
언젠가 할파스 던전의 순위를 두고 샤이탄과 내가 의견 충돌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색욕의 군단을 정벌한 기념으로, 29위 아스타로트 던전의 이름을 챙겼다.
똥차를 외제 준대형 SUV로 한순간에 갈아치우는 격이나 마찬가지. 억소리나는 유명 외제차 급은 아닐지라도, 반올림하면 억소리 낼 수 있는 정도까지는 올라왔다고 자부할 수 있다.
72위 중 29위. 한순간에 30계단을 뛰어넘은 셈이지만, 우리 군단은 그만큼 성장했다. 세 개의 인장을 확보한 만큼 우리는 강해졌다.
그만큼 위험도 따르겠지만, 그래도 언제까지 63위에 머무를 수는 없는 노릇.
마침 아스타로트도 잡았으니, 나는 그녀의 이름을, 존재를, 그리고 던전 주인이었던 증거를 빼앗았다.
"안녕히, 이름 모를 가축."
아스타로트였던 것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힘줄이 잘리고 가죽 구속이 채워진 이상, 그녀의 손은 내게 닿지 못했다.
"심심하면 놀러올게."
절그럭!
천장에 달아놓은 가죽끈을 잡아당겼다. 도르래에 걸린 끈은 쇠사슬마냥 다크엘프를 벽에 잡아당겼다. 다크엘프는 아둥바둥거리며 구속에서 벗어나려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몽총이. 풀려나게 하려고 했으면 애초에 왜 구속을 해놨겠냐?"
나는 그 말을 끝으로 특별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안에서 그 어떤 탈출도 하지 못하게 밖에서 문을 틀어막았다.
그녀가 밖을 볼 수 있는 건 아래에 난 작은 사각형 구멍 뿐. 마치 교도소에서 독방의 죄수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것 마냥 뚫어놓은 구멍은 머리 하나 내놓기도 힘들 정도로 작았다.
"고생하셨어요, 주인님. 청소할게요."
"지금은 빨지말고 스타킹으로 닦아다오. 저것의 더러운 애액을 네 입에 묻힐 수는 없으니."
륜은 살포시 웃으며 자신의 스타킹을 벗었다. 그리고 갓 벗은 따끈따끈한 스타킹으로 이물질이 잔뜩 묻은 내 자지를 깨끗하게 닦았다.
"그런데 주인님, 진짜로 저렇게 계속 넣어두실 거예요?"
"어. 애들한테 한 입 맛보라고 주기에는 아깝고, 그렇다고 파종 효율이 좋은 것도 아니잖냐."
레비즈처럼 확정 4성을 하루에 11개 뽑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루시펠처럼 마석 가챠를 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언제든지 내가 꺼내 먹을 수 있는 간식 정도로 해놓는 것이 낫다.
"부하들 버리고 튀는 년을 부하로 들여봤자 아무 쓸모 없어. 저런 것한테 던전을 맡기잖아? 분명 부하들 버리고 또 자기만 살아서 도망칠 게 뻔하다."
"버리고 튀었다기 보다는...."
"아니, 버리고 튄 게 맞다."
만약 아스타로트가 레벨이 30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면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스타로트 본인의 레벨도 88. 나와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강했던 마족이다.
"나였으면 같이 싸웠다."
부하들을 전부 모아 인장으로 합성하여 하나로 만들었다. 자신이 직접 합성되기가 무서웠다면, 최소한 그 자리에서 아스모딘과 함께 싸워야했다. 도망치지 않고 우리를 상대로 직접 싸웠다면, 나는 그레모리를 대한 것처럼 영입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나는 한 명 빼고는 누구든지 군단에 들어와도 좋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저건 안 돼. 이미 기회를 날렸어."
"그래도 주인님 기회를 후하게 주시잖아요. 그래서 안에 파종하신 거 아니세요?"
역시 륜은 날카롭다. 내가 아스타로트의 모든 것을 빼앗으며 유일하게 준 원찬스를 깨달은 것이다. 륜은 깨끗하게 내 자지를 닦아낸 스타킹을 꼬깃꼬깃 접어, 환경정화용으로 목장에 배치된 슬라임 드래곤의 입에 집어던졌다.
"흐흐, 륜아. 내가 어떤 기회를 준 것 같냐?"
"다시 태어날 기회요."
"정답이다. 인성이 글러먹었어도 다시 태어난다면 달라질 수도 있는 거지. 그러니까 나는 딱 한 번의 기회를 줬다."
"몇 퍼센트에요?"
"0.88%."
1%도 되지 않은 낮은 확률. 단 한 번의 산란 기회.
그 모든 것을 뚫고 환생가챠에 성공한다면, 나는 아스타로트였던 것에게 새로운 이름을 부여해줄 것이다. 아스타로트가 정말로 불가촉천민만도 못한, 영원한 가축의 삶을 벗어나려면 최소한 0.88%의 픽뚫을 해야할 정도의 각오는 있어야 했다.
아스타로트의 문제까지 해결했다. 나는 특별실의 또다른 문고리를 잡았다.
"......."
안에는 이미 샤이탄과 루시펠이 들어가있다. 우리의 '가설'이 맞다면, 아스타로트는 그저 한 명의 던전 주인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라면 뒷통수가 왠지 얼얼할 것 같은데."
"아, 하하, 하하...."
륜은 어색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우리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그런 당황스러움이야말로 현실이었다.
"우리도 똑같은 짓을 저질렀으니 뭐라 할 말은 없는데...."
"그래도 겨, 결과가 좋으니까 괜찮은 거 아닐까요?"
"그래. 결과가 장땡이지. 근데 그러면 내가 조금 사아아알짝 빡친단 말이야."
조금이 아니다. 존나 빡친다.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지만, 상스러운 말을 함부로 내뱉을 수가 없어서 겨우겨우 참고 있다.
끼이익.
문이 열렸다. 안에는 샤이탄과 루시펠이 좌우로 서있고, 가운데 침대에는 엘프 서큐버스-아스모데우스가 다소곳한 자세로 앉아있다.
"야."
아스모데우스가 움찔거렸다. 나는 미리 밖에 대기시켜놓았던 잠에 빠진 드라이어드, 아스모딘을 아스모데우스의 앞에 내려놓았다. 아스모딘의 몸에는 인장이 은은하게 박혀있었다.
"나 장난질 싫어하니까 확실하게 해라."
"......죄, 죄송해요?"
아스모데우스는 어울리지 않게 존대를 하며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샤이탄과 루시펠은 한심함과 경멸, 그리고 짜증이 깃든 눈빛으로 이를 갈고 있었다.
"사과를 하라는 게 아니라, 진실을 까발리라고."
"......."
아스모데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아래로 뻗었다. 아스모딘의 인장에 손을 올리자마자, 아스모딘의 드라이어드 몸이 재가 되어 바스라졌다.
고고고.
허공에 떠오른 색욕의 인장이 하늘하늘 춤추다가 주인에게 새겨졌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스모데우스의 하복부에.
"...하아."
우둑, 우두둑. 아스모데우스의 피부가 말라 비틀어진 나무껍질마냥 바스라지기 시작했다. 머리에 달린 뿔부터 꼬리에 이르기까지 서큐버스의 흔적은 수분이 빠진 나무줄기마냥 썩어문드러졌고, 아스모데우스는 자신의 손을 얼굴에 가져다댔다.
딸칵.
아스모데우스의 얼굴이 떨어져나왔다. 나무껍질로 된 가면-1장로의 얼굴이 떨어져나오자, 그 뒤에는 백옥처럼 하얀 아스모딘의 얼굴이 드러났다.
"어우야."
루시펠과 샤이탄에게는 미안하지만, 둘보다 얼굴 만큼은 더 낫다고 평해도 될 정도로 아름다웠다. 역시 요정왕의 딸이라는 걸까.
"하아."
"정말...."
두 인장은 한숨과 짜증을 내는 사이, 아스모딘이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하복부에 자리잡은 인장이 반짝이기 시작하더니, 그녀의 몸에 달라붙은 나무껍질이 빛무리와 함께 사라졌다.
"어...처음뵙겠습니다."
"오냐. 한 번 섹스는 했지만."
아스모딘의 얼굴이 붉어졌다. 나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녀 또한 살포시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아무래도 당신은 제 정체를 확실하게 알아챈 것 같네요."
"아무리 생각해도 너밖에 없거든."
나는 아스모딘과 시선을 맞췄다. 다소곳하게 무릎을 꿇은 그녀는 인장이 박혀있던 몸과 달리, 하얀 다리가 온전하게 붙어있었다.
"너지?"
"네."
아스모딘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녀는 손을 가슴에 붙이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색욕의 인장, 아스모딘이라고 하옵니다."
"그걸 누가...."
"동시에."
루시펠이 짜증을 부리려고 하는 걸 내가 차단했다. 아스모딘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잡은 자신의 손을 흔들었다.
"색욕의 군단장, 아스모데우스."
"......무슨?"
샤이탄마저 눈썹이 일그러질 정도였다. 나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던 일말의 가능성이 진실이라는 것에, 눈앞의 상대가 여간내기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역시 보지부터 다르다 싶었더라니."
"후후. 나름 마왕의 딸인데, 저보다 못한 것들이 감히 저를 다루려는 게 싫어서요. 뭐...인장이 던전 주인하고 군단장하고 정체를 숨기라는 법은 없잖아요?"
아스모딘은 내 손을 두 손으로 잡고 눈을 샐쭉였다.
"하지만 당신이라면 괜찮을 것 같네요. 저, 제법 당신이 마음에 들었거든요. 섹스 좀 하시더라고요."
"만약에 마음에 안들었으면?"
"그야 당연한 거죠."
아스모딘은 던전 위를 가리키며 두 팔을 펼쳤다.
"적진 내부에서, 콰-앙."
"......."
능력있는 여자는 환영하지만, 조금 진심으로 소름돋았다.
* * *
성기사단의 부단장, 바이스 엑슈얼은 후작의 집무실 의자에 앉아 고민에 빠졌다.
"아슬아슬하군."
그의 앞에 놓인 양피지에는 퀘르벨스 추기경으로부터 전해진 특별 지시사항이 적혀있었다.
성녀가 아직까지 연락이 되지 않는 이상, 교단에서는 극단적인 행위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
마족을 상대로 싸우기는 커녕 상행위까지 하려고 하는 후작가는 사실 마왕군의 내통자라는 것.
후작가의 성기사단은 후작이 틈을 보인 즉시 후작가를 점거하고 마왕군의 내통자라는 것을 알릴 것.
성기사단은 후작가를 점령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마침 후작가에서 엘프들을 구하겠다는 명목으로 기사단을 파견한 것이 그들에게는 주요한 기회가 되었다.
반발은 당연히 있었다. 그래서 성기사단은 반발한 기사들을 무력으로 구금했다.
엘프 구출대에 후작가의 기사단장인 안서니우스를 비롯한 제법 많은 기사들이 따라붙었기에, 역설적으로 후작가를 지킬 기사들의 수가 줄어들고 말았다. 남아있던 대부분의 기사들도 영지의 경계에서 마왕군을 경계하느라 성 밖에 있었다.
기사들의 반발은 무력으로 제압.
병사들은 성기사단이라는 권위로 제압.
그리고 후작가의 주민들에 대해서는 '마왕군의 내통자' 혐의로 제압했다.
"거짓 선동에는 선동으로 맞받아친다...추기경 님도 무서운 분이로구만."
성기사단장 레비즈가 마녀로 몰린 것은 후작가의 음모다.
실은 후작이 마왕군과 내통하였기에, 정의의 사도인 성기사단을 음해하고 교단의 얼굴에 먹칠을 한 것이다.
마왕군에게 있어서 눈엣가시 같은 성기사단장을 함정에 빠뜨려 제거하려는 음모일 뿐이다.
엘프는 마왕군에 협력하여 오크들에게 가랑이를 벌린 창녀들이기에 거대한 음모에 이용되었을 뿐이다.
- 성기사단의 행동에 의문을 가진다고? 이 놈이 이단이로구나! 마왕군의 끄나풀이야!
이러한 논리와 선전에 따라, 성기사단은 마구잡이로 후작가의 백성들을 잡아들였다. 아직까지 대륙에는 마왕군에 대한 공포도 공포지만, 여신교단의 교리에 따르지 않는 '이단'에 대한 공포가 더 컸다.
"반발이 커지기 전에 빨리 조치를 취해야되는데...."
후작가에 대해 확실한 조치가 필요했다. 왕국의 사절이 오기 전에 추기경이 먼저 도착해야했다. 그리고 후작은 마왕군의 내통자로 광장에서 효수될 것이다.
"참 미안하게 됐소, 후작. 이번 일만 성공적으로 끝나면 내가 단장이 될 수 있으니, 부디 양해해주시오."
바이스 부단장은 성호를 그으며 여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끼이익.
집무실의 문이 열리자, 그를 따르는 성기사 한 명이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바이스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이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형제님."
"부단장 님. 그것이...."
성기사는 일그러진 얼굴로 바이스의 귀에 속삭였다. 일어난 김에 추기경의 특별 지시가 담긴 양피지를 태우려던 바이스의 표정이 황당함에 물들었다.
"여신이시여."
바이스는 진심으로 여신을 부르며 기도했다.
"내통을 하랬더니 간통을...."
* * *
<그 시각, 후작가 레굴루스 성 별실.>
하아, 하아.
얼마나 기절했던 걸까. 고트다이할 레오 후작은 간신히 의식을 되찾았다.
하아, 하아.
전신이 뻐근하다. 온몸이 구속되어 있는 것 처럼 무겁다. 늙어서 가위에 눌리지 않도록 열심히 단련했건만, 역시 나이는 속일 수 없었다.
하앙, 흐아아.
하지만 귀에 거슬리는 이 신음소리는 참을 수 없었다. 불쾌하다기보다는 뭔가 이상한 감각에 소름이 끼쳤다. 누군가의 목소리로 일부러 신음을 낸다면 딱 이런 목소리가 아닐까.
'엘렉트라.'
하아악!!
언젠가 엘렉트라가 날카로운 칼에 손가락이 베여 비명을 지른 적이 있다. 의도치 않게 지나가다가 아들과 며느리의 성생활을 듣게 된 적도 있다. 그 순간의 기억이 플래시백 됨과 동시에, 고트다이할의 의식이 또렷해졌다.
이 개같은 성기사단 놈들-
"으읍!!"
입에 재갈이 채워져있다. 혀가 무언가 옷감같은 것에 짓눌려 자살도 하지 못하게 만들어놓았다. 고트다이할은 그제서야 자신을 짓누르는 힘이 가위가 아니라 사람의 무게인 것을, 그리고 자신의 손과 발이 묶인 것을 깨달았다.
하아, 흐응....
고트다이할이 격하게 움직이기 시작함과 동시에 여인의 신음이 잦아들었다. 마치 후작이 의식을 차린 것에 행동을 조심하는 듯한 신음에 고트다이할은 소름이 돋았다. 신음 속에 섞인 '물소리' 때문에.
찌걱.
아니다. 아닐 것이다. 고트다이할은 뜨겁게 달아오르는 자신의 몸에 부정하고 싶었다. 본능이 진실이라고 외치고 있는 걸 이성이 부정하고 있었다. 부정해야만 했다. 안 그러면-
"하아, 아버님...사랑스러우시네요."
"......!!"
안대가 벗겨졌다. 은은한 조명 아래, 자신을 내려다보는 얼굴은 후작이 알면서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아버님의 아드님도 정말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거 아시죠? 후후."
"읍, 읍, 으으읍!!"
"걱정마세요, 아버님. 제가 아버님을 지켜드릴테니까."
여인은 고트다이할의 볼을 쓰다듬으며 상체를 숙였다. 흐트러진 드레스 위로 드러난 가슴이 고트다이할의 가슴과 맞닿았다.
"이 날만을...기다려왔답니다, 후작님."
여인, 엘렉트라는 고트다이할의 위에서 방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