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비만 오크-456화 (456/800)

457회

106일차

몸은 생각이 없다. 머리는 생각만 한다.

몸은 아무생각없이 러스트릴리스의 고깃덩어리 속을 헤집는다. 머리는 어떻게하면 인간들의 시선을 돌릴지 고민한다.

불꽃이 얼굴을 덮어도, 고깃덩어리의 악취가 내 코를 찔러도, 피부 전체가 벌겋게 익어도 손은 멈추지 않는다. 살갗이 타들어간다고 한들 찾고, 찾고, 또 찾는다.

어쩌면 없을 수도 있다.

내가 찾는 곳에만 없을 수도 있고, 내가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을 수 있다. 금기로 태어난 합성마수라 아예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러스트릴리스의 이전, <아스모딘>이었던 95레벨 마수의 핵심인 아스모딘은 내가 뽑아냈으니까.

암술이 뽑힌 식물 괴수는 코어 역할을 하는 마석이 뽑히고 나서 남은 몸뚱아리로 움직였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그냥 돌아갈 수는 없다. 적어도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찾는 노력이라도 해보지 않는다면, 나는 평생 지금의 순간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주인님!! 인간들이 벽을 부수면서 오고 있어요!!"

하르파스를 통해 하늘 위를 날고 있는 륜이 비명을 질렀다.

인간들이 넘어오기 전에 우리도 이곳에서 도망쳐야하므로, 륜과 하르파스가 최후미에 남아 나에게 정보를 알렸다. 라임과 슬라미아들이 열심히 미로를 부수고 있을테지만, 역시 기사들은 던전의 미로쯤은 쉽게 돌파하고 있었다.

빠르고 간결하게 파밍해야한다.

보통의 사람들은 돼지의 심장이 어디있는지 모른다. 직접 잡아본 적이 없다면, 보통은 기존의 지식을 활용하는 방법이 최고다.

인간의 심장이 가슴 부위에 있듯, 돼지 또한 그럴 것이다. 최소한 엉덩이 쪽에 심장이 달려있지는 않고, 폐가 달려있는 근처에 심장이 있을 것이다.

식물 또한 마찬가지.

마수 또한 마찬가지.

만약 러스트릴리스가 진짜로 식물을, 아스모딘이라는 암술을 자신의 정중앙에 피어나게 하는 괴물이라면, 분명 핵심이라고 할 곳은 '안쪽'에 있을 것이다.

"씨바아아아앙!!"

아스모딘의 자궁이 아닌, 아스모딘의 허벅지가 아래로 연결되어 있는 러스트릴리스의 중추. 나는 손을 좌우로 헤집으며 간신히 그 중추에 도달했다.

그리고.

"우효, 초 럭키...."

발견하고 말았다. 나는 불길에 타서 그을린 손으로 내 눈앞에 있는 큼지막한 호두같은 물건을 움켜쥐었다.

다른 곳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밀도높은 육편으로 감싸여진 '알'은 내 힘으로도 좀처럼 빠져나오지 않았다.

푸쉬이이--

불꽃이 꺼지듯 내 문신도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혈류가속으로 애써 무시하고 있던 고통이 전신을 찌르기 시작했다. 숨을 들이키느라 불꽃을 삼켰던 폐부가 번개를 맞은 것처럼 따가웠다.

나는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 손을 교차시켜 문신을 켰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반짝이는 붉은 오라는 너무 많이 사용한 반동 때문인지 손목 이상으로 반짝이지는 않았다.

고오오.

그러나 충분하다. 손만이라도 힘이 들어간다면, 순간이나마 고통을 억누를 수 있다면 괜찮다.

'솔직히, 아스타로트도 잡지 못했는데 최상급 마석 정도는 괜찮잖아.'

만약 여신이 이걸 보고 있다면 엘프들의 귀를 자른 꼴알못에게 천벌을.

만약 솔로몬이 이걸 보고 있다면 군단을 상대로 승리한 나에게 마지막 보상을.

그리고 만약 신수가 이걸 보고 있다면, 자기 멋대로 엘프들을 합성한 나에게 마지막 힘을.

"...쿨럭."

입안에서 무언가가 역류했다. 검붉은 피가 가슴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와 동시에 문신의 힘이 꺼졌다.

여기까진가. 눈앞에 최상급마석처럼 보이는 알을 두고, 나는 그냥 퇴각해야만 하는 것인가.

순간.

꾸드득.

알의 겉면이 꿈틀거리며 한 존재의 얼굴이 나타났다. 누군가를 똑 닮은 표독스러운 눈동자에 나는 그 얼굴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네가...왜...?"

말도 하지 못하는 그녀는 입만 뻥긋 거리는 걸로 내게 말을 대신했다. 눈빛에는 나에 대한 증오와 분노가 서려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내게 마지막 한 마디를 남겼다.

딸을, 엘프를 잘 부탁한다.

푸스스.

얼굴이 사라졌다. 그러자 내가 손으로 잡고 있던 겉껍질이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안에서 영롱한 무지개빛으로 반짝이고 있는 주먹만한 구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

나는 그걸 두 손으로 받았다. 아이를 받는 산파마냥, 아주 조심스럽고 정성스럽게 받아 가슴에 고이 간직했다.

"잘 받아가마. 손자 며느리 어머님."

나는 너무나도 소중한 마석을 손에 붙잡았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 즐비하게 깔린, 내 전신을 짓누르던 고깃덩어리들이 조금씩 힘을 잃고 쓰러지기 시작했다.

"후우...."

좆됐다. 빠져나갈 힘이 없다. 나는 최상급마석을 품에 안은 채 무릎을 꿇었다.

"씨바...허억?!"

갑자기 바닥이 무너졌다. 몸이 아래로 떨어지는가 싶더니, 바로 푹신한 쿠션같은 감각이 나를 반겼다. 불꽃에 타들어가며 달아올랐던 몸이 차가운 감촉에 서서히 식어가기 시작했다.

"바보같은 주인."

라임은 내 머리를 자신의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위에서 쏟아지는 고깃덩어리들은 내 등 뒤로 타오른 슬라미아들이 몸으로 막아냈다.

엄청난 무게도 잠시. 라임과 슬라미아들은 땅을 등으로 파먹으며 아래에서 빠져나왔다. 나는 라임에게 안겨 러스트릴리스로부터 탈출했다.

"최상급 마석 하나 때문에 목숨을 건 거야?"

"그럴만한 가치가...쿨럭."

말조차 하기 힘들었다. 긴장이 풀리고 문신의 힘이 떨어지니 온몸의 고통이 나를 좀먹어들어가기 시작했다.

"야, 야! 지금 인간들 뛰쳐나올 것 같은데?! 주인님! 정신차려!"

"...퇴...각은?"

"저희만 남았어요!"

흐릿한 의식속에서 나는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우리 군단의 병사들은 그 누구 하나 던전에 남지 않고 명령대로 잘 도망갔다. 불길 속에 뛰어드는 건 나 하나로 충분했다.

"......륜. 이걸."

나는 륜에게 최상급마석을 건넸다. 다른 누구도 아닌 륜이기에, 최상급의 마석도 믿고 맡길 수 있었다.

"들고, 먼저 귀환하라."

"......꼭 살아서 돌아오셔야해요."

륜은 내 얼굴을 붙잡고 잠시 입술을 맞췄다. 까슬까슬한 입술의 겉이 농익은 복숭아를 먹은 것처럼 달콤했다.

"아아, 이것이 데드 키스, 쿨럭."

헛소리를 한 벌인지 피가 흘러나왔다. 륜은 도끼눈을 뜨며 나를 노려봤고, 나는 손을 들어올려 그녀의 귀를 만졌다.

"...만약 죽더라도 엘프 귀는 만지고 죽어야지.... 괜찮다. 후우, 륜아. 네가 남아서 정말 다행이다. 오직 너만이...나를 살릴 수 있다."

라임, 륜, 하르파스.

마침 딱 좋은 이들이 모였다. 나는 륜의 손을 내 배에 올렸다.

"......렇게 해다오."

인간들이 들이닥치기 직전.

나는 셋에게 마지막 작전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 * *

"아직도 중추에 도착하지 못했는가?"

지하 1층으로 내려온 안다이할은 미로 공략에 난항을 겪는 기사단에 다소 어이가 없었다.

"각하, 미로는 복잡합니다. 심지어 지금 살아서 움직이기까지 합니다."

"살아서 움직인다?"

안서니우스의 말에 안다이할은 제법 흥미가 동했다. 던전은 마법같은 일이 자주 일어나는 이세계와도 같은 곳이지만, 미로가 살아서 움직인다는 건 그도 처음 듣는 일이었다.

"혹시 미로가 마수라도 된다는 말인가? 그럼 위험한데. 기사들이 갑자기 벽에 흡수되어 먹히거나 그런 일은 없겠지?"

"그런 건 아닙니다. 단지 저희가 가려는 앞길의 천장이 무너져내린다거나 할 뿐입니다. 다행히 기사들이 오러를 이용해 금방 길을 뚫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둘의 분위기는 화목했다. 공략에 있어서 다소 의견 충돌은 있었지만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고, 던전 공략은 순항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승기가 높았다.

거기에 던전의 마물들이 인질로 잡고 있던 다크엘프들까지 구해냈으니 그 성과는 대단했다. 설령 던전을 완벽하게 무너뜨리지 못한다고 한들, 다크엘프들을 구한 것만으로도 인간들은 충분히 제 역할을 했다.

"각하, 엘프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크엘프를 정화하는 의식이 필요하다고 하더군. 아무래도 몽마들에게 당하면서 쌓인 마기를 정화해야 평범하게 인간과 할 수 있다고 했다."

"예?"

안서니우스는 순간 자신이 잘못들었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정말입니까?"

"경. 그대도 혹시 다크엘프들과 하고 싶은 건가? 엘프가 인간과 성교를 나눌 수 있는 건 이미 시장에서의 보고로 알고 있지 않은가. 그 정보를 듣고 제일 놀랐던 건 경이 아닌가?"

"그, 그렇기야 합니다만...."

다크엘프와 할 수 있다. 다크엘프의 몸에 남은 마기가 사라지면 다크엘프와 성교를 나눌 수 있다. 어쩌면 다크엘프들이 그냥 엘프로 다시 되돌아 갈수도 있다.

"조금 불안합니다만."

"경의 불안도 이해하네. 설마 엘프들이 우리 뒷통수를 후리겠는가?"

"...각하, 언행에 품격을...."

"뭐 어떤가. 의미만 통하면 그만인 것을. 오, 슬슬 끝나가는 것 같군."

둘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동굴 벽이 허물어졌다. 던전 안쪽에서 전해진 뜨거운 열기에 절로 몸이 후끈해졌다. 미로의 끝으로 나온 후작가의 기사단은 넓은 공동에 도착했다.

"저건...?!"

그곳에는 시체가 불타고 있었다. 족히 수십 명의 존재가 하나로 뭉쳐져서 형태가 어그러진듯한 괴물이 붉은 화마에 타들어가고 있었다.

"어머, 늦었네."

그리고 그 너머에는 검게 그을린 마물의 위에 걸터앉은 흑발의 여인이 기사단을 맞이했다. 안서니우스는 머리에 노란 부리가 달린 새를 형상화한 후드를 뒤집어 쓴 여인의, 마족의 실력을 직감하고 검을 빼들었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자신과 비슷하거나, 더 강한 존재다. 안서니우스의 긴장은 기사단 전체로 퍼져나갔다. 다행히 한 명 밖에 없지만, 혼자서 제 몸보다 몇십 배는 큰 괴물의 시체 옆에 있다는 것이 여인의 실력을 증명하는 듯 했다.

"나? 하르파스."

여인은 깔고 앉은 마족의 배 위에서 다리를 꼬았다. 허벅지 아래로 드러난, 조금 투명한 검은 스타킹이 보이는 각선미에 기사단은 절로 침이 넘어갔다.

"솔로몬 72던전 중 38위 던전의 주인이지."

"......!!"

"이곳은 아스타로트의 던전이라고 전해들었는데."

안다이할이 침착하게 앞으로 나서며 대화를 시도했다. 다행히 하르파스에게는 인간들에 대한 적의가 없어보였다.

"맞아. 아까까지는. 이게 아스타로트였던 것이지."

하르파스는 느긋한 손길로 불타는 시체를 가리켰다.

"싸워서, 죽여서, 이겼어. 그냥 두면 썩은 내가 풀풀 날 것 같아서 태우는 중이야. 그런데...."

씨익. 하르파스는 다리 한 쪽을 들어올려, 자신이 깔고 앉은 마족의 허벅지를 밟았다. 검게 그을린 알몸의 마족은 배가 튀어나온 오크처럼 보였고, 하르파스는 스타킹을 신은 발로 오크의 불방망이를 움켜쥐었다.

"기다리는 동안 심심해서 자지나 쓰려고 했는데, 너희 뭐야? 싸우러 온 거라면 조금 뒤에 했으면 하는데. 나 지금 달아오른 상태거든."

사아악.

하르파스가 눈웃음을 치며 살기를 뿌렸다. 기사단은 뒷걸음질치지 않았지만, 함부로 달려들지도 못했다.

"......."

어디선가 자신들의 목을 노리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지고 있었다. 방어는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분명 한 번 방어하고 나면 그 다음 공격에 당할 지도 모른다. 그런 직감이 기사들의 본능을 일깨웠다.

"우리는 레오 후작가의 기사들이오. 분노의 군단과 동맹을 맺어, 이 던전에 납치당한 엘프들을 구하러 왔소."

안다이할이 앞으로 나서며 두 손을 들어올렸다. 명백히 싸울 의사가 없다는 신호에 하르파스는 발가락으로 붙잡은 자지를 빙그르르 돌리며 여유를 부렸다.

"분노의 군단? 흐응, 우리는 오만의 군단인데. 번지수를 잘못 찾았어."

"...다른 군단인가?"

"그래. 마왕님께서 재편한 7군단...아차. 뭐, 상관없나? 아무튼 우리 군단은 아니야."

하르파스는 손사레를 치며 웃었다. 오크의 자지로 장난을 치다가 들어올린 발가락에는 끈적하고 투명한 실선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엘프들을 구하러 왔다고? 유감이네. 여기 다크엘프들 밖에 없던 걸."

"...어떻게 하였소?"

"뭘 어쩌긴 어째. 우리 전리품으로 챙겼지."

하르파스는 두 발을 옆으로 놓아 자지를 교차로 쓸어올렸다 내렸다. 아래에 깔린 오크의 자지가 계속 움찔거렸다. 하르파스는 자지를 발로 괴롭히는 것 이외에 인간들에게 관심이 없어보였다.

"몽마들이 붙잡고 있길래 일단 다 구해서 내 던전으로 보냈어. 뭐...엘프나 마족 따지기 이전에 나도 여자라서 걔들이 당한 건 조금 그렇더라고. 그래서 조금 열받아서, 여기 있던 몽마들 싹다 죽여버렸지. 그건...너희도 같은 거 아니야? 아주 피냄새가 줄줄 나는데."

"...그건."

안서니우스는 할 말을 잃었다. 눈앞의 마족이 하는 말이 사실이라면, 그들과 후작가의 기사단이 한 행위는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보다 재미있는 얘기를 하네. 분노의 군단과 동맹을 맺었어? 흐음, 신기한 인간들이네. 그럼 말이야."

하르파스는 오크의 좆대 위를 엄지발가락으로 눌러 인간들에게 겨눴다.

"혹시 우리 군단이랑 거래를 하지 않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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